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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181건
- 2013.12.24 [살인자의기억법]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했을 때 1
- 2013.12.20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목란언니
- 2013.12.19 시네마폴리티카: <변호인>, 국가란 국민입니다. 1
- 2013.12.14 [Op.13] 유도동기, 복선이 되는 음악
- 2013.12.12 [팝콘먹는좀비] 휴재공지 & 룽에세이 7
글
※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김영하의『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2013)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했을 때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얼마 전에 영화감독 김조광수와 모델 김승환의 혼인신고 기사를 보았다. 기사 밑의 수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그 곳에서 온갖 종류의 동성애를 비하하는 말들과 반말체부터 합쇼체까지의 다양한 어투의 동성애 비난 댓글을 목격할 수 있었다. 댓글들 중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김조광수와 김승환이 자신의 앞에 있다면 죽여버리고 싶다는 댓글이었다. 어째서 그 사람은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 것일까?
*
김영하 작가의 신작 『살인자의 기억법』을 이제야 읽었다.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사놓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읽지 못하고 있다가 며칠 전에 뽑아들었고, 첫 장을 펼친 지 2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마지막장까지 끝마쳤다. 이 책을 먼저 읽은 친구가 이야기했던 대로 순식간에 작품을 읽었고, 그 후에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첫 문장으로 인용된 해설과 마주했다.
훈계하는 듯한 말투에 기분이 좀 상했지만, 그러면 너는 얼마나 잘 읽었는지 보자, 라는 심보로 해설을 마저 읽어보았다. ‘웃을 수 없는 농담, 사드-붓다의 악몽’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해설을 짧게 요약해보자면, 이 이야기는 단순히 딸을 지켜야 하는 전(前)연쇄살인마와 그의 딸을 노리는 현(現)연쇄살인마의 쫓고 쫓기는 스릴러가 아니라, 사드적인 쾌락과 붓다의 공(空) 사상이 들어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평론가는 물론 더 심오하고 깊은 독해를 했겠지만, 평론에 대한 설명은 이쯤으로 마치고, 해설 중에서 내가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이해와 관계 맺음에 관한 한 완전히 무능력한 겁쟁이가 자신의 무능력을 능력으로 전도시킬 때,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관계 맺지 못하는 대상들을 부정되고 파괴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꿔놓을 때 악이 등장한다. 자신을 제외한 어떤 대상에도 마음쓰지 않는 것, 모든 대상들을 자기 마음대로 제어하고 부정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연쇄살인범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162-163)
소설의 주인공 김병수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심지어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재능이 없어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지, 노력을 하지 않아 재능이 사라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쨋거나 그는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소설 속에도 군데군데 나와있다.
나는 조용한 세상이 좋다. 도시에서는 살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소리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너무 많은 표지판, 간판,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표정들. 나는 그것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무섭다. (94쪽)
그는 타인과 왜 어울리지 못 하는가. 그것은 그들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 다시 말하자면, 그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책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작품 후반에 들어 결국 김병수가 상황을 잘못 해석한 것도, 사람들을 다른 사람으로 오인한 것도 ‘이해’와 관련된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이해와 관련하여 좀 더 이야기를 해보자.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하였을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그 존재를 ‘인정’할 수도 있겠다. 당신을 이해할 순 없지만, 나는 당신의 존재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무시’ 역시 있을 수 있겠다.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당신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 김병수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일까. 그는 ‘인정’이나 ‘무시’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들을 ‘거부’한다. 여기서 ‘거부’는 단순히 당신이 싫다는 것이 아니다. ‘거부’는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다름’은 ‘틀림’이 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는 ‘옳지 않은 존재’가 된다.
