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하반기 기대작 <변호인>을 개봉 첫날 보고 왔습니다. 시네마 폴리티카, 시작합니다.



변호인 (2013)

8.4
감독
양우석
출연
송강호, 김영애, 오달수, 곽도원, 시완
정보
드라마 | 한국 | 127 분 | 2013-12-18
글쓴이 평점  



  ‘영화같은 삶이 있다. 이를테면 고졸의 학력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세무변호사로 누리던 부를 포기하며 인권변호사로 변신하고, 결국 민주화운동으로 명성을 얻어 극적으로 대통령까지 당선되는 그런 삶.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환상적인 삶 말이다. 당신이 제작자라면, 영화감독이라면 언젠가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개봉 당일 달려가서 보고 온 이 영화 <변호인>도 어쩌면 그런 단순한 이유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환상적인 이야기가 있으니 영화화해도 좋겠다는 생각. 그러나 영화같은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데에는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 있다. ‘영화 같은 이야기가 영화 속에는 넘쳐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그린 <변호인>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돈을 최고로 알던 속물 변호사가 어떤 가까운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으로 각성해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서사구조는 그 것이 얼마나 현실 속에서 울림을 갖느냐와는 별개로 이야기 자체는 너무나 흔해빠진 소재일 뿐이다. 그러니까,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 영화의 서사가 갖는 힘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실존인물 노무현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형적으로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허구라고 못밖고 시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관객은 끊임없이 노 대통령을 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노무현의 이름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대통령이나 유명 정치인, 혹은 연예인의 삶을 다룬 영화들이 종종 해당 인물의 충실한 구현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달리 <변호인>은 의식적으로 실존 인물로서의 노 대통령과 거리를 둔다. (어쩌면 그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에 관한 징후적 읽기가 가능한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의의 화신이거나 악의 결정체이며, 어느 쪽에서도 입에 올리기 부담스러운 이름이다.) 예컨대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정치인을 다룬 <닉슨>이나 <철의 여인> 등은 주인공의 기벽이나 말투 등을 흉내 내며 실존 인물을 최대한 가깝게 연기한다. 한국에서도 <그 때 그 사람들>처럼 실존인물을 그럴싸하게 재현하거나,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영화 말미에 김근태의 영상을 띄운 <남영동1985>나 실제 사건의 결말을 제시한 <도가니>처럼 사건과의 연관성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변호인>에서는 노무현의 이름이 의식적으로 제거되어 있다.

 

  이러한 태도는 영화의 전반적인 호흡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정치적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인물을 다룬 영화 치고, <변호인>은 복잡한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지 않다. 영화를 지배하는 메시지는 헌법에 12항을 강조하는 소박한 정의론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제아무리 노 전 대통령과 정견을 달리하는 사람이라도 반발하기 어려운 정도다. (아마도, 이 영화의 메시지를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왕당파 파쇼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것이 이 영화의 단점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장점에 가깝다. 무리한 정치적 주장을 담아 관객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 점은 상업영화가 가져야 마땅한 미덕이고, 이 영화의 대중성을 강화한다. 강약이 잘 조율된 연출과 어느 정도는 염세적인 사건의 결말이 상당히 세련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그 기저에는 권선징악의 평범한 이야기가 깔려있다. 예외가 있다면 영화의 전반적 분위기를 해칠 듯이 외삽된 보기 힘든 고문 장면들과, 역시 영화의 결말을 해치며 외삽된 1987의 추가된 결말인데, 전자가 영화의 내적 정치성을 성공적으로 강화하는 데 반해, 후자는 영화를 외적으로만 정치적 공간으로 끌어들이게 될 사족처럼 보인다.

 

  대신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송강호의 연기이다. 송강호가 분한 송우석 변호사는 완벽하다거나 감탄을 자아낸다기보다는 오히려 연기임을 자각하지도 못하게 하는 자연스러움을 체화하고 있다. 특히 돋보이는 부분은 가난과 저학력의 열등감을 자조적으로 드러내는 초반부인데, 송강호의 능청스러움은 짠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가슴 한 편을 서늘하게 만든다. 한편 후반부 재판 장면들의 연출 상의 세련됨은 거의 전적으로 송강호의 연기에 기대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얼굴에 클로즈업된 채 헌법 12항을 연극적으로 외치는 대사는 여느 배우가 했더라면 매우 촌스럽거나 선동적이라고 느껴졌을 것이다. 실존 인물을 무리하게 모사하는 대신 송강호가 자유롭게 송우석을 그릴 수 있도록 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부터 허구임을 못박고 시작하기로 한 결정이 가져온 가장 긍정적인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매우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또 정치적으로 유통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영화 외적인 정치상황에 있다. 아무리 영화가 정치인 노무현의 삶을 전혀 다루지 않고, 의식적으로 노무현의 이름을 감추며, 정치적 주장을 밀고나가는 대신 평범한 주제에 포커스를 맞추고, 심지어 개봉일을 대선 1년 후로 미뤘다 한들, 관객은 호불호를 막론하고 영화를 정치적으로 읽으려 할 것이다. 이는 정치인 노무현의 유산이 여전히 확고한 정치적 지분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과도 관련이 있지만, 더 중요하게는 지금도 계속되는 구태한 공안몰이와 형해화한 언론이 주는 정치적 피로감 때문이다. (차동영 무리의 귀환을 우리는 영화가 아니라 뉴스에서 보고 있다.) 특히 송우석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등장하는 부산신보 기자의 일갈은 영화를 일부러 찾은 상당수 관객의 마음을 두드려 일깨울 것이다. 1987년의 사족도 영화를 부림 사건이라는 일화보다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게 하는 한 이유이다. 부산지역 변호사들의 지지는 배척받던 독고다이송우식이 어떻게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에필로그로 배치된 것이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를 정치인 노무현의 성장기로 읽을 것이다.

 

  안녕하지 못하다고 너나없이 위로를 원하는 오늘, <변호인>은 아마도 힐링을 위한 영화로 상당히 각광받을 것 같다. 지난 대선 당시 <레미제라블>이 그랬던 것처럼. 그만큼 영화는 잘 연출되었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그러나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은 영화보다 영화 같은 삶에서 출발한 <변호인>이 주는 위로로부터 빠르게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속 악당들의 여전한 현존을 의식하게 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