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왕 (2011)

The King of Pigs 
8.7
감독
연상호
출연
양익준, 오정세, 김혜나, 박희본, 김꽃비
정보
애니메이션, 스릴러 | 한국 | 96 분 | 201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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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부도 후 충동적으로 아내를 살해한 경민(오정세 분)은 자신의 분노를 감추고 중학교 동창이었던 종석(양익준 분)을 찾아 나선다. 소설가가 되지 못해 자서전 대필작가로 근근히 먹고 사는 종석 역시 내연녀와 싸우고 집밖에 나오고 15년 만에 찾아온 경민의 전화에 당황한다. 경민은 종석과 함께 술자리에서 무시당하고 짓밟혀 지우고 싶었던 중학교 시절과 자신들의 우상이었던 철이(김혜나 분) 이야기를 종석에게 꺼낸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중학교에서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마침내 경민이 종석을 불러낸 이유가 드러나는데...

 

  <돼지의 왕>은 하나의 우화입니다. 단순히 돼지와 개가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불편한 다큐멘터리에서, 액자구조 안의 아이들 이야기는 모두 사회에 대한 우화적 비유입니다. 무대로 설정된 중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현실에서 있을 법한 상황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 대한 은유로 만들어진것입니다. 연상호 감독은 자신이 정의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개와 돼지의 비유를 통해 먼저 제시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려 함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폭력적 계급사회로 구성된 어느 중학교라는 작위적 설정을 통해 무엇보다도 사회적 현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상황의 현실성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연상호 감독은 학교 폭력과 계급의 전이를 말하기 위해 이 애니메이션을 만든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한국 학교에서의 폭력적 계급구조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바 있는 <말죽거리 잔혹사>의 애니메이션 판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1이라는 설정에 어울리지 않는 대사나 행동, 극단적인 학교의 상황, 완전히 도식적으로 짜여진 계급구조 등은 감독의 미숙함이 아니라 의도된 것입니다. 이러한 작위적 우화는 애니메이션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주제를 심각한 학교 폭력으로 읽는 것도 잘못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영화의 악당들이 일진이어야 더 자연스럽겠죠. 그러나 이 영화에서 악당들은 일진이 아니라 모범생들입니다. 공부를 잘 하고, 집도 부유하며, 선생님의 신망을 얻으면서도 동시에 학생들 사이의 계급구조에서 상부를 장악한 이들입니다. 약간의 작위성을 감수하면서까지 모범생 선도부를 악당으로 만들고, 외형상 진짜 불량소년을 영웅적으로 묘사하는 것에는 분명히 다른 불가피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개와 돼지의 비유같은 것 말이죠.

 

  연상호 감독의 세계에서 사회는 개와 돼지의 두 계급으로 양분됩니다. 양분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색할 수도 있겠네요. 권력을 독점하는 일부 개를 제외하면 모두 돼지니까요. 사회의 질서와 규율을 유지하는 것은 개들입니다. 질서에 저항하려는 불량배들을 억누르고 면학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죠. 이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깡패새끼”, “불량배운운하는 대사는 괜한 블랙유머가 아닙니다. 사실 모든 질서라는 것은 반대를 억누르기 위한 명분일 뿐 아무런 필연적 정당성도 없는 것이니까요.

 

  질서 유지를 대표하는 조직인 국가를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흔히 국가를 공공재의 창출을 원하는 시민들이 자발적인 계약을 통해 권력을 위임해 만들어 낸 기구라고 여깁니다. 이른바 계약론적 국가관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인식도 존재합니다. 국가란 결국 질서 유지를 핑계로 시민을 약탈하는 모리배에서 출발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찰스 틸리라는 정치학자가 제시한 이른바 약탈자적 국가관입니다. 근대 국가란 결국 혼란스러운 약육강식의 봉건질서에서 질서 유지를 핑계로 시민들을 약탈하던 조직폭력배가 거대한 규모로 발전한 결과인 셈입니다. 어쩌면 하는 일도 조직폭력배와 크게 다르지 않죠.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시민들을 괴롭히고(세금!), 폭력을 독점하며(군대!), 반항하는 이들을 잡아넣으니까요(경찰!).

 

  연상호 감독이 <돼지의 왕>에서 제시하는 계급구조는 약탈자적 국가관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철이는 질서를 위협하는 불온세력을 대표하죠. 불만을 가진 이들은 철이가 질서를 뒤엎고 돼지의 왕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개와 직접 대적하려 하지는 않지요. 국가가 그러하듯이, 현존하는 질서는 꿈쩍도 하지 않을테니까요. 어쩌면 돼지들은 그저 돼지들끼리 위로하며, 혹은 서로 비교하며 불쌍하게 살아가는 게 최선인지도 모릅니다. <돼지의 왕>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돼지의 왕>이 주는 서늘함은 불쌍한 돼지들인 우리들의 현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돼지의 왕>의 세계에서 돼지들은 더욱 살찐 돼지가 되는 길을 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살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모른 채 (혹은 알고도 모르는 척) 말입니다. 충격적 결말이 우리에게 더욱 오랜 여운을 남기는 것은, 여전히 철이라는 거짓 희망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우리 돼지들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떠밀고, 또 떠밀리면서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