‘거부’ 반응을 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그 대상의 위치를 재정립한다. 재정립하는 양상은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첫째는 대상을 신격화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는 자신의 인지 범주를 넘어서는 존재로 신격화된다. 둘째는 대상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기이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정상이 아닌 범주에 모두 집어넣고, 이를 고쳐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이다.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마지막은 대상을 파괴하기이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은 없어져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동성애자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 김병수는 마지막 경우에 속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이해 불가능한 사람들을 죽여야만 했다. 그의 첫 살인을 살펴보자. 그는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영숙이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를 베개로 눌러” 죽인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는 늘 악몽을 꿨다. 잠꼬대도 심했다.'(31)는 문장에서 우리는 그의 아버지가 전쟁을 겪으면서 심리적인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의 여지를 빼앗겨버린 대상은 너무도 쉽게 없어져야 할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열여섯 살에 시작해서 마흔다섯까지”, 그는 30년 동안 살인을 멈추지 않은 연쇄살인마. 평범한 우리와는 지극히 먼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서 ‘그’의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동성애자를 죽이고 싶어하는 어느 한 네티즌에게서, 또는 노조의 파업을 참지 못하고 79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버리는 어느 사장에게서, 또는 노조 지도부를 연행하기 위해 유리문을 부수고 천장을 뜯고 14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연행해간 어느 나라의 모습에서.
위에서 인용했던 문학평론가의 말을 다시 한 번 빌려보자.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관계 맺지 못하는 대상들을 부정되고 파괴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꿔놓을 때 악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파괴하려 할 때 악이 등장한다면, 이해조차 시도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는 요즘 세상은 무어라 불러야 하는 걸까.
by 오까마
높디높은 열정과 낮디낮은 능력 사이에서 방황 중
문학에 관심이 많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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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정말 좋은 연극을 얘기할 땐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빙구에게 좋은 연극은 이런 거다.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연극이 생겼고, 함께 봐서 즐겁고,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는 게 기쁜. 그게 전부다.
하지만 빙구가 아직 많이 모자란 건지, 괜히 이것 넣었다 저것 넣었다 하다가 결국 또 늦어지고 길어졌다. 말들은 늘 주렁주렁 새끼를 쳐서 종종 쓰는 것보다 잘라내는 게 더 오래 걸리곤 한다. 그래도 연극을 보고 당신에게 해줄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 모처럼 아주 설레고 즐겁게 느껴졌으니, 변명은 이쯤 하고 뒤에 남겨둔 말들로 어물쩡 저물쩡 스무스무스무스하게 넘어가보도록 하겠다. 빙구에겐 좋은 연극이었는데, 당신은 또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목란언니>다.
2013.11.19(화) ~ 12.29(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
해솟는 백두에서 사랑의 미로까지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한 조목란. 유복한 평양 엘리트였던 그녀가 한순간에 탈북자가 되어 남한 땅을 밟았다. 그리고 다시 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천만원을 마련하려 죽을 둥 살 둥 무대를 누빈다. 그녀는 왜 돌아가려 할까? 과연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목란언니>의 이야기는 이 질문에서 물꼬를 터 120분의 러닝타임동안 줄기차게 뻗어 나간다.
극은 내내 명랑하고 경쾌한 톤을 유지하는데, 그 희극성은 대부분 조목란의 순진함에서 기인한다. 피아노 치는 사람 찾는다는 문구에 순진하게 룸살롱을 기웃거리고, 옷을 벗으며 관계를 요구하는 태산에게 "갑자기 바지를 빨란 말입네까!" 하고 울먹이며 바지를 들고 뛰어가는 우리들의 목란언니. 남한의 조대자 가족은 난데없이 나타난 그녀 덕분에 예상치 못한 지각변동을 겪는다. 큰아들 태산은 우울의 깊은 터널에서 빛을 찾고, 작은 아들 태강 역시 그녀에게서 사랑을 느끼며, 막내딸 태양은 애인의 시나리오를 빛낼 결정적 모티브를 얻어간다. 조대자 여사는 목란을 맏며느릿감으로 점찍고 그녀에게 선대의 유품인 쇠망치를 건네주며 오천만원을 약속한다. 그러나 조대자가 공들이던 사업이 꼬이면서 상황은 급변하고, 빨라진 스텝과 호흡에 인물들은 서로의 밟을 밟으며 넘어지기 시작한다.
