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희 (2013)

Our Sunhi 
7.1
감독
홍상수
출연
정유미, 이선균, 김상중, 정재영, 예지원
정보
로맨스/멜로 | 한국 | 88 분 | 2013-09-12
글쓴이 평점  

영화과 졸업생 선희(정유미)는 오랜만에 학교에 들린다. 미국유학을 위한 추천서를 최교수(김상중)에게 부탁하기 위해서. 평소 자신을 예뻐한 걸 아는 선희는 최교수가 추천서를 잘 써줄 거라 기대한다. 그러면서 선희는 오랜만에 밖에 나온 덕에 그 동안 못 봤던 과거의 남자 두 사람도 만나게 되는데, 갓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문수(이선균)와 나이든 선배 감독 재학(정재영)이 두 사람.

차례로 이어지는 선희와 세 남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서로는 서로에게 좋은 의도로 삶의 충고란 걸 해준다. 선희에게 관심이 많은 남자들은 속내를 모르겠는 선희에 대해 억지로 정리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들은 이상하게 비슷해서 마치 사람들 사이를 옮겨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삶의 충고란 말들은 믿음을 주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거 같고, 선희에 대한 남자들의 정리는 점점 선희와 상관없어 보이는데...

 

요즘 홍상수 영화는 유쾌합니다. 초기작에서 보이던 불편할 정도의 찌질함은 이제 흔적만 남았죠. 아마도 <하하하>부터였던 것 같아요. 이전까지 홍상수 영화는 스스로의 흑역사를 떠올리듯 쓴웃음 지으며 보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홍상수와 술 한잔 걸치고 수다를 떠는 것처럼 너털웃음을 짓게 되죠. 그러나 반복되고 순환되는 초라한 일상을 쓸쓸히 수용하라는 홍상수식 대화법은 여전합니다. 웃음의 외피를 걸치고 있어서 대중적으로 보이지만, 극장을 걸어 나오면서는 어딘가 서늘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번에 홍상수가 집중하는 것은 말 덩어리의 전염경로입니다. 누군가에게서 우연히 나온 말들이 사람들 사이를 돌고 돌지요. <우리 선희>의 남자들은 다른 자리에서 들은 말들을 자기의 말인 양 짐짓 잘도 말합니다. 그것도 아주 진심어린 충고라는 듯이요. 진지한 태도로 그럴싸한 말들을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언젠가 들었던 것 같은 말들 뿐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했던 말도 남의 입을 타고 돌다가 스스로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게 되는 거죠. “그거 제가 했던 말이잖아요!”

 

선희에 대한 규정은 더욱 희극적입니다. <우리 선희>의 남자들이 선희를 규정하는 말들은 사실 선희 자신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추천서를 받기 위해 선희가 꺼낸 말들은 입을 타고 전염되면서 결국 선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대답이 되어 선희에게 돌아옵니다. 그 말이 어디서 나온 건지 관객은 모두 알고 있는데도, 남자들은 폼 잔뜩 잡고 말합니다. 아마 홍상수도 낄낄대며 찍었을 장면들이에요.

 

뭐 결국 다 그렇고 그런 삶이라는 거죠. 우리는 그저 그 때 그 때 적당한 말을 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누구의 생각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진심이 아니어도 그냥 그럴싸한 말들을 하고 싶어할 뿐인 바보들이라는 거지요.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요. 사실 자기 자신도 진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걸요. <우리 선희>의 남자들이 선희에 대한 자기 생각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에요.

 

그런데 도대체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까요?

 

