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 먹는 좀비]

05. 그것만이 내 세상, <더 레슬러>

 

 

"오늘 오전 6시를 기해 우리나라가 태풍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기상캐스터가 개운한 표정으로 날씨를 전한다. 창밖을 보니 날씨는 여전히 찌푸려있다. 부산에서 따라 올라온 태풍은 사흘을 머물다 갔다. 가을 태풍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강한 비바람으로 서울 이곳저곳도 피해를 봤다고 한다. 유리창이 깨지고 간판이 날아갔으며, 가로수가 뽑히고, 벽이 무너졌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밖은 너무나 조용하다. 그 거대한 거친 소용돌이는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사라져버리는 걸까….

나는 사흘 내내 외출하지 않았다. 오랜만의 여행이 힘들었는지 그저 집에만 있고 싶었다. 승훈은 사흘 내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 시나리오 좀 쓰려고. 며칠 나갔다 올 테니까. 집 잘 보고 있으셔요오-."

"그래? 어디 가는데?"

"몰라, 안 가르쳐 줄 거야. 내 얘기 홀랑 뺏어서 소설 쓰면 어쩔라고. 크크. 나 간다-."

 

오랜만에 혼자 있는 시간은 나쁘지 않았다. 몇 편의 영화를 보았고, 소설 구상도 조금 했다. 안타깝게도 소설가다운 시간활용은 거기까지였지만.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승훈의 DVD장 한 편에 꽂힌 만화책을 보는데 썼다. 유리창이 깨지고 간판이 날아가고 가로수가 뽑히고 벽이 무너지는 동안 나는 태평하게 만화책을 넘겼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사흘이 지났고, 어느새 마지막 권만을 남겨두고 있었고, 어느새 태풍은 어디론지 떠나버렸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지만, 어찌됐든 마지막 권은 읽어야 한다. TV를 끄고 소파에 누워 마지막 권을 펼치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승훈이었다. 사흘 만에 사람을 보니 지겹게 보는 승훈이 놈도 반가웠다.

"나 왔어. 작가양반. 아침부터 뭐하시나?"

"어어, 왔어? 뭐하긴, 소설가답게! 독서 중이지."

"오, <슬램덩크>라…. 짜식. 안목이 있군."

"오랜만에 다시 보는데, 이거 진짜…"

"그래그래, 알아. 네 소설보다 억만 배는 재밌는 거."

승훈이 불쑥 일어나 거실 등을 끈다. 집이 밤처럼 깜깜해진다.

 

 

"이 새끼가! 야, 책 안 보여. 불 켜."

"그건 나중에 보고 영화나 하나 보자. 혜선이가 나보고 꼭 보라더라…."

날씨 탓인지 오랜만이라서인지 모르겠지만 승훈이 어쩐지 낯설어진 느낌이다. 표정도 말투도.어둑한 방에서 승훈의 표정을 살펴본다. 새끼, 무슨 일이 있었나?

 

"지금 보자고? 혜선 씨가 추천했다고? 뭔데?"

"음- 여기 있다. <더 레슬러>. 아직 안 봤거든."

"아, 미키 루크 나오는 영화 맞지? 나도 안 봤어."

 

우리는 아침부터 맥주에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 시작과 함께 헤비메탈이 흘러나온다. 승훈은 리듬에 맞춰 머리를 까딱이며 휴대폰을 확인한다. 승훈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다. 나는 승훈에게 말을 붙여본다.

"감독이 대런 아로노프스킨가? <블랙 스완> 정-말 좋았는데."

"좋았지- 아주- 좋았지-. 그나저나… 미키 루크 엄청 늙었네. 참."

승훈은 미키 루크가 맥주를 들이키는 장면에서 함께 술을 들이마신다.

 

 

80년대 최고의 레슬링 스타인 랜디가 이제는 노쇠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경기를 한다. 랜디가 경기를 끝내기 위해 3단 로프에 오른다.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는 어쩌면 저 점프를 뛰고 죽을 수도 있다. 의사는 그의 심장이 이젠 레슬링을 버틸 수 없다고 했다. 그의 표정이 보인다. 슬픔인지, 환희인지, 회한인지, 만족인지 모를 무엇으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결국, 점프.

영화는 거기서 끝났다. 크레딧이 올라가고 노래가 흐른다.

 

'재주 하나 잘 부려 한 때 잘 나가던 놈- 환호소리에 취해 그 맛에 살았다네-.'

 

승훈과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밖은 더 어두워져 있었다. 태풍은 아직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다시 비를 뿌리고 있었다.