분단현실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무거운 주제들은 조목란이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 안에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빈틈없이 스며들어 있다. 그 사이로 부패한 남북의 모습과 그 사이의 괴리, 변질된 사상과 이들 모두를 쥐락펴락하는 자본의 논리가 언뜻언뜻 드러날 때면, 극은 더할 나위 없는 명랑함으로 한층 서늘하고 뼈아프게 물어 온다. 우리들의 목란 언니는 어디로 가야 하나. 목란언니만큼이나 나약하고 힘없는 당신과 나는 갈 데가 있나. '해솟는 백두'를 낭랑하게 부르던 목란언니는 이제 대답이 없다. 다만 중국의 어느 홍등가에서 빨간 립스틱을 칠하고, 중국어로 '사랑의 미로'를 구슬프게 부를 뿐.
사면무대와 조명 전환, 빠른 장면 호흡
<목란언니>의 재미를 톡톡히 살린 것은 무대였다. 사면무대를 아주 탁월하게 활용하고 있는데(사면무대란, 한가운데에 정사각형의 무대를 배치하고 각 면에 관객석을 두어 벽 없이 배우들을 사방의 관객에게 노출시키는 무대형식이다. 레슬링 경기장을 생각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야기 진행이 빠르고 장면 전환이 무척 잦은 <목란언니>의 구성에 딱 들어맞았다. 배우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났다 사라지고, 암전 대신 색색의 조명 전환이 무대 공간을 변화무쌍하게 바꾸면서 관객의 시선을 휘어잡는다. 거기에 맞춰 텀 없이 빠른 템포로 통일된 배우들의 연기는 적절한 완급조절을 가미하여 이야기에 쫄깃쫄깃한 리듬감을 부여한다. 무대와 조명, 연출이 삼박자를 맞추어 이야기를 주무르니, 자칫 산만하게 흩어질 수도 있었던 색색의 장면들을 한줄기로 모아 밀어붙이는 뚝심이 돋보였다.
사실 연출적으로 사면무대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아무리 동선을 잘 짜도 결국 어느 면의 관객은 배우의 등과 뒷통수만 봐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러 배우가 무대에 등장하면 무대의 무게중심은 정사각형의 안쪽으로만 쏠리기 십상이고, 자칫하면 관객이 답답하지 않을 만큼의 시야가 어느 면에서도 확보되지 않는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나 <목란언니>는 기존의 사면무대에 약간의 변용을 주어 사면무대의 한계를 보완하는 동시에 사면무대만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사면무대 이외에 객석 사이의 양면에 별도의 무대공간을 배치해 공간의 활용도를 확 끌어올린 것이다. 관객에게 무척 밀착되어 있는 사면무대의 장점 자체는 유지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양옆으로 트여 동선이 획기적으로 커지면서 훨씬 다양하고 다이내믹한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덧붙여, 별도로 배치된 두 무대는 각각 남과 북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어 극의 진행 내내 두 국가의 대비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한쪽 무대에는 김정일의 초상화가, 한쪽 무대에는 썩어들어가는 대한민국의 실상이 대척점에 서서 서로를 마주한다. 그런데 때때로 두 나라의 일그러진 얼굴은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두 무대는 데칼코마니처럼 자주 겹쳐지곤 한다(그리고 이건 같이 보러갔던 당신이 짚어준 부분인데, 적어도 절반의 관객이 오른쪽에 북한을 왼쪽에 남한을 두고 극을 본다는 점이 무척 재미있었다!).