얼마 전 문제가 됐던 새 정부 예산안을 보다가 발견한 내용입니다. “DMZ 평화공원 조성 예산에 신규로 402억 원 반영”. 기초연금, 4대 중증질환 진료비 보장, 무상보육 국가 책임 등 대통령이 대선 때 약속한 핵심 공약을 위한 예산을 줄줄이 취소하면서도 증세는 포기해 세수는 100억원이 줄어들고, 결국 예산을 25.9조의 관리수지 적자로 편성해 국가 채무가 50.6조나 늘어났다는 그 새 정부 예산안 말입니다. 사상 최대의 국가 채무로 미래를 저당 잡아 다음 정권으로 문제를 미룬 것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사실 저를 실소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DMZ세계평화공원 조성 예산이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DMZ세계평화공원을 군사적 충돌이나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완충지대로 가져가면서 남북관계를 평화공존의 단계로 간다는 구상을 한다고 합니다. 이른바 그린 데탕트일환이라는 거죠. 그런데 사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DMZ세계평화공원이라는 것은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강도 높게 비난하고 있는 ‘NLL 포기발언과 동일한 취지의 구상입니다. 휴전선 부근에 양자가 공유하는 완충지대를 조성해 충돌을 방지하고 교류를 늘려가자는 거죠. 공동어로수역 구상이 서해와 NLL을 포기한 것이라면 DMZ 평화공원이 휴전선을 4km 내리자는 발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사실 DMZ 세계평화공원 구상 자체도 김대중 정부가 제시했던 겁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부터 구상했던 내용으로, 그 연장선 상에서 문제의 노무현 NLL발언에서도 언급하고 있죠. , 자세히는 몰라도 당시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박대통령도 이를 환영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정권의 핵심 업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요.

 

DMZ 세계평화공원 구상이 좋은 정책인지는 제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정당이 한번 취한 입장은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는 근본주의적 관점을 취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정책이 상반된 정견을 가진 정당들 사이를 돌고 도는 모습이 재미있을 뿐입니다. 한창 문제가 됐던 복지나 반값등록금 등도 마찬가지죠. 이전 선거에서 나라 망하는 길이라고 맹비난하던 정책을 버젓이 다음 선거에서 메인 공약으로 내거는 모습을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어차피 정치인들은 당선을 위해서라면 그럴싸한 말들을 무엇이든 할 뿐이라는 거죠. <우리 선희>의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정치학에서는 정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당선추구형(Office Seeking View)’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정당이나 정치의 순기능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모습과는 달리, 사실 정치는 어떤 특별한 이념이나 정책을 이루려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관직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인 직업적 정치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겁니다. 특정한 정책 달성이 정치권의 목적일 것이라는 정책추구형(Policy Seeking View)’ 관점과 대비되죠. 두 관점에 대한 경험적 연구에 따르면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당선추구형이 더 현실적 결과물에 부합한다고 합니다. 우울한 결론이죠.

 

<우리 선희>는 돌고 도는 말의 전염을 희극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공허한 말들로 이루어진 초라한 현실은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씁쓸합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홍상수의 주인공 같은 우리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정치권만 특별히 진실하기를 바라는 것도 환상일 뿐이겠지요.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진실하게 운영될 수 있는 제도적 배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요?

 

PS. 그 진짜 맛있다는 치킨 한 번 먹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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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근히 살아서 김근근인 역사/정치학도.

작품을 감상할 때면 주제보다도 시대와 맥락에 과도한 흥미를 느끼는 변태.

치킨과 두부를 좋아한다.

 

1. 조금 지난 얘기가 되겠지만 이번 추석 연휴 때 잊지 못할 순간이 딱 두 가지가 있다. 집이 도시에서 외곽지역으로 이사를 했고, 학교 주변에서 자취를 하는 나는 이번 추석 때 처음으로 새 집을 갔다. 이사한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10분 정도 거리로, 꽤 걸어야하는 곳이었는데 가는 길이 의외로 운치있었다. ‘아파트 숲’을 벗어나면 탁 트인 공터에 정자가 하나 있고 이내 코스모스가 양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넓은 강을 가르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역에 도착해있었다. 그렇게 11시가 넘은 시각에 집에서 지하철역까지의 길을 익힐 겸, 산책도 할 겸해서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다리를 건너다 말고 문득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골지역이라 그런지 별이 꽤 많이 보였다. 개인적으로 별을 좋아하지만 그 하늘에서 만큼은 별이 주인공이 아니었다. 달이었다. 동그랗고 커다란 보름달은 ‘아, 오늘이 추석이었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달에서 흘러나오는 달빛이 강에 닿아 흩어지는 것을 다리에 서서 보고있으니 괜히 설레기까지 했다. 카메라를 꺼내서 찍어도 보았지만 눈에 비치는 그 빛을 역시 온전히 담지 못하더라. 오히려 실망스러워 사진을 지워버리고 눈으로 그 달을 다시 몇 초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강 위의 다리에서 달빛에 취했다고나 할까. 달에 취한 그 순간이 올 추석의 잊지 못할 첫 번째 순간이다. (눈치채신 독자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잊지 못할 두 번째 순간은..비밀이다^^;)

 

 

2. 여기 달에 취한 존재가 나 말고 또 있는 듯하다. 바로 피에로다. 오늘은 늦은 추석맞이(?), 쇤베르크(A. Schönberg)의 <달에 취한 피에로>를 소개하려고 한다. 피에로는 달빛에 취해있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달빛은 그를 취하게 하는 술이었던 것이다.