 

 

미키 루크는 80년대 최고의 꽃미남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사춘기 시절 친구들과 좋은 거라며 몰래 보았던 영화 <나인 하프 위크>에서의 그의 우수에 찬 눈빛과 관능에 취한 몸짓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러나 그 섹시했던 남자는 이후 성형부작용과 약물중독, 복싱선수로의 외도, 스캔들로 무너져갔다. <더 레슬러>는 미키 루크의 실제 삶과 영화 속 랜디의 삶이 겹치며, 영화 밖까지 이야기를 확대하고 있었다. 젊음과 영광이 있던 과거와 망가져만 가는 현재의 삶. 비참한 바깥세상과 화려한 무대 위 세상. 그 속에서 과연 무엇을 자신의 세상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에겐 지금 눈앞에 있는 세상이 아닌, 다른 어떤 곳이 자신의 세상이기도 하다. 랜디에겐 레슬링 무대만이 오직 자신의 세상이었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소설 밖의 세상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어쩌면 나는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만 쓰게 될지도 모른다. 지난 2년간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소설은 이미 레슬링처럼 한물 간 장르인지도 몰랐다. 그래, 어쩌면 나도 랜디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승훈이 입을 열었다.

 

"야, 룽. 넌 <슬램덩크> 걔네가 지금쯤 뭐하고 있을 것 같냐?"

"응?"

"20년이 지났잖아.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걔네들 뭐하고 있을 거 같냐고."

뭐하고 있을 것 같냐고? 영화를 본 뒤라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누군가는 열정이 식어버렸을 거고, 누군가는 실패했을 테고, 누군가는 또 성공했겠지…. 그런데 <슬램덩크> 결말이 뭐였더라….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우승을 했던가? 졌던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뭐,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겠지. 가끔씩 '우리 고딩 때 참 좋았지'하면서 술 한 잔 하는 배나온 아저씨들 됐으려나."

"한 명도 농구 안 하고 있을라나?"

"뭐, 농구를 계속 했대도 지금은 은퇴했겠지. 다…."

승훈은 입을 꾹 다문다. 나는 결국 평소와 다르게 우울한 승훈을 참지 못하고 쏘아 붙였다.

"야, 너 근데 오늘 왜 그러냐? 3일 만에 들어와서는 왜 장마철 널어놓은 빨래처럼 꿉꿉한 건데? 나까지 기분 안 좋아지게."

승훈은 대답 없이 맥주를 연거푸 들이킨다.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 더 답답해진다. 비 맞는 한강을 바라보며 승훈은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넌, 이 영화가 어떤 거 같냐? 너는 랜디가 안쓰럽냐?"

"안쓰럽냐고? 그냥 무섭다. 나도 글 못 쓰게 될까봐."

"나는 말이야…, 랜디가 부럽다. 랜디는 링에서 엄청난 환호를 받아봤잖아. 최고의 스타였고. 그래, 그래서 지금이 더 불행한 거겠지. 근데, 난 링에서 환호를 받아본 적도 없어. 씨팔, 나는… 그 불행마저도 존나 질투가 나더라니까. 이해가 되냐, 작가양반? 근데 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한심하고…."

"야, 또 뭔 소리야. 네가 나보다 잘 살고 있잖아. 난 집도 절도 없이 얹혀사는데, 넌 집도 이렇게 좋고, 좋은 차도 있고, 뭐가 부족해…"

"아, 씨팔! 잘 산다, 잘 산다. 그 얘기 좀 그만해. 넌 내가 집 있고 차 있고 집안 부자니까 잘 사는 거 같아? 그래서 넌 내가 걱정도 없고 행복해보이냐고. 네 눈엔 내가 생각 없는 한량 같지? 너도 똑같아. 새끼야. 가난한 예술가? 씨팔. 예술가는 잘 살면 안 되냐? 어?"

위로랍시고 한 내 말이 실수였다. 승훈의 뇌관을 건드리고 말았다.

 

"왜 이래. 야, 그래 내가 미안. 갑자기 너 왜 그래? 평소답지 않게."

승훈이 옷을 챙겨 입고 일어섰다. 성큼성큼 발을 옮기더니 가방을 챙겨 나갈 채비를 한다.

"야, 룽. 넌 혜선이가 나한테 이 영화 왜 꼭 보라고 한 것 같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승훈을 바라보았다. 승훈의 표정이 꼭 랜디의 복잡한 표정과 닮아 보인다.

 

"나, 혜선이랑 헤어졌다."

"야, 그게 무슨 소리야?"

"며칠 나갔다 올게."

 

쾅-. 현관문이 닫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행복에서 추락한 사람, 행복을 가져보지도 못한 사람, 이건 내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넌 행복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 불행마저도 질투하는 사람. 대체 누가 더 행복하고 누가 더 불행한 걸까…. 정말 모르겠다.

나는 다시 <슬램덩크> 마지막 권을 집어 들었다. 어느새 비마저도 그쳐있었다. 나는 책장을 넘긴다. 그 거대하고 거친 태풍은 정말이지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BY  룽  

영화와 음악, 책을 사랑하고픈 기자지망생. 

행복과 항복 사이에서 글을 쓰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