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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1.18 시네마폴리티카⑥: <탐욕의 제국>, 삼성 공장의 산업재해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2
- 2013.11.17 [Op. ?] 휴재공지 1
- 2013.11.15 [팝콘먹는좀비] 05. 그것만이 내 세상, <더 레슬러> 10
- 2013.11.13 [고리오영감] 아이에서, 어른으로.
- 2013.11.10 아램디의 '지속 가능한 음악' 5
글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삼성 반도체 공장의 산업 재해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딴 세상 같았어요. 회사에 가면 남녀 모두 다 똑같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게 조그만 다른 나라 같았어요. 신기했어요. 그 안에 회사도 있고, 기숙사도 있고 병원도 있고, 내가 거기에 있다는 자체가 기분이 좋았던 거 같아요. 라인 안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기억나고... 진짜 로봇들이 일하는 거 같았어요.” 깨끗한 방에서 하얀 방진복, 하얀 방진모, 하얀 마스크를 쓰고 눈만 내놓고 일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1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저는 아이폰을 씁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의 반정도는 갤럭시를, 또 일부는 옵티머스를 쓰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스마트폰이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는지 전혀 모릅니다. 막연히 스티브 잡스나 팀 쿡같은 사람이 회의와 성찰 끝에 아주 크리에이티브하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추상적 과정 쯤으로 여기곤 하죠. 좀 더 생각하면 프로그래머나 개발자, 혹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연구원 정도를 떠올릴까요. 첨단 제품의 물리적 생산 자체에 대해서는 집단적 망각에 빠져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동차를 생각하면 즉각적으로 공장의 생산직 남성 노동자가 떠오르는 것과 대조적이지요. 화폐 경제에서 판매와 구매, 혹은 생산과 소비의 분리가 갖는 정치적 효과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에서 고진까지 무수히 많은 논자들이 지적해 왔지만, 이 정도로 사회적 담론에서 배제되어 있는 분야는 적습니다. 거의 고의적 공백처럼 느껴질 정도이죠.
그래서 <탐욕의 제국>에 나오는 ‘여공’들은 생경합니다.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유독성 화학물질로 가득찬 생산시설을 오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노동자들 말이에요. 이들이 몇 겹의 장갑을 끼고, 눈만 보이는 하얀 방진복을 입은 채 기계음 속을 활보하는 모습은 새롭기 때문에 위태롭고 불안합니다. 게다가 감독은 아무런 설명 없이 관객을 공장으로 던져놓기 때문에 더욱 낯설게 느낄 수밖에 없지요. 눈모양만으로 동료를 인식하고, 눈이 예쁜 신입을 질투하고, 눈 주위 모양이 예쁘게 나오는 방진복을 찾아 여러 번 갈아입는다는 여공의 농담을 듣고서야 우리는 옛 친구나 동생을 떠올리며 이들을 친근하게 여기게 됩니다.
사실 다큐멘터리 대부분은 이 ‘친근하게 만들기’에 할애됩니다. 우리는 삼성과 맞서는 노동자를 소개받고, 그들의 사연을 듣고, 일상을 보고, 무엇보다 대화를 나눕니다. 삼성에 들어갈 때 얼마나 기뻤는지, 작업이 얼마나 고되고도 보람찼는지, 어떤 소박한 꿈을 가졌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갑작스레 찾아온 질병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허무했는지, 답답했는지, 분노했는지, 시시콜콜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듣게 되지요. 감독은 해설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증언자들의 목소리와 현장의 모습만으로 스토리를 끌고갑니다. 아마도 ‘선동적 다큐’라는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서겠지요. 이런 다큐를 찍는 이들이 얼마나 ‘해설하고픈’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었을지는 예상할 만 합니다. 그러나 홍리경 감독은 카메라로 말하겠다고 작심한 듯, 2년여 동안 반올림의 활동을 따라다니며 찍은 영상과 음향을 날 것 그대로 엮어놓습니다.
