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하는 건 없지만 그래도 정신없이 살다보니 어느덧 2013년의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다. 거리와 카페의 배경음악이 크리스마스 캐롤로 바뀐 건 오래 전 이야기고, 건물과 나무들도 하나둘씩 조명을 휘감고 황홀한 빛으로 사람들을 설레게 한다. 각종 공연이나 다양한 콘서트도 연말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다. 그 중에서 가장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공연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호두까기 인형>일 것이다. 오늘은 조금 이른 연말 특집으로 <호두까기 인형> 발레극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물론 ‘들리지 않는 음악’에 집중해서!


<호두까기 인형>이 연말에 특히 인기가 많은 이유는 단순하다. 극 중 배경이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주인공 클라라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것이 바로 <호두까기 인형>이니 연말 분위기와 꼭 어울린다. 클라라가 받은 호두까기 인형은 오빠의 장난으로 망가지게 되고 상심한 클라라는 호두까기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잠에 든다. 꿈에서 클라라는 쥐 떼의 공격을 받고 호두까기 인형이 장난감 병정들과 함께 나타나서 쥐 떼와 싸운다. 호두까기 인형이 궁지에 몰릴 때, 클라라가 쥐 왕에게 슬리퍼를 던져 호두까기 인형을 도와준다. 그러자 호두까기 인형이 왕자로 변신하여 클라라를 과자의 나라로 데려간다. 여기까지가 발레에서 1막의 내용이고, 2막에서는 클라라가 과자의 나라 연회에 초대되어 여러 춤들을 감상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2막에서는 동화의 이야기보다 발레의 시각적인 요소가 부각된다.


장난감 병정과 쥐들의 싸움, 왕자로 변신하는 호두까기 인형 등의 전형적인 동화 속 이야기는 유치하게 보인다. <호두까기 인형>의 발레 음악을 의뢰받은 차이코프스키 역시 아이들이나 좋아할법한 동화 이야기를 발레작품으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 때문에 의뢰를 거절했다. 하지만 프티파가 각색한 발레 대본이 몽환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는 점에 흥미를 가지면서 작곡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발레 음악은 발레 음악이 하나의 독립적인 영역을 형성하는 시초가 된다. 차이코프스키 전에 작곡된 발레 음악들은 무용을 위해 쓰이는 수단이었을 뿐, 음악 그 자체로서 인식되지 못했다면 차이코프스키의 발레곡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발레와 상관없이 음악 그 자체로 즐겨 듣는 곡이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에 매혹되어서 작곡을 결심한만큼 이러한 분위기를 발레 음악에서도 부각시키고자 했다. 고민 끝에 차이코프스키는 ‘첼레스타’라는 악기를 사용함으로써 음색을 신비롭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했다. 첼레스타는 피아노와 비슷한 소형 건반 악기로, 당시 유럽에서 보편화되지 않은 악기였다.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음색의 악기를 써서 신비로움을 더하면 훨씬 매력적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 2막의 사탕 관저 장면과 여왕, 사탕 과자 요정의 춤에서 첼레스타를 활용하여 한껏 자아낸 몽환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호두까기 인형>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에서도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려한 차이코프스키의 세심함을 볼 수 있다. 「서곡」의 특징은 ‘적절한 빠름으로’ 연주하라는 알레그로 지우스토(Allegro giusto)의 템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곡의 형식이 복잡하지 않고 간결하다. 또 금관악기나 저음의 소리를 내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고, 높은 음을 내는 악기를 주로 사용했다. 간단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밝은 소리 위주의 악기를 사용한 「서곡」이 밝고 가벼운 분위기를 전달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는 동화 호두까기 인형의 간결한 내용과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을 통해 동화의 분위기를 전달함으로써,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하기 전에 극의 분위기를 예고하는 ‘서곡’의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고전발레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디베르티스망(Divertissment)’에서도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발레와 적절히 뒤섞이면서도 음악적 작품성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디베르티스망’은 발레 안에서 춤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삽입되는 부분으로 다양한 민속춤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때 민속춤들은 서로 어떠한 연관성도 가지지 않고 그저 병렬적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줄거리와 무관하게 진행되며 민속 의상과 노래를 차용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디베르티스망’이라는 이름에도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 ‘막간의 여흥’, ‘기분전환’이라는 뜻으 ‘디베르티스망’은 흘러가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눈요깃거리로 즐기는 무대라는 것을 암시한다.


<호두까기 인형>에서의 디베르티스망은 「초콜릿」,「커피」,「차」,「트레팍」,「갈대피리의 춤」,「어릿광대들의 춤」의 총 6곡으로 이루어져있다. 「초콜릿」은 스페인의 민속춤,「커피」는 아라비안, 「차」는 중국, 마지막으로 「트레팍」은 러시아의 민속춤이 사용된다. 나머지 두 가지는 민속춤 외에 춤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해 자유롭게 삽입된 부분이다. 「초콜릿」에서의 트럼펫의 가벼운 음색과 명쾌한 리듬이 스페인의 정열적인 이미지와 잘 연결되고, 「차」에서의 플롯과 피콜로의 날카로운 음색이 단조로운 배경 리듬과 대조되어 중국의 작고 귀여운 이미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커피」와 「트레팍」에서 음악이 전달하는 민속적 느낌이 가장 두드러진다.



「커피」는 프티파의 권유로 동양적인 그루지아 지방의 자장가를 채택했다고 알려져있다. 현악기와 관악기가 서로 대화하는 듯이 주고받으며 서글픈 분위기의 곡조를 연주한다. 그 뒤를 이어서는 오보에(혹은 잉글리쉬 호른)와 클라리넷이 또 한 번 주고받으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특히 마지막에 약음기를 끼운 바이올린 소리는 아주 약한 소리로 끊어질 듯이 아련하게 연주되는데 이는 커피의 맛을 묘사한 것이라고도 한다. 무언가 몽환적이고 서글픈 분위기는 차이코프스키가 생각하는 동양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이때의 ‘동양’은 그루지아 지방에서 채택되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흑해 연안의 중앙 및 서부 아시아를 말한다.



디베르티스망에서 마지막 민속춤으로 등장하는 러시아의「트레팍」이 특별한 이유는 차이코프스키가 러시아인이고, 특히 작곡 활동에서 러시아 민요의 요소를 자주 사용하여 민족주의 작곡가로 알려져있기 때문이다. 빠른 템포를 특징으로 하는 러시아 민속춤과 같이 트레팍은 매우 빠른 템포의 바이올린 선율로 시작된다. 뒤이어 나오는 교향곡 느낌의 음악은 박력있고 용맹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음악에 맞추어 안무 역시 높은 도약 등의 난이도 높은 기교를 선보이면서 러시아인의 힘을 보여준다.


올해도 어김없이 12월을 맞아 여러 발레단에서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준비 중이다. 따뜻한 연말 분위기에 몸을 싣고라면 유치한 동화 내용에 기꺼이 빠져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뭐..기회가 닿지 않는다면 차이코프스키의 곡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고. 사실 발레에서 음악을 떼어놓는 것이 차이코프스키가 원했던 것이고, 실제로도 이루어졌으니까 말이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 그림 1. 차이코프스키의 모습.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 그림 2. 첼레스타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 그림 3. 유니버셜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디베르티스망 中 <커피>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다음 이미지)

* 그림 4. 유니버셜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디베르티스망 中 <프레팍>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다음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