‘눈으로 마시는 포도주를 / 달은 밤새 파도에 쏟아 붓는다.’

<달에 취한 피에로> 제 1부의 1번 곡, [달에 취하여]의 가사 일부다. 피에로가 본 달은 내가 봤던 달과 다르게 강이 아니라 바다 위에 뜬 달이었나보다. 달이 파도에 쏟아 붓고 있으니 말이다. 피에로는 취할 줄 알면서도 달빛이라는 포도주를 눈으로 계속해서 마시고 있다. 물에 비친 달빛이든, 붉게 물든 노을이든 한 번쯤은 ‘예상하지 못한 아름다운 경관’이라는 포도주에 취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피에로를 이해할 것이다.

 

 

3. ‘들리지 않는 음악’에서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답할 수 있다. <달에 취한 피에로>는 음악이기 이전에 시이기 때문이다. <달에 취한 피에로>는 벨기에 문학가 지로(A. Giraud)가 쓴 시 모음집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이 곡이 작곡되기까지는 ‘체메’라고 하는, 연극배우이자 성악가의 역할이 컸다. 어느 날 쇤베르크는 체메가 연주할 <달에 취한 피에로> 연곡의 작곡을 의뢰받는다. 지로의 시는 당시 활동하던 작곡가 프리스란더(O. Vrieslander) 등의 작곡가에 의해서 피에로 곡으로 이미 여러 번 작곡되고 있었다. 하지만 쇤베르크는 작곡되어있던 피에로 가곡을 보고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하르트레벤(O. Hartleben)이 지로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한 시집을 읽은 후 제안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이후 열정적으로 작곡에 임하게 된다. 시에서부터 작곡으로 탄생한 <달에 취한 피에로>는 총 3부로 구성되어있고 각 부마다 7개의 곡이 있다. 그러니까 총 21편의 시로 이루어진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4. 달빛에 취한 피에로를 대상으로 하는 시로 쓰는 음악이라니. 낭만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음악을 듣는다면 당황스러울 것이다.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음악은 전혀 서정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이하다. 소름끼치고 무섭다. 그 이유를 어렵게 말하자면 ‘무조음악’이기 때문이다. 무조음악은 말그대로 ‘조성이 없다’는 뜻으로, 음들 간의 위계질서가 없다는 것이다. 흔히 음악시간에 한 번쯤 들어본 으뜸음과 나머지 음들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것을 부정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무조음악이라는 곡의 큰 특징은 듣기에 아름답지 못한 이유인 동시에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무조음악에 대해 너무 깊게 들어가면 음악의 전문지식을 다 알아야 하니 그저 불협화음을 느끼는 정도로 감상해도 충분할 것이다.

 

5. 한 가지정도만 덧붙이자면 무조음악은 표현주의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표현주의는 1910년을 전후로 인상주의에 대항하여 미술에서 출발하여 예술의 각 분야에서 나타난 예술 사조다. 영어로 인상주의가 'impressionism'이라면 반대의 어미를 붙여 ‘expressionism'이라 불렀고 그것이 ’표현주의’로 번역된 것이다. 인상주의의 핵심이 ‘보이는 대로’라면 표현주의의 핵심은 ‘느끼는 대로’이다.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고 억압된 것을 조금 더 직관적으로 표현해내고자 한 것이다. 쇤베르크 역시 ‘조성’이라는 음악의 형식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한층 더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표현되는 인간의 내면은 긴장과 공포, 불안과 갈등과 같이 일상에서는 억압되는 감정의 표현에 집중하기 때문에 음악 역시 불안과 긴장을 안고 있는 것처럼 들리게 된 것이다. 실제로 쇤베르크는 표현주의 화가 칸딘스키와 직접적으로 교류를 하기도 했고, 스스로 표현주의적인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따라서 <달에 취한 피에로>는 무조음악의 파격과 동시에 당시의 ‘표현주의’라는 예술흐름과도 맞물리며 현대 음악의 고전이 된 것이다.