그러나 소개는 불친절합니다. 처음부터 관객들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여러 목소리에 노출되는데, 다큐가 끝날 때까지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 한 번 없습니다. 심지어 이름자막도 없지요. 반올림의 활동을 잘 모르는 관객은 어리둥절하기 쉽습니다. 아마도 영화 중반정도는 가야 전체적인 퍼즐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등장인물(주인공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각각의 사연에 익숙해지지요. 영상의 서두에 등장한 학교를 졸업한 고 황유미 씨(2007년 백혈병 사망,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와 아버지 황상기 씨, 뇌종양에 걸려 말도 제대로 못하게 된 한혜경 씨와 어머니 김시녀 씨, 남편 황민웅 씨(2005년 백혈병 사망, 삼성반도체 기흥공장)를 잃고 거리를 뛰어다니게 된 정애정 씨, 그리고 이들을 돕는 반올림 활동가와 노무사 등 오늘의 반올림을 만든 주인공들이 그들입니다.
이처럼 인물에 주목하는 전개방식은 이 다큐멘터리의 강점이자 약점입니다. 강점은 자명하지요. 관객은 피해자의 고통에 직접적으로 공감하게 되고,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립니다. 뇌종양으로 제대로 걷지도 말할 수도 없게 된 상황에서도 삼성은 그럴 리 없다 믿는 한혜경 씨 사연을 누가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한 순간에 딸을 잃고도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을 때 황상기 씨가 느꼈을 절망감은 또 어떻고요. 무엇보다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건 정애정 씨 사연입니다. 같은 합창반에서 만났다며 “그 중에서 내가 좀 눈에 띄지”라고 천진하게 웃는 대목에서는 관객들도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무장해제당한 상황에서 그 뒷 문장을 듣고 나면 누구라도 눈시울을 붉히게 될 겁니다. 상투적인 문장이지만,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니까요. 이 다큐의 힘은 바로 그 외면할 수 없는 현실성에서 옵니다.
또 한 가지 강점은 인물과 인물 사이의 드넓은 공백을 관객 채우도록 남겨둔다는 점입니다. 문제에 대해 지진하게 부연하는 대신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전면에 드러나도록 두는 것이지요. 영상은 목소리를 드러내줄 뿐, 이에 대한 판단은 관객의 몫이에요. 예컨대 어떤 관객들은 주인공들의 세련되지 못한 어휘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겠지요. 문제의식에 공감하지만 활동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삼성이 회유를 시도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의 경우도 어느 정도 결론은 열려있습니다. 감독이 특정한 관점을 명시적으로 옹호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스스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은폐된 어떤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지요.
그만큼 한계도 명백합니다. 상황을 파악하려 할 때 수반되는 여러 의문들에 대해서 다큐멘터리는 아무런 대답도 제공해주지 않아요. 예컨대 그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동안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노동조합은 무엇을 했는지, 왜 노동조합이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왜 한국에서는 산업재해인정을 받기 위해 노동자가 입증을 해야 하는지(기업이 아니라!), 근로공단이 이들을 문전박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이 주최한 공청회나, 국정감사의 위상에 대한 나름의 평가도 없지요. 이는 ‘운동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적 말로 회피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관객들의 공감과 슬픔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다큐가 당연히 가져야 할 문제제기와 전망을 제시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특히 문제에 접근하는 어떤 ‘프레임’이 없다는(혹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은 치명적입니다. 감독은 이 문제를 주인공들의 개인적인 안타까움이 아니라 더 큰 사회구조적 맥락 속에서 규명하는 작업을 소홀히 합니다. 그 결과 이 문제는 억울한 피해자들과 막무가내 삼성이라는 유치한 이분법 속에서 길을 잃지요. 갈등은 매우 추상적이고도 작은 영역으로 축소됩니다. 악덕자본 삼성이 정신차려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는 간단한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결과적으로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임을 일깨워주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사연이 주는 깊은 울림은 따라서 매우 짧게만 지속됩니다. ‘탐욕의 제국’이라는 야심찬 제목을 붙였지만 그 ‘탐욕’이란 무엇인지, 왜 ‘제국’인지를 떠올리려 해도 그저 ‘노동자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탐욕적인 이건희의 제국’이라는 수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그저그런 비판입니다. 그러나 100분짜리 다큐멘터리라면 그 이상을 보여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클린룸에 울려퍼지는 기계소리, 입 없는 이들의 날선 목소리,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운 가슴 먹먹한 무소음으로 이루어진 영상은 처음에 그러했듯이 고등학교 졸업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려는 것이겠지요. ‘또 다시 이 싱그러운 청춘들이 사그라지기 전에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탐욕의 제국>은 그 지점까지 관객을 끌고 오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못합니다. 모두의 관심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정도의 현실인식에서 그친 것이지요.
