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181건
- 2013.09.05 [룽에세이] 그리움의 진화론
- 2013.09.02 [선셋파크] 삶과 소설, 선셋파크의 결말에 대하여 1
- 2013.09.01 [늦은 공지]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휴재
- 2013.08.28 샤오롱바오의 영화 후루룩1 <일대종사>: 힘, 흐름, 감각
- 2013.08.26 [골방통신] 뉴욕에서 보내드립니다
글
※ 사정상 룽의 Ex-MovieFriend 대신 에세이를 올립니다.
그리움의 진화론
◎
시인 허만하는 이런 말을 했다. '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에 대한 추억이다'라고. 나는 이 묘한 문장에 매료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을 어떻게 추억할 수 있는 걸까. 의문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론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공감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누구나 생전 처음 본 풍경에도, 혹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알 수 없는 아련한 그리움과 애틋한 이끌림을 느껴본 적이 있으리라. 추억은 아련함과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에 대한 이런 느낌을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추억. 우리는 기억 안에서의 풍경만 '추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 너머의 것도 분명 '추억'한다.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또 그 아버지의 기억이 나의 DNA 나선 어느 한 켠에 있다가 스르륵 풍경으로 살아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에, 하나의 무기물이었을 때라든가 형체도 없던 에너지였을 때의 기억일른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기억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느끼는 그 이상한 그리움을 그럼 뭐라 말해야하는 걸까.
우리는 모든 것을 추억하고, 무엇이든 추억할 수 있다. 내 손톱은 엄마의 손톱깎이를 추억하고, 내 턱은 맨질맨질했던 어린 날의 턱을 추억하고, 내 눈은 북극을, 내 귀는 이름 모를 언덕에서의 바람을, 내 입술을 에덴동산의 맛있던 과일들을, 내 코는 씁쓸한 도시 매연을 추억한다. 내 심장은 백악기를 추억하며, 내 신경세포는 수 만 광년 떨어진 별을 추억한다.
모든 것을 끝없이 추억하기 때문에 우린 그립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추억은 그리움이다.
◎
언젠가 '그리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밀밭에서의 풍경을 그리다'라고 말하면 밀밭을 그림으로 그렸다는 말과 밀밭의 풍경을 그리워한다는 중의적 문장이 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어느새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이 되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 되어버린다.
나만의 엉뚱한 추측으로 '그림'이라는 말은 분명 '그리움'에서 파생되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림은 그리워함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다시 나는 매료되었던 문장을 우연히 떠올렸다. '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에 대한 추억이다.' 그리고 나는 엉뚱하게도 나만의 '그리움 - 그림 파생설'을 확장하게 되었다.
"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글'이라니, 글, 글. <ㄱ, ㅡ, ㄹ>. 이런 조합의 글자는 본 적이 있다. 그리움. 바로 그리움이다. 나의 가설에 따르면, 그리움은 그림이 되었는데 다시 그리움은 글이 돼버린 것이다. 실제로도, 글을 쓴다는 것은 뭔가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반대로 그리워한다는 것은 글을 쓴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글은 그리움으로 쓰여 진다.
생각해보면, '글'은 '그림'에서 나왔다. 이건 학교에서 배웠다. 벽에 그림을 그리다가 줄이고 줄이고 하다가 문자가 되었다고 배웠다. 신기하게도 '글'과 '그림'은 생김새도 비슷하다. '그림'이라는 글자가 줄어든 모습이 '글'이지 않는가.
하지만 그림이 있기 전에도 사람은 있었다. 바꿔 말하면 '그리움'은 그림 이전에 있었다. 우리는 생과 동시에 무언가를 추억했고 그리워했다.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가 우리는 그렸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림'이라는 말은 '그리움'이 줄어든 형태로 보인다.
< 그리움 - 그림 - 글 > 이라니.
재밌는 것은, 이 글자가 점점 직립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사족보행에서 허리를 주욱 펴고 두 발로 서고 있다. 언어학자들이, 생물학자들이 바보 같은 소리 말라고 하겠지만, 신기한 건 어쩔 수 없다. 서로의 모습이 닮은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줄지어 세워놓고 보니 인간의 진화모습과 닮아 있다니.
글의 원시가 '그리움'이다. 이걸 '그리움의 진화론'이라고 하자. 글은 그리움을 추억한다. 글은 그림을 추억한다. 오늘도 글은 그리움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그 모습에도 남아있듯, 영원히 그렇게 살 것이다. 모든 그리움을 위하여.
