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자라면서, 빙구는 세상의 대부분과는 '맞지 않아 보이는' 혹은 '틀려 보이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주류는 나를 그들로부터 멀찍이 떨어뜨려놓고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라는 말을 가르쳤다. 내가 신뢰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주 지당한 공리라는 듯 그들을 이르러 그 말을 썼고 나는 멀찍이서 꼬물거리는 그들이 얼마간 불쌍하고 가여웠다. 또 그 명제가 당연히 옳다는 걸 이해할 만큼은 철이 들었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별 고민 없이, 심지어는 약간 비장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어른들은 어려운 것을 안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권력을 쥔 사람들의 말을 따라하는 것은 정말 쉬웠는데 말이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간질간질하고 달달해서, 그 감질맛에 이끌려 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책상 앞에 붙어 앉아 공부를 하고 그들이 좋다고 말하는 대학에 가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는 동안, 틀린 게 아니라 다른 존재라는 당신은 여전히 이쪽으로부터 멀 있었다.

 그런 당신들이 올린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았다. 무대 위 당신들은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었고 단언컨대 결코 불쌍하지도 가엽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정말 말그대로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뿐이었다. 그러나 줄곧 그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해 왔던 나는 정작 보는 내내 불편했다. 그 말이 합리화하는 힘의 논리와 가식, 심지어는 지금 써내려가고 있는 말들에조차 스며 있을지 모르는 위선과, 좁은 우물 속에서 멀대처럼 키만 키운 나의 오만이 부끄러워서. 극단 애인의 [고도를 기다리며]다.



고도를 기다리며

극단 애인






에이블 아트

 장애인만의 고유한 움직임과 표현으로 무대를 구현하는 극단 애인은 지난 10일부터 열흘간 또 한 차례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렸다. 애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2010년 초연된 이후부터 여러번 수정을 거치며 4년간 지속되어 왔다. 애인의 지향점은 '에이블 아트(able art)'로, 그들은 장애인이 흔히 무능력(disable)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에 반대하여 새로운 가능성의 예술(able art)을 제시한다. 나아가 장애인들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예술을 통해 나아가 사회에 새로운 예술관과 가치관을 창조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

 중증의 지체장애인들에게 말처럼 쉬운 작업은 아니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그들이 가진 장애를 되도록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과 병행하여 이를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언어로 만들기 위해 깎아내고 다듬는 과정이 수반되었으리라. 어쩌면 전자보다는, 비장애의 틀 속으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밀어넣어야 하는 후자의 작업이 주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대사 전달과 몸 사용이 제한적이라는 점은 점은 무대에 오르는 이에게 있어 치명적인 오점이었을 터였다. 또렷하게 대사를 말하지 못하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데 어떻게 관객에게 원활하게 정보를 전할 것이며, 캐릭터의 행동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할 것인가. 이와 같은 난점들로 극단 애인의 처음은 많이 어려웠을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이러한 상황에서 애인이 선택한 것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한없이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기만 하는 이야기.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든 말들은 결국 고도를 기다린다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그를 왜 기다리는지 알지 못한다. 시간은 반복되고, 공간은 고정되어 있고, 인물들은 성격도 캐릭터도 없이, 끝없는 기다림만 지속된다. 이 무지하게 지루하고 권태로운 부조리극은 폐관 직전이었던 바빌론 소극장에서만 400회가 넘는 공연기록을 세우며 20세기의 대표적 희곡으로 이름을 남겼다. 