입체적인 캐릭터들
생동감 넘치는 무대에 살아있는 인물들이 들어가면서 극은 활기차게 꿈틀댔다.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각 인물들이 남한과 북한, 근현대를 제각기 반영하는 장기말처럼 쓰이고 있음에도 전형적인 인물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인물들은 제각기 충분히 찌질하고 가여웠으며, 짠하고 인간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목란 - 조목란 - 조대자의 연결 지점에 시선이 갔다. 브로커들 사이에서 세상 모르고 잠든 유목란의 앳된 얼굴은 극이 시작할 때의 조목란의 말간 얼굴과 어찌나 닮았던지. 또, 매정한 세상에 쫓기듯 내달리는 조대자와 조목란이 쇠망치를 주고받으며 어찌나 짙고 깊은 연대를 형성하던지. 조목란을 가운데 두고 교집합을 공유하는 세 인물은, 남북상황과 시대의 간극을 초월해 공존하며 목란의 삶이 어떻게 흘러왔고 어떻게 변해 가고 이제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극의 결말이 다소 비극적인 쪽으로 비스듬히 흘러갔음에도 빙구는 감히 그녀의 미래를 낙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뿜어내는 에너지가 조대자의 박력 못지 않게 단단하고 강렬했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도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기어이 제 살을 깎고 찬 땅에 삶을 박아넣으며 맑은 노래를 부를 것이다.
태산, 태강 형제들도 자꾸만 눈이 가는 캐릭터들이었다. 태산은 극중에서 가장 의욕이 없는 인물이지만, 모두가 벼랑끝에 몰렸을 때 가장 먼저 절망을 털고 일어난다. 가장 생에 대한 희망이 없던 인물이 마지막까지 희망을 말한다는 역설적인 설정이 흥미로웠다. 반면 태강은 캐릭터보다 배우 자체에 호기심이 갔다. 좋은 말일지 나쁜 말일지 모르겠지만 배우같지가 않았다. 어느 대학교에나 한명씩 있을 법한 특이하고 젊고 무기력한 교수 한명을 정말로 데려다가 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독특하면서 자연스러웠다. 잘 들여다보면 구부정하고 힘없는 자세나 묘한 딕션이 무대언어로 충분히 포용될 수 있을 만큼 다듬어져 있어, 어디까지가 만들어진 부분이고 어디까지가 배우가 가진 고유의 특성인지 모를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시선을 끌었다. 그 외에도 브로커, 자객, 독립열사 등으로 등장하는 조연들도 깨알같이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며 재미를 더했다.
이 여러 이야기의 결론은, 빙구한테 <목란언니>는 좋은 연극이었다는 말이다. 좋더라는 말을 이토록 덕지덕지 길게 좀 써 봤다. 음, 당신이 보면 어떨지 궁금하다. 사실 정말로, 진심으로 궁금하다. 그래서 좀 어떻게 매력적인 글을 써서 당신이 연극을 보려는 마음이 생기게끔 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오늘도 마음뿐이다.
거 참, 그래도 보러 갈 마음이 병아리 새끼발톱만이라도 생기면 기쁠 텐데 말이다. 왜냐하면, 빙구는 이 연극이 정말 좋았고, 당신도 좋으니까. 그래서 당신이 이 연극을 보러 가면 참 좋겠으니까!
허허. 뜬금없고 느닷없는 빙구의 수줍은 고백을 귀엽게 봐주시길 바라며. 그리고 당신의 <목란언니>는 어떨지, 이 리뷰를 읽고 두산아트센터를 방문할지 말지는 당신의 판단에 맡겨 두며.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는 이주 후에 다시 찾아오련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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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하반기 기대작 <변호인>을 개봉 첫날 보고 왔습니다. 시네마 폴리티카, 시작합니다.
