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 먹는 좀비]

02. 뮤즈에 대하여, <우리 선희>

 

 

"야, 룽. 일어나봐. 밥 먹어."

"아으으. 몇 시야?"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눈을 슬며시 뜬다. 창으로 뛰어드는 가을햇살이 아찔하다. 머리가 띵하다. 거실에 수천 장의 DVD가 알록달록한 아지랑이처럼 보인다.

"해가 중천입니다, 작가양반. 해장해! 형님이 콩나물국 끓여놨지-."

승훈이 놈 콩나물국도 끓일 줄 안단 말인가. 15년을 봐왔지만 아직도 나는 이 놈의 진짜가 뭔지를 알 수가 없다. 뭐 그래서 이렇게 오래 보고 있는 거겠지만. 10분만 보고 있어도 어떤 사람인지 훤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체질적으로 그런 부류들과는 맞지 않았다. 어쩜 그렇게도 패턴화된 말과 행동들을 하는지. 국그릇을 들고 숭늉처럼 벌컥벌컥 삼킨다. 칼칼하게 잘 끓인 콩나물국이 쓰린 위장에 퍼진다.

"크아-. 어제 어떻게 된 거냐. 기억이 안 나네."

"흐흐. 어제 우리 대문호님 신나셨지 뭐."

능글거리는 승훈의 표정에 속이 또 메슥거린다. 역시 저 표정은 싫다. 콩나물국에 얼굴을 파묻는다.

 

 

어제 승훈과 혜선 그리고 나는 영화를 보고 모자란 술을 더 사와 마셨다. 천장도 높고, 조명도 좋고, 야경도 좋은 승훈의 집은 여느 고급 바(Bar) 못지않았다. 게다가 풋풋한 20대 여자가 있었으니까. 마시다 보니 난 필름까지 끊겨버렸다. 어제의 시간들이 피카소의 그림처럼 조각나서 멋대로 이어 붙여져 있다. 피카소는 어쩌면 숙취의 아침에 지난밤의 연인들을 그렸을까. 나의 지난밤을 더듬어본다.

"자자, 짠-. 우리의 만남을 축하하며!"

짱그랑하고 잔 부딪는 소리가 오랜만에 즐겁다.

"야, 룽. 혜선이가 왜 우리 과에 들어오게 된 줄 아냐?"

"아이-. 오빠 그런 말하지 말라니까-."

둘은 한참을 옥신각신한다. 나는 멀뚱히 둘을 바라본다. 승훈의 표정이 참 즐겁고 편안해 보인다. 부러운 얼굴이다. 이내 혜선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쉰다. 그러더니 술을 꿀꺽꿀꺽 들이켜고 결심한 듯 눈을 빛내며 말한다.

 

 

"저 룽 씨 소설 전-부- 읽었어요. 학창시절에 꾹꾹 눌러 읽으면서 생각했거든요. 아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이런 사람들이랑 함께 친구로 지내고 싶다. 그래서 지원했어요. 운 좋게 후배가 됐네요. 히히. 언젠가 꼭 만나고 싶었어요!"

혜선은 말을 이을수록 더 흥분하기 시작한다. 필사를 했다느니, 몇 번을 읽어 책이 헤졌다느니, 주변 친구들 생일마다 내 책을 선물해서 친구들이 싫어했다느니 하는 얘기들이 줄줄이 쏟아진다. 얘길 들을수록 나는 몸이 굳는다. 항상 독자와의 만남 행사를 가면 난처하고 어색하다. 내 글을 좋아해주는 건 참 고맙지만 그들에게 무슨 얘길 해줄 수 있을까 싶고. 내가 써내는 글이지만 글은 글일 뿐, 글이 곧 나는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진다. 나도 팬질 깨나 하며 작가들을 따라다녀 봤지만, 실제와 작품이 전혀 달라서 실망한 경우가 많았다. 결국 나는 어색하게 허허 웃으며 팬서비스를 해준다.

"허허, 고마워요. 혜선 씨."

"허허가 뭐냐. 촌스러운 새끼."

자기가 말하라고 해놓고는 혜선이 소녀팬의 모습이 되어 고백을 늘어놓자 승훈은 못마땅한 눈치다. 취기 때문인지 팬심 때문인지 혜선의 볼이 빨갛다….

