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2012, 이윤택 연출의 [궁리]를 보았다.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이야기에 압도된 가운데 극 전체를 꿰뚫는 연출의 시선이 상당히 선명하게 느껴졌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장영실을 역사에서 사라진 희생자로 조명함으로써 권력의 흐름에 따라 기록되는 역사, 승자에 의해 재단되는 그 속성을 드러냈다.

반면 [혜경궁 홍씨]에서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기보다 <한중록>에 의거하여 혜경궁 홍씨라는 인물을 생생히 되살리는 데 힘썼다. 역사의 주변자에 불과했던 혜경궁 홍씨의 얼굴 위로 자신의 페르소나라 불리는 배우 김소희를 덧씌워 다층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무대의 중심에 세웠다. [혜경궁 홍씨]를 들여다보자.





혜경궁 홍씨는 누구인가?

세자비에서 정조의 어머니로, 그리고 순조의 할머니로. 비록 중전과 대비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그녀가 앉은 곳은 그 못지않은 막강한 권력이 있는 자리였다. 적어도 표면적인 역사에서는 그랬다. 그녀의 이름조차 전하지 않는 승자의 역사에서는.

홍씨가 써내려간 <한중록>은 역사라기보다 기구한 인생을 살아간 한 여인의 회고록에 가깝다. 8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수모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남편은 시아버지의 미움을 사 뒤주 속에서 질식사했고, 살아남아 왕권을 잡은 아들 정조는 홍씨의 친정을 철저히 몰살했다. 정순왕후가 정조의 사후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남은 홍씨 일족을 더욱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 모든 궁중의 피바람은 겨우 열 살에 어린 세자의 비로 궁에 들어온 한 여성이 홀로 견뎌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손자 순조가 왕좌에 오른 후에야 그녀는 <한중록>을 통해 자신과 친정의 결백을 밝히며 지나온 삶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인물로 풀어가는 역사극

<한중록>에서 뻗어나와 배우 김소희에 의해 재현되는 홍씨의 얼굴은 아주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옷을 훌렁훌렁 벗고 피부병으로 가려운 몸을 긁으려 소똥도 바르고 바닥에도 누워 보고 기둥에도 몸을 비비는 여인. 그러다 마침내 외로움과 서러움에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이 늙은 여인네를 두고 누가 임금의 위엄 있는 어머니라고 생각할까. 이 약한 여성을 휘감는 극의 중심사건 사도세자의 죽음 은 그래서 더욱 비정하고 잔인하게 다가온다. 철저히 사건의 중심에서 배제된 그녀의 목소리를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계속 이어가는 것으로 지나온 삶의 정당성을 짙게 호소한다. [혜경궁 홍씨]는 그 질긴 싸움의 기록이다.

이미 예상되어 있는 파국과, 그 파국의 변두리에 있는 인물에 무게중심을 두는 강수를 살리기 위해 이윤택은 스토리텔링을 들어내는 대신 인물에 더욱 힘을 실었다. 그러다보니 역사의 순차적 시간성 자체를 많이 떠냈다. 홍씨가 바라본 사건은 하룻밤의 꿈으로 압축되어 보여지고, 홍씨는 열 살배기 소녀와 환갑의 노인 사이를 넘나들며 사건을 전한다. 얽히고 설킨 정치적 이해관계보다는 인물과 인물간의 깊은 감정과 관계의 골이 뚜렷하게 떠오르고 홍씨는 무대의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이를 모두 목격한다. 그 속에서 고뇌하고 절망하는 홍씨의 모습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고 안타깝게 그려진다.




 

패자의 역습

이윤택은 <한중록>을 두고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패자의 역습이라고 잘라 말한다. 극중에서 이미지화되는 사건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면서도 마치 같은 자성을 띤 극인 양 그녀를 튕겨내고 철저하게 그녀를 관찰자로 만든다. 영조와 친정에서 각자 그녀에게 전해주는 책자는 이를 명백하게 드러내는데, 그들은 처음부터 그녀의 위치를 못박고 주변자를 자처하기를 강요한다.

