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lls_Like_White_Elephants.pdf

※ 읽기 전 주의사항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숫자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Hills Like White Elephants 

 

 

 

 

 

 

   숫자 2를 가지고 글을 시작해보려 한다. 여기 숫자 2가 있다. 여기에 1을 더했다가 다시 1을 빼보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가. 굉장히 놀랍게도, 숫자 2는 그대로이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숫자의 세계이다. 1을 더한 것을 다시 그대로 뺄 수 있는 세계이고, 그 과정 역시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세계인 것이다. 갑작스레 덧셈과 뺄셈 이야기를 왜 하느냐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말하고픈 이야기는 숫자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의 차이이다. 그리고 오늘의 책은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Hill like white elephants이다.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Hill like white elephantsA4용지로 약 세 페이지 정도의 아주 짧은 분량이다.(저작권 기간이 지나 인터넷에서 구한 영어본 자료를 올린다.) 분량은 짧지만, 이 글은 헤밍웨이의 통찰력과 여러 상징들을 통해 그 깊이를 더하게 된다. 이 이야기의 표면적인 이야기는 낙태이다. 소설에는 낙태(abortion)’가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상황과 맥락을 통해 우리는 이야기에 계속 등장하는 그것(it)’이 낙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에는 다양한 상징이 나온다. 간단하게 살펴본다면 언덕은 여성의 임신한 배를 나타내며, 레일의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은 둘 사이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대화를 의미한다. 이야기가 벌어지는 곳은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사이에 위치한 곳인데,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옛 수도로 오랜 관습과 전통을 상징하고, 마드리드는 현재 수도로써 새로운 가치관을 의미한다.

 

   이 외에도 다양한 상징들이 놓여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할 것은 바로 흰 코끼리이다. 제목에도 등장하는 흰 코끼리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흰 코끼리는 신성한 동물로도 성가신 동물로도 해석될 수 있는데, 이에 관해선 위키백과의 설명을 참조해보자.

 

흰 코끼리는 불교에서 대단히 귀중한 존재로 여겨지는데, 이는 석가모니의 모친인 마야부인이 태몽으로 6개의 상아가 달린 흰 코끼리가 옆구리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흰 코끼리는 어떠한 일도 시키지 않고 신성시되고 있는데, 특히 불교국가인 태국의 경우 국가의 수호신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일반적인 코끼리도 신성하게 여겨진다.

한편, 이러한 흰 코끼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처치곤란한 물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버마나 태국, 캄보디아의 설화에서 찾을 수 있는데, 고대 국왕이 불편한 관계에 있는 신하에게 흰 코끼리를 선물했던 것이 그 유래라고 전해진다. , 신하 입장에서는 국왕이 선물한 코끼리가 죽게 되면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코끼리가 자연사할 때까지 어쩔 수 없이 열과 성을 다해 키울 수밖에 없다. 코끼리는 평균 수명이 70년이고 하루 180-270 kg의 먹이를 먹는 대식가로 어지간한 재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그 사육이 불가능하며, 실제로 사육에 드는 비용을 제외하더라도 흰 코끼리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는 신하의 심적 고통은 실로 엄청난 것일 수밖에 없다. (출처: 위키백과)

 

   결국 흰 코끼리는 여자의 뱃속에 들어있는 태아를 의미한다. 태아는 그 자체로 신성한 생명이지만, 자유로운 삶을 사는 남자에게는 물론 여자에게도 성가신 짐이 될 수 있다. 아이를 낳는다면 남자와 여자는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을 구축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남자는 여자에게 끊임없이 낙태를 권유한다. 여자는 남자의 설득과 자신의 감정 속에서 갈등하고 있다.

 

   여자가 결국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나오지 않은 채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에 대한 논의는 여자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에 초점이 맞춰지기 십상이다. 어떤 이는 대화의 맥락을 통해 여자가 결국 남자의 설득에 넘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선로의 짐을 반대로 갖다 놓은 것을 통해 그들은 관습과 전통을 중시하는 옛 수도 바르셀로나로 향하며, 이는 낙태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 다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낙태 여부가 아니다.

 

   앞서 밝혔다시피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수학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의 차이이다. 이야기가 던지고 있는 중요한 물음 중 하나는 이것이다. 아이를 지우고 나면 남자와 여자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그리고 이 문제에서 남자와 여자는 큰 차이를 보인다. 남자는 당연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더 나아가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낙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여자는 과연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끝없는 의문을 품는다.

 

   이제 이야기를 조금 바꿔서 정리해보자. 한 남자와 여자가 있다. 이 둘은 서로를 사랑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여행을 다녔다. 그러던 중,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예정에 있지 않은 임심을 한 두 사람은 낙태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다. 아이는 이제 사라졌다. 이제 이 두 사람은 다시 예전 둘이서 서로를 사랑했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수학의 세계에서 1을 더했다가 다시 1을 빼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숫자 21을 더했다가 다시 1을 빼면 그것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우리가 방금 이야기했던 그 숫자 2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는 수학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존재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존재의 세계에서 1을 더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고, 거기서 다시 1을 빼는 것은 1을 더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는 숫자 2를 얻을 순 있지만, 그것은 결코 예전에 우리가 보았던 숫자 2는 아니다. 그것보다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른 것이다. 헤밍웨이의 이야기 속 여자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절대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새로운 관계의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란 사실을.

 

   나는 생각한다. 언덕에서 여자만이 흰 코끼리를 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고 말이다. 흰 코끼리를 신성한 태아나 짐이 되는 아이뿐만 아니라, 겉모습으로는 알 수 없는,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의미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남자는 단순히 겉모습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여자는 언덕에서 흰 코끼리를 발견하는 일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나 다른 두 사람이라면, 바르셀로나로 가 아이를 낳았던, 아니면 마드리드로 가 아이를 낙태했던 간에 기차 레일처럼 벌어져있는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은 더 넓어져 결국 두 사람은 불행해지지 않았을까. 헤밍웨이가 남긴 3페이지 속에서 생각만 깊어질 뿐이다.






 

by 오까마  

높디높은 열정과 낮디낮은 능력 사이에서 방황 중  

문학에 관심이 많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