'[영화] 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팝콘먹는좀비] 01. 이야기를 하는 이유, <로맨스 조> (0) | 2013.09.20 |
---|---|
[룽의EX] 헤어짐 (0) | 2013.09.19 |
[룽의EX] 조슈아 마이클 스턴의 <스윙보트> - 자라지 못해 느끼는 성장통 (0) | 2013.08.22 |
[룽의EX] 왕가위, 양조위의 <화양연화> - 인생이라는 그래프 위의 어떤 점 (0) | 2013.08.08 |
[룽View] 봉준호 <설국열차> - 봉준호의 엔진은 무엇이었나 (0) | 2013.07.25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폴 오스터의 『선셋파크』(열린책들, 2013)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삶과 소설, 선셋파크의 결말에 대하여
폴 오스터의 『선셋파크』
소설은 삶을 담는다. 그렇기에 소설은 삶과 닮아있다. 하지만 닮아있다는 말은 언제까지나 비슷한 점이 많다는 뜻이고, 같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소설은 삶과 분명 다르다. 소설이 삶과 다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은 맨 뒷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사람은 살아있는 독자이다. 그 사람의 삶을 하나의 소설로 비유한다면, 시작은 했지만 아직 끝이 나지 않은 이야기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맨 앞장은 있으나 맨 뒷장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한 사람의 삶에 가장 마지막 장은 무덤가에 묵묵히 서있는 묘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 흔히 이야기되는 소설의 구성 단계이다. 소설 속에서 갈등은 책 속의 글자들을 삼키며 조금씩 자신의 몸집을 부풀려 나간다. 그러고는 끝에 가서 희망적으로든 비극적으로든 어떻게든 자신의 전부를 보여준다. 그렇게 소설은 결말을 맺고 책은 덮어진다. 하지만 삶은 소설과는 다르다. 하나의 갈등이 마무리되었다고 삶까지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이 해결되었더라도 삶은 어김없이 계속 진행될 것이고, 그 삶은 언젠가 다시 갈등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다면 소설은 조금 달라질 필요도 있을 것이다. 소설이 조금 더 삶의 모습에 다가간다면, 소설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갈등의 해결과정과 그로인한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갈등을 바라보는 시선과 갈등을 마주하는 자세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폴 오스터의 선셋파크는 삶과 굉장히 닮아있는 모습의 결말을 맺고 있다.
이 소설은 마음속에 상처를 지닌 네 사람이 버려진 목조 건물에 모여들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깨끗이 청소하고 새로 페인트칠을 하였지만, 무단 점유한 그들의 보금자리는 그들의 현 상황처럼 일시적인 장소이고 언제 내쫓길지 모르는 불안한 곳이다. 서로 다른 음이 하나로 모여 화음을 만들어내듯, 각기 다른 상처들은 하나로 어울리며 살아갈 희망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서로 말하지 않고 서로를 보듬었고 점점 희망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소설은 희망이라는 결말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나아간다. 하지만 그 끝에 다다르기 몇 페이지 전에 희망은 순식간의 절망의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그들을 ‘합법적으로’ 내쫓으려는 경찰들이 들이닥치면서 그들의 집은 아수라장이 되버린다. 경찰의 폭력에 앨리스는 계단에서 떨어지고, 그 광경을 목격한 마일스는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경찰을 폭행하였고 도주한다.
가까스로 불행에서 빠져나오던 마일스 헬러는 다시 불행과 마주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불행과 마주했다는 것이다. 그는 예전처럼 그의 부모를, 그의 미래를, 그의 현재의 삶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는다. 현재에서 벗어나 과거에 짓눌려있거나 미래의 희망만 쫓지도 않는다. 그는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려 최선을 다할 것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마일스의 독백은 그러한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차가 브루클린 다리를 건널 때 그는 이스트 강 건너편의 거대한 건물들을 바라보며 사라진 건물들, 무너지고 불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건물들, 사라져 가는 건물들과 사라지는 손에 대해 생각했다.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328)
마일스 헬러는 달라졌다. 그가 여전히 큰 곤경에 처해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역경을 이전과는 다르게 멋지게 맞닥뜨릴 것이다. 독자는 책을 덮으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마일스의 변한 모습이 그의 뇌리 속에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마일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책장을 덮더라도 우리 앞에 삶이 그대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문학] 오까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에서제일잘생긴익사체] 환상, 욕망, 사실, 허구 (1) | 2013.09.30 |
---|---|
[세계영화사 강의] 할리우드, 영화의 표준화를 가져오다 (0) | 2013.09.17 |
[게으름에 대한 찬양] 자, 이제 모두 게을러집시다! (0) | 2013.08.20 |
[천사는 여기 머문다] 자신 안의 생명을 찾아나가는 여정 (3) | 2013.08.06 |
[타인의 고통] 사진이 보여주는 것, 그리고 보여주지 않는 것 (0) | 2013.07.2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8월 30일 연재가 작가의 개인 사정으로 인하여 휴재합니다.
