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제국

The Empire of Shame 
10
감독
홍리경
출연
-
정보
다큐멘터리 | 한국 | 110 분 | -
글쓴이 평점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삼성 반도체 공장의 산업 재해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딴 세상 같았어요. 회사에 가면 남녀 모두 다 똑같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게 조그만 다른 나라 같았어요. 신기했어요. 그 안에 회사도 있고, 기숙사도 있고 병원도 있고, 내가 거기에 있다는 자체가 기분이 좋았던 거 같아요. 라인 안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기억나고... 진짜 로봇들이 일하는 거 같았어요.” 깨끗한 방에서 하얀 방진복, 하얀 방진모, 하얀 마스크를 쓰고 눈만 내놓고 일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1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저는 아이폰을 씁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의 반정도는 갤럭시를, 또 일부는 옵티머스를 쓰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스마트폰이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는지 전혀 모릅니다. 막연히 스티브 잡스나 팀 쿡같은 사람이 회의와 성찰 끝에 아주 크리에이티브하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추상적 과정 쯤으로 여기곤 하죠. 좀 더 생각하면 프로그래머나 개발자, 혹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연구원 정도를 떠올릴까요. 첨단 제품의 물리적 생산 자체에 대해서는 집단적 망각에 빠져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동차를 생각하면 즉각적으로 공장의 생산직 남성 노동자가 떠오르는 것과 대조적이지요. 화폐 경제에서 판매와 구매, 혹은 생산과 소비의 분리가 갖는 정치적 효과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에서 고진까지 무수히 많은 논자들이 지적해 왔지만, 이 정도로 사회적 담론에서 배제되어 있는 분야는 적습니다. 거의 고의적 공백처럼 느껴질 정도이죠.


   그래서 <탐욕의 제국>에 나오는 ‘여공’들은 생경합니다.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유독성 화학물질로 가득찬 생산시설을 오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노동자들 말이에요. 이들이 몇 겹의 장갑을 끼고, 눈만 보이는 하얀 방진복을 입은 채 기계음 속을 활보하는 모습은 새롭기 때문에 위태롭고 불안합니다. 게다가 감독은 아무런 설명 없이 관객을 공장으로 던져놓기 때문에 더욱 낯설게 느낄 수밖에 없지요. 눈모양만으로 동료를 인식하고, 눈이 예쁜 신입을 질투하고, 눈 주위 모양이 예쁘게 나오는 방진복을 찾아 여러 번 갈아입는다는 여공의 농담을 듣고서야 우리는 옛 친구나 동생을 떠올리며 이들을 친근하게 여기게 됩니다.


   사실 다큐멘터리 대부분은 이 ‘친근하게 만들기’에 할애됩니다. 우리는 삼성과 맞서는 노동자를 소개받고, 그들의 사연을 듣고, 일상을 보고, 무엇보다 대화를 나눕니다. 삼성에 들어갈 때 얼마나 기뻤는지, 작업이 얼마나 고되고도 보람찼는지, 어떤 소박한 꿈을 가졌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갑작스레 찾아온 질병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허무했는지, 답답했는지, 분노했는지, 시시콜콜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듣게 되지요. 감독은 해설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증언자들의 목소리와 현장의 모습만으로 스토리를 끌고갑니다. 아마도 ‘선동적 다큐’라는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서겠지요. 이런 다큐를 찍는 이들이 얼마나 ‘해설하고픈’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었을지는 예상할 만 합니다. 그러나 홍리경 감독은 카메라로 말하겠다고 작심한 듯, 2년여 동안 반올림의 활동을 따라다니며 찍은 영상과 음향을 날 것 그대로 엮어놓습니다.


   그러나 소개는 불친절합니다. 처음부터 관객들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여러 목소리에 노출되는데, 다큐가 끝날 때까지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 한 번 없습니다. 심지어 이름자막도 없지요. 반올림의 활동을 잘 모르는 관객은 어리둥절하기 쉽습니다. 아마도 영화 중반정도는 가야 전체적인 퍼즐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등장인물(주인공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각각의 사연에 익숙해지지요. 영상의 서두에 등장한 학교를 졸업한 고 황유미 씨(2007년 백혈병 사망,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와 아버지 황상기 씨, 뇌종양에 걸려 말도 제대로 못하게 된 한혜경 씨와 어머니 김시녀 씨, 남편 황민웅 씨(2005년 백혈병 사망, 삼성반도체 기흥공장)를 잃고 거리를 뛰어다니게 된 정애정 씨, 그리고 이들을 돕는 반올림 활동가와 노무사 등 오늘의 반올림을 만든 주인공들이 그들입니다.


