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 먹는 좀비]

10. 액션보다 리액션, <시작은 키스>

 

 

집을 나섰다. 오후의 겨울공기가 청량하게 뺨에 닿았다. 햇빛은 쨍하게 앙상한 나무와 녹지 않은 눈 위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맑은 겨울의 공기는 저절로 사람을 신선하게 만드는 것만 같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았다. 얼어버릴 것처럼 차갑게 만든 보드카를 스트레이트로 꼴깍 넘기는 듯했다. 무색무취의 차가운 취기에 몸이 얼었다가 이내 달아올랐다.

현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외출하기 전 거울 앞에서 한참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그러느라 정작 챙겨야할 팔찌를 깜빡할 뻔 했다. 거울이라는 건 신기한 것이었다.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을 나 스스로 볼 수 있다는 것. 모르긴 몰라도 그것은 인류의 사고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나는 머리를 툭툭 털며 거울을 보았다. 문득 거울이라는 건 나를 보도록 만든 것인지, 사실은 나를 바라보는 남들을 보도록 만든 것인지 궁금해졌다.

 

"윽! …아야야야…."

 

쾅하는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앓는 소리가 들려왔… 아니,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런저런 생각에 부풀어 걷다가 빙판길에서 제대로 넘어진 것이었다. 넘어진 내 옆으로 사람들이 빙판에 넘어진 나를 흘끗 보고는 뒤뚱거리며 지나갔다. 아, 지금, 바로 지금 거울이 있다면 내 모습이 어땠을까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거울 따위가 없어도 나를 보는 사람들의 리액션만으로 상당히 우스운 표정과 몸짓이었을 거라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때론 액션보다 리액션이 그것을 더 잘 보여줄 때가 있다.

현은 혜화동의 통제구역 바로 건너 편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아직 내부 인테리어 공사가 채 끝나지 않은 모습의 카페였다. 여기가 약속장소가 맞나 싶어 꾸물거리고 있는데, 현이 카운터에 서서 웃고 있었다. 하얀 목폴라 니트를 안에 입고 오버사이즈의 검은색 롱코트를 걸친 현은 이미 배우이긴 하지만, 정말로 '배우' 같았다.

 

 

"주문하시겠어요?"

"네?"

"뭐 안 마시실 거예요?"

"음, 아, 네… 그러니까 저는 따듯한 아메리카노…요."

"네에- 앉아계세요."

"계산은요?"

"제가 쏘는 거예요. 첫 손님이니까."

 

나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눈치를 보며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무언가 생각과는 다른 분위기에 나는 좀 전에 넘어진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미신 같고 결과론적인 얘기여서 잘 믿진 않지만 때때로 인생은 정말 복선과 암시를 보여주기도 하니까. 아직도 얼얼한 엉덩이를 슬쩍 주물러 보았다. 역시 팔찌만 주고가면 되는 거였던 건가… 나를 만나려고 온건 아니었던 건가….

카페는 나무로 만든 집의 오래된 다락방처럼 아담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이곳저곳에 인형과 장난감, 향초가 놓여있었고 벽엔 영화와 연극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어서 해놓은 듯한 그런 것들이었다. 잠시 뒤 현이 자기 얼굴 만한 커피 잔을 들고 와서 내 앞에 앉았다.

 

"오랜만이에요. 작가님. 잘 지내셨어요?"

"네, 그런 것 같네요. 하하, 근데 여기 뭔가요?"

"여기, 제 카페예요. 놀라셨죠? 다음 주면 정식으로 문 열거에요."

"예쁘네요. 카페. 커피도 맛있고요."

"그렇죠? 그럼 구경 좀 해보실래요? 비밀공간도 있거든요. 맘에 드실 거예요."

 

 

카페 한 쪽엔 지하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있었다. 현과 나는 얼굴 만한 머그컵을 들고 나무계단을 내려갔다. 현에게선 오늘도 또각또각하는 하이힐 소리가 났다. 혹여나 또 넘어질까 조심조심 내려간 그곳엔 카페와는 다른 새로운 공간이 있었다. 한 쪽 벽면엔 무대처럼 단이 놓여있었고 무대 쪽으로 빔 프로젝터가 설치돼있었다. 그리고 무대 쪽으로 향해 있는 몇 개의 소파는 마치 커다랗고 게으른 개가 웅크리고 낮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짜잔- 제 카페의 비밀공간! 지하극장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극장주인까지 된 건가요?"

"네, 여기서 상영을 많이많이 할 생각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로만요."

"자주 놀러와야겠네요. 무슨 영화 좋아하는데요?"

"음…… 좀비영화?"

"조그만 지하극장에서 좀비영화라, 잘 어울리네요."

"시간 괜찮으시죠? 첫 손님이니까, 첫 상영회도 같이 해요."

