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 먹는 좀비]

04. 인생은 디테일, <부산국제영화제> (2)

 

 

"이모- 수고하세용-."

포차 옆자리 네 명의 여자가 일어선다. 슬쩍 우리 쪽으로 던지는 눈빛에 뭔가 있는 것 같다. '따로 한 잔 더 하고 싶으면 얼른 따라 나와'라는 듯. 나는 그 끈적한 메시지를 받고 승훈을 바라봤다. 승훈은 여자들이 나가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얘길 한다.

"야, 룽. 봤냐, 쟤네? 네 명이 다 똑같이 생겼어. 앞트임, 뒤트임, 코에, 애교살…. 으아- 성형한 건 그렇다 치고 왜 저렇게 넷이 같이 다니는 걸까?"

승훈의 혀가 이미 꼬부랑하다. 벌써 소주는 세 병째다. 어제도 오전에 예매한 영화는 못 봤다. 내일도 그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대체 부산국제영화제에 와있는지 부산국제주류박람회에 와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나 역시 새우를 까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우는 또 왜 이렇게 맛있어서 술이 술술 넘어가는 건지.

"글쎄. 밖에서 보면 다 똑같아 보여도 안에서 보면 다 다를 걸. 우리 눈에 클론 같아 보여도 자기들끼리는 전혀 다른 사람일거라고."

"오- 군대 같은 거냐?"

"음, 그렇지. 남들이 보면 다 같은 군인인데, 군인끼리 보면 다 다르잖아. 팔소매를 어떻게 걷어 올리는지, 군복 주름은 어떻게 잡는지, 군화 광은 어떻게 내는지, 심지어 모자무늬도 다 똑같아 보이는데 뭐가 멋있네- 뭐가 별로네-."

"크크크크 그랬지. 검은색 무늬 많고 패턴이 조화로워야 예쁜 거라던가."

"그래, 크게 보면 사람 다 비슷해. 신기할 정도로. 다들 먹고, 자고, 싸고, 아프고, 죽고. 근데 자세히 보면 사람 다 달라. 미묘하게 운동화 끈 묶는 법도 다르고, 샤워하는 순서도 다르고. 그건 작지만 실은 전혀 다른 삶인 거야. 그러니까 인생은 디테일이라니까."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소라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내려놓는다. 해운대 주변 초고층 빌딩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삶은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른 걸까. 승훈이 소주를 따려다 말고 갑자기 소리친다.

"에이- 이모! 오리지널 말고 후레시 달라니깐. 후. 레. 시."

 

 

포차 입구로 누군가 들어온다. 엊그제 만났던 승훈의 첫 단편영화 주인공이었다는 그 여자다. 검은 재킷에 검은 원피스, 검은 스타킹에 검은 하이힐까지 올 블랙으로 빼입고 나타난 저 여자가 엊그제 만난 해사한 노란 스웨터의 귀여운 여자가 맞나 싶었다. 게다가 이 밤에 화장까지 완벽하게 하고 나오다니.

"혀-언- 왔어? 봐봐, 현이는 아까 걔들이랑은 전혀 다르잖아. 눈이며 코며 입술이며 디테일이 살아있네."

"뭐야. 오빠- 벌서 취했어요? 작가님 안녕하세요?"

"아, 저희가 좀 미리 마시고 있었어요. 현이 씨도 한 잔 받으세요."

술잔을 드는 현의 팔목엔 묵주팔찌가 있다. 뜬금없는 디테일이기도 하고, 저렇게 빼입고도 묵주팔찌를 하는구나 싶었다.

"어떻게 부산 잘 즐기고 계세요? 영화는 좀 보셨어요?"

현이 승훈 쪽으로 몸을 슬며시 당기며 다가간다. 혜선 생각이 난다. 이거 이대로 나둬도 될까.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혜선이 보낸 문자가 떠올라 고갤 휙휙 저었다.

"응, 뭐. 오늘은 카자흐스탄 영화 봤어 <나기마>라는 작품인데 좋더라. 여배우도 묘하게 매력있는 눈빛과 표정이 있더라고. 어디에 붙여놔도 몽타주되는 그런 표정을 가진 배우들 있잖아. 그런 느낌이었어."

"승훈 오빠, 예전에 나한테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오오케이- 컷! 현이 표정은 역시 어디 붙여놔도 몽타주가 된다니까-'라면서. 기억 안 나죠?"