한 회 휴재 후, 9월 13일 새로운 이야기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공지사항'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지사항 (새로운 집필진) (0) | 2013.06.14 |
---|---|
2월 업로드 날짜 공지 (0) | 2013.02.0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코너소개 : 샤오롱바오의 영화 후루룩
안녕하세요, 샤오롱바오입니다. 지금까지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으로 열 편의 영화를 소개했습니다. 이번엔 새 코너 “샤오롱바오의 영화 후루룩”을 시작할 텐데요, “냠냠”이 제가 마음속에 간직해두고 있는 영화들을 조목조목 꼭꼭 씹어서 분석‧비평하는 글이었다면, “후루룩”은 주로 상영 중인 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하고 그에 대한 감상평을 적는 식이 될 것입니다. 새 코너는 예전의 영화들을 다시 볼 기회보다는 상영 중인 영화를 볼 기회가 훨씬 많아진 샤오롱바오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것입니다. (DVD방이 멀어지고 영화관이 가까워진 변화라던가?) “냠냠”에서 시도했던 깊은 관찰과 다양한 정보 조사를 다소 포기해야겠지만, “후루룩”만의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매력에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샤오롱바오의 영화 후루룩1 <일대종사> : 힘, 흐름, 감각
샤오롱바오의 영화 후루룩, 그 첫 영화는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2012)입니다. <일대종사>는 <아비정전>(1990), <중경삼림>(1994), <해피투게더>(1997), <화양연화>(2000) 등으로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왕가위 감독의 최근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송혜교(장영성 역)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죠.
사실 샤오롱바오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직접 보는 것이 처음입니다. 임팩트 강한 이름과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있는 감독의 영화를 만나려니 약간은 긴장한 채로 영화를 본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일대종사>가 그의 명성이 아까운 영화는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보입니다.
“일대종사”?
일대종사(一代宗師)란 각 무술 문파에서 한 시대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위대한 스승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각 문파를 부흥시키고 실력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고수에게 붙여지는 명예로운 칭호로, 각 문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소속 문파를 벗어난 무림계 전체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인물에게 붙여진다. 일대종사의 칭호를 받은 인물은 무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공헌을 하여 만인들에게 널리 존경을 받게 되는데 중국 무림 역사상 일대종사의 칭호를 받은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대표적인 일대종사는 홍가권(洪家拳)의 황비홍(黃飛鴻)이나 영춘권(詠春拳)의 엽문, 미종권의 곽원갑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영화의 제목인 “일대종사”는 이런 뜻의 단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이 바로 마지막 줄에 언급된 엽문(양조위 분), 엽선생입니다. (이소룡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엽문에 대해서는 영화로 제작도 되었죠.)
얼마 전 [룽의 Ex]에서 화양연화에 대한 글(http://seesunblog.tistory.com/80)을 읽고 샤오롱바오는 <일대종사> 역시 멜로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지 않을까 예상했습니다. 왕가위 감독과 <일대종사>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송혜교의 출연 확정 이후 그녀가 엽문의 아내 역으로 캐스팅 되었다는 소식이 주로 거론되거나 영화 소개에도 송혜교가 분한 장영성을 중점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주로 봐온 탓이겠지요. (실제로 영화에서 송혜교가 분한 장영성의 비중은 생각보다 많이 작습니다.) <일대종사>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비율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채 10%도 안 될 것 같네요. 어쩐지 12세 관람가라더니….
이 영화의 중심이자 가장 큰 관심은 쿵푸, 무술 권법에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일대종사>는 순도 높은 무협 영화로서 영춘권의 마스터인 엽문의 전기를 다룹니다. 다만 거칠고 강렬한 ‘주먹질’을 평범한 무협 영화가 아닌 왕가위 감독만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감각과 세계관에 있습니다. <일대종사>에서 왕가위 감독은 쿵푸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장되고 또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시각적 청각적으로 말이죠. 그리고 엽문과 주요 인물들의 생애를 지배하는 무림의 세계는 그들의 삶과 완전히 일치되어, 힘이나 실력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생의 법칙과 교훈을 주는 듯합니다. 이것들을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힘의 흐름’ 정도가 가능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채 10%도 되지 않는 짧은 사랑의 순간이 주는 여운 또한 진하게 남을 수 있습니다.
