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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9.17 [세계영화사 강의] 할리우드, 영화의 표준화를 가져오다
- 2013.09.13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데스데모나 – 웬 손수건에 관한 연극
- 2013.09.11 샤오롱바오의 영화 후루룩2 <바람이 분다>: '꿈'으로 '살아가기' 4
- 2013.09.08 시네마 폴리티카⓵ : Aesthetica Politica
- 2013.09.06 [Op.7] 박스석 이야기 No.1, 이상한 시선들. 2
글
※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임정택 외 9명의 저자가 쓴 『세계영화사 강의』(연세대학교 출판부, 2001)를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의 표준화를 가져오다
임정택 외 9인이 쓴 『세계영화사 강의』를 읽고
1994년, '비락식혜'라는 이름으로 식혜가 캔에 담겨 팔리기 시작했다. 1981년에 캔에 포도알을 담기 시작한 '봉봉'에 이어, 이제는 밥알마저도 캔에 담아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락 식혜 출시 소식에 어떤 이는 식혜를 언제 어디서든 마실 수 있다며 기뻐했고, 어떤 이는 지역마다 맛이 다른 식혜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비락식혜'의 출현을 걱정했다고 한다.
생산방식의 규격화와 분업화를 통한 대량 생산은 인류에게 분명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다주었다.(비락 식혜 덕분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식혜를 싼 가격에 맛볼 수가 있다!) 하지만 대량 생산이 마냥 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대량 생산의 도입은 분명 기존의 생산체계를 위협하였다.(비락 식혜 때문에 식혜를 이제 만들지 않는 어느 할머니가 계시다면, 우리는 식혜의 한 가지 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이야기는 비단 식혜에만 또는 상품생산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품생산을 필두로, 다양성을 위협하는 획일적 대량 생산 시스템은 문화상품에도 적용되었고 그 문화를 향유하는 소비자들에게도 이식되었다. 이번 글에서 할 이야기는 영화의 표준화이다.
(※이하의 내용은 세계영화사 강의 125-135p를 수정하고 요약하여 인용한 것이다※)
1908년 영화특허권을 통제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영화특허권회사(MPPC)가 1912년 특허권 무효 판결로 인해 지배력을 잃었다. 그 후에 독립영화사들이 모여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토마스 인스와 같은 영화제작가는 효율적이면서도 경비가 적게 드는 공장의 조립 라인 방식을 응용하여 영화의 제작 과정을 분화하였다. 영화제작 과정은 시나리오, 세트, 조명, 편집 등으로 분업화되어 하나의 스튜디오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스튜디오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영화는 '효율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었다. 만들어진 상품을 안정적으로 팔아야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영화의 보급과 판매까지 장악하고자 했다. 파라마운트의 전신인 페이머스 플레이어스-래스키사(Famous Players-Lasky)는 상품의 차별화, 배급망 확보, 상영권 장악 등을 주요한 전략으로 추구하면서 주도적인 영화제작사로 부상하였고, 그 뒤를 이어 다른 영화제작사들도 이 전략을 따라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1920년대 미국영화산업은 한 영화사가 제작, 배급, 상영을 모두 통제하는 ‘수직적인 통합체계’와 분업화와 표준화를 원칙으로 하는 ‘스튜디오 시스템’을 주된 원동력으로 하여 고전적 할리우드의 황금기로 돌입할 수 있는 문턱을 다졌다. 할리우드는 고정적인 스타 이미지를 등에 업고 황금기로 입장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제작, 배급, 상영을 독점적으로 통합한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안정된 흥행을 위해서 표준적인 제작 방식과 고정적인 스타이미지를 지향하였다. 이런 특징들은 결과적으로 20년대의 영화들이 일정한 공통분모를 지닌 채 생산되는 현상을 낳았다. 장르화된 영화가 등장한 것이다.
