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 먹는 좀비]

09. 결국 몸, <월드워 Z>

 

 

밤은 어딘지 사람의 무언가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그래서 그 밤에 사람들은 저마다 일기장을 끄적이고, SNS에 흔적을 남기고, 용기 내 연락해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간밤의 알 수 없는 풍성함들은 어쩐지 허세스럽고 창피하고 감추고 싶은 민망함으로 바뀌어 있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나의 새해 첫날 새벽도 그랬다. 어떤 알 수 없는 풍부함이 그날 밤은 더욱 가득했다. 새해 첫날이었고, 거리는 고요했고, 눈은 거리에 엎드려 새근새근 자고 있었고, 투명할 만큼 깨끗하고 찬 바람이 불었던 밤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떠밀었고, 나는 소설을 썼던 이유를 찾았다. 아니,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혹은 불행하게도 그건 그 밤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자고 일어나니 아득해진 꿈결 속 로또번호처럼 '소설을 썼던 이유'라는 것은 뿌옇게 희미해졌다. 그런데도 마치 꿈속에서 본 숫자를 정확히 떠올리기만 한다면, 로또에 반드시 당첨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처럼, 나는 간밤에 내가 떠올려 냈던 그 '소설을 썼던 이유'라는 것을 이리저리 짜 맞춰 보고 있었다. 그 문장만, 그 이유만 정확하게 떠올린다면 반드시 다시 힘차게 소설을 써낼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나를 휘감았다.

 

고민과 고민 끝에 고고학자가 유골을 발견하듯 조심스럽게 '소설을 썼던 이유'를 발굴해낼 수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마음 속의 잊혀진 제국의 성터를 확인하는 일이었고, 이미 그 제국은 되살아날 수 없었다. 그건 그러니까 발굴된 것이었고, 떠올려진 것이었고,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린 것이었다. 그걸 찾아낸들 지금의 나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깨어난다고 해도 그건 마치 죽은 시체가 살아 돌아다니는 좀비 같은 거였으리라. 소설을 '썼던' 이유였지 내가 지금 소설을 '써야만 하는' 이유가 아니었으니까.

지금 내가 소설을 써야하는 이유를 찾는 것, 그걸 위해선 고고학자가 아니라 탐험가여야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새로운 무엇을 찾는 것, 눈앞에 있는 생생한 질량과 부피와 색과 향을 찾는 작업.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그것이었다.

 

 

"결국, 몸 아닌가요?"

 

혜선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니지. 정신이지. 좀비는 정신이 죽어있고, 몸만 살아있는 거야."

승훈이 혜선의 말에 반박했다.

함께 저녁을 먹은 우리의 대화주제는 새해다짐을 지나 작년에 본 영화들이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작년 여름 즈음 개봉한 좀비영화 <월드워Z>에 이르러 있었다. 소설이 억만 배는 좋았다는 승훈의 평, 나름 그 정도면 드라이하게 잘 뽑아낸 좀비영화라는 나의 평, 브래드 피트가 이제 할아버지로 보인다는 혜선의 평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혜화동 통제구역에 대한 소문을 넘어 자기가 봤던 할아버지가 좀비였을지도 모른다는 승훈의 음모론을 넘어 이제 대체 좀비란 무엇인가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야, 룽 너는 어떻게 생각해? 좀비는 몸이 죽은 거냐 정신이 죽은 거냐."

승훈과 혜선이 자기 의견에 동의해달라는 듯한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음, 나의 의견으로 판결이 나는 건가?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한 번 각자 날 설득해봐."

"아이 참, 이건 간단한 문제야. 몸은 움직이고 있는데 통제를 못 하잖아 그리고 아무 것도 못 알아보고 생각도 못 하고 그러니까 정신이 죽어있는 상태인 거지. 좀비는 마치 식물인간이나 치매환자 같은 거야."

"아니야 오빠. 좀비는 몸을 통제하고 있다니까. 저 사람을 물어뜯어야겠다고 생각도 하고 사람인지 좀비인지 다 알아보잖아. 그러니까 그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알아보고 몸을 통제하는 거야. 식물인간이나 치매환자도 그런 거고. 그리고 좀비 몸은 심장이 멈추고 호흡도 안하고 섞어가니까 죽은 게 맞지. 어때요? 룽 씨. 제가 더 맞는 거 같죠?"

 

 

"결론이 났습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엔요…"

"나지 뭐."

"조용히 해봐. 오빠."

둘이 싸우는 모습이 재밌어서 더 놀아주고 싶었는데 마침 나에게도 그렇다 싶은 대답이 떠올랐다. 애초에 답이 있는 얘기도 아니었겠지만.

 

"내 생각엔 둘 다 틀린 거 같은데. 그러니까 좀비는 몸은 죽지 못했고, 정신은 살지 못한… 그런 거 아닐까?"

"에이, 뭐에요 그게."

"그러니까, 왜 갑자기 다른 대답을 해. 임마."

나는 금세 실망하는 표정이 된 둘을 바라보며 웃었다. 둘이 어딘지 비슷하다는 걸 승훈과 혜선 서로는 알고 있을까. 취향이나 성격을 떠나서 둘이 가진 어떤 생생한 질량과 부피와 색과 향이 어딘지 비슷하다는 걸.

