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금 지난 얘기가 되겠지만 이번 추석 연휴 때 잊지 못할 순간이 딱 두 가지가 있다. 집이 도시에서 외곽지역으로 이사를 했고, 학교 주변에서 자취를 하는 나는 이번 추석 때 처음으로 새 집을 갔다. 이사한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10분 정도 거리로, 꽤 걸어야하는 곳이었는데 가는 길이 의외로 운치있었다. ‘아파트 숲’을 벗어나면 탁 트인 공터에 정자가 하나 있고 이내 코스모스가 양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넓은 강을 가르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역에 도착해있었다. 그렇게 11시가 넘은 시각에 집에서 지하철역까지의 길을 익힐 겸, 산책도 할 겸해서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다리를 건너다 말고 문득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골지역이라 그런지 별이 꽤 많이 보였다. 개인적으로 별을 좋아하지만 그 하늘에서 만큼은 별이 주인공이 아니었다. 달이었다. 동그랗고 커다란 보름달은 ‘아, 오늘이 추석이었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달에서 흘러나오는 달빛이 강에 닿아 흩어지는 것을 다리에 서서 보고있으니 괜히 설레기까지 했다. 카메라를 꺼내서 찍어도 보았지만 눈에 비치는 그 빛을 역시 온전히 담지 못하더라. 오히려 실망스러워 사진을 지워버리고 눈으로 그 달을 다시 몇 초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강 위의 다리에서 달빛에 취했다고나 할까. 달에 취한 그 순간이 올 추석의 잊지 못할 첫 번째 순간이다. (눈치채신 독자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잊지 못할 두 번째 순간은..비밀이다^^;)

 

 

2. 여기 달에 취한 존재가 나 말고 또 있는 듯하다. 바로 피에로다. 오늘은 늦은 추석맞이(?), 쇤베르크(A. Schönberg)의 <달에 취한 피에로>를 소개하려고 한다. 피에로는 달빛에 취해있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달빛은 그를 취하게 하는 술이었던 것이다.

‘눈으로 마시는 포도주를 / 달은 밤새 파도에 쏟아 붓는다.’

<달에 취한 피에로> 제 1부의 1번 곡, [달에 취하여]의 가사 일부다. 피에로가 본 달은 내가 봤던 달과 다르게 강이 아니라 바다 위에 뜬 달이었나보다. 달이 파도에 쏟아 붓고 있으니 말이다. 피에로는 취할 줄 알면서도 달빛이라는 포도주를 눈으로 계속해서 마시고 있다. 물에 비친 달빛이든, 붉게 물든 노을이든 한 번쯤은 ‘예상하지 못한 아름다운 경관’이라는 포도주에 취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피에로를 이해할 것이다.

 

 

3. ‘들리지 않는 음악’에서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답할 수 있다. <달에 취한 피에로>는 음악이기 이전에 시이기 때문이다. <달에 취한 피에로>는 벨기에 문학가 지로(A. Giraud)가 쓴 시 모음집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이 곡이 작곡되기까지는 ‘체메’라고 하는, 연극배우이자 성악가의 역할이 컸다. 어느 날 쇤베르크는 체메가 연주할 <달에 취한 피에로> 연곡의 작곡을 의뢰받는다. 지로의 시는 당시 활동하던 작곡가 프리스란더(O. Vrieslander) 등의 작곡가에 의해서 피에로 곡으로 이미 여러 번 작곡되고 있었다. 하지만 쇤베르크는 작곡되어있던 피에로 가곡을 보고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하르트레벤(O. Hartleben)이 지로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한 시집을 읽은 후 제안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이후 열정적으로 작곡에 임하게 된다. 시에서부터 작곡으로 탄생한 <달에 취한 피에로>는 총 3부로 구성되어있고 각 부마다 7개의 곡이 있다. 그러니까 총 21편의 시로 이루어진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4. 달빛에 취한 피에로를 대상으로 하는 시로 쓰는 음악이라니. 낭만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음악을 듣는다면 당황스러울 것이다.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음악은 전혀 서정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이하다. 소름끼치고 무섭다. 그 이유를 어렵게 말하자면 ‘무조음악’이기 때문이다. 무조음악은 말그대로 ‘조성이 없다’는 뜻으로, 음들 간의 위계질서가 없다는 것이다. 흔히 음악시간에 한 번쯤 들어본 으뜸음과 나머지 음들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것을 부정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무조음악이라는 곡의 큰 특징은 듣기에 아름답지 못한 이유인 동시에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무조음악에 대해 너무 깊게 들어가면 음악의 전문지식을 다 알아야 하니 그저 불협화음을 느끼는 정도로 감상해도 충분할 것이다.

 

5. 한 가지정도만 덧붙이자면 무조음악은 표현주의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표현주의는 1910년을 전후로 인상주의에 대항하여 미술에서 출발하여 예술의 각 분야에서 나타난 예술 사조다. 영어로 인상주의가 'impressionism'이라면 반대의 어미를 붙여 ‘expressionism'이라 불렀고 그것이 ’표현주의’로 번역된 것이다. 인상주의의 핵심이 ‘보이는 대로’라면 표현주의의 핵심은 ‘느끼는 대로’이다.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고 억압된 것을 조금 더 직관적으로 표현해내고자 한 것이다. 쇤베르크 역시 ‘조성’이라는 음악의 형식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한층 더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표현되는 인간의 내면은 긴장과 공포, 불안과 갈등과 같이 일상에서는 억압되는 감정의 표현에 집중하기 때문에 음악 역시 불안과 긴장을 안고 있는 것처럼 들리게 된 것이다. 실제로 쇤베르크는 표현주의 화가 칸딘스키와 직접적으로 교류를 하기도 했고, 스스로 표현주의적인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따라서 <달에 취한 피에로>는 무조음악의 파격과 동시에 당시의 ‘표현주의’라는 예술흐름과도 맞물리며 현대 음악의 고전이 된 것이다.

 

 

6. 추석을 전후로 해서 보름달이 된 지도 대략 2주가 지났다. 연휴가 끝나고 바쁜 일상에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 달은 그동안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2주 동안은 자신을 채워갈거다. 하현달과 그믐달로 오른쪽이 작아졌다면 초승달과 상현달로 다시 오른쪽을 채우는 방향으로 말이다. 다음 보름까지 남은 2주 정도의 시간동안 점점 차오르는 달을 보며 기이하더라도, 불편하더라도 쇤베르크의 <달에 취한 피에로>를 한 번쯤 감상해보는 것도 자신을 내면을 채우는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2주가 지나면 삐아오의 새 글이 올라와있을 것이다!)

 

* 포스팅이 하루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 오희숙의 『달에 홀린 피에로』(음악세계)를 참고하였습니다.

* 그림 1. <달에 취한 피에로> 초연 포스터.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 그림 2. 1912년 체메의 모습. (사진 출처 : 오희숙, 『달에 홀린 피에로』,15쪽 이미지 스캔)

* 그림 3. 쇤베르크.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