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 먹는 좀비]

08. 삶의 모토,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자자- 짠! 오늘은 내가 쏜다. 이 대감독님께서 말이지."

목청껏 소리를 내지르는 승훈의 얼굴이 벌써 벌겋다. 옆자리의 혜선이 목소리 좀 낮추라며 승훈의 어깨를 꾹 누른다. 나도 괜히 돌아보며 고기집 손님들의 눈치를 살핀다. 2013년 마지막 날이라서인지 꽉 들어찬 손님들은 승훈의 외침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태연히 술잔을 부딪고 고기를 뒤집었다.

승훈이 놈이 이렇게 신난 건 그토록 바라던 일이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전에 들었던 승훈의 시나리오가 한 영화사의 눈에 들었고, 일이 꽤 빠르게 진행되면서 계약까지 성공한 것이다. 영화 쪽 일이라는 게 잘 진행되다가도 언제든 엎어져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것이지만, 승훈이 놈 어쩐지 이번엔 자신만만해 보였다.

"이번엔 확실하다니까. 대표님이 딱 보시더니 내 손을 잡고 '우리 아카데미 한 번 가보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야, 이건 내가 썼지만 정말 딱 봐도. 그냥, 크아-"

"오빠, 설레발은 하여튼."

 

혜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큭큭 웃는다. 못 살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혜선은 종종 저런 포근한 웃음을 짓고는 하는데 나는 그때마다 이상하게 엄마가 떠올랐다. 포근하고 따듯한 기분. 나는 그 웃음을 오래도록 쳐다보고 싶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여자들에겐 엄마와 같은 무언가가 있는 걸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승훈이 병원에서 풀려난 뒤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승훈의 방공호는 그러니까 혜선이었다. 둘 사이의 문제에 혹시 내가 끼어있는 걸까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역시 물어볼 순 없었다. 하지만 내가 끼어있다면 과연 어떤 식으로인 것인지,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저 그런 느낌이었다. 어쩐지 씁쓸하고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 적당히 좀 해라. 적당히. 누가 보면 무슨 천 만 관객 달성하고 칸, 베니스, 아카데미까지 휩쓸었는지 알겠다."

"곧 그럴 건데, 연습 좀 해놓는 셈 치지 뭐. 흐흐- "

"오빠, 우리 곧 가야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아, 맞다! 야, 룽. 혜선이랑 나랑 그 영화사에서 하는 송년파티 가야하는데 너도 같이 갈래? 이참에 영화인들이랑 안면도 좀 트고 그래."

"그래…? 아냐, 뭐 나도 곧 가야돼. 나도 약속이 있어서."

"오호? 약속? 오오케이- 그래 그럼. 잘 놀고 내년에 보면 되겠네. 가자 그럼."

어쩐지 둘이 꽤 멀끔하게 차려입고 왔다 했더니 따로 약속이 있었다니. 대체 저런 옷차림을 하고 뒤에 약속이 있는데도 왜 고깃집을 오는 걸까 저 둘은…. 하여간 둘 다 사람 헷갈리게 하는 데엔 뭔가 있다.

나 역시 실은 작가모임이 있긴 했지만 글을 전혀 못 쓰고 있는 상태라 나가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승훈과 혜선, 둘과 함께 2013년 마지막 밤을 보내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결국 혼자 남게 되다니. 그렇게 조금 우울해져서 나는 고깃집을 나섰다.

 

 

"룽. 우리 먼저 간다 그럼! 이따 집에서 봐."

"그럼, 룽 씨. 새해엔 편식하지 마시고요. 저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고 멋진 소설 써주세요. 자- 이거요."

혜선이 조그만 손에 쥐고 있던 걸 나에게 주었다. 손을 내려다보니 거기엔 하얀 박하사탕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외로운 사탕을 얼른 입으로 집어넣고 멀어지는 승훈과 혜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싸한 박하향이 입 안에 퍼졌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서 영화관으로 갔다. 때마침 시간이 맞는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 딱 새해가 될 그런 타이밍이었다. 이렇게 맞는 새해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알 수 없는 제목의 영화였다. 표를 끊고 기다리는 동안 검색해본 영화의 카피가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해본 것 없음, 가본 곳 없음, 특별한 일 없음! 아직도 상상만 하고 계신가요?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그 순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영화는 일 년을 마감하고 시작하기엔 꽤 좋은 작품이었다. 보고 나서야 아주 예전에 읽었던 제임스 서버의 소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를 영화화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소설을 읽을 때도 영화화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는데, 이정도면 나름대로 잘 영화화한 작품이지 않을까 싶었다.

 

 

월터는 ‘라이프’지에서 포토에디터로 수년째 일하고 있는 남자다. 영화의 카피처럼 그는 해본 것도, 가본 곳도, 특별한 일도 없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바로 상상하기인데, 상상에 빠지면 누가 말을 걸어도 모를 정도다. 상상 속에서만큼은 월터는 영웅이 되고, 모험가가 되고,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된다.

어느 날, 그의 평생 직장이던 ‘라이프’지는 폐간하게 되고, 그는 잡지의 마지막 호를 준비한다. 그런데 전설의 사진작가 션 오코넬이 보내 온 자신의 생애 최고 걸작이라는 사진. 바로 25번째 사진. 표지 사진으로 써달라는 그 사진이 사라진다. 그 25번째 사진을 찾기 위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연락도 되지 않는 션 오코넬을 만나러 월터는 길을 떠난다. 당연하게도 그는 그 여행을 하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해본 것 많고, 가본 곳 많고, 특별한 일 많은 인생이 된 것이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들은 저마다 함께 온 사람에게 말을 뱉어내며 걸어 나갔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새해가 되기 정확히 10분 전이었다. 나는 다가올 새해는 어떤 1년이 될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조금 다른 한 해가 될 수 있을까? 월터의 삶을 바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진을 찾지 못하면 직장에서 쫓겨날 거라는 압박감? 좋아하는 여자에게 멋져 보이고 싶었던 마음? 직접 얼굴을 보고 싶었던 전설의 사진작가에 대한 동경? 그런 것들 때문이었을까.

새해 5분 전의 거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집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주머니 속에 동전을 만지듯 나는 걸어가며 영화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나의 새해 모토도 라이프지의 모토를 따라볼까….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라는 거창한 모토. 그 모토를 되뇌고 나니 어렴풋이 내가 소설을 왜 쓰게 되었는지가 떠올랐다. 혜선이 물었을 때 답하지 못했던 바로 그것.

 

 

그래, 그거였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러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그래서 나는 썼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썼던 게, 그것 때문이었다. 왜 이제야 생각났을까.

 

시계는 이제 11시 59분이었다. 새해가 1분 전이었다. 어쩐지 1분 뒤부턴 소설을 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래된 어린 시절의 일기장을 보고 옛 기억이 떠오르듯 처음 소설을 끄적이던 날들부터 좋아하던 작가들의 책을 필사하던 밤, 첫 소설책이 나오던 날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얼른 달려가 밤이 새도록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곤 션 오코넬의 대사를 떠올렸다.

 

"어떤 때는 안 찍어. 아름다운 순간이 오면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 그래, 바로 저기 그리고 여기."

 

 

초침이 막 12를 지나 1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띵-동-

 

혹시, 제 묵주팔찌 가지고 계시지 않나요?

 

나에게 정말 새로운 1초가 시작되고 있었다.

 

 


 

BY  룽  

영화와 음악, 책을 사랑하고픈 기자지망생. 

행복과 항복 사이에서 글을 쓰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