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기 전 주의사항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손보미 단편모음집『그들에게 린디합을(문학동네, 2013)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한'을 위한 변명

손보미의 담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작가 손보미의 단편모음집을 구입했다. 간단히 말하면 번역체 어투라고 하고, 조금 더 친절히 이야기하면 담담한 문체로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색을 나타내는 작가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작가에 관하여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하였는데, 그 이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품을 읽고 받은 인상은 작가가 받는 관심만큼 강하지는 못하였다. 갑자기 감정선을 끊거나 중요한 부분을 생략한 채 진행되는 서술에 익숙하지 못한 점도 그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다룰 담요이다.

 

   글을 쓰기에 앞서 작가에 관하여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누군가 담요에 관하여 올린 글을 읽었다. 그 사람은 작품의 특징을 이야기한 뒤 본격적으로 단점을 들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매개자들의 위치였다. 말하고자 하는 인물에 다가가기 위해서 기능적으로 소모되는 인물이 많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담요에 관해서도 이러한 부분을 지적하였다. 결국 이야기가 다루고 싶은 인물은 인데, ‘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라는 인물이 소모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지적이 마냥 틀리다고 고개를 젓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나 담요에 관해서만큼은 이러한 비판이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의 은 단지 을 연결해주기 위하여 만들어 낸 인물만은 아니다. ‘에게 가닿을 수 있는 매개자임과 동시에 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을 위한 변명을 해보기로 했다.

 

 

 

   이야기 속에서는 두 가지 상실이 나타난다. 하나는 이야기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이 겪는 아들에 대한 상실이고, 다른 하나는 가 겪는 친구 에 대한 상실이다. 짧은 이야기 속에서 두 가지 상실이 나타나면서, 우리는 상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상실의 보편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장이 홀로 키우는 아들은 록밴드 파셀을 좋아했다. 장은 아들이 열다섯 살이 되던 날 파셀의 콘서트 티켓을 구입한다. 장은 기준 가격의 세 배를 지불하면서 가장 앞자리의 티켓을 얻어냈다. 하지만 밴드가 첫 곡을 부르고 있을 때, 총을 든 괴한이 나타나 총격을 가하여 밴드 보컬과 몇몇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불행히도 몇몇 사람들 중 한 명은 장의 아들이었다. 장은 아들을 상실하게 된다.

 

   이번엔 의 이야기이다. ‘는 친구 으로부터 한의 직장상사인 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된다. ‘는 한이 들려준 장의 이야기를 토대로 난 리즈도 떠날 거야라는 소설을 쓰게 되고, 그 소설로 그는 소설가로서의 명예와 인기를 얻게 된다. 하지만 한은 가 장의 삶을 멋대로 비웃고 평가했다며 비난하였다. 한과의 연락이 끊긴 는 그로부터 2년 뒤 한의 부고를 듣게 된다. ‘는 한을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

 

   ‘만약이라는 고문관이 이 두 상실자를 따라다니게 된다. 상실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얼마나 쉽고 빠르게 만약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지 알 것이다.

 

장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만약 그렇게 무리해서 앞자리의 표를 구하지 않았다면 내 아들은 죽지 않았을 거라고요.” (14)

 

놀이터에서 나를 만난 이후, 한은 경찰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렸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만약 한이 죽지 않았다면 나는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었을까? (19)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두 사람이 되돌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장은 위의 인용에서 보이듯이 아들의 죽음을 되돌리고 싶어하지만, ‘는 한의 죽음을 되돌리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정일 뿐이고, ‘가 진정 되돌리고 싶어하는 것은 다시 한을 만나 오해를 푸는 것이다.

 

   그들은 상실을 겪었다. 하지만 아직 상실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이를 보여주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장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덮어주었던 담요를 항상 지니고 다니며, ‘는 한의 장례식을 갔다 온 이후로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또한 두 사람은 이미 일어나버린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자신의 무기력함을 탓하고만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애가 죽은 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소. 하지만, 그렇다면 그게 누구의 잘못일까요? 그날 죽은 사람은, 내 아들과 록밴드의 보컬을 포함해서 여섯 명이었소. 그건 물론 많은 숫자지. 하지만 공연장에는 이천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소. 그렇다면 그들 중 유독 그 여섯 명이 죽어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오? (14)

 

어느 누구도 충분한 준비를 할 수 없었다. 뭔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19-20)

 

    이제 는 화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또 하나의 주인공이 된다. 이제 이 이야기 속 두 주인공은 숙명적으로 상실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 그 시도가 성공하든 혹은 실패하든 말이다. 어찌 보면 이 이야기는 두 사람이 각기 상실을 겪고 그 상실을 마주하고 진정 겪어내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는 장의 전화를 받는다. 장은 에게 할 말이 있으니 만나자고 한다. 둘은 만나 허름한 술집으로 들어가고, 장은 에게 담요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 날 순찰을 돌던 장은 추위에 떨고있는 어린 부부를 만나게 된다. 부부를 집에 들여보내기 위해 말을 건 장은 엉겁결에 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아들과 같이 갔던 콘서트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 (아들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한 마디 하지 않고 장례식까지 끝내 거부한 장에게 이것은 흡사 고해성사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어린 부인은 장에게 아들과 함께 사람이 죽지 않는 행복한 콘서트에 가라고 말을 했고, 장은 차에서 담요를 가져와 그들에게 주어버렸다. 그렇게 담요는, 아들을 잃은 상실감은 죽음을 맞이했다. 장은 아들이 완전히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시 현실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는 장의 이야기를 듣고 울고 싶어졌다. ‘는 드디어 의 말을 이해했다. 장의 삶을 멋대로 비웃고 평가했다는 말을. ‘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한 인간이었다. 도대체 왜, 자신이 그런 아픔을 겪어야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무기력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결국 마주하고 겪어내는 용감한 인간이었다. ‘는 한 이야기의 작가로서 한 인간의 삶을 신의 위치에서 마음대로 주무른 것이다. 그것이 과연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신과 같은 위치에서 인물의 삶을 낱낱이 파헤치고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과연 작가의 일일까? ‘는 장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평론가는 그의 소설을 눈부시게 발전했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는 자신이 발전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 부분을 겪으면서 이야기 속 는 확신하는 인간에서 고민하는 인간으로 변한다. 문학 역시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에서 아무 것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으로 변하고 만다. 이는 손보미라는 작가의 문학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땅히 소설이라면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 다루어지지 않고 간다든지, 등장인물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든지,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든지, 이 모든 것들은 문학이 삶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 작가는 신과 같은 위치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일 것이다.

 

   이렇게 보고 나니, 이 이야기의 중심이야기를 장의 이야기로만 한정시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만나 - 그것이 책을 통해서이건 술자리를 통해서이건 야간순찰을 통해서이건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지는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

 

 

 

   많이 돌아왔다. 처음의 의문 제기로 돌아가보자. 누군가는 을 그저 소모적인 인물로 다루었다며 비판했지만 은 이야기에서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한을 통해 가 장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 뿐만이 아니라, ‘을 통해 는 상실을 겪게 되었고, 그 상실로 인해 비로소 는 장의 상실을 제대로 알아보게 된 것이다. 장 또한 의 상실을 감지하였기에 자신도 왜인지 모른 채 자신의 이야기를 에게 들려주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두 상실이 만나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먹먹함 역시 어떤 상실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