‘영화같은 삶’이 있다. 이를테면 고졸의 학력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세무변호사로 누리던 부를 포기하며 인권변호사로 변신하고, 결국 민주화운동으로 명성을 얻어 극적으로 대통령까지 당선되는 그런 삶.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환상적인 삶 말이다. 당신이 제작자라면, 영화감독이라면 언젠가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개봉 당일 달려가서 보고 온 이 영화 <변호인>도 어쩌면 그런 단순한 이유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환상적인 이야기가 있으니 영화화해도 좋겠다는 생각. 그러나 ‘영화같은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데에는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 있다. ‘영화 같은 이야기’가 영화 속에는 넘쳐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그린 <변호인>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돈을 최고로 알던 속물 변호사가 어떤 가까운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으로 각성해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서사구조는 그 것이 얼마나 현실 속에서 울림을 갖느냐와는 별개로 이야기 자체는 너무나 흔해빠진 소재일 뿐이다. 그러니까,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 영화의 서사가 갖는 힘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실존인물 ‘노무현’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형적으로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허구’라고 못밖고 시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관객은 끊임없이 노 대통령을 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노무현의 이름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대통령이나 유명 정치인, 혹은 연예인의 삶을 다룬 영화들이 종종 해당 인물의 충실한 구현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달리 <변호인>은 의식적으로 실존 인물로서의 노 대통령과 거리를 둔다. (어쩌면 그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에 관한 징후적 읽기가 가능한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의의 화신이거나 악의 결정체이며, 어느 쪽에서도 입에 올리기 부담스러운 이름이다.) 예컨대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정치인을 다룬 <닉슨>이나 <철의 여인> 등은 주인공의 기벽이나 말투 등을 흉내 내며 실존 인물을 최대한 가깝게 연기한다. 한국에서도 <그 때 그 사람들>처럼 실존인물을 그럴싸하게 재현하거나,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영화 말미에 김근태의 영상을 띄운 <남영동1985>나 실제 사건의 결말을 제시한 <도가니>처럼 사건과의 연관성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변호인>에서는 노무현의 이름이 의식적으로 제거되어 있다.
이러한 태도는 영화의 전반적인 호흡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정치적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인물을 다룬 영화 치고, <변호인>은 복잡한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지 않다. 영화를 지배하는 메시지는 헌법에 1조 2항을 강조하는 소박한 정의론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제아무리 노 전 대통령과 정견을 달리하는 사람이라도 반발하기 어려운 정도다. (아마도, 이 영화의 메시지를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왕당파 파쇼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것이 이 영화의 단점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장점에 가깝다. 무리한 정치적 주장을 담아 관객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 점은 상업영화가 가져야 마땅한 미덕이고, 이 영화의 대중성을 강화한다. 강약이 잘 조율된 연출과 어느 정도는 염세적인 사건의 결말이 상당히 세련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그 기저에는 권선징악의 평범한 이야기가 깔려있다. 예외가 있다면 영화의 전반적 분위기를 해칠 듯이 외삽된 보기 힘든 고문 장면들과, 역시 영화의 결말을 해치며 외삽된 1987의 추가된 결말인데, 전자가 영화의 내적 정치성을 성공적으로 강화하는 데 반해, 후자는 영화를 외적으로만 정치적 공간으로 끌어들이게 될 사족처럼 보인다.