그러나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에는 끝내 살아남아 붓을 쥐고 글을 써내려가는 홍씨의 모습은 이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윤택은 혜경궁 홍씨가 평생에 걸쳐 긍정하려 했던 자신의 당위성에 주목하고 이를 한 여성이 선언하는 주체성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역사적 판단을 개입시키는 대신 그녀의 삶 자체를 통해 극 전체에 묵묵한 물음을 실었다. 역사라는 껍데기가 승자의 전리품이라고 해서, 그에 대항하지 않을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혜경궁 홍씨는 박제된 역사 속 인물에서 빠져나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윤택은 [혜경궁 홍씨]의 작의를 밝히며 지금껏 다루어왔던 사회적 정의를 모두 빼고 인간의 심리라는 개인적 담론에 초점을 맞추어 작업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거대한 사회적 담론이 드러났다고. 그는 한중록에 의거한 혜경궁 홍씨를 충실하게 복원했고, 극중 드러나는 비극에 있어서 어떠한 방향성도 제시하지 않은 채 막을 내린다.

이윤택은 역사극이라는 선입견을 갖지 말고 극을 볼 것을 요청한다. 범시대적인 어떤 개인의 드라마, 역사의 한켠을 재현하는 드라마라기보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인간에 대한 드라마로 보아달라고. 그 기저에 깔리는 그의 질문은 지금까지 그가 작품에서 제시해왔던 방향성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또는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이라면 그저 함구할 것인가?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신의 삶을 짓뭉개는 것들을 보고도





돼지의 왕 (2011)

The King of Pigs 
8.7
감독
연상호
출연
양익준, 오정세, 김혜나, 박희본, 김꽃비
정보
애니메이션, 스릴러 | 한국 | 96 분 | 201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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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부도 후 충동적으로 아내를 살해한 경민(오정세 분)은 자신의 분노를 감추고 중학교 동창이었던 종석(양익준 분)을 찾아 나선다. 소설가가 되지 못해 자서전 대필작가로 근근히 먹고 사는 종석 역시 내연녀와 싸우고 집밖에 나오고 15년 만에 찾아온 경민의 전화에 당황한다. 경민은 종석과 함께 술자리에서 무시당하고 짓밟혀 지우고 싶었던 중학교 시절과 자신들의 우상이었던 철이(김혜나 분) 이야기를 종석에게 꺼낸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중학교에서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마침내 경민이 종석을 불러낸 이유가 드러나는데...

 

  <돼지의 왕>은 하나의 우화입니다. 단순히 돼지와 개가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불편한 다큐멘터리에서, 액자구조 안의 아이들 이야기는 모두 사회에 대한 우화적 비유입니다. 무대로 설정된 중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현실에서 있을 법한 상황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 대한 은유로 만들어진것입니다. 연상호 감독은 자신이 정의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개와 돼지의 비유를 통해 먼저 제시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려 함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폭력적 계급사회로 구성된 어느 중학교라는 작위적 설정을 통해 무엇보다도 사회적 현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상황의 현실성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연상호 감독은 학교 폭력과 계급의 전이를 말하기 위해 이 애니메이션을 만든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한국 학교에서의 폭력적 계급구조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바 있는 <말죽거리 잔혹사>의 애니메이션 판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1이라는 설정에 어울리지 않는 대사나 행동, 극단적인 학교의 상황, 완전히 도식적으로 짜여진 계급구조 등은 감독의 미숙함이 아니라 의도된 것입니다. 이러한 작위적 우화는 애니메이션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주제를 심각한 학교 폭력으로 읽는 것도 잘못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영화의 악당들이 일진이어야 더 자연스럽겠죠. 그러나 이 영화에서 악당들은 일진이 아니라 모범생들입니다. 공부를 잘 하고, 집도 부유하며, 선생님의 신망을 얻으면서도 동시에 학생들 사이의 계급구조에서 상부를 장악한 이들입니다. 약간의 작위성을 감수하면서까지 모범생 선도부를 악당으로 만들고, 외형상 진짜 불량소년을 영웅적으로 묘사하는 것에는 분명히 다른 불가피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개와 돼지의 비유같은 것 말이죠.