그리곤 어떻게 됐더라. 아주 잠깐 예술에 대해 진지한 얘길 했던 것 같고, 대부분의 시간은 농담 따먹기에 보냈던 것 같고, 아무튼 아주 오랜만에 유쾌한 술자리였다. 혜선의 등장으로 새롭게 생긴 화학작용 때문이었으리라.

 

 

콩나물국을 바닥까지 긁어 마시곤 승훈에게 물었다.

"너가 그렇게 찾던 뮤즈냐? 혜선 씨가?"

"뮤즈! 그래 짜식아. 어제 너도 봤잖아. 혜선이 걔 발랄하고, 나이답지 않게 열려있고, 머리 좋고, 착하고, 안목 있고, 똑똑하고, 솔직하고. 바로 내가 찾던 뮤즈지."

"그래, 그렇더라. 발랄하고, 오픈 마인드에, 착하고, 안목 있고, 똑똑하…. 야, 근데 이거 홍상수 영화 대사랑 비슷한데?"

"오, <우리 선희> 너도 봤냐? 내가 또 상수형 영화는 꼭 보니까."

"상수형 좋아하네. 술자리 옆 테이블에 잠깐 같이 앉았다고 형이냐."

나도 홍상수 영화는 참 좋아한다. 전형인 것 같으면서도 전형이 아닌 것. 혹은 확실한 전형을 보여주어서 느껴지는 비전형성 같은 것이 좋다. 10분 만에 답이 나오는 영화들과는 다르다. 뭐 누군가는 홍상수 영화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하겠지만. 콩나물국을 끓여내는 승훈을 보듯 뜬금없는 홍상수의 매력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번 영화도 참 뜬금없이 묘한 뽕짝이 영화에 통째로 나왔었다.

 

 

"아무튼 <우리 선희>를 보는데 선희가 꼭 혜선이 같더라니까. 자기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고 확인 받고 싶어 하는 욕망 같은 거. 알 듯 모를 듯한 행동들. 뭐 그런 거. 20대라 그런 건가? 아무튼 세 남자한테 영감을 주잖아 선희가. 혜선이가 나한테 그래. 뭔가 특별하고, 내 이야기의 샘이 될 것 같달까-."

"너 영화 제대로 안 봤구나. 선희는 세 사람한테 다 '우리 선희'야. 각자 선희는 나한테 특별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실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잖아. '우리 선희'가 '나만의 선희'가 아니라 '모두의 선희'가 되는 셈이지. 혜선 씨라고 다를까?"

"그렇겠지. 내가 20대 애도 아니고 그런 건 상관없어. 당장 나한테 이야기를 주니까. 일단은 파고, 파고, 가고, 가보는 거지. 그리고 솔직히 예쁘잖아? 흐흐"

승훈이 영화 속 이선균 흉내를 낸다. 그런데 인상 깊었던 대사 중에 이런 것도 있었다. '끝까지 파고들어가는 건 좋은데 그건 네가 뭘 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게 아니고 뭘 못하는지 아는 거야.' 이 대사로 승훈에게 대꾸해주고 싶지만 무슨 마음인지 그냥 참았다. 어쩐지 승훈이 영화 속 남자들처럼 텅 빈 창경궁을 터덜거리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지만 <우리 선희>의 그 장면이 그랬던 것처럼 상상 속 승훈의 모습은 참 아름다워 보였다.

 

 

그나저나 뮤즈라…. 2년간 한 글자도 못 쓰고 있는 소설가에게도 고뇌가 아니라 뮤즈가 필요한 걸까. 30대 중반이 되어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한편으론 너무나 쉬운 일이기도 하지만 또 너무나 힘든 일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 나에겐 쉽지도 힘들지도 않은 사람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까 어제 무슨 문자가 왔던 것 같은데…."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하는 승훈을 뒤로하고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바라본다.

 

"소방방재청…긴급재난알림…."

소리내어 문자를 읽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띵-동-.

 

[우리 혜선이]

룽 씨! 일어나셨어요?ㅋㅋ 혹시 다음 주에 영화 보실래요? <우리 선희>. 승훈 오빠는 벌써 봤다네요.

 

아. 우리가 번호를 교환했었나?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 혜선이'라니.

 

"왜 그렇게 머리를 싸매? 이제 일어나 쫌."

승훈이 베란다 창을 연다. 가을 강바람이 시원하게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