대신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송강호의 연기이다. 송강호가 분한 송우석 변호사는 완벽하다거나 감탄을 자아낸다기보다는 오히려 연기임을 자각하지도 못하게 하는 자연스러움을 체화하고 있다. 특히 돋보이는 부분은 가난과 저학력의 열등감을 자조적으로 드러내는 초반부인데, 송강호의 능청스러움은 짠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가슴 한 편을 서늘하게 만든다. 한편 후반부 재판 장면들의 연출 상의 세련됨은 거의 전적으로 송강호의 연기에 기대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얼굴에 클로즈업된 채 헌법 1조 2항을 연극적으로 외치는 대사는 여느 배우가 했더라면 매우 촌스럽거나 선동적이라고 느껴졌을 것이다. 실존 인물을 무리하게 모사하는 대신 송강호가 자유롭게 송우석을 그릴 수 있도록 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부터 허구임을 못박고 시작하기로 한 결정이 가져온 가장 긍정적인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매우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또 정치적으로 유통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영화 외적인 정치상황에 있다. 아무리 영화가 정치인 노무현의 삶을 전혀 다루지 않고, 의식적으로 노무현의 이름을 감추며, 정치적 주장을 밀고나가는 대신 평범한 주제에 포커스를 맞추고, 심지어 개봉일을 대선 1년 후로 미뤘다 한들, 관객은 호불호를 막론하고 영화를 정치적으로 읽으려 할 것이다. 이는 정치인 노무현의 유산이 여전히 확고한 정치적 지분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과도 관련이 있지만, 더 중요하게는 지금도 계속되는 구태한 공안몰이와 형해화한 언론이 주는 정치적 피로감 때문이다. (차동영 무리의 귀환을 우리는 영화가 아니라 뉴스에서 보고 있다.) 특히 송우석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등장하는 부산신보 기자의 일갈은 영화를 일부러 찾은 상당수 관객의 마음을 두드려 일깨울 것이다. 1987년의 사족도 영화를 ‘부림 사건’이라는 일화보다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게 하는 한 이유이다. 부산지역 변호사들의 지지는 배척받던 ‘독고다이’ 송우식이 어떻게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에필로그로 배치된 것이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를 정치인 ‘노무현’의 성장기로 읽을 것이다.
안녕하지 못하다고 너나없이 위로를 원하는 오늘, <변호인>은 아마도 ‘힐링’을 위한 영화로 상당히 각광받을 것 같다. 지난 대선 당시 <레미제라블>이 그랬던 것처럼. 그만큼 영화는 잘 연출되었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그러나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은 영화보다 영화 같은 삶에서 출발한 <변호인>이 주는 위로로부터 빠르게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속 ‘악당’들의 여전한 현존을 의식하게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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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와 테마곡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2003)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 주제곡 ‘The Last Waltz'를 들었을 때 영화 속 인물인 ’미도‘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제목은 생소할지라도,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노래를 들으면 익숙하게 느끼고 영화를 떠올릴 정도로 유명한 곡이다. ‘The Last Waltz'는 4분의 3박자, 왈츠 느낌의 곡이기 때문에 경쾌할 법 하지만 클라리넷 특유의 아련한 소리로 어딘가 슬프게 들리기도 하고, 이러한 부조화 때문에서인지 조금은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 곡은 미도가 등장할 때 배경음악으로 여러 번 사용된다. 이렇게 미도와 배경음악이 자주 연결되어서 관객들에게 다가가면, 어느새 관객은 그 음악을 듣고 미도가 등장하기를, 미도를 보고는 그 음악이 흘러나오기를 기대하게 된다. 물론 영화음악에 특별히 집중하기 않는 이상 등장인물을 보고 음악을 기대하는 후자의 일은 어렵겠지만. 어쨌든 음악과 인물을 연결해주는 강한 연결고리가 생기게 되는데 이 때 그 곡은 ‘00 테마곡(주제곡)’과 같이 그 인물 고유의 음악이 된다. 실제로 <The Last Waltz>도 원래의 제목보다 ‘미도 테마곡’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올드보이>에는 ‘미도’뿐만 아니라 ‘우진 테마곡’, ‘대수 테마곡’ 등 다른 등장 인물들도 각각의 테마곡을 가지고 있다.
복선이 되는 음악
이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쓰이는 테마곡은 원래 오페라에서 쓰이던 기법을 차용하여 각 장르에 맞게 변형한 것이다. 오페라에서 어떤 인물이나 상황을 특징짓기 위해서 쓰인 짧은 악구를 ‘라이트모티프(Leitmotif)’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유도동기’, 또는 ‘지도동기’라고 번역한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유도동기’로 쓴다!)