 

조그만 리모컨으로 현은 불을 끄고 프로젝터를 켰다. 지하라서 불을 끄면 암실 같았다. 현은 내 옆에 앉았다. 소파는 둘이 앉기에 딱 맞는 크기였다. 극장이나 산책이나 드라이브가 데이트로 선호되는 이유는 어쩌면 이렇게 나란히 남녀가 있을 수 있기 때문 아닐까 싶다. 나란히 있으면 서로를 의식한 리액션이 아니라 본래 그 사람의 자연스러운 리액션을 훔쳐 볼 수 있다. 그건 마주보고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도록 한다.

 

"무슨 영화예요?"

"무슨 영화겠어요? 당연히 좀비영화죠."

 

현은 화면을 바라보며 더 깊숙이 소파를 파고들었다. 목폴라를 입술까지 끌어올리는 그녀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하지만 좀비영화라니, 호감 있는 이성에게 여자가 틀어줄만한 영화는 아니었기에 나는 체념하고 커피를 꿀꺽꿀꺽 삼켰다.

 

 

한 여자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화면으로 영화는 시작했다. 묘한 배경음에 또각거리며 걸어가는 여자의 가녀린 뒷모습은 어쩐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곤 카메라가 여자의 앞모습을 담았을 때 나는 놀랐다. 오드리 토투였다. 오드리 토투가 좀비영화를 찍었단 말인가? 의심하고 있었는데 이내 멋지게 생긴 남자와 오드리 토투가 키스를 하며 제목이 뜨고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의 제목은 <시작은 키스>였다. 현은 양손으로 코까지 목폴라를 당겨 올리고 있어서 눈빛만 보였는데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오드리 토투가 나오는데 당연히 그렇겠지 싶겠지만 그녀보다 남자 주인공이 더 사랑스러웠다. 오드리 토투가 연기한 나탈리는 맨 처음 나왔던 멋지게 생긴 남자와 결혼한다. 하지만 사고로 남편을 잃고 마음의 문을 닫고 워커홀릭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나탈리는 자신도 왜인지 모르게 부하직원 마르퀴스에게 충동적으로 키스를 퍼붓게 된다. 그는 대머리에 불규칙한 치열, 멍한 눈빛, 어기적거리며 걷는 못생긴 남자다. 그러나 마르퀴스의 귀엽고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은 나탈리를 편안하게 웃게 만든다. 이 섬세하고 매너있고 따듯한 남자에게 나탈리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많은 사랑영화들이 액션영화도 아닌데도 현란한 구애와 어긋남의 액션을 눈 아프게 선보인다. 하지만 좋은 사랑영화는 구애와 어긋남의 드라마틱한 액션이 아니라, 서툴고 심심한 액션을 선보이고 섬세하고 사려 깊게 그들의 리액션을 담는다. 사랑은 원래 액션보다 리액션이 중요하다. <시작은 키스>는 그걸 아는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도 현은 불을 켜지 않았다. 우리는 한참을 지하극장에 그렇게 나란히 앉아 있었다. 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작게 메아리가 쳤다.

"좋죠? <시작은 키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코트 주머니에서 묵주팔찌를 꺼냈다.

"이거요. 기억이 안 나네요. 왜 제가 이걸 가지고 왔는지. 미안해요."

"…전혀 기억 안 나세요?"

"음… 네."

"전혀요? 실망이네요. 참."

"그게 제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래도 조금 기억나는 것도 있긴 한데…"

"그거 제가 행운의 묵주팔찌라고 작가님 빌려드렸던 건데. 소설 팍팍 쓰실 수 있게 될 거라고. 에이 이거 뭐 기억이 안나니 효과도 없었겠네."

"아, 그런 거였구나."

 

현이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리액션이었다. 나는 어떤 리액션을 하고 있을까. 현에게 어떻게 보여지고 있을까.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마 거울이 있었다고 해도 그 리액션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현이 하이힐 앞코를 툭툭 부딪치며 딴소리를 꺼냈다.

 

"근데… 저 솔직히 작가님 소설 하나도 안 읽었어요."

"원래 제가 읽은 사람보다 읽은 척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작가거든요. 괜찮아요."

"그래서 앞으로 나오는 소설부터 읽어보려구요."

"언제 나올 줄 알고요?"

"여기 어때요? 제 카페 오셔서 소설 쓰실래요? 그렇게 읽어보면 안 되나?"

"으음…"

 

갑작스러운 제안이어서 당황스러웠다. 아주 마음에 드는 공간이긴 하지만… 대체 어떤 의미인 걸까. 나는 방금 본 영화의 제목을 되뇌었다. 시작은 키스, 시작은 키스, 시작은…

 

빔 프로젝트마저 꺼지고 지하극장은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였다. 현의 옆모습이 흐릿해진 크로키처럼 경계가 모호하게 보였다. 톡톡 하이힐 앞코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흐릿한 크로키에게로 조금씩 다가갔다. 그래, 시작은 키스.

그렇게 현의 입술에 입술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 뒤 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말했다.

 

"네, 여기서 쓸게요. 이번엔 제정신입니다."

어둠 속에서 작게 메아리가 울렸다.

 

 


 

BY  룽  

영화와 음악, 책을 사랑하고픈 기자지망생. 

행복과 항복 사이에서 글을 쓰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