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와 테마곡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2003)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 주제곡 ‘The Last Waltz'를 들었을 때 영화 속 인물인 ’미도‘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제목은 생소할지라도,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노래를 들으면 익숙하게 느끼고 영화를 떠올릴 정도로 유명한 곡이다. ‘The Last Waltz'는 4분의 3박자, 왈츠 느낌의 곡이기 때문에 경쾌할 법 하지만 클라리넷 특유의 아련한 소리로 어딘가 슬프게 들리기도 하고, 이러한 부조화 때문에서인지 조금은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 곡은 미도가 등장할 때 배경음악으로 여러 번 사용된다. 이렇게 미도와 배경음악이 자주 연결되어서 관객들에게 다가가면, 어느새 관객은 그 음악을 듣고 미도가 등장하기를, 미도를 보고는 그 음악이 흘러나오기를 기대하게 된다. 물론 영화음악에 특별히 집중하기 않는 이상 등장인물을 보고 음악을 기대하는 후자의 일은 어렵겠지만. 어쨌든 음악과 인물을 연결해주는 강한 연결고리가 생기게 되는데 이 때 그 곡은 ‘00 테마곡(주제곡)’과 같이 그 인물 고유의 음악이 된다. 실제로 <The Last Waltz>도 원래의 제목보다 ‘미도 테마곡’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올드보이>에는 ‘미도’뿐만 아니라 ‘우진 테마곡’, ‘대수 테마곡’ 등 다른 등장 인물들도 각각의 테마곡을 가지고 있다.



복선이 되는 음악

이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쓰이는 테마곡은 원래 오페라에서 쓰이던 기법을 차용하여 각 장르에 맞게 변형한 것이다. 오페라에서 어떤 인물이나 상황을 특징짓기 위해서 쓰인 짧은 악구를 ‘라이트모티프(Leitmotif)’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유도동기’, 또는 ‘지도동기’라고 번역한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유도동기’로 쓴다!)

테마곡이 장면과 음악이 서로를 연상시킨다는 점을 차용했지만 유도동기와 테마곡은 음악을 사용하는 목적이 다르다. 테마곡은 인물과 노래의 연관성을 반복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 둘을 연결시키려는 목적을 가진다. 하지만 유도동기는 극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어떤 소품이 우연한 내용 속에서 등장할 때, 곧 그 소품이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암시를 주기 위해서 사용된다. 음악이 일종의 복선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서 테마곡은 하나의 완결된 멜로디가 있고 독립적인 음악으로 관객들에게 나타나지만 유도동기의 경우 두 마디보다 약간 긴 정도의 짧은 길이로 되어있고, 그마저도 다른 선율에 묻히듯이 나온다. 따라서 반복적으로 암시를 주고 있기는 하지만 눈치를 챌 수 있을 사람만 그 소품의 복선을 알 수 있다.



바그너와 그의 악극

앞서 유도동기가 오페라에서 쓰이기 시작하였다고 말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유도동기는 오페라의 일부인 ‘악극(Musikdrama)’에서 쓰인 기법 중 하나이다. 악극은 오페라가 시작되고 발전한 이탈리아와 그 영향을 받았지만 또 다른 모습으로 자신들만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 프랑스의 오페라로부터 벗어나 독일에서 새로운 형태의 낭만주의 오페라를 말한다. 이러한 악극은 리하르트 바그너에 의해서 창시되었다.

독일의 지휘자인 바그너는 오케스트라의 위상을 끌어올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오케스트라 사랑은 너무도 강해서 관객들에게 높은 수준의 집중력과 이해력을 요구했다. 그러한 그의 노력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지 못하도록 연주회장의 중간 복도를 없애고 의자를 길게 이어붙이도록 설계하거나 악장 간 박수를 금지시키는 규칙이 제정되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했다.(「삐아오의 들리지 않는 음악」, [Op.1] ‘악장 간 박수에 대한 낯선 질문’참고)

이러한 노력에 더해 또 한 가지 그의 오케스트라에 대한 업적이 있다면 바로 오페라와 같은 극에서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고 대사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음악으로 표현함으로서 종합예술로 칭해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오페라에는 분리된 형식의 아리아가 없이, 음악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두 시간에 이르는 공연에서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것은 일반적인 관객의 경우 감상하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유도동기는 이러한 바그너 오페라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음악이 끊어지지 않아 자칫 극의 진행이 단조로워질 수 있는 오페라에서 포인트가 되어줌으로서 지루함을 더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니벨룽겐의 반지>에서는 100개가 넘는 유도동기가 등장한다.



어긋난 계획

계획대로라면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유도동기들을 찾아서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해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바그너의 곡은 곡대로 흘러갈 뿐 아주 짧은 순간의 멜로디로만 들리고, 또 대부분의 경우 특정 악기의 멜로디에만 유도동기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소개하기가 곤란하다. 대신 유도동기를 찾으려고 음악을 듣고 있자니 그저 흘러가는 음악에서 한 번씩 톡톡 튀는 부분의 유도동기를 만나는 반가움이 꽤나 재미있다. 오히려 들리지 않는 음악으로 자세히 알려주기보다 <니벨룽겐의 반지>곡을 들으며 나름대로 유도동기를 찾아보는 재미에 빠져볼 기회를 주고 싶어졌다. 이제 그 기회를 빼앗기 않기 위해 침묵한다. 집중해서 들어보시길!^^



* 사진1. 영화 <올드보이> 포스터.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 사진2. 바그너의 모습.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 사진3. <니벨룽겐의 반지> 바이로이트 음악제, 피에르 불레즈 지휘 음반.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