 

  연상호 감독의 세계에서 사회는 개와 돼지의 두 계급으로 양분됩니다. 양분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색할 수도 있겠네요. 권력을 독점하는 일부 개를 제외하면 모두 돼지니까요. 사회의 질서와 규율을 유지하는 것은 개들입니다. 질서에 저항하려는 불량배들을 억누르고 면학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죠. 이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깡패새끼”, “불량배운운하는 대사는 괜한 블랙유머가 아닙니다. 사실 모든 질서라는 것은 반대를 억누르기 위한 명분일 뿐 아무런 필연적 정당성도 없는 것이니까요.

 

  질서 유지를 대표하는 조직인 국가를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흔히 국가를 공공재의 창출을 원하는 시민들이 자발적인 계약을 통해 권력을 위임해 만들어 낸 기구라고 여깁니다. 이른바 계약론적 국가관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인식도 존재합니다. 국가란 결국 질서 유지를 핑계로 시민을 약탈하는 모리배에서 출발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찰스 틸리라는 정치학자가 제시한 이른바 약탈자적 국가관입니다. 근대 국가란 결국 혼란스러운 약육강식의 봉건질서에서 질서 유지를 핑계로 시민들을 약탈하던 조직폭력배가 거대한 규모로 발전한 결과인 셈입니다. 어쩌면 하는 일도 조직폭력배와 크게 다르지 않죠.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시민들을 괴롭히고(세금!), 폭력을 독점하며(군대!), 반항하는 이들을 잡아넣으니까요(경찰!).

 

  연상호 감독이 <돼지의 왕>에서 제시하는 계급구조는 약탈자적 국가관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철이는 질서를 위협하는 불온세력을 대표하죠. 불만을 가진 이들은 철이가 질서를 뒤엎고 돼지의 왕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개와 직접 대적하려 하지는 않지요. 국가가 그러하듯이, 현존하는 질서는 꿈쩍도 하지 않을테니까요. 어쩌면 돼지들은 그저 돼지들끼리 위로하며, 혹은 서로 비교하며 불쌍하게 살아가는 게 최선인지도 모릅니다. <돼지의 왕>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돼지의 왕>이 주는 서늘함은 불쌍한 돼지들인 우리들의 현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돼지의 왕>의 세계에서 돼지들은 더욱 살찐 돼지가 되는 길을 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살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모른 채 (혹은 알고도 모르는 척) 말입니다. 충격적 결말이 우리에게 더욱 오랜 여운을 남기는 것은, 여전히 철이라는 거짓 희망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우리 돼지들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떠밀고, 또 떠밀리면서 말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지휘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정명훈의 모습이다. ‘마에스트로 정’의 사진을 보고있자면 그의 표정과 지휘봉을 들고있는 손 끝에서 어떤 숭고함이 느껴진다. 이미 현실의 세속적인 논리에서 벗어나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하고 있으며, 음악의 세계라는 또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가 사는 음악 세계에서는 현실적인 계산이나 돈이 없이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러한 환상을 깨뜨린 사건이 지금으로부터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났다. 정명훈의 고액연봉 논란에 휩싸이며, 연봉 인하와 서울시향 재계약 건을 두고 박원순 서울 시장과 협상하는 정명훈의 모습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렸다. 예술가가 ‘돈’ 때문에 ‘정치인’과 협상하는 이 생소한 모습은 예술이 돈이나 정치 등의 현실과는 독립된 어떤 신성한 영역일 것이라는 생각이 환상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오늘 <삐아오의 들리지 않는 음악>에서는 그 환상을 조금 더 깨보려고 한다. 예술에 가려 들리지 않는 노동, 보이지 않는 정치에 관한 이야기다.