"그, 그랬나? 흐흐 역시 난 그때도 안목이 있었군? 현이와 나기마를 위해 짠-"

 

 

<나기마>는 술 먹고 늦장을 부리다보니 어쩌다 보게 된 영화였는데 상당히 좋았다. 나에게는 이런 게 영화제의 맛이구나 싶었고, 승훈에게는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기마의 선택은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나는 술에 취해서인지 구구절절 영화얘기를 내뱉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런 내용이에요. 못 생기고 글도 모르는 나기마가 유일한 친구이자 고아원 동기인 안야와 함께 사는데. 안야는 임신을 한 상태에요. 그렇게 나기마는 친구를 돌보며 살아가는데 어느 날 안야가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되는 거예요. 보호자가 없는 갓난아이는 고아원에 보내지게 되죠…. 근데! 나기마가 그 애를 고아원에서 훔쳐 나와서 키우기로 해요."

"그렇게 아이를 통해 버림받은 상처를 극복하나보죠?"

"아뇨. 그게 그러니까…."

"죽여. 애를. 이-렇-게 들어서 절벽에서 휙- 쿵-."

승훈은 나기마가 아이를 안고 절벽에서 아이를 던져버리는 장면을 재연한다. 승훈은 짓궂게 다시 소라껍데기를 들었다가 떨어뜨린다. 쿵, 부딪히는 소리가 가슴으로 콱 박힌다.

"아니, 왜요? 친구 아이를 굳이 훔쳐서 키우려 한 것도 아니고 죽여요?"

현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슬쩍 젖히며 묵주팔찌를 만지작거린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기마는 고아가 된 갓난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 같아요. 누구도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거고, 상처만 받아가면서 삶을 살아가게 될 거라고. 자기 삶이 그랬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게- 나기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이었을지도 몰라. 절대 나처럼은 되지 마라! 그런데 살아서는 무조건 자기처럼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나기마는 참 이기적인 여자네요? 그럴 거면 자기가 죽어야하지 않나요?"

"글쎄요. 이기적이라기 보단 바보 같았던 것 같아요. 인생의 디테일을 보지 못 했달까. 실은 그녀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게 너무 작은 디테일로 표현되어서 어쩌면 나기마가 못 봤을 수도, 성에 차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요. 나기마는… 안타깝게도 삶의 디테일을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 같아요."

"그렇구나, 저는 굉장히 디테일을 사랑하는 사람인데."

어느새 술잔은 몇 번씩 더 주고받고, 소주병이 쌓여가고 있었다. 현이 나와 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문득 얘길 시작한다.

 

 

"그런 적이 있어요. 저 어릴 때 엄마가 퇴근하는 시간이면 항상 문 너머로 또각또각하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어요. 또각또각. 현아 엄마왔다- 하는 그 소리. 그래서 어릴 땐 꿈이 엄마처럼 하이힐을 신는 여자가 되는 거였거든요. 근데 그걸 오래도록 까먹고 있었어요. 서울 올라와서 연기도 맘대로 안 되고, 인생 참 맘대로 안 되는 구나. 신세한탄하면서 집으로 가고 있는데. 문득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또각또각. 제가 신은 하이힐에서 나는 소리였어요. 웃기게도 그때 그런 생각이 들어라구요. '와, 생각해보니 내가 어릴 적 꿈을 이뤘구나. 이현 성공했네.'라는. 우습죠? 근데 그게 너무나 위안이 되는 거 있죠? 그 뒤로는 항상 하이힐을 신고 다녔어요. 내가 사랑하는 인생의 디테일이랄까. 그래요."

승훈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하이힐을 내려다 보았다. 엄마의 구두소리를 들었을 꼬마 아이를 상상했다. 승훈에게 추근거리는 그저 그런 여자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했는데 미묘한 디테일들이 그녀를 전혀 다르게 보이도록 했다. 해사했던 첫인상은 그런 모습을 본 것이었을까.

"오오케이-. 말 나온 김에 작가양반이 사랑하는 인생의 디테일을 들어볼까?"

"글쎄, 그런 것보다 너의 디테일이 너에 대해 얼마나 많은 걸 알려주는지 말해줄게. 먼저 몇 주 전부터 밑창이 떨어져 덜렁거리는 네 신발. 그걸 넌 지금도 그대로 신고 있잖아. 네가 그런 놈이라는 거야. 덜렁덜렁, 디테일은 전혀 신경 안 쓰는."