장르적인 영화생산은 최초의 흥행을 반복하고 그 위에 성공을 다지려는 시도 속에서 성장한 것으로,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서사발달의 공식(formula), 등장인물이나 장면의 관습(convention), 시각적 이미지의 도상(iconograpy) 등을 표준화하였다. 이 시기에 할리우드 영화의 기저를 이루는 주요 장르들인 웨스턴, 갱스터, 호러, SF, 스크류볼 코미디, 여성 멜로드라마, 뮤지컬, 시대극 등이 장르화되어 정착하고 발전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세계영화사 강의 125-135p를 수정하고 요약하여 인용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도입된 영화는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영화 산업을 만들었다. 이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 장르화된 영화를 만들어내고 장착시키며 발전을 일구어냈지만, 한편으로는 장르에 갇혀 그 이상의 발전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천편일률적인 작품들을 쏟아냈다.(물론 그 중에 몇몇의 수작들이 있기는 하다!) 어찌보면 그 후에 미국의 영화사는 보편적인 할리우드의 영화 문법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이들을 흡수하는 할리우드 간의 대결로 볼 수도 있겠다. 그 이후의 과정이 궁금하다면 『세계영화사 강의』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 편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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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시작하기 전에
가까운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인간이 힘줘서 만들 수 있는 건 똥뿐이라고. 그 무렵 나는 내가 싸질러놓은 똥을 치운답시고 또 한참 힘을 주고 있었다. 연극과 글은 그중에서도 가장 뻑뻑하고 물기 없는 지독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어쩌지 못해 한참을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색도 칠해보고 동선이나 배치도 바꿔 보고 남은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주위도 어지간히 알짱거렸다. 그래봤자 똥은 똥이라는 걸 인정하는 데 참 오래 걸렸다.
그걸 인정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다. 색깔이 같다고 똥이 황금이 되는 건 아니니까. 배운 건 있었다. 이 상태로는 힘을 주나 안 주나 나오는 건 어차피 똥이야!
한 회차를 쉬면서 특별히 떠오르는 소재나 새로운 형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매번 글을 쓸 때마다 그럴 법한 콘텐츠를 짜낼 자신도 없었거니와,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것들이 당신과 내게 대단한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더더욱 들지 않았다. 무의미한 것들을 만드느라 굳이 공들여 예쁘게 똥을 만들 이유는 없었고, 나와 당신의 이야기라고 말하면서 당신이 없고 나만 있는 글을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형식을 취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두 가지는 힘을 좀 빼기로 했다는 점, 그리고 빙구가 재미있게 본 연극을 유들유들 부들부들 부담 없이 당신에게 소개하는 글이 되리라는 점이다. 쓰다 보면 일정한 패턴이 생길 수도 있고, 구체적으로 방향이 잡힐 수도 있고.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당신이 즐거이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면 좋겠다.
변명이 구구절절 길었다. 새로운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의 첫 연극을 소개한다. 빙구가 열심히 똥을 만들다가 제풀에 지쳐서 보러갔던 연극, 공연 일주일 전에 연습 때려치우고 보러 간 값을 톡톡히 했던 연극이다.
[데스데모나 – 웬 손수건에 관한 연극]
2013.09.06(금) - 09.29(일)
화-금 8시 / 토 3시,7시 / 일 3시 / 월 쉼(추석당일 7시공연)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발랄하고 발칙한 여자들
셰익스피어 고전인 [오셀로]를 기반으로 재구성된 연극 [데스데모나]. 이 연극은 오셀로를 비롯하여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에서 중심이 되던 남성들을 가장자리로 치우고, 그들의 뒷배경인 양 가려져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무대 위로 옮겨놓았다. 관저의 어느 세탁실로 꾸며진 2면 무대에서 여배우 세 명만이 100분의 러닝타임을 꽉꽉 채운다.
