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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에 즐겨 읽은 만화책이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만화 시리즈물로 풀어낸 책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남자 신들은 엄청난 근육질 몸매였고 여자 신들은 말 그대로 ‘여신’의 이미지로 그려져 있었다. 이런 만화적 요소를 이용하여 신들이 복잡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흥미로웠다. 아마 90년대 이후로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라면 꽤 많이 공감할 것이다. 열 권이 넘는 방대한 양의 책이어서 모든 걸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스토리가 몇 개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르페우스 신화’이다.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익숙한 신화 내용이다. 이번에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단순히 그리스․로마 신화 속 하나의 스토리쯤이 아니라 이것을 들리지 않는 음악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려고 한다.
먼저 오르페우스 신화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오르페우스의 음악적 천재성에서 모든 이야기가 이루어진다. 그가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면 인간은 고통을 잊고 사나운 동물들은 길들여진다. 그러다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 대상은 숲의 요정인 에우리디케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에우리디케는 독사에 발을 물려서 죽고 만다.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오르페우스는 깊은 슬픔에 빠진다. 결국 그녀를 저승으로부터 다시 돌려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살아있는 자가 저승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는 음악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승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괴물들을 음악으로 잠재우고, 지하 세계의 신인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성공한다. 감동한 하데스는 에우리디케를 다시 살려달라는 오르페우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바로 지상에 도착하기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 하지만 저승 세계를 벗어나기 직전에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게 되고 에우리디케는 다시 지옥으로 사라진다. 지상에 돌아온 오르페우스는 그 충격으로 인해 다른 여인들과의 접촉은 절대적으로 멀리하고 소년들과만 관계를 맺는다. 이를 불쾌하게 생각한 여인들에 의해 그는 맞아 죽게 되고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난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일반적으로 에우리디케와의 사랑 이야기에 주목된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로맨스 스토리의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오르페우스가 음악의 명수로 등장하는 만큼 그의 신화에서부터 음악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먼저 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계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신들의 아버지로 제우스가 등장한다. 그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사이에서 9명의 여신이 탄생하는데 이들이 뮤즈, 혹은 무사 여신들이다. 뮤즈들은 넓은 의미의 예술을 담당하는 여신들로 독창이나 가무에서부터 역사, 천문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영역을 담당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시와 음악을 담당한 뮤즈가 ‘칼리오페’이다. 므네모시네는 태양의 신이자 음악의 신인 아폴론과 결혼을 한다. 므네모시네의 어여쁜 목소리와 아폴론의 리라 솜씨를 이어받아 타고난 음악 천재가 태어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오르페우스이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서 시인이자 음악가로 등장하여 위에서 소개한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폴론의 아들이 아니라 강의 신 오아이그로스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때 그는 단순히 리라의 명수가 아니라, 리라의 줄 7개를 뮤지 여신의 수에 맞추어 9개의 줄로 개조한 새로운 악기를 만든 인물이다. 영웅 이아손이 주도한 아르고 호 원정대에 참여하여 음악 연주로 대원들을 위로하기도 하고, 죽음으로 유혹하는 세이렌을 제압하기도 하는 등의 영웅적 모습도 보인다.
음악의 신의 아들에서 시작하여 그가 만드는 신화 모든 것에서 음악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신화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은 오르페우스 신화가 하나의 신앙으로 발전하면서 더욱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오르페우스 신앙에서 음악이 갖는 의미를 알아보기에 앞서 오르페우스 신앙의 종교관을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오르페우스 신앙은 디오니소스 종교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디오니소스 종교는 술의 신을 찬양하는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광기나 취해있는 정신 상태를 통해서 이성에서부터 벗어나고 궁극적으로 신과 합일의 지향하는 종교이다. 이러한 디오니소스 종교에서부터 오르페우스 종교가 믿는 인간의 기원이 시작된다. 제우스의 아들인 디오니소스가 티탄들에 의해서 처참히 죽고, 화가 난 제우스가 벼락으로 티탄들을 재로 만드는데 그 속에서 인간이 태어났다고 믿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티탄의 사악한 육체와 디오니소스의 신성한 영혼을 공유하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육체는 악한 것, 인간의 영혼은 선한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이 가능해지고, 영혼이 악한 육체 속에 갇혀있는 것이 된다.
비슷한 세계관을 기초로 하지만 오르페우스 신앙과 디오니소스 신앙은 선한 영혼을 해방시키고자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디오니소스 신앙은 앞서 말했듯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짐승의 육체를 뜯어먹거나 광기를 통해 육체를 초월하는 경험을 통해서 영혼을 육체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하지만 오르페우스 신앙에서는 육체적 욕망을 억제한다. 절제와 금욕을 통해 영혼의 선을 단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오르페우스 신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르페우스가 동성애적 모습을 보이고 이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르페우스가 살던 트라키아 지방에 사는 어떤 두 여인은 자신들을 가까이 하지 않음에 대해 상처를 받은 것인지, 동성애에 대한 심각한 거부감 때문인지 그를 때려서 죽인다. 그를 죽인 기간이 바로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이다. 그야말로 광적인 축제에서 오르페우스를 죽이는 이야기에서 디오니소스 신앙과 오르페우스 신앙의 묘한 긴장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오르페우스 신앙에서 핵심은 육체 속에 갇혀있는 영혼을 육체의 훼손없이 해방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음악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음악이야말로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인간을 위로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음악은 보이지 않는 나라로 가는 것을 도와준다고 믿는다. 음악은 육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육체를 넘어서서 영혼으로 직접 가닿는다. 이것을 오르페우스 신앙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르페우스 신앙은 오르페우스를 숭배하는 것이지만 이는 곧 음악을 숭배하는 종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보면 오르페우스 신화는 순수하고 고귀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음악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히려 에우리디케는 그의 음악적 천재성이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지하세계에까지 통용된다는 천재적인 면모를 드러내주는 수단으로서 사용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또는 죽음의 세계에서 에우리디케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통해 삶과 죽음에서 영혼의 윤회를 믿는 오르페우스 신앙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오르페우스 신화는 음악의 신의 아들로 태어난 탄생부터 음악을 통한 사랑과 영웅적 행동, 마지막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두 음악에 관한 신화이다.
<사진 1> Bronzino, <CosimoⅠde' Medici as Orpheus>, 1537-39, Oil on panel, 94×76cm, Museum of Art, Philadelphia.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사진 2> Albrecht Durer, <Death of Orpheus>, 1494, pen drawing, 289×225mm, Kunsthalle, Hamburg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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