테마곡이 장면과 음악이 서로를 연상시킨다는 점을 차용했지만 유도동기와 테마곡은 음악을 사용하는 목적이 다르다. 테마곡은 인물과 노래의 연관성을 반복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 둘을 연결시키려는 목적을 가진다. 하지만 유도동기는 극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어떤 소품이 우연한 내용 속에서 등장할 때, 곧 그 소품이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암시를 주기 위해서 사용된다. 음악이 일종의 복선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서 테마곡은 하나의 완결된 멜로디가 있고 독립적인 음악으로 관객들에게 나타나지만 유도동기의 경우 두 마디보다 약간 긴 정도의 짧은 길이로 되어있고, 그마저도 다른 선율에 묻히듯이 나온다. 따라서 반복적으로 암시를 주고 있기는 하지만 눈치를 챌 수 있을 사람만 그 소품의 복선을 알 수 있다.
바그너와 그의 악극
앞서 유도동기가 오페라에서 쓰이기 시작하였다고 말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유도동기는 오페라의 일부인 ‘악극(Musikdrama)’에서 쓰인 기법 중 하나이다. 악극은 오페라가 시작되고 발전한 이탈리아와 그 영향을 받았지만 또 다른 모습으로 자신들만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 프랑스의 오페라로부터 벗어나 독일에서 새로운 형태의 낭만주의 오페라를 말한다. 이러한 악극은 리하르트 바그너에 의해서 창시되었다.
독일의 지휘자인 바그너는 오케스트라의 위상을 끌어올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오케스트라 사랑은 너무도 강해서 관객들에게 높은 수준의 집중력과 이해력을 요구했다. 그러한 그의 노력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지 못하도록 연주회장의 중간 복도를 없애고 의자를 길게 이어붙이도록 설계하거나 악장 간 박수를 금지시키는 규칙이 제정되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했다.(「삐아오의 들리지 않는 음악」, [Op.1] ‘악장 간 박수에 대한 낯선 질문’참고)
이러한 노력에 더해 또 한 가지 그의 오케스트라에 대한 업적이 있다면 바로 오페라와 같은 극에서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고 대사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음악으로 표현함으로서 종합예술로 칭해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오페라에는 분리된 형식의 아리아가 없이, 음악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두 시간에 이르는 공연에서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것은 일반적인 관객의 경우 감상하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유도동기는 이러한 바그너 오페라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음악이 끊어지지 않아 자칫 극의 진행이 단조로워질 수 있는 오페라에서 포인트가 되어줌으로서 지루함을 더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니벨룽겐의 반지>에서는 100개가 넘는 유도동기가 등장한다.
어긋난 계획
계획대로라면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유도동기들을 찾아서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해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바그너의 곡은 곡대로 흘러갈 뿐 아주 짧은 순간의 멜로디로만 들리고, 또 대부분의 경우 특정 악기의 멜로디에만 유도동기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소개하기가 곤란하다. 대신 유도동기를 찾으려고 음악을 듣고 있자니 그저 흘러가는 음악에서 한 번씩 톡톡 튀는 부분의 유도동기를 만나는 반가움이 꽤나 재미있다. 오히려 들리지 않는 음악으로 자세히 알려주기보다 <니벨룽겐의 반지>곡을 들으며 나름대로 유도동기를 찾아보는 재미에 빠져볼 기회를 주고 싶어졌다. 이제 그 기회를 빼앗기 않기 위해 침묵한다. 집중해서 들어보시길!^^
* 사진1. 영화 <올드보이> 포스터.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 사진2. 바그너의 모습.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 사진3. <니벨룽겐의 반지> 바이로이트 음악제, 피에르 불레즈 지휘 음반.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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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올라오기로 한 팝콘 먹는 좀비는
개인 사정으로 휴재합니다.
주중 혹은 다음주에 업데이트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신, [룽에세이]로 죄송함을 전합니다.