어디 남배우가 등장하지 않는 것뿐일까, 그녀들의 대화 속에서 비극의 고귀했던 남성들은 볼품없는 발정난 수컷들로 전락하고, 그녀들은 셰익스피어의 뒷배경에서 벗어나 무대 위에서 3D가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 고삐풀린 망아지 데스데모나와, 그런 그녀를 꼬드겨 사창가로 끌어들이고 레즈비언 플레이를 즐기는 비앙카, 그리고 그 옆에서 주님을 찾으며 묵주기도를 올리는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까지. 그녀들은 역동적이고 발랄하며, 거칠고 생명력이 넘친다. 어떻게 정숙한 오셀로의 아내가 이토록 발칙하고 섹시하게 그려질 수 있었을까?
폴라 보겔과 그린피그
극단 그린피그의 작가 소개를 따라가보면, [데스데모나]의 작가 폴라 보겔은 1998년 [운전 배우기 ‘How I Learned To Drive’]라는 희곡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들을 써내려갔다.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인 그녀는 그녀의 작품 속에 여성주의적 의식을 드러내는데, 주로 에이즈나 가정폭력, 여성의 가난의 고착화 등 현 사회의 뜨거운 쟁점들을 작품에 반영한다. 그녀의 작업은 항상 관객의 기대를 뒤집고 전통적인 연극의 개념을 바꿔 놓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린피그가 구현한 [데스데모나]는 흥미로웠다. ‘불온한 상상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새로운 연극을 위해 주제와 예술 형식의 진보를 고민하는 그들은 폴라 보겔의 텍스트 위에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힘있는 연기, 관객의 눈을 휘어잡는 재치 있는 연출을 덧발랐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음탕한 코미디 풍자극으로 탈바꿈하는 동안, 작가의 여성주의적 주제의식은 가볍지만 의미심장하게,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관객의 웃음 사이를 파고든다.
우리가 기억하는 오셀로는 무엇이었는가?
폴라 보겔은 [데스데모나]를 통해 여성의 사회에 초점을 맞추고 그간 그들을 억압해왔던 비극의 구조를 뒤집으며 성공적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그러나 데스데모나가 몰랐던 탑 바깥의 세상이 너무나도 강고했던 것처럼, 여전히 [데스데모나]는 궁전의 뒷방, 컴컴하고 어두운 세탁실에서 사그라드는 이야기다. 세상이 기억하는 [오셀로]의 무대 위에서 여전히 데스데모나는 정숙하고 순종적인 아내로 오셀로의 손에 순순히 죽임을 당한다. [데스데모나]에서 남성들은 등장하지 않지만, 남성의 그림자는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다. 반지도 아니고 목걸이도 아니고 고작 손수건 한 장에 세 여자의 인생이 울고 웃는 것, 편이 갈라지고 그들의 삶을 뿌리 채로 내던질 결심을 하는 모습은 무대 위에서 매우 희극적으로 그려지는 한편으로 씁쓸한 그림자를 던진다. ‘웬 손수건에 대한 연극’이라는 부제처럼, 한낱 코풀개에 불과한 손수건 하나만으로 오셀로로 대표되는 남성성은 여성들을 무릎 꿇리고 그들의 삶을 쥐락펴락하는 것이다. 막이 내린 후에 결국 기억되는 것은 활달하게 살아움직이는 데스데모나와 에밀리아, 비앙카가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인 오셀로와 그를 숙명적 죽음으로 내모는 손수건 한 장이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정말로 같은 결말일까
이러한 맥락에서 그린피그 측에서는 셰익스피어와 보겔이 모두 데스데모나의 운명을 같은 결말로 몰아가고 있다고 해설한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입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움직이던 그녀들을 생각해보면 의문이 든다. 정말 그들은 같은 결말일까? 얼마든지 다른 결말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화요일 밤마다 사창가로 파트 타임 알바를 뛰고, 예배 시간엔 옆에 앉은 총각에게 손으로 서비스를 한다는, 고삐 풀린 망아지같은 아가씨인데.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구둣발로 발등이라도 콱 찍었을지 누가 아는가.