"뭐? 야, 룽. 이런 말은 안 하려 그랬는데 그래서 네 소설이 재미없는 거야. 디테일, 디테일, 그 놈의 디테일. 서사가 쭉쭉 치고 나가는 맛이 있어야지. 그녀의 떨어진 코드 단추가 어쩌고 저쩌고."

"에이- 승훈 오빠. 이런 말은 안 하려 그랬는데요. 오빠 영화는 너무 디테일이 없었어요. 이 장면에서 저 장면으로 막 휙휙 넘어가고. 연기하기 얼마나 힘들었다구요."

나는 현과 하이파이브를 한다. 현도 슬슬 취해가면서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그래, 밖에서 보면 다 비슷비슷한 포차에 들어가 비슷한 술을 먹고 비슷한 얘길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뭐든 들어와 봐야, 자세히 봐야 아는 법이다. 바닷바람이 불고 분위기가 즐겁다. 내일이면 서울에 올라가야 하는데 역시 제 시간에 가긴 힘들 것 같다.

 

시끄럽게 벨이 울려서 눈을 떴다.

"아으으, 여보세요?"

"아, 룽 씨! 저 혜선이에요. 지금 어디세요?"

"네? 아, 예. 혜선 씨. 여기가 그러니까 부산인데요."

"그러니까 부산 어디세요. 저도 지금 부산이에요."

 

혜선에게 듣기로 승훈이 어제 새벽에 혜선에게 만취해 전화를 했다고 했다. 큰일 났으니 어서 부산으로 데리러 와 달라고 했다고. 놀란 혜선은 얼른 부산으로 차를 끌고 내려왔다는 거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어젯밤 기억이 없다. 왜 나만 숙소에서 자고 있는 걸까. 나는 얼른 체크아웃을 하고 해운대 포차로 나갔다. 이미 혜선은 승훈을 차에 실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그러게요. 어떻게 된 일인지. 일단 타세요."

승훈은 해운대 포차에서 쓰러져 바닥에서 내내 자고 있었다고 했다. 나중에야 포차 아주머니께서 혜선 씨 번호로 전화를 주셔서 찾아올 수 있었다고 혜선은 뾰루퉁해서는 말했다. 혜선은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는데 어쩐지 더 창백해보였다. 화가 난 걸까.

나는 뒷좌석에 쓰러진 승훈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나는 승훈을 버리고 혼자 숙소로 왔나보다.

 

"승훈 오빠가 어제 전화해서는 장난 아니었어요. 하하하. 데리러 오라고 막 응석을 부리는데. 저 다 녹음해놨다니까요. 너무 웃겨서. 룽 씨는 좀 괜찮으세요?"

다행이었다. 혜선이 화가 났을까 걱정했는데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긴장이 풀리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창문을 살짝 열었다. 손목에서 뭔가 짤그락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엣, 이게 왜 여기 있지?'

순간 뒷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현의 묵주팔찌였다. 설마…. 나는 머리를 감쌌다.

 

"룽 씨 괜찮으세요? 우리 휴게소라도 들릴까요?"

"아, 아뇨 괜찮아요. 머리가 아파서요. 조금만 자도 될까요?"

"그러세요. 그럼.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꿈같은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어제 그러니까 술 깨려고 잠깐 바다에 바람을 쐬러 나왔는데, 현이 따라 나왔고. 그땐 이미 승훈은 포차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해변 스탠드에 앉아서… 기억나지 않는 대화를 나누다가… 현이 내 어깨에 기대고… 승훈 얘길 했었나? 현이 울기 시작했고… 안쓰러워서 토닥거려 주다가… 분위기에 취해서… 현에게 키…스를….

아, 제발. 아닐 거야.

왜 그랬지. 묵주팔찌와 하이힐의 디테일 때문이었을까. 현도 기억할까.

 

"우에에에에엑- 으에엑-"

"꺄악, 오빠! 안돼."

 

놀라서 눈을 번뜩 떴다. 뒷좌석의 승훈이 토를 하기 시작했다. 혜선은 안절부절 못했다. 왜 여행의 끝이 이 모양인건지. 라디오에선 태풍이 북상중이라는 예보가 흘러나왔다. 부산을 떠나고 있다는 이정표가 보였다.

 


 

BY  룽  

영화와 음악, 책을 사랑하고픈 기자지망생. 

행복과 항복 사이에서 글을 쓰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