어쩌면 그 역할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려던 의도인지도 모르겠네요. 사회를 바꾸는 건 결국 사람이지 영상 나부랭이가 아니니까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탐욕의 제국’을 만들어낸 범인은 영상을 보고도 행동에 나서지 않는 바로 우리들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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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근히 살아서 김근근인 역사/정치학도.
작품을 감상할 때면 주제보다도 시대와 맥락에 과도한 흥미를 느끼는 변태.
치킨과 두부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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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번 <삐아오의 들리지 않는 음악> 휴재합니다.
더 재밌는 이야기로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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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먹는 좀비]
05. 그것만이 내 세상, <더 레슬러>
"오늘 오전 6시를 기해 우리나라가 태풍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기상캐스터가 개운한 표정으로 날씨를 전한다. 창밖을 보니 날씨는 여전히 찌푸려있다. 부산에서 따라 올라온 태풍은 사흘을 머물다 갔다. 가을 태풍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강한 비바람으로 서울 이곳저곳도 피해를 봤다고 한다. 유리창이 깨지고 간판이 날아갔으며, 가로수가 뽑히고, 벽이 무너졌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밖은 너무나 조용하다. 그 거대한 거친 소용돌이는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사라져버리는 걸까….
나는 사흘 내내 외출하지 않았다. 오랜만의 여행이 힘들었는지 그저 집에만 있고 싶었다. 승훈은 사흘 내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 시나리오 좀 쓰려고. 며칠 나갔다 올 테니까. 집 잘 보고 있으셔요오-."
"그래? 어디 가는데?"
"몰라, 안 가르쳐 줄 거야. 내 얘기 홀랑 뺏어서 소설 쓰면 어쩔라고. 크크. 나 간다-."
오랜만에 혼자 있는 시간은 나쁘지 않았다. 몇 편의 영화를 보았고, 소설 구상도 조금 했다. 안타깝게도 소설가다운 시간활용은 거기까지였지만.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승훈의 DVD장 한 편에 꽂힌 만화책을 보는데 썼다. 유리창이 깨지고 간판이 날아가고 가로수가 뽑히고 벽이 무너지는 동안 나는 태평하게 만화책을 넘겼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사흘이 지났고, 어느새 마지막 권만을 남겨두고 있었고, 어느새 태풍은 어디론지 떠나버렸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지만, 어찌됐든 마지막 권은 읽어야 한다. TV를 끄고 소파에 누워 마지막 권을 펼치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승훈이었다. 사흘 만에 사람을 보니 지겹게 보는 승훈이 놈도 반가웠다.
"나 왔어. 작가양반. 아침부터 뭐하시나?"
"어어, 왔어? 뭐하긴, 소설가답게! 독서 중이지."
"오, <슬램덩크>라…. 짜식. 안목이 있군."
"오랜만에 다시 보는데, 이거 진짜…"
"그래그래, 알아. 네 소설보다 억만 배는 재밌는 거."
승훈이 불쑥 일어나 거실 등을 끈다. 집이 밤처럼 깜깜해진다.
"이 새끼가! 야, 책 안 보여. 불 켜."
"그건 나중에 보고 영화나 하나 보자. 혜선이가 나보고 꼭 보라더라…."
날씨 탓인지 오랜만이라서인지 모르겠지만 승훈이 어쩐지 낯설어진 느낌이다. 표정도 말투도.어둑한 방에서 승훈의 표정을 살펴본다. 새끼, 무슨 일이 있었나?
"지금 보자고? 혜선 씨가 추천했다고? 뭔데?"
"음- 여기 있다. <더 레슬러>. 아직 안 봤거든."
"아, 미키 루크 나오는 영화 맞지? 나도 안 봤어."
우리는 아침부터 맥주에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 시작과 함께 헤비메탈이 흘러나온다. 승훈은 리듬에 맞춰 머리를 까딱이며 휴대폰을 확인한다. 승훈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다. 나는 승훈에게 말을 붙여본다.