특히 그린피그만의 특징적인 부분으로 꼽히는 커튼콜 없는 엔딩은 극의 결말을 재치있게 열어놓음으로써 관객에게 더 긴 여운을 남기며 빛을 발한다. 관객의 무안한 웃음을 자아내면서,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이야기는 끝난다. 이 연극이 흥미로워 보인다면, 이들의 결말이 궁금하다면, 음탕한 여자들의 야한 얘기가 듣고 싶다면 당신, 늦기 전에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 들러보시길.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이미지 출처 : 그린피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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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롱바오의 영화 후루룩2 <바람이 분다>: 꿈으로 살아가기
바람이 분다 (2013)
The Wind Rises
- 감독
- 미야자키 하야오
- 출연
- 안노 히데아키, 타키모토 미오리, 니시지마 히데토시, 니시무라 마사히코, 스티븐 알버트
- 정보
- 애니메이션, 드라마 | 일본 | 127 분 | 2013-09-05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이 분다>를 보고 왔습니다. 올해로 72세를 맞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얼마 전, <바람이 분다>를 자신의 은퇴작으로 선언했는데요, 그래서인지 <바람이 분다>에 대한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주말 좌석은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관객이 그의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이웃집 토토로>(1988),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으로 친숙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귀환, 아름답고 환상적인 영상과 음악으로 상징되는 ‘지브리 스타일’은 <바람이 분다>에서도 역시 잘 재현되고 있습니다.
꿈의 양면성
‘꿈’은 영화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첫 장면부터가 주인공 지로의 꿈이지요. 잠에서 깬 지로는 지붕으로 올라가 경비행기를 타고 마을의 상공을 한 바퀴 돕니다. 지로의 비행기가 지나는 곳마다 구름이 걷히고 햇볕이 비추는 것에서, 지로의 꿈이 가지는 희망-혼자만의 열망에 한정되지 않고 국민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희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괴비행체들의 공격에 의해 추락하고 마는 비행기는 미래의 전쟁과 결부된 자신, 그리고 자신의 비행기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 이려나요.)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꿈속에서, 지로는 자신의 롤모델인 카프로니 백작과 자주 조우합니다. 이탈리아에서 경비행기를 설계하는 선도자인 카프로니 백작은 “일본의 소년” 지로에게 미래의 비행기를 보여주면서 그의 꿈을 자극하고 희망을 키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비행기는 지로 인생의 꿈이자, 자는 동안 꿈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소재인 것이지요. 자는 동안 꾸는 꿈과 멋진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포부로서 꿈이 겹쳐지면서 꿈의 세계에 대한 갈망과 동경은 한껏 강조됩니다.
보통 꿈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니체의 말마따나 꿈이 있기에 살아갈만한 세상이 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바람이 분다>는 꿈의 세계를 마냥 찬양하지만은 않습니다.
“(비행기는) 아름답지만 저주받은 꿈이야.” -카프로니 백작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은 아주 오래되었고 어떤 측면에서는 신성하게까지 여겨집니다. 땅의 공간에서 하늘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오랜 꿈. 하지만 카프로니 백작은 지로에게 그 꿈이 “아름답지만 저주받은 꿈”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모습은 아름답고 벅찬 광경이지만, 상승하는 비행기는 결국 추락할 운명을 지녔으며 심지어 전시 상황에서는 인간의 행복이 아닌 절망의 폭탄을 싣는 역할을 하도록 명령받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꿈이라는 건 양면성을 가집니다. 꿈은 황홀하고 무한하지만, 꿈이 끝나는 순간 밀려오는 허무함과 더욱 강하게 대비되는 현실의 고통. 지로 역시 자신의 삶을 가득 채운 꿈의 양면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꿈을 좇는 길을 택할 뿐인 것이지요.
지로의 꿈은 ‘비행기’로 구현되지만, 결국은 하늘에 대한 동경입니다. 영화에서 하늘은 대부분 정말 아름답습니다. 바람이 부는 하늘, 비행기가 가르는 하늘, 심지어는 폭탄이 터지는 하늘마저도. 저 아름다운 하늘에 닿겠다는 인간의 열망! 하지만 비행기의 운명이 예고하듯, 결국 하늘이라는 공간도 죽어서야 진정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절망의 공간으로 설명됩니다. “하늘은 모든 걸 삼켜”버리니까, 병으로 죽은 나호코만이 비로소 하늘에 갈 수 있었으니 말이에요.