다시 밤이 찾아오고 있었고, 다시 무언가 풍부해지는 시간이 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브래드 피트는 너무 일하는 것 같더라. 자기 직장에서 상사가 시킨 일을 그냥 하는 그런 느낌이었어. 자기 가족은 안전한 데에 있고 그저 혼자 돌아다니잖아. 그래서 드라이하긴 하지만 그래서 이 영화가 좀비 영화론 별로였어."

"오오케이- 네 말이 맞다. 작가양반. 좀비 영화의 핵심은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좀비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거지. 어떻게 그게 안 나올 수가 있지."

승훈이 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가장 소중한 사람이 좀비가 되면요?"

 

혜선이 그 특유의 티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런 목소리로 물어오는 질문은 대답하지 않으면 아주 나쁜 짓이 될 것만 같은 무언가가 있다. 떠보려거나 의중을 알아내려는 어른의 질문이 아닌 꼬마아이들의 그것 같은 그저 순수한 물음. 그러니 답할 수밖에.

"어쩌겠어. 슬프지만 적어도 내 손으로 생을 마감시켜 주는 게 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승훈은 말을 마치고 입을 꾹 다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지금 바로 옆에 좀비가 된 연인을 두고 마지막 결정을 내린 사람처럼 어쩐지 비장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흠. 역시 그런가? 룽 씨는요?"

"…글쎄요. 저건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니야. 절대 그럴 수 없어. 라고 생각은 할 것 같아요. 하지만… 내 몸도 그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그건 전혀 다른 문제일 것 같은데요? 어쩌면 저는 죽이지는 못 할 것도 같네요."

 

"하긴… 생각이 몸이 되는 건 전혀 다른 거죠. 제 머릿속엔 엄청난 생각들이 있을 텐데 그건 생각일 뿐이잖아요. 그러고 보면, 생각들 중에 아주 몇몇만 살아서 몸이 되는 것 같아요. 나는 글을 쓰고 싶지만 그 생각은 몸이 되지 못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금방 몸이 되어서 아르바이트를 다니거든요. 올해는 꼭 하루를 일찍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미 20여 년간 일찍 시작해서 뭐하냐는 생각이 몸이 되어버려서 어쩌지 못하고 있고요."

"그래, 금연은 정말이지 몸이 되지 않더라. 아아-"

승훈이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하고는 머리카락을 뜯는다.

 

 

생각이 몸이 된다. 나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일지 문장의 몸을 해부하고 싶어졌다. 불현듯 김수영 시인의 말도 떠오른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온몸으로 하는 것이라던 그 말. 어쩌면 그 몸이 이런 뜻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애써 찾아낸 '소설을 썼던 이유'라는 것이 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결국 몸인 거였나….

생각은 다시 번져 이현에게로 향했다. 새해 첫날밤 나는 이현과 통화를 했다. 문자와 달리 통화는 몸으로 하는 거였다. 입을 열고 성대를 떨어 소리를 내고, 그것이 다시 고막을 떨리게 하는 것. 이현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나는 집으로 걸었다. 피가 기분 좋게 머리끝에서 발끝을 돌아 다시 머리로 돌아오는 상쾌한 순환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네, 어쩌다 보니 제가 현이 씨 묵주팔찌를 가지고 왔네요.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연락을 못 드렸네요. 그럼 제가 그거 찾으러 가도 될까요?"

"부산에서 너무 멀지 않나요? 제가 그냥 택배로 보내드릴게요. 그게 나을 것 같은데."

"아, 괜찮아요. 저 마침 서울 올라갈 일이 있어서요. 다음 주에 뵐 수 있죠…?"

거리에 쌓인 눈을 꾸득꾸득 밟으며 나는 바다를 떠올렸다. 파도소리와 바람, 고운 모래. 현의 묵주팔찌와 하이힐이 온몸을 돌아 머리로 순환하는 피와 함께 또렷하게 그려졌다.

"네, 뭐 저는 일이 없으니까요. 언제든지요."

 

수화기 너머로 현이 슬며시 웃는 소리가 들여왔다. 그 숨소리는 안개가 걷히듯 천천히 나를 현과 키스하는 시간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 생생한 질량과 부피와 색과 향 그리고 온기를 내 몸은 느끼고 있었다. 추워서였을까 통화 때문이었을까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날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몸인 거였나.'하고 말이다.

 

 

"오빠, 주머니 봐봐. 담배 있지? 끊기로 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래. 내놔."

"뒤져봐. 없다니까. 그냥 생각이 난다는 거지. 안 피웠어."

승훈과 혜선이 담배를 놓고 실랑이를 벌인다. 담배를 피우려는 승훈과 뺏으려는 혜선이 엎치락뒤치락 한다.

 

내일이면 현을 만날 수 있다. 현도 기억할까. 아니 혹시 느꼈을까. 몸의 떨림을.

뭐가 됐든, 가보면 알겠지.

 

"있네. 여기 담배! 몸이 아파야 말을 듣지. 응?"

혜선이 승훈의 등짝을 퍽하고 때린다.

"아야아아-!"

 

내일 아침이면 또 민망해질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무언가 풍성한 느낌이 드는 기분 좋은 밤이다.

 

 


 

BY  룽  

영화와 음악, 책을 사랑하고픈 기자지망생. 

행복과 항복 사이에서 글을 쓰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