오케스트라는 흔히 작은 사회로 비유된다. 지휘자라는 지도자를 따라 각각의 영역이 제 소리를 내고 그것이 하나로 어우려져 아름다운 하모니를 내는 모습을 이상적인 사회상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를 ‘작은’ 사회로, 사회의 규모만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의 모습인지 생각해본다면 독재 체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수많은 오케스트라가 저마다의 운영 체계를 갖고 있지만, 대부분은 지휘자가 단원들에게 독점적으로 자신의 음악관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음악을 아름답게 연주해줄 오케스트라 단원을 선발하고, 독주자를 선정하는 권리 역시 지휘자에게 주어진다. 대표적으로 오스트리아 지휘자인 카라얀은 그 유명세만큼 독재적인 지휘자로 악명도 높았다.



이렇게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1인에 권력이 모이기 쉽기 때문에 단원들이 음악 혹은 운영에 관한 결정권을 갖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있다.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사회 모습에 발맞추어 오케스트라 내에서도 권력의 민주적 분배를 지향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이 곳곳에 보이고 있다. 어떤 오케스트라는 독재자인 지휘자를 아예 없애기도 했고, 어떤 오케스트라는 단원들이 함께 모여서 ‘예술가도 노동자다’라며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오케스트라와 노조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연결되어 만들어진 ‘오케스트라 노조’는 여전히 생소한 개념이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노조는 다른 여느 노조와 같이 노사협약을 통해 임금 인상, 연습(노동)시간 준수, 민주주의 수호 등 익숙한 구호를 외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자칫 ‘숭고한 예술의 완성’이라는 명목 아래 착취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단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오케스트라 노조가 결성되었고 그 세력을 점차 키워 지금은 영향력있는 집단이 되기에 이르렀다. 세계3대 오케스트라 중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의 노조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비엔나 필하모닉 등의 오케스트라에서도 노조에 꽤 큰 힘이 실린다. 이들은 모두 단장 1인의 지나치게 높은 연봉과 단원들의 낮은 임금을 조율하고, 연습시간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베를린 필하모니는 전 단원의 투표를 통해 지휘자를 선정하는 민주적 방식을 오케스트라 운영에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다. 1994년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지휘자 정명훈이 정권이 바뀌면서 강제 해고를 당했을 때, 나서서 해고의 부당함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고, 다시 정명훈을 복직시키는 데 일조한 단체도 바로 바스티유 오페라 합창단 노조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케스트라 노조가 따로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10여 년 전부터 전국문화예술노동조합이 확산되고 있고 오케스트라 노조가 그 속의 일부로 편성되어 단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우리나라 오케스트라 노조만의 특이하고도 핵심적인 요구를 한 가지 소개하자면 ‘오디션 제도 폐지’이다. 오디션은 원래 오페라 극장에서 가수를 채용할 때 청각에 의해서만 판단하던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배역을 정하거나 승급을 결정하는 시험의 일종이었던 오디션 제도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단원의 채용여부를 결정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면서 그 성격이 변하였다. 5분에서 10분의 짧은 시간에 걸쳐 단원의 기량을 확인하고, 그것만으로 단원의 생존권까지 쥐락펴락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오디션 제도의 약점을 오케스트라의 관리자들이 단원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 노조의 주장이다. 오디션 제도의 폐지가 정당한지 아닌지의 논쟁을 떠나서, 사용자들이 노동자의 삶을 순간의 판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모습은 비단 예술계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그리 낯선 모습은 아닌 듯하다.


손에 기름때를 묻히며 일하는 사람들도 아닌데, 문화예술인들이 무슨 노동자며 노동조합이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임금을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직종이나 노동형태를 불문하고 모두 노동자다...

- 전국문화예술노동조합 소개글 일부


시청 주변을 갔다가 어디선가 상당한 실력의 노랫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길거리 공연도, 공연 홍보도 아닌 집회였다. 국내에서 논란이 되었던 국립 오페라 단원들의 해고와 관련하여 해고 당사자들이 복직을 요구하며 오페라를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려한 무대와 조명, 의상없이 관객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노래하고 있는 그들은 예술가라기보다는 집회참가자였다. 어쩌면, 예술가도 노동자다. 