 

 

6. 추석을 전후로 해서 보름달이 된 지도 대략 2주가 지났다. 연휴가 끝나고 바쁜 일상에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 달은 그동안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2주 동안은 자신을 채워갈거다. 하현달과 그믐달로 오른쪽이 작아졌다면 초승달과 상현달로 다시 오른쪽을 채우는 방향으로 말이다. 다음 보름까지 남은 2주 정도의 시간동안 점점 차오르는 달을 보며 기이하더라도, 불편하더라도 쇤베르크의 <달에 취한 피에로>를 한 번쯤 감상해보는 것도 자신을 내면을 채우는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2주가 지나면 삐아오의 새 글이 올라와있을 것이다!)

 

* 포스팅이 하루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 오희숙의 『달에 홀린 피에로』(음악세계)를 참고하였습니다.

* 그림 1. <달에 취한 피에로> 초연 포스터.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 그림 2. 1912년 체메의 모습. (사진 출처 : 오희숙, 『달에 홀린 피에로』,15쪽 이미지 스캔)

* 그림 3. 쇤베르크.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빙구의당신의 이야기



 늦어진 포스팅에 대해서 고백하자면, 원래 쓰려고 했던 극은 이게 아니었다. 사실 예정에 없었던 관극이었다. 지하철을 거꾸로 타는 바람에 예매했던 연극을 어처구니없이 놓쳤고(빙구가 하는 일이 다 뭐 그렇지....허허) 공교롭게도 그게 막공이었다. 결국 다른 연극을 찾아야 했는데 생각보다 마땅치 않아 난감했던 차에 '시극'이라는 매력적이고도 의심스러운 단어에 눈길이 갔다. '한국의 역사와 정신 및 문화적 정체성을 담은 총체극', '서울의 불면을 달래는 연극'...으레 듣기 좋은 말들이 있는 몇 개의 리뷰들을 뒤적이다가, '채우기보다는 비워내는 극'이라는 평에 호기심이 동해 표를 예매했다. 김경주라는 젊은 시인의 '시극'이라는 새로운 형식도 보고 싶었다.
 막상 보고 나서 맨 처음 들었던 생각은, 뭘 봤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적어도 읽고 갔었던 공연평들이 대부분 굉장히(어쩜 이렇게까지!) 관대했다는 것만 빼고. 무언가 여기저기 많이 아쉬웠는데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고 흐릿한 느낌만 들어 글을 쓰면서도 오래 고민했다. 이번에는 극이 담은 내용에 대한 것보다는 '시극'과 '총체극'이라는 극의 특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김경주 작 김혜련 연출, 서울시극단의 [나비잠]이다.


[나비잠]
2013. 09. 19 - 09. 29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





시극? 총체극?

 시극이라는 형식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시극은 말 그대로 시문학을 연극에 적용한 것으로, 이 극의 모든 대사들은 [나비잠]이라는 한편의 긴 서사시를 구성하고 있다. 함축성과 다의성을 전제하는 시어들을 어떻게 무대에서 극화하여 내러티브를 구현해낼 것인가ㅡ그 내러티브가 강하든 약하든ㅡ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극을 이끌어가는 이야기 자체에 너무 힘이 없었던 탓이다. 스토리라인이 극의 중후반에 이르도록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아서 시놉시스를 두어번 읽고 봤는데도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불분명했다. 사실적이고 세밀한 서사구조를 짰어야 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비잠]은 드라마틱한 전개를 피하고 이야기를 부러 성기게 풀어 놓았다. 영상, 인형극, 라이브 음악, 마임, 탈춤 등 다양한 연극적 요소들을 동원한  '총체극'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옳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문제는 극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주요한 흐름이 흐트러졌다는 데에 있다. 장면들을 끌고 가는 힘이 풀려 버리니 암전이 지날 때마다 극은 늘어지기 일쑤였으며, 그 사이마다 동원된 다양한 요소들은 하나로 버무러지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나누어졌다.