이제 지로의 꿈은 황홀하지도 뿌듯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꿈은 꿈이기에 아름답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스쳐옵니다. 그리고, 적어도 지로에게는 그 꿈이라는 환상이 삶을 살아가는 주요한 동력이 되었죠.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영화의 제목이자 여러 번 등장하는 이 한 마디는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1871-1945)의 시 ‘해변의 묘지’의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진우 시인이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발레리의 시를 한 마디로 정리할만한 깊이가 허락되지는 않지만, 보통 짐작하듯 ‘바람’을 현실의 시련으로 본다면, 힘든 현실을 극복하고 삶의 의지를 다지는 구절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레리의 시에서 ‘덧없는 꿈’이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이 구절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아, <바람이 분다>는 ‘살아감’ 자체에 대한 찬양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공황과 전시 상황-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는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요. 그래서 지로처럼, 현실의 아편 격으로 꿈을 사고하면서, ‘꿈’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비극의 시대인 것입니다.
최근 <바람이 분다>와 더불어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찬양이라는 논쟁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카프로니 백작과 지로는 비행기의 발명이 전쟁에 동원되는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을 여러 번 표출하기도 하니까요. 반나치주의자 독일인 카스트로프(토마스 만의 <마의 산>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지요!)를 통해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죠. 따라서 감독이 적어도 전쟁을 옹호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저의 해석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욱승천기가 등장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에서 필수적인 것이라 생각하고요.
그럼에도 문제가 되는 지점은, 현재의 관점에서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 전혀 없다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세계대전발발을 주도했던 국가임에도 역사의 가해자가 아닌 오히려 피해자로 그리는 모습들에서 감독의 민족주의적 감성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주인공 지로 역시 자신의 비행기가 살육의 무기로 쓰였다는 죄의식보다는, 자신의 비행기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허망함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보이고요. 하지만 저는 이마저도 당시의 일본의 모습을 최대한 재현하고자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당시 일본, 특히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은 전쟁의 책임과 죄의식보다도, 또한 열렬한 제국주의 찬양보다도, 개인적인 삶의 의미와 탐미적 취향을 형성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당대의 시대상, 심리 상태와 행동 양식에 대한 섬세한 터치에서 거장의 면모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감독의 입장에서 완벽하게 ‘재현’한 것에 만족할지라도, 반세기의 시간이 흐른 지금, 역사의 부채에 대해 침묵함으로서 암묵적인 미화에 동의한다는 혐의를 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특정한 역사적 배경과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삼은 이상 판타지라는 장르의 방패가 무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나저나, 지로는 그 때(!) 도대체 왜 담배를 폈을까요? 역시 그에겐 꿈이 먼저인가요.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환상적 로맨스가 무너지는 순간, 극장의 모든 관객이 폭소(실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인 지로의 캐릭터가 꽤나 흥미로운 요소였습니다만, 과연 이 장면은 일관적 지로의 연장선인가 일탈선인가… 아직도 고민이에요. <바람이 분다>, 어떻게 보셨나요? 후루룩!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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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근의 시네마 폴리티카⓵ : Aestheticá Politica
변덕 많고 참을 성 없는 김근근이 또 다시 새로운 코너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정치와 영화를 연결해 본다고 하는데요, 기대가 많이 되지는 않겠지만 한 번 지켜봐 줍시다용. 과연 이번에는 얼마나 오랫동안 쓸 수 있을지.
