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 먹는 좀비]

01. 이야기를 하는 이유, <로맨스 조>

 

 

 

"당분간 그럼 신세 좀 질게. 고맙다."

"오-. 한국소설계를 이끌어가는 대문호 룽님에게 고맙다는 소릴 듣다니. 감개가 무량하옵니다아-."

저 돼지기름을 듬뿍 바른 듯한 말투. 승훈이 놈은 마음놓고 나를 비꼬고 있다. 승훈은 항상 붙어 다니던 대학동기다. 우리는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갔다. 나는 글을 썼고, 승훈인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등단 이후 평단의 극찬과 독자들의 넘치는 사랑으로 단숨에 스타작가가 되었다. 여전히 독립영화를 만드는 승훈이는 그런 날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내심 대박난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하면서도 자존심인지 자격지심인지 메이저 시스템을 경멸했으니까. 승훈이는 항상 말했다.

"야. 사람들은 네가 똥구멍으로 글을 써도 좋다고 받아먹을 거야. 유명세라는 건 그런 거니까. 그치?"

아, 얘랑 같이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지난 2년간 한 글자도 못 쓰고 있는데다 돈도 없어져 갈 곳 없어진 신세.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마음껏 비웃어라.

 

"룽. 네가 이러고 빌빌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아마 역작을 내려나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치?"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승훈이 말한다. '그치?'라고 되묻는 저 말버릇 정말 별로다.

"그만 좀 해. 새끼야.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한강 보이는 오피스텔에 살면서 배고픈 예술가인 척 하는 너 같은 게으른 한량보단 나으니까."

"아, 그러는 넌 존나게 성실하게 노력해서 2년 동안 한 글자도 못 썼구나. 역시 대문호답다. 혼을 실은 한 글자! 크아, 멋져멋져."

"씨팔, 그래 말자. 말아. 그만하고 술이나 한 잔 하자."

"오오케이. 알겠습니다아-."

승훈이 과장되게 엉덩이를 씰룩이며 맥주를 내온다. 거실 창문 너머로 해 지는 한강이 보인다.

 

 

 

"야. 근데 여기 거의 DVD방 수준인데? 만 장은 되는 거 아니야?"

거실 벽엔 빙 둘러 DVD가 빽빽하게 꽂혀있다. 진열장에 레일까지 깔아놓아서 정말 DVD방 같았다. 나도 이런 서재를 가질 수 있을까. 내심 부러웠다.

"후후후. 형님의 콜렉션이지. 만 장은 안 되고 한 삼 천장쯤 될 거야. 우리 애기들."

"미친놈. 그럼 영화나 하나 보자. 안주로."

"오오케이. 뭘 볼까아-. 뭘 봐야 소설가님이 흡족하실까아-."

띵-동-. 그때 벨이 울렸다. 승훈이가 주인을 맡는 강아지처럼 쫄랑쫄랑 달려가 문을 열었다. 처음 보는 앳된 여자였다.

"인사해. 말했었지? 내 여자친구 혜선이."

이 새끼가 또 말도 없이…. 승훈은 항상 여자를 꼬시는데 나를 팔곤 했다. 자신의 능력과 인맥을 과시하려는 허세스러운 방법이다. 나는 승훈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 안녕하세요. 룽입니다."

"네, 하하. 저 룽씨 정-말- 팬인데. 꼭 뵙고 싶었어요. 정말이요."

하얀색 쫙 달라붙는 바지에 경쾌한 색의 스트라이프 티셔츠 그리고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까지. 전체적으로 평범한 인상이었지만 환하고 싱그러운 느낌의 여자였다. 잠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 발랄한 처자였다. 그녀는 대학교 4학년이었고, 알고 보니 같은 과 후배였다. 승훈이 새끼 능력도 좋다. 11살 연하 후배를 만나다니.

 

 

 

"우리 영화 보려던 참이었어. 혜선아. 오늘의 영화는! <로맨스 조>!"

"아, 그 감독 홍상수 감독님 옆에서 조감독 하셨던 분 맞죠? 완전 보고 싶었는데."