힘의 흐름을 감각하라
<일대종사>의 첫 장면은 비오는 거리, 엽문이 오직 맨손으로 수십 명의 사람들을 상대하여 전멸시킵니다. 엽문의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강렬한 오프닝이지만, 1대 다의 상황에서 주인공이 영웅처럼 승리하고야마는 이런 장면은 진부하고 다소 촌스럽기까지 하지요. 하지만 왕가위 감독은 이 진부한 상황을 가장 감각적인 화면으로 변모시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연마하고 구사하는 권법들은 그저 힘으로 때려 부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의 힘의 흐름을 읽고 이용하는, 깊은 내공을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힘의 흐름을 읽기 위해 과감히 눈을 감고 대결에 임하는 엽문은 내공의 진수를 보여주고요. 이를 화면 안에 감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왕가위 감독은 빗물, 눈이나 먼지 등의 움직임과 진동, 바람과 공기의 흐름을 담은 소리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오프닝 씬에서도 빗물은 엽문의 힘의 파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매개가 됩니다. 엽문의 손이 절도 있게 내뿜는 장력이라던가, 그의 손과 다리가 타격한 상대의 몸에서 반동되어 출렁이는 물방울들이 그의 힘을 가시적으로 짐작케 합니다.
영화 내내 반복되는 격투씬에서 왕가위 감독은 이러한 힘의 감각적 표현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거참 비도 자주 오거니와, 건조한 실내에서는 건물에 붙어있던 먼지가, 눈밭에서는 작은 눈발들이 힘의 흐름을 담아냅니다.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하지만 힘 있고 절도 있게 내딛는 발걸음들을 담아낼 때는 바닥의 질감까지 생생히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힘을 조절하는 비가시적인 무술의 원리를 우리의 온 감각으로 느끼게 해주니, 가히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일대종사>의 과장되고 섬세한 연출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감각입니다.
자칫 촌스러울 수 있는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열쇠는 배우들의 눈빛과 감독의 긴장감 조절에 있습니다. 영화는 종종, 격투씬이 아닐 때조차 초고속 카메라를 보는 듯 느린 화면으로 진행되는데, 이 때 화면 안 인물들의 모습이 참 극적입니다.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거든요. 영화가 아닌 따로 떼어내진 사진 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이렇듯 숨 막힐 듯 빠른 속도의 촉각으로 또 느린 화면의 생경함으로 조절되는 긴장감은 영화 내내 관철되는 과장되고 극적인 표현들과 만나 이 무협영화를 왕가위의 작품으로 만듭니다.
이처럼 일종의 숭고함까지 느끼게 하는 왕가위 감독 특유의 연출과 영상미는 역시 왕가위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궁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심리적 갈등을 가장 많이 겪는 궁이(장쯔이 분)가 등장할 때의 조명과 유리창 등을 이용한 명암 효과는 특히 인상적입니다. 엽문은 격동의 시대적 상황에서도 안정과 절제를 보여준다면 궁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격동하는 인물입니다. 올곧은 엽문의 삶만으로는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를 엽문과 궁이의 대조적 태도가 전체 극의 균형을 맞춰주는 느낌입니다.
순간의 사랑
“........이 순간은 양보할 수 없지.”
강호의 지도자였던 공융(왕경상 분)이 엽문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자신의 자리를 물려준 후,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공가’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엽문을 초대해 결투를 벌이는 공이의 한 마디. ‘졌더라도 되찾을 수 있다, 천하를 다스리는 영웅이 되지는 못하지만 이 순간의 설욕을 포기할 수 없다.’ 공이는 가문의 자부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인물로, 조금은 충동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입니다. 그런 그녀와 엽문의 필연적인 충돌. 영화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바로 여기, 두 사람의 결투씬입니다.
