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기 전 주의사항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김영하의『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2013)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했을 때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얼마 전에 영화감독 김조광수와 모델 김승환의 혼인신고 기사를 보았다. 기사 밑의 수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그 곳에서 온갖 종류의 동성애를 비하하는 말들과 반말체부터 합쇼체까지의 다양한 어투의 동성애 비난 댓글을 목격할 수 있었다. 댓글들 중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김조광수와 김승환이 자신의 앞에 있다면 죽여버리고 싶다는 댓글이었다. 어째서 그 사람은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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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하 작가의 신작 『살인자의 기억법』을 이제야 읽었다.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사놓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읽지 못하고 있다가 며칠 전에 뽑아들었고, 첫 장을 펼친 지 2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마지막장까지 끝마쳤다. 이 책을 먼저 읽은 친구가 이야기했던 대로 순식간에 작품을 읽었고, 그 후에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첫 문장으로 인용된 해설과 마주했다.


   훈계하는 듯한 말투에 기분이 좀 상했지만, 그러면 너는 얼마나 잘 읽었는지 보자, 라는 심보로 해설을 마저 읽어보았다. ‘웃을 수 없는 농담, 사드-붓다의 악몽’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해설을 짧게 요약해보자면, 이 이야기는 단순히 딸을 지켜야 하는 전(前)연쇄살인마와 그의 딸을 노리는 현(現)연쇄살인마의 쫓고 쫓기는 스릴러가 아니라, 사드적인 쾌락과 붓다의 공(空) 사상이 들어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평론가는 물론 더 심오하고 깊은 독해를 했겠지만, 평론에 대한 설명은 이쯤으로 마치고, 해설 중에서 내가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이해와 관계 맺음에 관한 한 완전히 무능력한 겁쟁이가 자신의 무능력을 능력으로 전도시킬 때,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관계 맺지 못하는 대상들을 부정되고 파괴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꿔놓을 때 악이 등장한다. 자신을 제외한 어떤 대상에도 마음쓰지 않는 것, 모든 대상들을 자기 마음대로 제어하고 부정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연쇄살인범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162-163)


   소설의 주인공 김병수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심지어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재능이 없어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지, 노력을 하지 않아 재능이 사라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쨋거나 그는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소설 속에도 군데군데 나와있다.


   나는 조용한 세상이 좋다. 도시에서는 살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소리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너무 많은 표지판, 간판,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표정들. 나는 그것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무섭다. (94쪽)


   그는 타인과 왜 어울리지 못 하는가. 그것은 그들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 다시 말하자면, 그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책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작품 후반에 들어 결국 김병수가 상황을 잘못 해석한 것도, 사람들을 다른 사람으로 오인한 것도 ‘이해’와 관련된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이해와 관련하여 좀 더 이야기를 해보자.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하였을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그 존재를 ‘인정’할 수도 있겠다. 당신을 이해할 순 없지만, 나는 당신의 존재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무시’ 역시 있을 수 있겠다.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당신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 김병수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일까. 그는 ‘인정’이나 ‘무시’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들을 ‘거부’한다. 여기서 ‘거부’는 단순히 당신이 싫다는 것이 아니다. ‘거부’는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다름’은 ‘틀림’이 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는 ‘옳지 않은 존재’가 된다.


   ‘거부’ 반응을 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그 대상의 위치를 재정립한다. 재정립하는 양상은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첫째는 대상을 신격화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는 자신의 인지 범주를 넘어서는 존재로 신격화된다. 둘째는 대상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기이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정상이 아닌 범주에 모두 집어넣고, 이를 고쳐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이다.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마지막은 대상을 파괴하기이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은 없어져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동성애자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 김병수는 마지막 경우에 속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이해 불가능한 사람들을 죽여야만 했다. 그의 첫 살인을 살펴보자. 그는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영숙이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를 베개로 눌러” 죽인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는 늘 악몽을 꿨다. 잠꼬대도 심했다.'(31)는 문장에서 우리는 그의 아버지가 전쟁을 겪으면서 심리적인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의 여지를 빼앗겨버린 대상은 너무도 쉽게 없어져야 할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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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여섯 살에 시작해서 마흔다섯까지”, 그는 30년 동안 살인을 멈추지 않은 연쇄살인마. 평범한 우리와는 지극히 먼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서 ‘그’의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동성애자를 죽이고 싶어하는 어느 한 네티즌에게서, 또는 노조의 파업을 참지 못하고 79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버리는 어느 사장에게서, 또는 노조 지도부를 연행하기 위해 유리문을 부수고 천장을 뜯고 14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연행해간 어느 나라의 모습에서.


   위에서 인용했던 문학평론가의 말을 다시 한 번 빌려보자.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관계 맺지 못하는 대상들을 부정되고 파괴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꿔놓을 때 악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파괴하려 할 때 악이 등장한다면, 이해조차 시도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는 요즘 세상은 무어라 불러야 하는 걸까.







 

by 오까마  

높디높은 열정과 낮디낮은 능력 사이에서 방황 중  

문학에 관심이 많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