* 사진1. 지휘자 정명.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 사진2. 지휘자 베르하르트 폰 카라얀.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팝콘 먹는 좀비]

07. 나의 방공호는 어디인가, <테이크 쉘터>

 

 

승훈을 다시 만난 건 한 달 뒤 대학로 파출소에서였다. 지난 한 달간 정체불명의 전염병과 관련된 소식으로 온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질병관리본부는 상당한 치사율의 신종전염병으로 판단되지만 공기 중으로나 가벼운 접촉으로는 전염될 일이 절대 없다는 발표를 신속하게 내놓았다. 이후 정부는 경찰을 동원하여 전염병 최초 진원지라는 혜화동 서울대병원 근방을 통행금지 시켰다. 모든 조치가 일사천리였다. 마치 원래 전염병이 퍼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정부의 신속한 대응에도 백신은커녕 정체조차 확인할 수 없다는 신종전염병에 대한 불안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수많은 소문들이 나돌았다. 지난번 전염병에 대한 경고메시지가 잘못 발송되었던 일과 경찰 병력까지 투입시켜 진원지를 아예 폐쇄조치한 것 등을 이유로 정부가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다는 추측이 잇달았다. 찌라시 소식으로는 불법체류자로부터 신종전염병이 시작되었고 이는 인간을 이용한 생화학테러일 가능성이 높으며 폐쇄된 구역 안에서 이미 백여 명 가까이가 죽었다고 했다. 인터넷에선 이때다 싶었던 종말론자들이 썰을 풀어댔다. 불안에 떠는 사람들은 마스크며, 방독면, 세정제, 각종 약품 및 비상식량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불안 속에서 한 달이 지났다. 어느새 올해도 끝나가고 있었다.

 

"오- 마이 쉘터. 얼마만인가 나의 소파."

승훈이 집에 오자마자 소파 위로 쓰러졌다. 승훈은 지난 한 달간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몇 가지 경찰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두 달 만에 보는 승훈은 대체 뭘 하고 지냈는지 전보다 훨씬 살이 쪄있었다. 살이 오른 얼굴에 특유의 능청스러운 표정이 더해지니 마치 만화영화 캐릭터 같은 모습이었다.

"소파 오염시키지마. 이 보균자 돼지 놈아. 넌 어떻게 된 놈이 거기서 살이 쪄왔냐."

"피검사, 소변검사, CT, MRI, 엑스레이… 한 달 동안 빡시게 돌았지. 그게 은근 노동이야. 배가 엄청 고프더라고. 병원 밥은 또 얼마나 맛있던지. 먹고 눕고 먹고 눕고. 특실이라 방도 엄청 좋고…. 또 간호사도…"

"아, 알았다. 알았어. 아무튼 다행인줄 알아. 새끼야. 세상 망하게 생겼다고 사람들 난리도 아니야. 너 하마터면 폐쇄구역 안에 갇힐 뻔했다고. 알기나해?"

"모-올-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그냥 극단 친구들이랑 마로니에 공원에서 술 마시다가 이상한 할아버지를 봤다구요-. 근데 그 할아버지가 어떤 여자 팔을 물었다니까. 그래서 달려가서 뜯어 말려놓고는 경찰 불러서 처리했는데. 갑자기 서로 가서 진술을 해달라고 하질 않나. 신종전염병 감염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병원엘 가두질 않나…. 작가양반이야말로 내 당황스러움을 알기나해?"

 

 

띵-동-

"배달이요-"

"오오- 그래도 병원에선 이건 못 먹었어. 치맥이라니! 내일 지구가 멸망한데도 나쁘지 않다. 이 정도면."

"이건 뭐 휴가 나온 군바리도 아니고…. 아무튼 그래서 집 나가서 뭐하고 돌아다닌 거야?"

"아하, 내 그 얘길 안 했군. 시나리오 좀 쓰느라. 극단에 있는 친구 방에 좀 있었어. 창작에 몰두했달까. 그래서 연락은 못 했다. 친구."