"오오케이. 그럼 플레이합니다요."

우리는 혜선을 가운데 끼고 영화를 보았다. 신선하고 깨끗한 느낌의 영화였다. 로맨스 조라는 인물의 실제와 그에 대한 상상과 회상과 허구가 마구 뒤섞인 이야기. 하지만 그것이 이상하게도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다가오는 영화였다. 마치 학창시절 각자 싸온 도시락 반찬을 한 데 놓고 비벼먹던 비빔밥처럼 여기저기서 가져온 이야기가 맛있게 비벼졌다.

 

"영화 어땠어요?"

맥주를 입에 털어 넣고 혜선에게 물었다.

"재밌었어요. 확실히 홍상수 영화 느낌이 있는데요? 영화 속 300만 영화감독이라는 사람은 꼭 승훈오빠 같아서 웃겼어요. 물론 오빤 300명 영화감독이지만요. 하하하."

그녀가 그 나이답게 천진하게 웃는다. 참 상쾌하다.

"요것이 말하는 것 보게-. 아무튼 공감 가는 부분은 있었어. 이야기를 찾는 영화감독이 좀 짠하더라. 나도 이야기 헌팅 좀 해볼까. 어때 대문호님은?"

"글쎄. 아무래도 너나 나나 이야기 쓰는 사람이니까. 더 공감하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로맨스 조가 술 취해서 '왜 우리는 이야기를 해야만 합니까? 이야기가 없는 나는 왜 죽어야 합니까?'라고 말하는데 그게 서늘하게 와 닿더라. 소설 못 쓰고 있는 소설가인 내 처지 같아서 그런가."

"새끼야 너도 연애를 좀 해봐. 로. 맨. 스. 응? 나처럼."

승훈이 보란 듯이 혜선의 허리를 감는다. 혜선이 나를 보고 빙긋 웃는다.

 

 

 

"저는 예전부터 로맨스 조의 첫사랑인 초희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혜선이 허리에서 승훈의 팔을 벗겨내며 말했다. 나는 물었다.

"왜요?"

"로맨스 조의 평생의 이야기 속 주인공인 여자일거 아니에요. 반복되고 변주되는 신화적인 존재요. 멋지지 않나요?"

승훈이 코웃음을 쳤다.

"그거 안 좋을 수도 있어. 우리 대문호님도 첫사랑 얘기 많이 썼는데 말이지. 그 친구가 자기 얘기 쓰지 말라고 욕을 했어. 그치?"

"응. 그랬지. 소설을 읽으면 자기 추억이 좀비처럼 느껴진다나? 죽지도 살지도 못한 그런?"

술을 꽤 마셨는지 혜선의 얼굴이 붉었다. 혜선이 맥주캔을 입에 갖다 대고 눈을 끔뻑이다가 말을 꺼냈다.

 

 

"근데요. 두 분은 왜 이야기를 해요?"

맹랑한 질문이다. 그녀는 답변을 기다리며 입을 삐죽거린다. 인터뷰 할 때면 늘 받는 질문이면서도 항상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니까 이렇다 저렇다라고 확실히 말하기 찝찝하달까. 뭐라고 말해도 확실하지가 않고, 생각할수록 멀어진다. 승훈이 먼저 입을 연다.

 

"허세지. 뭐. 난 그냥 멋있어 보이려고 하는 거야. 크크. 그게 아님, 토끼를 좇아가는 엘리스처럼 이상한 환상에 속아 넘어가서 이야기의 세계에 빠져 버렸달까? 로맨스 조처럼."

나는 잠시 앓은 소리를 내며 골몰하다가 말을 뱉었다.

"글쎄요. 옛날엔 알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내가 왜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요?"

뭐였더라 소설을 처음 쓰게 된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한 글자도 못 쓰고 있는 걸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을 보았다. 한강이 빛을 반사하며 울렁거렸다.

 

그때 정적을 뚫고 핸드폰이 울렸다.

띵-동-.

 

[소방방재청]

긴급재난알림.

현재 서울 북부에서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전염병이 돌고 있음.

위험지역대피, 외출자제 등 안전에 유의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