"감독이 대런 아로노프스킨가? <블랙 스완> 정-말 좋았는데."
"좋았지- 아주- 좋았지-. 그나저나… 미키 루크 엄청 늙었네. 참."
승훈은 미키 루크가 맥주를 들이키는 장면에서 함께 술을 들이마신다.
80년대 최고의 레슬링 스타인 랜디가 이제는 노쇠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경기를 한다. 랜디가 경기를 끝내기 위해 3단 로프에 오른다.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는 어쩌면 저 점프를 뛰고 죽을 수도 있다. 의사는 그의 심장이 이젠 레슬링을 버틸 수 없다고 했다. 그의 표정이 보인다. 슬픔인지, 환희인지, 회한인지, 만족인지 모를 무엇으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결국, 점프.
영화는 거기서 끝났다. 크레딧이 올라가고 노래가 흐른다.
'재주 하나 잘 부려 한 때 잘 나가던 놈- 환호소리에 취해 그 맛에 살았다네-.'
승훈과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밖은 더 어두워져 있었다. 태풍은 아직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다시 비를 뿌리고 있었다.
미키 루크는 80년대 최고의 꽃미남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사춘기 시절 친구들과 좋은 거라며 몰래 보았던 영화 <나인 하프 위크>에서의 그의 우수에 찬 눈빛과 관능에 취한 몸짓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러나 그 섹시했던 남자는 이후 성형부작용과 약물중독, 복싱선수로의 외도, 스캔들로 무너져갔다. <더 레슬러>는 미키 루크의 실제 삶과 영화 속 랜디의 삶이 겹치며, 영화 밖까지 이야기를 확대하고 있었다. 젊음과 영광이 있던 과거와 망가져만 가는 현재의 삶. 비참한 바깥세상과 화려한 무대 위 세상. 그 속에서 과연 무엇을 자신의 세상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에겐 지금 눈앞에 있는 세상이 아닌, 다른 어떤 곳이 자신의 세상이기도 하다. 랜디에겐 레슬링 무대만이 오직 자신의 세상이었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소설 밖의 세상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어쩌면 나는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만 쓰게 될지도 모른다. 지난 2년간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소설은 이미 레슬링처럼 한물 간 장르인지도 몰랐다. 그래, 어쩌면 나도 랜디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승훈이 입을 열었다.
"야, 룽. 넌 <슬램덩크> 걔네가 지금쯤 뭐하고 있을 것 같냐?"
"응?"
"20년이 지났잖아.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걔네들 뭐하고 있을 거 같냐고."
뭐하고 있을 것 같냐고? 영화를 본 뒤라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누군가는 열정이 식어버렸을 거고, 누군가는 실패했을 테고, 누군가는 또 성공했겠지…. 그런데 <슬램덩크> 결말이 뭐였더라….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우승을 했던가? 졌던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뭐,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겠지. 가끔씩 '우리 고딩 때 참 좋았지'하면서 술 한 잔 하는 배나온 아저씨들 됐으려나."
"한 명도 농구 안 하고 있을라나?"
"뭐, 농구를 계속 했대도 지금은 은퇴했겠지. 다…."
승훈은 입을 꾹 다문다. 나는 결국 평소와 다르게 우울한 승훈을 참지 못하고 쏘아 붙였다.
"야, 너 근데 오늘 왜 그러냐? 3일 만에 들어와서는 왜 장마철 널어놓은 빨래처럼 꿉꿉한 건데? 나까지 기분 안 좋아지게."
승훈은 대답 없이 맥주를 연거푸 들이킨다.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 더 답답해진다. 비 맞는 한강을 바라보며 승훈은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넌, 이 영화가 어떤 거 같냐? 너는 랜디가 안쓰럽냐?"
"안쓰럽냐고? 그냥 무섭다. 나도 글 못 쓰게 될까봐."
"나는 말이야…, 랜디가 부럽다. 랜디는 링에서 엄청난 환호를 받아봤잖아. 최고의 스타였고. 그래, 그래서 지금이 더 불행한 거겠지. 근데, 난 링에서 환호를 받아본 적도 없어. 씨팔, 나는… 그 불행마저도 존나 질투가 나더라니까. 이해가 되냐, 작가양반? 근데 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한심하고…."