승훈이 경쾌하게 캔맥주를 땄다. 두 달 전 축축한 모습으로 집을 나갔을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원래의 능글맞고 기름진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거기에 알 수 없는 자신감까지 더해져있었다. 뭐 대단한 시나리오라도 썼나?

"그래서 시나리오는 좀 썼고?"

"그럼, 그럼. 작가양반 미리 축하파티나 하자고. 자- 건배건배-. 대작이 나왔지. 흐흐"

"오, 어디 들어보자. 뭔데?"

두 번째 닭다리까지 먹으려는 승훈에게서 닭다리를 재빨리 빼앗아 온 뒤 내가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설명하기가 조금 복잡한데…. 너 <테이크 쉘터> 봤어?"

"<테이크 쉘터>? 아니 못 봤는데."

"오오케이-. 그럼 그 얘기부터 시작해야겠군."

승훈이 반쯤 뜯은 닭날개를 내려놓고 번들거리는 입술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의 주인공 커티스는 건설노동자로 일하는 아주 평범한 남자야. 그에게는 그의 전부인 사랑스러운 아내와 딸이 있지. 아주 평화롭고 이상적인 삶이야. 문제가 조금 있다면 딸이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던 어느 날 커티스가 악몽을 꾸기 시작해.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고, 빨간 비가 내리고, 얌전한 애완견이 느닷없이 팔을 물어뜯고,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집을 습격하는 그런 악몽을 매일 꾸기 시작하는 거야. 근데 그 느낌이 너무너무 생생해서 커티스는 마냥 꿈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게 되는 지경까지 된 거지. 뭔가 계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야."

"그래서?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심플했으면 좋았겠지. 또 문제가 있어. 커티스의 어머니가 30대부터 정신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서 생활을 했단 말이야. 그래서 커티스도 비슷한 나이가 된 자기도 정신분열인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해. 정신과 책도 사서 읽고 어머니를 찾아가보기도 하지. 여기서 커티스는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돼. '과연 내가 정신분열로 미쳐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신의 계시로 세상의 종말을 미리 고지 받고 있는 중일까.'하고 말이지. 커티스는 그 어느 쪽도 확신할 수가 없어."

"으흠, 재밌는데? 네 시나리오도 이것만큼 재밌는 거 맞지?"

승훈이 나에게 냅다 닭뼈다구를 던진다. 명치에 닭날개뼈가 쿡하고 박힌다. 어쩐지 이제야 좀 사람이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실실 웃음이 나왔다.

 

"아, 들어봐 좀. 그래서 커티스는 극심한 불안에 떨며 최악의 사태를 준비하기 시작해. 집은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방공호'를 만드는 거지. 커티스는 점점 방공호와 종말에 더 큰 불안을 느끼고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이상한 사람이 되고 고립되지. 근데! 어느 날 정말 심판의 날이 온 것처럼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거야. 커티스의 가족은 방공호로 재빨리 대피하지. 방공호에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이 됐어. 커티스는 여전히 종말에 대한 불안을 느끼면서 밖으로 나가길 거부해."

"무섭겠지. 나라도 못 나갈 거 같은데."

"하지만 아내는 커티스가 지금 직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래야만 망상인지 계시인지 확인할 수 있을 테고,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 커티스는 결국 힘겹게 방공호의 문을 열어젖히지."

승훈은 내 얼굴을 살핀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이야기에 몰입해 있었다.

방공호의 문을 여는 순간 어떻게 되었을까. 세상은 여전히 그 앞에 있을까? 아니면 종말 이후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을까? 그도 아니면 그마저도 커티스의 꿈이었을까?

 

 

"그래서 결론은?"

"결론이라…. 이 양반이 손 안대고 코를 풀려고 하네. 결론은 직접 확인해봐. 자식아. 우리의 주인공이 방공호 문을 직접 열어봤으니 작가양반도 직접 열어서 확인해야지 않겠어?"

"알았다. 그래. 네 시나리오나 말해보지 그래 이제? 거장의 시나리오 달달 전달해주지 말고."