어떤 여타의 소음도 없이 두 사람의 호흡과 움직임이 만드는 소리와 파장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아 역시 힘의 흐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과 묘한 기류, 강한 충돌과 밀고 당기는 힘의 교차, 서로의 생각을 읽어내는 교감의 시간. 이것들이 어우러진 가운데, 다시금 <일대종사> 특유의 긴장감 조절이 빛을 발합니다. 격렬히 겨루면서도 서로의 몸에 의지해 결투를 진행해나가고, 결국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거리를 두고 얼굴이 맞닿을 때 긴장은 극에 달하고 두근거림까지 전달됩니다.
순간을 놓치지 않는 궁이와 그녀의 선택에 응한 엽문에게 순간의 마주침은 매우 강렬합니다.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아 더 절실하죠. 주고받은 서신의 글자 몇 개, 아쉬움을 담아 간직해 온 단추 한 개의 함축이 주는 진동은 깊은 파장을 지니고 관객의 가슴 속으로 퍼집니다. 룽이 말했듯,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닐지라도 가장 소중한 순간일 수 있겠네요. 잊을 수 없어 오래 지속되는 아쉬움과 후회의 순간. 사랑의 힘은 어긋나 버렸지만 내려놓는 법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의 현명함은 어딘가 아련합니다. 두 시간의 러닝타임 속 몇 분 안 되는 사랑의 시간, 그러나 이 사랑의 순간이 지배하는 여진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타인의 삶이 가지는 의미
영화에 주인공 엽문이 대표하는 영춘권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북방과 남방의 다양한 권법들을 가진 인물들이 신중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자신의 권법을 설명해주며 엽문과 대결하죠. 무협 영화라는 자신의 본분에 정말 충실히 임하고 있죠? 굳이 있어야하나 생각이 들만큼 영화에서 겉도는 일선천(장첸 분)의 스토리와 권법 또한 시간을 할애하여 소개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타인의 생애를 관찰하는 일이란 꽤나 건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의 절제가 뛰어난 엽문 같은 인물의 경우 더욱 그러하죠. 하지만 격동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다양한 권법의 가르침을 좇고 직접 실현하는 엽문의 생애가 보여주는 세계관은 왕가위의 영화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도 참 아름다운 영상의 흐름으로.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그를 충실히 구현함으로써 어떤 세계관을 제시하는 왕가위 감독의 뚝심이 존경스러운 순간입니다.
음, 한국에서 많은 관객을 동원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생소한 세계인 무협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멜로도 별로 없고, 함축과 상징이 풍부한 대사들을 소화하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중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라면 시간 순으로 영화를 따라가는 게 처음엔 조금 버겁기도 합니다. 실제로 샤오롱바오가 관람할 때에도 큰 영화관에 일곱 남짓의 관객만이 있었어요. 근데 이게 또 영화를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장점이기도 하지 않나요? 막 내리기 전에 보시길 추천합니다. 후루룩!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영화] 샤오롱바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샤오롱바오의 영화 후루룩3 <관상>: 운명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0) | 2013.09.25 |
---|---|
샤오롱바오의 영화 후루룩2 <바람이 분다>: '꿈'으로 '살아가기' (4) | 2013.09.11 |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⑩-2 <멜랑콜리아>: 숨은 그림 찾기 (2) | 2013.08.14 |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⑩ <멜랑콜리아>: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0) | 2013.07.17 |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⑨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이별의 공식, 사랑과 이별에 대한 예의 (0) | 2013.07.0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골방통신]
글로벌 이상주의자들의 현실적 만남: UNAOC-EF 썸머스쿨
* 김근근은 8월 24일부터 일주일간 UNAOC-EF Summer School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에 있습니다. 이번주 골방통신은 국제뉴스를 다루는 대신 청년들이 열어가는 국제협력의 현장에서 그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 드립니다.
전세계에서 100명을 모아 난장토론을 시킨다면 어떨까. 그것도 아주 열정적이고 혈기왕성한 청년들만 모아서. 무슬림과 기독교도, 시리아인과 레바논인,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파키스탄인과 인도인, 미국인과 아프간인, 중국인과 대만인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국제 문제'에 대해 논하게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유엔문명간연대(UNAOC)와 EF(Education First)가 뉴욕에서 일주일간 여는 UNAOC-EF 썸머스쿨은 그런 대책 없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아무렇지 않게 추진해버린 결과다.
93개국에서 모인 100명의 청년들의 국적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곳(Mauritania, Sierra Leone ...)부터 국제면을 급박하게 오르내리던 곳(Syria, Egypt ...)까지를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다. 입국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아프간인은 미국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데 6시간이 걸렸고, 캄보디아인은 비행기를 3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몇몇은 비행기가 연착되었으며, 몇몇은 아예 미국 비자발급이 거절돼 다른 참가자로 급하게 교체되기도 했다.