눈이 오고, 얼음이 어는 겨울이지만
잠시나마 가을을 느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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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의 단추]
왜 그런 날이 있지? 일기예보가 어긋나서 손엔 거추장스럽게 쓰지도 않은 우산을 쥔 채 집으로 돌아가는 날. 웬일인지 지하철이 코앞에서 떠나려 해도 뛰고 싶지 않은 날. 한참을 앉아서 몇 대를 보내고 나서야 그제야 힘들게 올라타게 되는 날. 너도 그런 날이 있지? 집으로 걷는 길에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며 페이스북을 다 뒤져가며 새로울 것 없는 소식들을 한참이나 보고야 마는 날. 최백호 아저씨의 목소릴 듣고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날. 젖은 낙엽을 발끝으로 가지고 한참을 놀게 되는 날. 문득 시려지는 날. 갑자기 그리워지는 날. 그런 날 말이야.
아마 그날도 그런 날이었을 거야. 지하철 맞은편 의자에 밤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앉아있었어. 조금은 때 이른 겨울코트를 꺼내 입었더라고. 꽤 쌀쌀해진 가을밤이었거든. 아마 아주 오랜만에 꺼내 입었을 겨울코트였겠지.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난 멍하니 여자를 보고 있었어. 골똘히 핸드폰을 바라보던 여자가 갑자기 고갤 들어 여기저기를 노려보더라고. 그러더니 내려야할 역이었던지 급하게 일어서서 뛰어나가는 거야. 어쩌면 그 여자도 나처럼 그런 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가 휙 일어서던 그때 '툭'하고 뭔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라고. 여자는 벌써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내린 뒤였어. 뭔가 하고 봤더니 '단추'더라고. 코트단추가 떨어진 거였어. 툭. 그렇게 여자가 떠난 빈자리 앞에 갈색 단추가 혼자 남겨져 있더라. 그런가보다 하고 집으로 가는데 자꾸만 단추가 떨어지던 모습이 떠오르는 거야. 이상하게. 묘할 정도로 생생하게 말이야. 여자가 휙 일어서고 그때 바닥으로 툭.
다시 휙, 툭. 또, 휘-익, 투-욱.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되더라고. 여자는 단추가 떨어졌는지 몰랐을까? 아니 알았지만 역에서 내리는 게 더 급했을까? 그렇게 집으로 가면서 빈 단추자리를 손으로 슥슥 문질러보고 있을까? 그 사이로 꽤 찬 가을밤바람이 스미게 될까? 그러면 그 여자는 코트를 더 꼭 여미게 될까? 여자는 언제쯤 코트단추를 다시 달게 될까? 어쩌면 내내 신경 쓰이면서도 귀찮아서 미루고 미루다 결국 겨울을 다 보내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다 봄이 되어 다시 장롱 속에 코트를 넣을 때야 '아, 단추를 결국 안 달고 겨울이 갔구나. 나도 참 어지간하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아닐까? 참 이상한 생각들이야. 그치? 그러다보니 툭, 하고 집 앞이더라고.
한참을 집에 들어가기가 싫더라. 그래, 그런 날이기도 했고. 지하철에서 본 그 모습 때문에, 그것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이면서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한참 쳐다봤어. 왜 툭하고 단추가 떨어졌을 뿐인데 거대한 무언가가 툭, 추락한 느낌이 들었을까. 세상이 무너지는 그런, 툭, 아주 외롭고 슬픈 그런, 툭, 자꾸만 나를 따라와 사라지지 않는, 툭. 너도 그걸 봤으면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보니까 나뭇잎들이 하늘과 땅을 여미는 단추들이 아닌가 싶더라. 나무들이 툭툭 단추를 떨구는 가을이야. 그것들이 떨어질수록 하늘이 저만치로 멀어지더군. 코트자락이 벌어지듯이 말이야. 그리고 그 사이로 바람이, 차고 명징한 바람이 스미더라. 이 짧은 가을이 지나면 곧 겨울이 오겠지? 내일은 아무도 단추를 떨어뜨리지 않았으면 싶다. 너도 이 短秋에 단추 떨어지지 않길. 그런 날이 너에겐 없길. 아주 외롭고 아주 슬퍼질 테니까 말이야. 그럼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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