“예술은 사회적 가치의 감성적 배분이다.”- 김근근
인간 활동의 근본적 목적은 희소한 사회적 가치의 배분이다. 사회 현상은 제한된 수의 가치물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개인들 사이에서 이동하게끔 만드는 다양한 행위들의 지속적 흐름이다. 이 때 사회적 가치란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대상인데, 그러한 가치물은 돈이나 옷, 집과 같은 구체적인 물체일 수도 있고, 권력이나 명예, 심지어 사랑과 같은 추상적인 것도 포함한다. 그러한 가치물의 분배 과정을 둘러싸고 경제, 정치, 문화, 심지어 예술이라는 인간 활동의 기본적인 양식이 출현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희소한 자원이 분배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이 출현한다. 개인들의 일차적 관심은 가치를 전유(專有)하고 향수(享受)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타인보다 먼저 가치를 쟁취하기 위해, 타인으로부터 가치를 지키기 위해, 타인의 가치를 빼앗기 위해 경쟁한다. 약탈과 야만, 전쟁이 발생한다. 이러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배 과정이 구조화되어 상대적인 안정성과 예측성을 갖게 만드는 대안적 방식이 필요하다. 요컨대 다음과 같은 인간적 제도들이다.
첫 번째는 관습이다. 한 사회 내에서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관습에 따라 가치물을 적절히 귀속되도록 하는 것이다. 신분제 질서, 장자상속 등 직접적으로 가치배분과 연관되는 관습들 뿐 아니라 노인 공경, 효도, 종교 제례 등도 넓은 의미에서 가치 배분의 한 방식이다. 다시 말해 관습이란 가치 있는 또는 없는 것으로 인정되는 사물들이 어떤 사람 혹은 지위에 올바르게 귀속되도록 하는 일련의 공유된 규칙들이다. 이러한 관습의 총체를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교환이다. 한 개인이 가진 가치를 다른 개인에게 양도하고 새로운 가치물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교환의 두 당사자가 교환에 자발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이다. 교환은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가치의 배분 방식일 것인데, 이러한 교환의 총체를 우리는 (시장)경제라고 부른다.
세 번째는 명령이다. 누군가 강제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분배 메커니즘이다. 관습이 참여자들의 일반적 합의를 반영하고, 교환이 형식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명령은 필연적으로 강제력에 기반한 지배와 복종을 수반한다. 이러한 명령의 총체인 정치는 아마도 정치에 대한 가장 유명한 정의일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데이비드 이스턴)”이라는 표현에 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정치는 관습이나 교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시급한 공동체의 문제에 관여함으로써 두 제도의 경직성을 보충한다.
그런데 결코 관습적이지도, 교환에 따르지도, 누군가가 명령하지도 않았지만, 어떤 인간의 내적 동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가치배분이 있다. 나는 이 것을 ‘가치의 감성적 배분sensible allocation of values’, 다시 말해 예술이라고 부른다. 예술은 다른 세 방식에 비해 간접적으로만 가치 배분에 관여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실은 오히려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개입한다. 가치의 배분뿐 아니라 재정의와 전복까지 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예술이란 다른 어떤 제도화된 규칙에도 따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가치배분에 개입하는 것이다. 좋은 시장경제가 교환의 방식을 통해 합리적인 가치의 배분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좋은 정치가 공동체에 필요한 부분에 명령을 통해 가치를 배분하는 것이라면, 당연하게도 좋은 예술은 감성을 동원해 사회적 가치를 배분에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그 것이 기존의 가치체계를 전복하는 것이든, 관습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든, 시장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것이든,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는 것이든, 예술은 (예술가가 의도하였거나 의도하지 않았거나) 감성을 매개로 그러한 목적을 성취하려 한다.