참가자들의 면모도 화려하다. 나이지리아에서 아동구호 NGO를 운영하는 청년부터 키르키즈스탄의 비디오 액티비스트, 미얀마의 페미니스트, 뭄바이에서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브라질 청년,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발언해 온 호주의 코미디언, 독립 블로거와 전문적 저널리스트도 있다. 글로벌하게 모인 이들 이상주의자들은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할 지도 모르겠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 자신의 꿈을 열심히 설명했다.
파티처럼 화기애애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각국의 대표들이 가져온 시각은 국적의 다양함 이상으로 폭넓게 펴쳐져 있었고, 때로는 극심한 시각차를 확인하기도 했다. 소통은 공식적 세션이 끝난 뒤에도 끊이지 않았다. 룸메가 된 예멘과 터키의 청년은 세속화된 무슬림에 대한 날카로운 논쟁을 밤늦도록 펼쳤고, 이스라엘과 아프간의 청년은 다리아픈 것도 잊은 채 숙소 복도에 서서 갈등의 해결방안을 찾고 있었다. 모두가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었고, 모두가 다른 인사이트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대화가 통할 수 있다면,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공통의 인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만 보자면 아무래도 서구-중동의 문제가 논의의 중심이 되고 있다. 특히 시리아, 이집트에서의 급박한 정세와 이스라엘을 둘러싼 여러 국가간의 갈등의 주요한 의제이다.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문제이지만, 국제정치의 차원에서는 아무래도 중동이 뜨거운 감자인 셈이다. 더불어 서구의 이민자 문제와 우익 극단주의자와의 갈등,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의 빈곤 해결을 위한 국제협력, 소비에트 이후 동유럽과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의 민주주의적 이행의 문제 등도 중요한 대화 주제가 되고 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아무래도 남북한 갈등과 중국-대만 문제가 핵심적인 듯 하지만, 아쉽게도 북한 청년은 참가하지 못했다. 게다가 문명간 갈등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만큼 상대적으로 부차화되는 느낌이다. (사실 동북아의 주요갈등은 그저 냉전갈등의 해결이 지연된 탓이기도 한 만큼 서구의 시각에서는 약간 철지난 문제라는 인식이 있다)
이들 100명의 청년들이 모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안은 뭘까? 일단 참여자의 면면과 앞으로 진행될 세미나 주제를 보면 주최측의 마음에는 두 가지 대안이 있는 것 같다. 1) 젊은 오피니언 리더들이 뉴미디어 등을 활용해 소통을 증진하는 것 2) 청년들이 국제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사회적 기업을 이끄는 것. 참여자들은 대체로 NGO 활동가, 사회적 기업가, 혹은 저널리스트의 세 가지 중 한 부류에 속하고 있다. 앞으로의 세션에서 어떤 논의가 진행될지 주목해볼 만하다.
시리아에서 온 청년은 미국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데 4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시리아의 상황은 어떠냐고 묻자 슬픈 표정으로 'It's getting worse'라고 답했다. 이대로 갈등이 계속된다면 한국처럼 두 개의 국가로 갈라져버릴지 누가 아냐면서. 이집트에서 온 의대생에게 정치적 혼란에 대해 물으면서 조심스럽게 어느 쪽을 지지하냐고 묻자, 그는 두 정치세력 중 어느 쪽도 지지하지 못하겠다고, 일단은 공부를 끝내려고 한다고 체념하듯 말했다. 스웨덴 NGO활동가는 얼마전 스웨덴에서 최초로 무슬림에 대한 혐오범죄가 일어났다고 전해왔다. "Even in Sweden!"
시리아의 총성도, 이집트의 정치적 혼란도, 스웨덴에서의 극우주의 활동도 일주일의 "교류"로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각자의 공동체에 무언가 임팩트를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UNAOC-EF 썸머스쿨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영화] 김근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네마 폴리티카②: 올리버 스톤, <닉슨> (Nixon 1995) (0) | 2013.09.23 |
---|---|
시네마 폴리티카⓵ : Aesthetica Politica (0) | 2013.09.08 |
휴재 공지 (0) | 2013.08.12 |
[골방통신] 국적 없는 사람들, 로힝야족 (0) | 2013.07.29 |
[골방통신] 이집트 사태는 민주화일지도 ...일단은 (0) | 2013.07.15 |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