"여하튼 영화를 보고난 나의 결론은 이거였어. '근데 나의 방공호는 어디지?', '방공호 없는 인생이 괜찮은 인생일까?' 이런 것들."

"왜 너도 하나 만들게? 나는 빼줘라. 갑자기 군대에서 방공호 파던 기억이 떠오르네. 그래, 고민해보니 네 방공호가 어딘데?"

"내 방공호는 당연히! 비밀이지. 나만의 방공혼데."

승훈이 가슴을 툭툭 치면서 강조한다. 방공호라. 그래 그럼 나의 방공호는 어디일까.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나는 어디로 숨어들어갈까. 예전 우리 집? 고향 집? 그도 아니면 안국동 그 카페? 여러 장소가 떠올랐지만 이곳도 저곳도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여기 승훈의 집이려나…. 생각해보니 이 놈과 이렇게 시시껄렁하게 맞이하는 종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책 없이 서로 비꼬고 놀리다가 번쩍하고 사라지는 거.

 

"야, 룽. 뭔 생각을 그리해. 임마. 봐봐, 그보다 내 시나리오는 이런 거야. <테이크 쉘터>의 반대인 상황인거지. 세상사람 모두가 마치 내일이면 종말이 다가올 것처럼 준비하면서 살고 있는 거야. 주인공은 그런데 아무리 봐도 세상이 종말할 것 같지 않거든? 그래서 사람들에게 증거가 있냐고 따져 물어. 그래서 들어본 증거들이 굉장히 그럴싸해. 최근 들어 자연재해가 급증하고 있고,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을 계속하고 있고, 빈부의 격차는 메울 수 없을 만큼 벌어졌고, 법은 지키는 자들이 바보가 되었다는 등등. 하지만 주인공은 그렇다고 세상이 종말할 거란 건 인정할 수 없는 거지. 오히려 종말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세상이 정말로 망해버릴 거라고 생각해. 실제로 오지 않아도 그 불안들만으로도 세상이 무너져버리는 거지. 그런데 정말 세상의 종말과도 같은 날이 다가와. 모두들 엄청난 빚을 지고 준비한 방공호로 들어가지.

"아하, 우리의 주인공은 방공호로 들어가지 않고 맞서는 건가?"

"빙고! 그리곤 어떻게 될까? 사실 여기부터가 진짜 재밌는 시나리오야. 흐흐. 오늘은 여기까지."

"고맙다. 더 들었으면 졸릴 뻔 했어. 되게 지루한데?"

"뭐 임마!"

 

 

짓궂게 말했지만 승훈의 시나리오는 꽤 그럴듯했다. 지금의 상황과도 딱 맞는 느낌도 들었다. 뉴스는 이 이야기 와중에도 내일이라도 신종전염병에 의해 세상이 종말할 것처럼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과거의 신종유행성질환 사례 가운데 대표적인 1968-69년의 홍콩 독감, 1957-58년의 아시아 독감 등은 모두 아시아에서 발생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2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1918-19년의 스페인 독감도 사실은 아시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 아시아가 새로운 전염성 질환의 진원지가 될 가능성은 굉장히 높았죠. 그게 우리나라에서 터진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합시다. 이 신종전염병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믿지 않는 자들의…

"…인간을 이용한 생화학테러의 가능성은 어떻게 보십니까. 혹시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은 없나요…"

"초특가 할인! 전염병 이 비상세트 하나면 문제없습니다. 지금 바로 전화주세요!"

"전염병이요? 대학 못 가면 어차피 인생 끝나는데. 학원을 안 다니는 건 바보죠."

"네, 또 그게… 최근 수 십 년간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아시아 각국에서는 소득향상과 함께 항생제 사용도 늘고 있으며… 의사와 병원들이 이익을 챙기기 위해 항생제 남용을 더욱 부추겨서…"

"현재 대기업 회장들 위치임. 한국에 거의 한 명도 없음ㅋㅋㅋㅋ어쩔 진짜 망하나봄"

 

 

"야, 룽. 뉴스 좀 꺼라. 안 그래도 언제나 망할 것 같은 세상이었는데 신종전염병 하나 추가됐다고 되게 난리네. 아, 참! 그리고 내일 모레 크리스마스네? 파티 하자. 형님 퇴원 파티 겸 종말 파티. 나는 내 방공호 좀 보고 온다."