“정치적 예술은 정치적 위기의 대리적 표현이다.” - 김근근
잠시 가라타니 고진의 글을 인용해 보자.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그 것이 노동운동이 불가능한 시대, 일반적으로 정치운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대리적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정치운동이나 노동운동이 가능하게 되면, 학생운동은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문학도 그것과 닮았습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문학은 학생운동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이 모든 것을 떠맡았던 것입니다.”(강조는 김근근)
일반화하면 정치적 예술은 정치운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대리적 표현으로 등장한다. 정치가 시각적 스펙터클에 몰두하고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예술은 정치를 발언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반면 정치·도덕적 책임에서 해방되어 ‘순수한’ 것이 될 때, 예술은 권위를 상실하고 탐미적 사소함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정치적 예술에 주목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위기를 메타적으로 읽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가 감각적인 것이 되어 쇠퇴하는 동안, 예술은 정치적 장소로 귀환해 깃발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더 이상 문학은 아니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말했을 때, 그 것은 근대문학이 표현해 온 근대적 정치성의 해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소설로 혁명하는 시대가 끝났다는 말이기도 했다. 근대문학의 무덤 위에 등장한 것은 미적 언어의 기만이었다. 문학이 정치적/윤리적/지적 과제를 짊어지기 때문에 영향력을 갖던 시대는 기본적으로 끝났다. 그 잔영과 흔적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 빈자리는 이제 탐미적 언어가 차지한다. 평범한 슬픔을 기이하게 표현하고, 사소한 불행을 미화하고, 공허를 치장하고, 한숨 혹은 빈정거림을 미사여구로 꾸며서, 언어를 통해서 존재하는 새로운 문학! 이들에게 근대문학의 죽음은 별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닌데, 혁명 대신 위스키가 있으며, 브래지어 위를 흐르는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예술의 귀환을 바라며, 시네마 폴리티카” - 김근근
근대문학의 죽음은 근대적 정치성의 해소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것은 해소가 아니라 봉합과 지연일 뿐이었다. 오히려 정치적 위기는 화려하게 부활해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것을 근대적 정치성의 재림으로 보든, 탈근대적 정치성의 기획으로 보든 상관없이 말이다.
시네마 폴리티카는 바로 그러한 조망 아래 펼쳐진다. 희소가치와 예술의 전복성. 정치적 위기와 정치적 예술의 귀환. 활자의 죽음과 스크린 시대의 도래. 공동체에 대한 메타 비평. 역사, 진보, 변혁,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영화, 영화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파시스트들이 영상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전쟁의 참혹성을 미화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정치의 예술화에 맞선 예술의 정치화”라는 테제를 제시했다. 시네마 폴리티카는 벤야민의 테제에 따라 일련의 영화를 정치적으로 읽어보려는 시도다. 나아가 영화가 그리는 사회에 대한 메타적 비평을 통해 영화와 정치를 이어보려는 야심찬 기획이다. 시네마 폴리티카! 에스테티카 폴리티카! 휘바휘바! 개봉 쑨!!
뭐, 끈기 있게 써나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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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근히 살아서 김근근인 역사/정치학도.
작품을 감상할 때면 주제보다도 시대와 맥락에 과도한 흥미를 느끼는 변태.
치킨과 두부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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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은 냉철한 공간이다. 무대는 하나밖에 없고 관객석은 넓다. 결국 무대를 잘 볼 수 있는 사람과 상대적으로 잘 못 보는 사람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티켓의 개념이 생기고 난 이후부터는 돈에 따라서 그 사람이 결정된다.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은 무대를 가까이에서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돈을 적게 내는 사람은 좀 더 먼 곳에서 작게 봐야 한다. 이렇게 자리가 서열화 되어있는 공간에서 가장 비싼 공간으로 인정받는 곳은 단연 박스석(box seat)이다. 이번에는 오페라 극장의 박스석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늘은 박스석에 관련된 간단한 질문 하나를 제기하고, 다음 글에서 질문에 대한 답해 보려고 한다.
