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 먹는 좀비]

06. 사랑이 두려운 이유, <우리도 사랑일까>

 

 

"배달이요-."

 

벨이 울렸다. 드디어 오늘에야말로.

"네, 여기 쿠폰 20장이요. 맞죠?"

"감사합니다. 근데 이렇게 드셔도 되겠어요? 저희야 감사한데 한 달에 20번을 드시는 건…."

"아아, 괜찮아요. 하하. 워낙 좋아해서요."

"네에, 그럼 맛있게 드세요."

맛있는 점심을 먹기 위해 문을 닫으려는데 문틈 사이로 눈에 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엣?"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문 밖 복도로 메아리가 울렸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히히-. 들어가도 되죠?"

"아니, 혜선 씨 여기 어떻게…."

혜선은 들어오라는 내 답을 듣기도 전에 벌써 들어와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 카멜색 코트를 입은 혜선의 신발은 베이지색의 단화였다. 밖이 꽤 추운지 볼과 코끝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헤어스타일이 바뀌어 있었다. 윤기 있는 검은 포니테일에서 밝은 갈색의 단발머리로. 머리가 짧아져서인지 혜선의 얼굴은 전보다 더 앳돼 보였다.

 

 

"근데, 흐아- 이게 다 뭐예요? 집이 완전…."

큰일이었다. 싱크대는 그릇들로 바벨탑을 쌓고 있었고, 쓰레기통은 배달음식 쓰레기들로 터질 지경이었다. 거실은 널브러진 만화책이며 DVD, 옷가지들로 엉망이었다. 실은 그간 집안일은 승훈이 도맡아서 다 해왔었다. 요리며 청소며 빨래며 뭐하나 나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모든 게 완벽하게 돼있고는 했다. 승훈이 놈이 집을 나간 지 한 달. 집은 이 꼴이 되어 있었다.

"이게… 그러니까… 제가 요즘 좀 정신이 없었어서요."

나는 얼른 보이는 곳이라도 치우고 혜선을 앉혔다. 혜선은 여전히 어떨떨해서 방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룽 씨. 전 괜찮으니까 일단 짜장면부터 드세요. 다 불겠어요!"

"혜선 씨. 점심은 드셨어요? 탕수육도 있는데 같이 먹어요."

"그래요. 그럼 한 달 동안의 집념으로 먹게 된 탕수육이 얼마나 맛있나 맛 좀 볼까요-?"

혜선이 재밌다는 듯 탕수육과 나를 번갈아 보았더니 눈을 찡긋하며 빙긋이 웃었다. 나는 슬쩍 눈치를 보고 짜장면을 비비기 시작했다. 뭔가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더러운 것도 더러운 거였지만 친구 집에서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창피했다. 나는 화제를 돌리려 말을 꺼냈다.

 

"혜선 씨. 머리 잘랐네요?"

"네? 아, 네. 꽤 됐는데. 우리가 진짜 오랜만인가 보네요."

"잘 어울리네요. 더 어려진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말을 붙여놓고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승훈이 놈이 혜선과 헤어졌다며 집을 나간 지 한 달. 승훈은 연락도 받지 않았고 연락도 없었다. 승훈과 화해를 한 걸까? 혜선과는 연락이 됐던 걸까? 아니, 다시 만나는 게 아니라면 여길 올 이유가 없지 않나? 그렇다고 해도 섣불리 승훈의 얘길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던 나는 무심코 탕수육 소스를 탕수육에 부었다.

 

"으악! 룽 씨. '부먹파'세요? 이럴 수가."

"부먹파요?"

"탕수육 소스 부어 드시냐구요."

혜선의 눈치를 살폈다. 눈꼬리는 축 처지고 입술은 삐죽 나와 있었다.

"글-쎄-요. 좀 귀찮기도 하고… 원래 부어먹는 거 아닌가요?"

"에이, 원래 찍어먹는 거죠. 괜찮아요. 제가 뺏어먹는 거니까."

혜선이 아까처럼 또 빙긋 웃으며 탕수육을 집어 먹었다. 우물우물 탕수육을 씹으며 혜선이 말했다.

"룽 씨. 오늘보니까 생각보다 의외인 부분이 많네요? 근데 계속 이렇게 지내셨어요? 짜장면에 치킨, 피자, 족발…."

"네… 뭐 요리는 전혀 못하는 데다 제가 또 음식을 잘 질려하지 않아서요."

"하이고. 이따 저녁은 저랑 제대로 먹어요. 그럼. 내 우상이 이런 소굴에서 그 모든 소설을 썼던 거구나아-"

"아니, 제가 항상 이런 게 아니라요…."

 

 

"우리 청소나 할까요? 제가 설거지랑 부엌 맡을게요. 룽 씨가 쓰레기 좀 버려주시고 거실 정리! 좋죠?"

혜선은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가 지금 친구 집에서 친구의 여자친구(혹은 전 여자친구)랑 뭘 하고 있는 거지? 대체 혜선은 여기 왜 온 걸까?

"게으름 부리지 말고요. 여기 청소기요. 어서 움직이세요."

일단 시키는 대로 혜선과 집을 청소했다. 혜선은 빠르고 깔끔하게 설거지와 청소를 끝내고 있었다.

"룽 씨. 바닥 걸레질 좀 해주실래요? 저는 저녁거리 장 좀 봐올게요."

"저녁요? 아니 안 그래도 되는데…."

