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빙구가 연출부로 참여하여 가을부터 준비해온 연극 <테레즈 라캥>이 저번주에 1차 공연을 마치고 오늘부터 사흘간의 추가공연만을 앞두고 있다. 몇시간 뒤면 배우들은 자신을 잠시 벗고 테레즈와 로랑의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그 짧은 순간을 더 예쁘고 더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긴긴 시간을 들였다. 

 오늘 무대 뒤에서 리허설을 지켜보았다. 샤막 뒤에 쪼그려 앉아 조명빛이 새는 틈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 캄캄한 무대 뒤의 풍경을 당신에게 한번쯤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무대를 만들기 위해 어떤 고민들이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오늘은 객석이 아닌 무대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되겠다.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는 '장애문화예술연구소 짓'의 <테레즈 라캥>이다. 



장애문화예술연구소 짓
테레즈 라캥
구로 예술나무씨어터 1. 9 - 12
홍대 가톨릭청년회관 CY씨어터 1. 17 - 19



 '짓'이 우리 스스로에게 내린 정의는 이렇다. '예술의 수단이자 목표로서 '장애'를 탐색, 사고하고,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함께 모여 즐겁고, 매력적이고, 의미있는 공연을 만들고자 설립된 예술단체'. 
 그러나 처음 연습을 시작했을 때 적지 않게 당혹스러웠다. 장애를 가진 신체가 그야말로 '장애'로만 인식되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같이 공연을 만들어가는 연출부나 기획팀에게도 그랬지만 그 누구보다도 배우들 자신이 가장 그러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무대에서 부자연스러운 신체. 아름다워보이지 않는 몸. 처음 연습을 시작할 즈음, 배우들은 자주 자신의 장애 뒤에 숨곤 했고 그럴 때면 장애는 그야말로 '장애물'처럼 보였다. 




 무엇이 깎아내야 할 장애이며 무엇이 드러낼 수 있는 장애인가? 이 사이의 줄타기가 항상 위태로웠다. 언어장애를 가진 사람이 말을 할 때 생기는 고유의 느린 호흡과 템포가 무대에서 낯설게 느껴질 수 있고,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소리나 발음에 대해서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들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언어장애가 있는 배우에게 자꾸 텀이 생긴다느니, 여기서 에너지가 사그라들면 안된다느니 하는 코멘트를 해야 하거나, 청각장애를 가진 배우에게 '쉿!'이라는 대사를 연습시키려고 온 공연팀이 달려드는 순간들이 빈번하게 생겼다. 그런 날이면 많은 질문들을 안고 집에 돌아가곤 했다. 나는 이들을 배우로 보고 있는 걸까? 다른 비장애인 배우였더라면 이보다 훨씬 노력해야 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요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부분이 노력을 요청해도 되는 부분일까? 이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것들을 힘을 들여 훈련시키는 건 아닐까? 더 자연스럽게 말하게 되고, '쉿'을 잘 하게 되는 걸 기뻐하는 게 맞는 걸까? '장애의 극복'이라는 프레임을 스스로 뒤집어쓰는 건 아닐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들에게 비장애인의 모습을 모방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레즈 라캥>은 이런 고민들 사이에서 짓만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짓의 <테레즈 라캥>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모든 배우가 한번씩 중심인물인 테레즈와 로랑을 연기한다는 점이다. 배우들은 모자, 안경 등의 소품 전환을 통해 막마다 배역을 바꾸면서 다른 신체 및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테레즈와 로랑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이 갖는 각자의 신체적 특성이 각 인물에 투영되었을 때 각 테레즈와 로랑은 무대 위에서 새롭고 독특한 몸, 움직임, 이미지를 선사한다. 이들은 휠체어에서 내려와 걷고 서로를 끌어안으며, 고유의 목소리와 발음으로 이야기한다. 휠체어를 탄 로랑과 그렇지 않은 테레즈가 서로 다른 높이에서 눈을 맞추고 교감하며 아름다운 왈츠를 춘다. 특정 장면들에서는 제각기 다른 몸의 테레즈와 로랑이 한 무대에 등장하여 마치 여러 자아가 이야기하듯 테레즈와 복합적인 감정 및 심리 상태를 입체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특히 극 도중 수화를 사용하는 테레즈의 독백 장면은 장애를 짓만의 미적 도구로 훌륭하게 활용한 장면이다. 2막이 끝나고 3막에 들어가기 전 불안한 모습으로 무대에 홀로 남은 테레즈는 표정과 호흡, 수화만으로 관객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한다. 그 장면에서만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영상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자막해설 서비스를 포함하여 모든 관객들에게 어떤 설명도 주어지지 않는다.
 사실 극의 구성상 이 장면을 이해하지 못해도 극의 흐름을 문제없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관객 앞에 아무런 설명 없이 이 장면을 던져놓은 데에는 관객에게 어떤 의미에서의 전복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연출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수화 독백이 펼쳐지는 찰나의 시간동안, 객석과 무대는 침묵에 휩싸이고 테레즈는 관객을 일시인 몰이해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청각장애를 가진 배우의 언어를 새로운 무대언어로 조명하는 동시에, 관객에게 잠시나마 장애의 순간을 경험하게 하는 재미있는 순간이다.






 짓은 장애가 예술에 있어서 '장애'가 되지 않는 무대를 꿈꾼다. 누구나 오를 수 있고 누구나 볼 수 있는 무대. 장애를 가진 배우와 그렇지 않은 배우가 제각기의 매력을 발산하며, 휠체어를 탄 사람도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도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도 객석에 기꺼이 앉아 극을 감상할 수 있는 무대. 이를 위해 휠체어가 이용할 수 있는 연습장과 공연장을 찾고, 청각장애를 가진 배우를 위해 연습 내내 대필이 진행했다. 또, 장애인 관객을 위해서 스크린 자막을 설치하고 장면 해설을 진행하며 차량운행을 통한 휠체어 접근성을 지원하는 등 보이지 않는 무대 뒤 짓의 시도들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갖은 어려움과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테레즈 라캥>은 무대에서부터 객석까지 짓이 꿈꿔왔던 것들을 구현한 첫 작품이다. 

 그러니 당신, 보러 왔으면 좋겠다. 연극을 한다는 장애인을 보러 오는 게 아니라 나쁘고 섹시하고 매력적인 네명의 테레즈와 네명의 로랑을 보러. 그동안 무대와 객석에서 오래 소외되어왔던 어떤 관객들과 기꺼이 함께 하고, 무대의 조명이 꺼지면 그 묵묵한 어둠을 그들과 같은 무게로 나눠 가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