 시공간의 변화도, 정보도, 갈등도, 사건도, 기승전결도, 캐릭터도 없다. 명확한 대사전달과 움직임이 어려워 관객에게 복잡한 서사를 수신하기 힘든 애인에게는 핸디캡을 최소화하기에 더없이 좋은 극이었다. 애인은 거기에 러닝타임을 대폭 줄이고, 어려운 말들은 지체장애인들이 보다 쉽게 발음할 수 있는 어휘들로 대체했다. 그리고 두 명의 인물에 의해 대사를 반복하여 관객이 최대한 대사를 전달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최대한 크고 일차적인 제스처들을 통해 단순하고 분명하게 인물들의 행동을 드러내려고 했다. 이는 아무리 단순한 몸짓도 그들만의 신체를 거치면서 독특하고 신선한 움직임으로 재탄생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장애가 가진 고유성을 극대화시키는 극단 애인만의 개성이었다. 각자가 가져가는 고유한 리듬 또한 장애의 활용이 두드러지는 부분이었는데, 그들이 가진 느린 움직임과 호흡과 시선은 무대에서만 적용되는 시간의 흐름으로 관객을 끌어와 고도를 향한 그들의 긴긴 기다림에 함께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다른 여타의 [고도를 기다리며]들과 가장 다르고 가장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에 대해 대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수없이 재차 던져졌던, 그러나 아무도 답을 모르는 이 질문에 말이다. 


도대체 고도는 누구일까?





텅 빈 무대에 던져진 대본 없는 배우

 하이데거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았다면, 그는 고도를 두고 '죽음'이라고 일컬었을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우리는 텅 빈 무대 위에 던져진 대본 없는 배우들과 같은 존재다. 어느 순간 삶이라는 무대 위로 던져져 영문도 모른채 인생의 희비극을 버텨내야 하는 존재. 우리는 갑작스럽게 삶이 주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갑작스러운 순간에 죽음이 찾아올 것을 알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지도 모르는 그 시간을 막연히 기다리며 우리는 긴 기다림을 채워볼 따름이다. 그러나 불안은 여전히 우리의 깊은 무의식 속에 사라지지 않고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깊은 권태이자, 비본래적 삶의 형태로는 극복할 수 없는 우리의 존재론적 불안의 실체다.

 고도가 죽음이라면,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아무런 준비 없이 삶으로 내던져진 현존재인 우리를 의미한다. 영문도 모른채 견딜 수 없는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우리들. 그리고 극단 애인은 삶이라는 비극에 이유없이 던져진 우리네의 위태롭고 불안한 모습을 가장 쉽고도 강렬하게 가시화했다. 그들 자신의 신체    아무런 이유 없이 장애로 내던져진 신체    를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권태로운 그들의 기다림을 통해 관객으로부터 하여금 자신의 얼굴을 거기서 발견하게 한다. 극단 애인만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단연 독자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 순간 장애를 가진 주체는 뒤바뀐다. 장애인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가장 본래적이고 주체적으로 실존하는 반면, 관객은 자신의 삶 내면에 존재하는 장애의 실체를 보는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깊은 권태를, 삶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행해온 비본래적인 '시간죽이기'들과, 그것들의 허무와 무의미함을. 덧붙여 이 흥미로운 순간은, '다름'을 어떻게 연극이라는 공동작업의 도구로 활용할지에 대한 애인의 깊고 깊은 고민이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에서 끝나지 않는 말, 이토록 다른 당신과 내가 어떻게 함께할지에 대하여, 이어지는 이 끈질긴 질문에 말이다. 

 '다른데, 달라서 뭐?' 



다름에 대한 고민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서둘러 말을 끝냈고 여전히 당신과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앵무새처럼 그들의 말을 그대로 베껴 쓰던 나 역시 그러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말은 한없이 오만하고 가벼운 말이었다. 그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오히려 그 거리를 더 합리화하는 강자들의 말이었다. 그 말은, 이렇게 다른 우리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함께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다른 것일 뿐'이라 하는 것은 결국 틀리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그것을 더디게 배워가고 있다.

 다음달, 빙구는 다시 공연을 준비한다. 함께 뭔가를 만들어가는 것들은 어렵기 마련이다. 서로 부대끼고 난관에 부딪치고 실패하기 일쑤니까. 그러나 그렇게 함께한다는 것은 얼마나 인간적인지. 더 많이 불편해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더 많은 고민을 해야겠다고 거듭 생각한다. 우리의 다름이 함께하는 무대 위에서 어떻게 빛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내가 그동안 다르다는 말로 밀어낸 당신과, 그 당신을 다시 무대로 끌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었을지를 잊지 않으면서. 



* 업데이트가 늦어진 점 죄송합니다! 
*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김용규 저, 웅진 지식하우스)를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