사진은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에 있는 오페라 극장의 모습이다. 무대가 한 가운데 있고 그 앞으로 작은 객석이 이어져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양 옆의 벽에 볼록볼록하게 튀어나와있는 넓은 공간, 즉 박스석이다. 무대 바로 앞쪽에 위치하는 객석 하나와 박스석 하나의 공간의 넓이를 비교해보면 박스석이 얼마나 넓은지 충분히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예술의 전당을 조망하고 있자니 문득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돈을 많이 낼 수록 공연을 더욱 깊게 즐길 수 있는 공간에 배정받을 수 있다면 박스석은 공연을 관람하기에 최적의 위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위의 사진을 보면 박스석은 무대에서 측면으로 있고, 가장 앞쪽 박스가 아니라면 일반 객석보다 먼 곳에 위치해있다. 측면 쪽 위치와 무대와의 거리. 공연을 관람하기에는 오히려 불편해 보인다. 오히려 일반 객석의 앞쪽이 공연을 즐기기에 더 적합하고, 그렇다면 더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전에 오페라 박스석을 다룬 회화 작품 몇 편을 보고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림이 답을 찾는 실마리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먼저 앞의 그림은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의 <La Loge>, ‘박스석에서’라는 작품이다. 그림에는 박스석에 있는 한 쌍의 남녀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여성은 가슴이 깊이 파인 검정 드레스와 몇 겹의 목걸이, 커다란 브롯지로 장식해서 화려한 느낌을 준다. 손에는 흰 장갑을 끼고 있으며 머리도 올려서 멋을 내고, 커다란 꽃으로 장식했다. 한껏 멋을 낸 여성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듯이 정갈한 자태로 앉아있다. 여인의 뒤에 있는 남성 역시 흰 장갑을 끼고 턱시도를 입어 외모에 신경을 쓴 듯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의 시선이다. 남녀는 각각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여성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남성은 위로 올려다 보고있다. 맨 눈으로 보기도 부족했는지 쌍안경을 통해 보고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오페라 극장의 박스석의 위치에 대해 떠올려보자. 박스석을 기준으로 무대는 측면에, 그리고 아래에 있다. 그렇다면 정면을 보고 있는 여성이나 위 쪽을 보고있는 남성은 모두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
또 다른 회화작품은 메리 카삿(Mary Cassatt)의 그림으로, 르누아르의 작품과 같은 제목인 <In the Loge>이다. 역시 박스석에 있는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검정색의 화려한 드래스를 입고 모자로 멋을 냈으며 왼속에는 부채를 들고 있다. 그리고 쌍안경으로 어딘가를 바라 보고 있다. 다시 한 번 시선에 주목해서 예민하게 쌍안경의 방향을 살펴보면 전혀 아래쪽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뒤로 보이는 배경을 통해서 박스석이 1층이 아니라 적어도 2층 이상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무대를 보기 위해서는 더욱 아래쪽을 보고 있어야 무대에 집중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여성은 오히려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으며, 맞은편의 박스석을 보고있다는 것을 그림에서 쉽게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재밌는 점은 뒤에 작게 보이는 남성의 모습이다. 조금 확대시켜서 살펴보자. 거친 붓터치로 표현되어 있지만 남성의 시선이 전체 그림의 중심 대상이 되는 여성에 향해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몸을 앞으로 쭉 빼고, 무대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서 쌍안경으로 여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르누와르의 그림과 카삿의 그림에 등장하는 박스석에 있는 인물들의 시선은 모두 무대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무대가 잘 보이는 위치일수록 자리의 가격이 비싸진다는 일반적인 상식은 관객들이 무대를 잘 보고 싶어하는 욕망이 클 때 통할 수 있다. 관객이 무대에 크게 관심이 없다면 이미 무대의 상태는 목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박스석은 처음부터 무대를 잘 보기 위한 '시야 확보'나 '음향의 최적화'라는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페라 극장의 박스석이 유행하던 19세기의 박스석은 어떤 다른 목적이나 의미를 가졌으며, 어떻게 운용되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진다!^^
* 그림 1.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의 모습. (출처 : 네이버 이미지)
* 그림 2. Pierre-Auguste Renoir, <La Loge>, 1874. (출처 : 구글 이미지)
* 그림 3. Mary Cassatt, <In the Loge>, 1878. (출처 : 구글 이미지)
* 그림 4. Mary Cassatt, <In the Loge> 확대본.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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