"야, 또 뭔 소리야. 네가 나보다 잘 살고 있잖아. 난 집도 절도 없이 얹혀사는데, 넌 집도 이렇게 좋고, 좋은 차도 있고, 뭐가 부족해…"
"아, 씨팔! 잘 산다, 잘 산다. 그 얘기 좀 그만해. 넌 내가 집 있고 차 있고 집안 부자니까 잘 사는 거 같아? 그래서 넌 내가 걱정도 없고 행복해보이냐고. 네 눈엔 내가 생각 없는 한량 같지? 너도 똑같아. 새끼야. 가난한 예술가? 씨팔. 예술가는 잘 살면 안 되냐? 어?"
위로랍시고 한 내 말이 실수였다. 승훈의 뇌관을 건드리고 말았다.
"왜 이래. 야, 그래 내가 미안. 갑자기 너 왜 그래? 평소답지 않게."
승훈이 옷을 챙겨 입고 일어섰다. 성큼성큼 발을 옮기더니 가방을 챙겨 나갈 채비를 한다.
"야, 룽. 넌 혜선이가 나한테 이 영화 왜 꼭 보라고 한 것 같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승훈을 바라보았다. 승훈의 표정이 꼭 랜디의 복잡한 표정과 닮아 보인다.
"나, 혜선이랑 헤어졌다."
"야, 그게 무슨 소리야?"
"며칠 나갔다 올게."
쾅-. 현관문이 닫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행복에서 추락한 사람, 행복을 가져보지도 못한 사람, 이건 내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넌 행복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 불행마저도 질투하는 사람. 대체 누가 더 행복하고 누가 더 불행한 걸까…. 정말 모르겠다.
나는 다시 <슬램덩크> 마지막 권을 집어 들었다. 어느새 비마저도 그쳐있었다. 나는 책장을 넘긴다. 그 거대하고 거친 태풍은 정말이지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BY 룽
영화와 음악, 책을 사랑하고픈 기자지망생.
행복과 항복 사이에서 글을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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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고리오 영감』(민음사, 1999)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어떤 순간에 문득, “이제 나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러한 순간이 ‘문득’ 찾아오는 이유는 자신의 변화를 인지하는 순간은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변한 자신을 보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일 것이다. 한 번 어른이 되고 나면, 다시는 아이였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이와 어른을 구분짓는 것일까?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은 이 질문에 한 가지 대답을 들려준다.
발자크는 아이와 어른을 구분 짓는 것은 ‘순수’ 또는 '순수의 상실'이라고 말한다. 그것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아이의 순수한 시각은 대상의 본질을 포착한다. 아이의 눈과 아이가 바라보는 대상을 그대로 바라본다. 그러나 ‘순수’를 잃어버린 어른의 시각은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 어른의 눈과 시선의 대상 사이에는 많은 장애물이 존재하여, 대상은 굴절되고 왜곡된 형상으로 망막에 맺힌다. 어른은 더 이상 벗을 수 없는 안경을 쓰게 된 존재인 것이다.
『고리오 영감』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인 ‘으젠 드 라스티냐크’는 아이임에도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 으젠은 아이의 영역인 그의 고향 앙굴렘에서 벗어나, 어른의 영역인 파리 사교계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 그는 상류층의 문법을 터득하고 사교계의 법률을 배우며, 계략에 당하고 술수를 펼치면서 서서히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고리오 영감』의 줄거리는 앙굴렘의 아이가 파리의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인물은 ‘으젠’인데, 왜 소설의 제목을 차지한 건 ‘고리오 영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고리오 영감은 작가가 강조하고픈 ‘순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른의 논리 – 특히 팽배한 자본주의의 논리 – 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딸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러나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딸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은 보잘 것 없고 귀찮은 것이고 그의 돈만이 중요한 것이 되고 만다. 그의 사랑은 뭉개지고 짓밟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가지 딸들을 위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의 사랑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되고, 고리오 영감의 기괴할 정도의 사랑은 숭고라는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렇다면 앞선 질문을 뒤집은 질문,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이 왜 ‘으젠’이어야 하는가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 심지어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두 딸들까지 – 고리오 영감을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가치로만 판단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아직 아이와 어른의 경계선에 놓여있는 ‘으젠’과 정말 어린아이인 심부름꾼 ‘크리스토프’ 뿐이다. 빈털터리가 된 그의 초라하고 비참한 죽음을 지켜보는 것도 으젠과 크리스토프 뿐이다.