승훈은 나에게 윙크를 날리고 집을 나섰다. 아, 저 놈 방공호가 무슨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었나? 생각해보니 커티슨지 하는 주인공의 방공호도 실은 가족이었던 건가….

창밖으로 첨탑 위의 붉은 십자가들이 여럿 보였다. 차가운 겨울밤이라 더 빨갛게 달아오른 십자가들이 마치 나에게 묻는 듯 했다.

 

"너의 방공호는 누구니?"

 

 


 

BY  룽  

영화와 음악, 책을 사랑하고픈 기자지망생. 

행복과 항복 사이에서 글을 쓰는 중. 


 


기적이라고 말하지마.



Apollo 18 - 'Warm' <The Red Album>




기적은 없다.


너무나도 명증적인 결론이다.


기적은 없다.

다시 한 번 말해도 그 명성에 빗금 하나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은

없기 때문이다.


온 누리의 만 백성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솔직히, 그래.

모두가 알고 있다. 알면서도 너는 기적을 바란다. 나 또한 간절히 바란다.


우린 알면서도, 그 빌어먹을 신기루를 쫓아서-

울리지 않을 휴대폰을 쥐고,

'안타깝다'고 적혀있을 합격여부 통보 사이트에 접속하고,

죽어가는 혈육에 체온을 얹어 기도한다.

그깟 거짓부렁따위에 휩쓸려서는-

시를 쓰고,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춘다.

심지어 읽지 않을 너에게 편지를 부치기도 한다.



기적을 말하는 장사치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은 더없이 좋은 시즌이다.


아파하는 이에게 헛된 기대를,

외로운 이에게는 킬링타임용 상품을,

정말로 죽어가는 이에게는 철저한 무관심을.

선사한다.


거짓 예언자와, 관심병자와, 컨베이어벨트에서 찍혀나온 부나방,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과시함으로써 다른 이의 행복을 짓이기는 낯뜨거운 목소리들로.

성탄전야는 숨이 막힌다.

명동의 희번덕이는 네온보다, 더 많은 사람의 떼로

나의 거리는 숨이 막힌다.

멀쩡한 나무마저 전구의 사슬로 옥죄여, 질식시키는 밤이다.

이 밤에는

예수를 대신해-

계획에 없던 아이가 수도없이 잉태될 것이다.

그 중, 수많은 아이가 낙태될 것이다.

수많은 아이가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적의 날로 기억한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기적의 날에,

노래를 크게 틀고

눈을 가리고는

거짓증언을 선서한다.


지금부터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내가 들은 바, 본 바 대로만 증언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기적만을 말하겠습니다.







자-


기적의 크리스마스여.

어디 한 번 그 매혹의 춤사위나 구경해볼까.

그래, 나는 너의 몸을 원한다. 하지만,

너를 믿지는 않는다.

이 빌어먹을 것아.


어디 한 번 춰 보란 말이다.

너의 그럴듯한 눈웃음과 함께 말이야.

내 손아귀에 네 놈이 없어도 나는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사실 나는 추울 수가 없다. 추위를 느낄 수가 없다.

2년 전처럼, 아니 3년 전처럼.

뜻하지 않은 열기로

나의 상체는 펄펄 끓어 넘치고 있다.

찬 공기와 만나 식어갈 귓바퀴에서는

이제 겨우, 따뜻한 냄새가 나고 있다.


쉬이이이- 소리내며

겨우겨우 식어갈 따뜻한 귓바퀴로는

'기적'이라는 파동을 그리는 비슷한 무엇도 흘러들지 않는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차가운 손을

응원할, 그를 위해 기도할

온기만

이렇게.


이렇게,

들려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