나열한다고 해서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비잠]은 크게 질곡이 없는 드라마를 택했다. 인물들 간의 갈등도 좀 두드러질 법하면 지나가고, 가장 클라이막스였을 기우제 장면마저 이렇다할 임팩트 없이 끝이 난다. 이런 식으로 극의 모든 막이 전반에 걸쳐 느린 속도와 느슨한 긴장도를 유지하는 데 비해, 다소 복잡하게 얽힌 서로의 관계는 극의 중후반이 되도록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가장 큰 원인은 시로 이루어진 대사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어들은 분명 정제되고 걸러져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언어들을 사용해야 하는 배우들에게 그 시어들은 너무나도 벅차 보였다. 캐릭터와 스토리 및 장면이 주어진 상황에서 배우의 몫이란, 납작한 활자들에 뼈를 세우고 살을 찌워 무대 위에 구현하는 것이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드러나지 않은 관계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배우들의 고민이 더해져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 입체화된다.
 배우들이 이 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배우들이 그 대사를 얼마나 체화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애초에 연출적으로 시도된 부분들이 많았던 만큼 배우들이 대사를 씹어보고 스스로 채워넣을 여지가 얼마나 주어졌을지도 의문이 든다. 아름다운 시어들만 나열한다고 해서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번 듣고서는 선뜻 다가오지 않는 함축적인 언어들이 배우들로부터 무의미하게 발음되어서는, 후랑크소시지마냥 줄줄이 한쪽 귀로 들어와서 반대쪽 귀로 다시 나가는 식이었다. 그래서 러닝타임 두시간동안 앉아있는 것이, 약이나 중강이 없이 강강강강으로만 이어지는 노래를 듣는 것처럼 못내 괴로웠다. 
 그런 속에서 시도된 '총체극적' 무대는 거의 총체적 난국에 가까웠다. 아름답고 고고한 시어들은 뭉툭한 채로 뚝뚝 떨어져 있고, 그것들로 채워진 장면들은 얼기설기 벌어질 수밖에. 그 틈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연극적 요소들은 관객을 당황스럽게 했다.




그 외에도 아쉬운 부분은 많다. 울의 정체성과 역사적 정서를 담고자 했다고는 하나 스토리부터 무대, 캐릭터, 의상까지 서울의 그 어떤 역사적 배경도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 극이 진행되는 내내 서울이라는 지역적 특성은 거의 강조되지 않는데 유독 극의 맨 처음 영상과 극의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현대의 서울 모습이 삽입되어 다소 억지스러운 연결처럼 보였던 점, 잦은 장면전환 때문에 자주 길게 이어지던 암전이 관객 마인드를 자주 방해했던 점과, 그마저도 음악 연주 때문에 무대 아래쪽에서 조명이 들어와 완전암전이 불가능했던 점 등등.


'비워내는 극'이라던 공연평에 보러갔던 것이었는데, 되려 내가 본 것은 너무 많이 차 있었다. 오히려 이것저것 집어넣은 것들의 부피가 너무 컸다. 그리고 정작 그것들을 끼고 가야 할 시어들은 너무 멀고 헐렁해서, 애초에 그것 자체가 너무 비어 있었다. 비워내는 극이라기보단 너무 많이 비어있는 극.


 놓친 연극의 푯값에다 다시 예매한 것까지 두 배의 돈을 지불하고 이런 솔직한 평을 쓰고 있는 게 씁쓸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이런 평도 있어야지. 다음엔 더 좋은 연극을 보고 오겠다. 마음에 드는 극으로 천천히 골라서, 기왕이면 당신도 보면 좋겠다 싶은 연극으로. 지하철 노선은 꼭 확인하고.  


