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에 대한 시작, 오페라의 시작.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처음으로 본 오페라는 <리골레토(Rigoletto)>다. <리골레토>는 빅토르 위고의 희곡 <일락의 왕>을 기초로 베르디가 작곡한 곡이다. 빅토르 위고에 베르디라니! 한 마디로 오늘날 거장으로 칭송받는 위인들의 합작이다. 하지만 당시 어렸던 나에게는 작곡가나 거장에 대한 인식은 없었다. 대신 나를 사로잡은 것은 무대의 화려함, 오케스트라 음악의 웅장함, 무대를 보는 동시에 오른쪽 구석에 있는 한글 자막을 보는 생소함이었다. 낯선 광경에 신기해하기도 하고 ‘딱 걸렸네~’를 외치던 광고음악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노래를 원곡으로 직접 듣고는 반가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모든 열정을 토해내는 듯한 가수들의 노래가 끝나면 영화 속에서나 보던 ‘브라보’와 함께 기립박수를 치는 관객들의 모습까지. 이것이 오페라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이다.

오늘날 오페라는 성악가의 노래와 연기, 오케스트라의 연주, 연출가의 무대 연출에 걸쳐 종합예술의 전형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다면 오페라가 스스로 기억하는 오페라의 첫 기억은 어떤 모습일까. 이러한 궁금증에서 출발하여 이번에는 오페라의 초기 모습을 따라 여행을 떠나볼까 한다. 초기 오페라가 발생한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거쳐 로마, 베네치아, 나폴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국경을 살짝 넘어 프랑스까지가 우리의 여정이 될 것이다. 긴 여행이 될 것이니만큼 오늘은 피렌체와 로마를 먼저 들려보자. 조금의 휴식을 가진 뒤 2주 뒤에 베네치아와 나폴리, 프랑스까지 여행하며 여행을 마무리한다!

 

 

‘화려한 종합예술’, 오페라의 배경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오페라가 생겨난 배경을 알고 간다면 더욱 풍부한 여행이 될 것이다. 르네상스기 음악에서는 여러 성부가 각각 독립적인 멜로디를 가지는 ‘다성음악’이 발달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르네상스가 처음 꽃피운 이탈리아에서 시간이 지나자 르네상스에 대한 비판이 일어난다. 르네상스 음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의 중심에 ‘카메라타(Camerata)’가 있었다. 그들은 피렌체 지방에서 메디치 가문의 후원 하에서 당대의 문화를 연구하던 지식인과 예술가 집단이다. 카메라타는 다성음악 중심의 르네상스 음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고대 그리스의 음악과 연극을 새로운 방향으로 연구했다. 그들은 다성음악의 아름다운 선율보다 중요한 것은 고대 그리스 연극의 내용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연극에 음악을 더하여, 대사를 노래로 표현하는 새로운 양식을 고안해내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오페라의 시초이다.

 

 

오페라의 시작 @피렌체

제일 먼저 카메라타의 활동 무대였던 피렌체로 떠나본다. 최초의 오페라는 1600년 공연된 <에우리디케(Euridice)>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엄밀히 기록을 따지자면 1597년에 ‘Dafine'이 먼저 공연되었다는 문헌이 있지만, 악보나 가사집 등의 물질적인 증거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에우리디케를 최초의 오페라로 보는 것이다. 에우리디케의 내용이 궁금하다면 「삐아오의 들리지 않는 음악」, [Op.2]‘오르페우스 신화, 음악의 신화’를 참고할 것!(글보러가기) 본론으로 돌아와서 에우리디케는 카메라타의 일원이었던 페리(Peri)와 카치니(Caccini)가 작곡하고, 리누치니(Rinuccini)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각색한 대본을 써서 완성한 오페라다. 오늘날 오페라라고 웅장하고 화려한 스케일의 무대를 생각하지만 처음 <에우리디케>가 공연된 것은 결혼식에서다. 당시 피렌체에서 유력했던 메디치 가문의 결혼식에 참여하는 귀족을 위한 여흥으로 처음 무대에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신랑․신부의 사랑을 축복하는 결혼식에서 비극적 결말의 에우리디케 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마지막에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가 저승에서 나와서 행복하게 사는 결론으로 내용을 각색했다.

 

 

피렌체에서 공연된 <에우리디케>의 특징은 오페라이지만 음악보다는 가사가 중점적이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카메라타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을 이상으로 삼고, 주인공들의 심리나 감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노래를 수단으로 사용했다. <에우리디케>를 비롯한 피렌체에서 나타난 초기 오페라는 가사 전달에 효과적인 양식으로 ‘모노디양식’을 차용했다. 모노디 양식이란 ‘monos(하나의) + ode(선율)’의 의미로, 간단한 화음반주에 맞추어 단선율로 낭송하듯이 노래하는 방식이다. 이는 여러 선율로 이루어진 르네상스의 다성음악과 대비되어 바로크와 르네상스를 구분하는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이 주된 요소가 되고 전달하는 내용이 많아지자 관객들에게는 오페라가 어렵게 느껴졌고 그렇게 매력적인 공연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오페라가 시작된 피렌체에서는 오히려 오페라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점점 더 많은 인기를 얻기 시작했는데 그 출발은 이탈리아의 중심인 로마이다.

 

오페라의 변화 @로마

지금의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 정도의 의미를 갖지만 당시 로마는 교황이 살던 곳이다. 교황을 보기 위해 수많은 신자들이 로마로 몰려들었고 성당은 이러한 신자들에게 보여줄 공연이 필요했다. 때마침 피렌체에서 건너온 오페라 양식의 채택하였다. 대신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화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종교적인 내용으로 각색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당시 성당에서 여성은 성가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페라 극 진행을 위해서는 여자 역할이 필요하지만 여성은 노래를 할 수 없으니 해결책은 남성이 여자 역할을 맡아서 하는 것이었다. 여자 역할을 맡은 남자 가수는 여성과 같이 높은 음역대를 유지해야 했다. 이 때문에 남성이 변성기를 거치며 음역이 낮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거세를 한 가수 ‘카스트라토(castrato)’가 성행했다.

피렌체의 오페라가 모노디 양식을 지키며 노래보다는 가사에 중점을 두었다면, 로마에서의 오페라는 노래를 중심을 옮겨가는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벨칸토 창법’의 개발로 이어졌다. ‘벨칸토(Bel Canto)’는 이탈리아어로 아름답다는 의미의 ‘벨’과 노래라는 의미의 ‘칸토’의 합성어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데 치중하는 발성법이다. 벨칸토 창법은 노래를 부르면서 한 번에 들여마신 숨을 자신이 원하는 만큼 내보낼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다. 이 발성법을 사용하면 노래할 때 자신의 호흡을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창법은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게 되면서 오페라 노래는 전문성악가만 부를 수 있다. 점점 가사의 내용보다는 음악에 중요도가 옮겨지면서 노래의 아름다움이나 성악가의 기량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사보다 듣기 쉬운 멜로디로 중심이 변화하면서 오페라는 사람들에게 보다 친숙해지고 점점 많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다음 여정을 위한 휴식

아쉽지만 오늘의 여행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자. 여행은 조금 쉬었다 가야 다음 여정이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 2주 뒤에 시작될 베네치아와 나폴리, 그리고 프랑스 여행을 기다리며!

 

* 그림1. 피렌체 성당의 모습.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 그림2. 작곡가 페리의 전신 초상화.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 그림3. 에우리디케 악보 표지. (사진 출쳐 : 구글 이미지)

* 그림 4. 콜로세움의 모습.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