   이처럼 인물에 주목하는 전개방식은 이 다큐멘터리의 강점이자 약점입니다. 강점은 자명하지요. 관객은 피해자의 고통에 직접적으로 공감하게 되고,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립니다. 뇌종양으로 제대로 걷지도 말할 수도 없게 된 상황에서도 삼성은 그럴 리 없다 믿는 한혜경 씨 사연을 누가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한 순간에 딸을 잃고도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을 때 황상기 씨가 느꼈을 절망감은 또 어떻고요. 무엇보다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건  정애정 씨 사연입니다. 같은 합창반에서 만났다며 “그 중에서 내가 좀 눈에 띄지”라고 천진하게 웃는 대목에서는 관객들도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무장해제당한 상황에서 그 뒷 문장을 듣고 나면 누구라도 눈시울을 붉히게 될 겁니다. 상투적인 문장이지만,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니까요. 이 다큐의 힘은 바로 그 외면할 수 없는 현실성에서 옵니다.


   또 한 가지 강점은 인물과 인물 사이의 드넓은 공백을 관객 채우도록 남겨둔다는 점입니다. 문제에 대해 지진하게 부연하는 대신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전면에 드러나도록 두는 것이지요. 영상은 목소리를 드러내줄 뿐, 이에 대한 판단은 관객의 몫이에요. 예컨대 어떤 관객들은 주인공들의 세련되지 못한 어휘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겠지요. 문제의식에 공감하지만 활동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삼성이 회유를 시도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의 경우도 어느 정도 결론은 열려있습니다. 감독이 특정한 관점을 명시적으로 옹호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스스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은폐된 어떤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지요. 


   그만큼 한계도 명백합니다. 상황을 파악하려 할 때 수반되는 여러 의문들에 대해서 다큐멘터리는 아무런 대답도 제공해주지 않아요. 예컨대 그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동안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노동조합은 무엇을 했는지, 왜 노동조합이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왜 한국에서는 산업재해인정을 받기 위해 노동자가 입증을 해야 하는지(기업이 아니라!), 근로공단이 이들을 문전박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이 주최한 공청회나, 국정감사의 위상에 대한 나름의 평가도 없지요. 이는 ‘운동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적 말로 회피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관객들의 공감과 슬픔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다큐가 당연히 가져야 할 문제제기와 전망을 제시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특히 문제에 접근하는 어떤 ‘프레임’이 없다는(혹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은 치명적입니다. 감독은 이 문제를 주인공들의 개인적인 안타까움이 아니라 더 큰 사회구조적 맥락 속에서 규명하는 작업을 소홀히 합니다. 그 결과 이 문제는 억울한 피해자들과 막무가내 삼성이라는 유치한 이분법 속에서 길을 잃지요. 갈등은 매우 추상적이고도 작은 영역으로 축소됩니다. 악덕자본 삼성이 정신차려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는 간단한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결과적으로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임을 일깨워주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사연이 주는 깊은 울림은 따라서 매우 짧게만 지속됩니다. ‘탐욕의 제국’이라는 야심찬 제목을 붙였지만 그 ‘탐욕’이란 무엇인지, 왜 ‘제국’인지를 떠올리려 해도 그저 ‘노동자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탐욕적인 이건희의 제국’이라는 수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그저그런 비판입니다. 그러나 100분짜리 다큐멘터리라면 그 이상을 보여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클린룸에 울려퍼지는 기계소리, 입 없는 이들의 날선 목소리,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운 가슴 먹먹한 무소음으로 이루어진 영상은 처음에 그러했듯이 고등학교 졸업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려는 것이겠지요. ‘또 다시 이 싱그러운 청춘들이 사그라지기 전에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탐욕의 제국>은 그 지점까지 관객을 끌고 오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못합니다. 모두의 관심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정도의 현실인식에서 그친 것이지요.


   어쩌면 그 역할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려던 의도인지도 모르겠네요. 사회를 바꾸는 건 결국 사람이지 영상 나부랭이가 아니니까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탐욕의 제국’을 만들어낸 범인은 영상을 보고도 행동에 나서지 않는 바로 우리들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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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근히 살아서 김근근인 역사/정치학도.

작품을 감상할 때면 주제보다도 시대와 맥락에 과도한 흥미를 느끼는 변태.

치킨과 두부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