이미지 출처 : 구글





※ 읽기 전 주의사항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단편모음집 『꿈을 빌려드립니다(하늘연못, 2006)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환상, 욕망, 사실, 허구

가블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을 본 곳은 일본 나라 지방의 어느 공원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길을 걸을 때와 마찬가지로 뭇 여성들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고, 그러던 중에 꿈과 같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을 마주친 것이다.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서 보았지만, 그녀의 두 눈은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고 입술은 부드럽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옆에 친구에게 읊조리고 있었다. 머릿결은 저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한껏 머금었다가 그 일부를 다시 세상에 돌려주고 있었고, 발걸음은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경쾌하게 지면을 내딛고 있었다. 채 3분도 걸리지 않는 시간동안 그녀는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갔지만, 그것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을 본 이야기이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았지만, 3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스쳐간 그 여인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오늘 다룰 소설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 특이한 점은 그 남자가 죽은 시신으로 바다에 두둥실 떠서 내려왔다는 점이다. 환상적 사실주의의 거장,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6장도 되지 않는 짧은 이야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맘껏 뽐내 보이고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번역의 문제를 살짝 언급해야겠다. 이 소설의 영어 제목은 「The handsomest drowned man in the world」이다. 이 소설은 마르께스 단편집 『꿈을 빌려드립니다』와 플레이보이 잡지에 수록된 단편소설 엄선작을 모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에 각각 담겨있다. 전자는 이 소설을 ‘물에 빠져 죽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로 번역하였고, 후자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라고 번역하였다. 이 소설의 중심 내용이 한 남자가 물에 빠져 죽는 과정이 아니라, 익사체를 발견한 사람들의 반응이므로, 후자의 번역이 더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어감상으로도 후자의 번역이 더 낫지 않은가!)



   본문이 굉장히 짧기에 다시 요약하기도 그렇지만, 간단히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러하다. 어느 외진 마을에 익사체 하나가 떠내려온다. 그 익사체는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몸집이 굉장히 큰 거구였다. 익사체에 묻어있는 진흙과 해초를 걷어내자 훌륭한 외모가 드러났다. 마을의 여자들은 그를 흠모하기 시작하였다. 익사체는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을 얻고, 장례식도 치르게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그의 가족이 되었고, 결국 그 마을은 에스테반의 마을이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점 중 하나는 ‘환상과 욕망의 관계’이다. 바다를 건너온 익사체는 삶이라는 현실을 초월한 환상이다. 시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시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기에 어떠한 말도 할 수 있으며,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기에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마을의 여인들은 시체에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에스테반의 삶을 재구성한다. 여인들의 욕망 속에서 에스테반은 강인한 육체적 힘을 지녔지만, 한없이 착한 마음씨를 지닌 남성으로 탈바꿈한다. 여인들은 자신의 상상 속 에스테반에 대하여 동경을 표하기도 연민을 표하기도 한다.


   익사체는 삶이라는 현실을 벗어나 환상의 영역에 있었기 때문에 여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투영할 수가 있었고, 욕망이 투영된 익사체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욕망은 환상 속에서만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물론 현실 속에서도 욕망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것은 욕망의 일부분을 발견하는 것이다. 현실을 뛰어넘은 환상 속에서 비로서 주체는 자신의 욕망의 전부를 구현해낼 수 있다.(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3분도 채 보지 못한 사람인 것도, 그녀를 알지 못하는 빈자리들을 나의 욕망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에스테반이라는 존재는 텅 비어있는 존재이기에 여인들은 그 안에 무엇이든 채울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여인들의 수만큼 다양한 여인들의 욕망은 에스테반이라는 하나의 대상에 아무 무리 없이 투영될 수 있었다. 개인 각자의 욕망이 투영된 에스테반은 이제 집단의 욕망을 지니고 있는 특별한 존재로 탈바꿈하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이 되어주며, 보통의 시체 처리 방식과는 다른 고유한 방식으로 시체를 바다로 보낸다. 급기야 이 마을은 ‘에스테반의 마을’로 명명되기 시작한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보자.


“저기 좀 봐. 저곳은 바람이 너무 잠잠해서 침대 밑에서 잠을 자고 있는 듯한 마을이군. 저기 좀 보란 말이야. 너무 태양이 빛나서 해바라기들이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지도 알 수 없는 곳 말이야. 그래 바로 저곳이야. 저곳이 에스테반의 마을이야.”(159)


자신이 규정지은 존재로 인해 자신이 규정된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이다. 이쯤 되면 이러한 의문이 머릿속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이제 에스테반이라는 존재는 허구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허구를 뛰어넘은 실재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존재한다고 믿어지고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단지 환상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찝찝하지 않은가?

이번 회차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는 빙구의 사정으로 관극이 늦춰져 다음주 화요일에 게시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