혜선은 또 대꾸도 않고 집을 나섰다. 나는 걸레를 집었다. 점점 더 의문이 커져갔다. 오늘 승훈이 들어오는 건가? 아니면… 아니면 뭐지?

 

"저 왔어요-. 밖에 눈 와요! 첫눈!"

혜선은 코트와 머리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 양 손엔 각종 찬거리가 봉투 가득 있었다. 나는 봉투를 받아 부엌에 놓고는 거실 커튼을 쳤다. 밖엔 눈이 펑펑 흩날리고 있었다. 승훈의 집에 아직 조금은 더울 때 들어왔던 것 같은데 벌써 겨울이었다.

혜선은 금방 뚝딱뚝딱 요리를 해 근사한 저녁상을 차렸다. 된장국, 계란말이, 배추겉절이, 소시지볶음 그리고 맥주까지. 대학생이라고 어리게 봤는데 혜선은 굉장히 싹싹하게 일을 잘했다.

 

 

"아야-"

혜선이 앉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식탁의자에 놓여있던 DVD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미안해요. 내가 저걸 거기다 놓아가지고."

"<우리도 사랑일까>? 이거 보셨어요?"

"네, 미쉘 윌리엄스 팬이거든요. 뭐랄까. 쓸쓸하고 무서운 영화더군요. 좋았어요."

"아, 마고 역으로 나온 그 여자요? 저도 그 여자 좋아하는데."

<우리도 사랑일까>는 마고라는 여자가 우연히 만난 옆 집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그와 살게 된다는 간단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영화가 특별했던 것은 너무나 디테일하고 납득할만한 마고의 감정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해낸 점이었다. <화양연화>가 새롭지만 불안한 불륜에 대한 인상화라면, <우리도 사랑일까>는 흔들리는 털끝마저도 그려내는 극사실주의에 가까웠다. 마고의 감정에 뽀얗게 먼지가 이는 순간을 볕이 잘 들어오게 창을 열어 관찰하는 느낌이랄까. 그보다 더 특별하고 서늘했던 것은 마고가 옆 집 남자를 선택하고 나서부터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마저도 포기할 만큼 끓었던 감정은 어느새 같은 과정을 거쳐 깎이고 마모되어 갔다. 진짜 사랑을 찾은 듯 했던 마고는 어느새 전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는 쓸쓸하고 무서웠다.

 

 

"혹시, 룽 씨는요. 애인이 있는 상황에서 만약 '진짜 사랑'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애인과 헤어질 건가요?"

"글쎄요. 저는 애초에 진짜 사랑이란 게 뭔지 모르겠어요. 그런 게 있나요? 저는요, 마고의 남편 같은 사랑을 했어요. 익숙함에서 사랑을 느꼈거든요. 짜장면을 한 달에 20번이나 먹을 수 있는 성격이기도 하고요. 마고 남편도 매일 닭요리만 연구하잖아요? 저는 아마 헤어지지 못할 것 같은데요?"

"…그래요? 오늘 보니까 룽 씨는 저랑 정말 다르네요. 탕수육 소스도 부어먹고, 정리정돈도 안 하고. 저는요. '진짜 사랑'이라면 그 사람에게 갈 거예요. 결국 그것도 닳고 닳아서 그게 진짜였는지 사랑이었는지 알 수 없어진대도 말이에요….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잖아요. 어떻게 될지는. 혹시 그런 사람은… 싫은가요?"

혜선을 바라보았다. 혜선의 눈빛이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아주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사랑은 솔직히 무섭네요. 저도 예전에 그랬던 것도 같은데… 이제는 호감이 애정이 되는 게 무섭고, 그 사람이 내 사람이 되는 게 두려워요. 혹시 내가 질려버리는 게 아닐까. 그 반대도 무섭기도 하고요. 지금이야 저렇게 짜장면을 계속 맛있게 먹었지만 혹시 언제 갑자기 싫어질지는 모르는 일이잖아요. 내가 정말 사랑하던 사람을 내가 더는 전처럼 사랑하지 않는구나 싶을 때 참 슬프거든요. 그런 거 알려나? 그래서 내가 이렇게 노총각이 되고 있나 봐요."

"그럼 제가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되시겠네요? 제가 승훈 오빠랑 왜 헤어졌는지 전혀 공감하지 못하시겠네요."

"네?"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무언가 무서운 말이 혜선의 입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눈송이가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승훈 오빠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빠가 능글거리면서도 이상하게 눈치는 빠른 사람이라서 말이죠. 제가 누구 때문에…."

 

"아, 글쎄 제가 봤다니까요! 걸음걸이가 뭔가 이상한 할아버지였어요. 젊은 여자 손을 낚아채더니 갑자기 그 여자 몸 여기저기를 물어뜯었다고요. 어제 밤에 제가 신고해서 경찰까지 다 출동했었는데. 근데 대체 나는 왜 여기 잡아두는 거예요! 기자양반! 이거 봐요!"

분명 승훈의 목소리였다. 승훈의 목소리가 TV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TV 앞으로 뛰어 나왔다. 왜 저 놈이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거지? 어느새 혜선도 내 옆에서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TV뉴스는 알 수 없는 속보를 전하고 있었다.

[서울 북부 통행 제한 조치. 정체불명의 전염병 확산 중. 질병관리본부 현재 사태 긴급조사 중. 안전 유의 바람.]

 

 


 

BY  룽  

영화와 음악, 책을 사랑하고픈 기자지망생. 

행복과 항복 사이에서 글을 쓰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