고리오 영감은 차가운 땅 속에 묻히고 이제 ‘순수’는 사라져버렸다.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본 으젠은 이제 자신이 어른이 되는 길 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그는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는 청춘 시절에 흘려야 할 마지막 눈물을 그곳에 묻었다. 이 눈물을 순결한 마음의 성스러운 감동에서 흘러나왔다. 그가 떨어뜨렸던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튀어오는 것 같은 눈물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으젠의 이런 모습을 보고 크리스토프마저 가버렸다.
혼자 남은 라스티냐크는 묘지 꼭대기를 향해 몇 걸음 옮겼다., 그리고 그는 센 강의 두 기슭을 따라서 꾸불꾸불 누워 있는, 등불들이 빛나기 시작하는 파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방돔 광장의 기둥과 불치병자 병원의 둥근 지붕 사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가 들어가고 싶었던 아름다운 사교계가 있었다. 그는 벌들이 윙윙거리는 벌집에서 꿀을 미리 빨아먹은 것 같은 시선을 던지면서 우렁차게 말했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사회에 도전하려는 첫 행동으로, 라스티냐크는 뉘싱겐 부인집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396)
으젠은 고리오 영감과 함께 그의 마음 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순수’마저도 땅에 묻는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묘지 꼭대기에 올라서서 – 자신의 순수했던 시절을 밟고 올라서서 - 자신이 들어가려고 애썼던, 그리하여 마침내 들어갔던, 그리고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할 파리의 사교계를 바라본다. 으젠은 이제 어른이 되었으며, 어른의 방식으로 어른의 세상에 도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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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녕하세요.
2. 시선블로그에 새로운 필진으로 참여하게 된, 아램디 입니다. (아.... 혼자 설레도 되는 거죠?)
3.어찌어찌 4년 정도를 이어온 밴드활동을 하고 있어서인지, 저는 대중음악에 대한 포스팅을 할 예정입니다.
4. 제목은 : '지속 가능한 음악' 입니다.
; 제 음악관입니다. 음악을 위한 음악, 연주를 위한 연주,
'지속 가능할 지 안 할 지' 같은 건 묻지 않아서 지속 가능할 수 있는,
존재론적 음악.(무슨 말이죠?)
5. 집필 형식은 격주로 '한 곡' 을 정해서 제 생각을 몇 마디(혹은 몇십 마디, 최악의 경우 몇 억 마디) 적는 정도가 되겠습니다.
; 곡 선정 기준은 <대중음악 중 '좋은'(밑줄 쫙쫙) 곡> 되겠습니다.
- youtube 링크를 사용할 예정입니다.
6. 집필 방향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하지만 공공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직관적이며,
재미있고자 부단히 노력하면서도,
진지한 척을 아주 버릴 수는 없는, 그런 글을 쓰고자 합니다.
(솔직히 그냥 '잘' 쓰고 싶어요.... 사실 그것 뿐이에요. ㅠ^ㅠ^)
7. 포스팅 날짜는 일요일 입니다. 영어로는 Sunday구요. 줄여서 Sun인데, 블로그 이름이 seesun이네요.
8. 죄송합니다.
9. 9번을 빌려,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신 룽을 비롯한 다른 필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앞으로 함께할 70억 독자에게 미리 감사의 말씀을 예약 문자합니다.
10. 죄송합니다.
날씨가 춥네요.
이어폰 꼭 챙기시고,
Antifreezing 하시길.
(스펠링이 맞나요?)
10.5. = P.S.
오늘의 추천 곡은 The 1975의 <The 1975>에 수록된 'The City' 입니다.
앨범 전반에 걸쳐,
마치 The script가 2008년 데뷔앨범 <The Script>를 내놓았을 때 느낀 '익숙한 신선함' 과
비슷한
기분 좋은 청량감이 들더군요.
이 앨범이 요즘 굉장히 핫!하다는 소문이 있던데, 저는 핫!한 노래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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