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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23 [Op.6] 탱고의 계절, 피아졸라의 <사계>
- 2013.08.22 [룽의EX] 조슈아 마이클 스턴의 <스윙보트> - 자라지 못해 느끼는 성장통
- 2013.08.20 [게으름에 대한 찬양] 자, 이제 모두 게을러집시다!
- 2013.08.17 14. 지금의 얼굴은 전생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 2013.08.14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⑩-2 <멜랑콜리아>: 숨은 그림 찾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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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푹 찌는 한여름의 고비는 지났나보다. 여전히 낮이면 폭염이고 열대야도 계속되고 있지만, 저녁이면 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도 가끔 있는 걸 보면 이러다가 곧 가을이 오겠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한여름의 폭염이든 겨울의 혹한이든 그 계절의 가운데에서는 그 계절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계절의 끝이 보이는 순간 문득 계절은 항상 부지런히 변화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번 여름도 마찬가지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짧은 가을을 거쳐 언제 더웠냐는 듯 칼바람이 불겠지.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 서있는 이 시기에 어울리는 곡 하나와 그 작곡가를 살짝 소개해본다.
소개하려는 곡은 바로 <사계>이다. <사계>라고 하면 친숙한 비발디의 사계를 떠올릴 수 있지만 이번에는 좀 더 강렬하고 열정적인, 피아졸라의 <사계>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비발디의 <사계>가 작곡되고 나서 약 200년 후에 피아졸라가 태어났다. 그리고 1992년에 피아졸라의 <사계>가 작곡되었으니 작곡된 지 20년 남짓 된 현대곡이다. 피아졸라 <사계>의 원제는 <4 계절의 포르테냐(Cuatro Estaciones Portenas)>, 부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 포르테냐는 민속음악을 뜻하는 스페인어다. 피아졸라의 <사계> 역시 비발디의 <사계>와 마찬가지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피아졸라의 <사계>는 그가 직접 의도하고 작곡한 하나의 곡이 아니라 후대에 편곡되면서 완성된 곡이다.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Gidon Kremer)는 비발디의 <사계>의 새로운 버젼을 구상하던 중 피아졸라의 탱고 오페라 작품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리아> 속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겨울>을 발견한다. 다른 작품 속에서 나머지 계절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작곡가 친구인 레오니트 데샤트니코프에게 편곡을 부탁한다. 탱고 곡을 협주곡과 같은 느낌으로 편곡하는 과정을 거치고 네 악장으로 가다듬는 중간 과정을 거쳐 마침내 피아졸라의 <사계>가 완성된 것이다.
<사계>의 작곡가 피아졸라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의 반도네온 연주가이다. 생소한 악기 반도네온부터 소개하자면 아코디언과 비슷하게 주름상자를 통해 소리를 내며 단추로 음을 연주하는 악기다. 실제로 독일의 H.반도가 아코디언에서 고안하여 만들었다. 반도네온이 19세기 후반 아르헨티나에 수입되었는데 이때부터 아르헨티나의 탱고 연주에 널리 쓰이면서 아르헨티나 탱고의 핵심적인 악기가 되었다. (위 사진에서 피아졸라가 들고있는 악기가 반도네온이다.)
반도네온 연주가였던 피아졸라는 탱고 작곡가이기도 했다. 그가 활동한던 1950년 당시 세계적으로 탱고는 침체기에 빠져있었다. 원래 탱고는 춤을 추기 위한 곡, 즉 춤곡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지만 피아졸라는 연주를 위한 곡으로서의 탱고를 추구하며 작곡 활동을 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탱고곡은 춤으로부터 독립하여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음악으로 연주되기도 했다. 피아졸라가 새롭게 개척한 탱고는 ‘새로운, 최신의’라는 의미의 스페인어 ‘누에보’를 붙여서 ‘누에보 탱고(Nuevo Tango)’라고 불린다.
피아졸라는 누에보 탱고를 독립적인 음악으로 만들기 위해 아르헨티나 전통 탱고에 클래식 음악과 재즈를 접목시켰다. 특히 클래식에서는 피아졸라가 평소 좋아하던 스트라빈스키와 바르토크의 음악을, 재즈에서는 미국의 재즈를 접목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피아졸라가 새롭게 개척한 누에보 탱고는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어 탱고곡을 연주하는 큰 오케스트라가 생기거나 탱고 연주만을 위한 콘서트가 열리기도 하는 등, 탱고의 침체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음악 활동을 통해 그는 지금까지도 탱고에서 있어서 세계적인 천재 작곡가로 평가된다.
“나는 푸가를 써도 탱고처럼 쓸 것이다.”
_아스토르 피아졸라
실제로 피아졸라의 <사계>는 실내악으로 편곡되어 자주 연주된다. 실내악에서 연주되는 피아졸라의 <사계>는 다채롭다. 클래식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서는 우아함이 느껴지는 동시에 탱고의 정열적인 느낌이 강하게 난다. 그러면서도 정해진 박자에 미묘하게 어긋나면서 서로 밀고 당기기하는 리듬에서는 재즈의 흥을 느낄 수 있다. 클래식이면서, 탱고이면서 재즈인 피아졸라의 <사계>는 20분이 넘어가는 꽤 긴 연주시간이지만 세 가지 묘미를 모두 듣기에는 오히려 부족할 정도다. 특히 겨울 악장의 경우에는 꽤 친숙한 멜로디가 반복되면서 듣는 사람은 반가움의 감정도 느낄 수 있다.
계절을 소재로 한 곡들은 흥미롭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느낌에 어울리게 멜로디로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하고, 같은 계절도 곡마다 다른 느낌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 참신하다. 계절은 소리없이 움직인다. 인식하지 못한 채로 살다보면 어느새 곁에 와있는 것이 다음 계절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꾸준히 움직인다. 계절에 맞추어 바뀌는 세상도 참 꾸준하다. 계속 변화하려는, 그 변화에 맞추어가려는 모든 노력들은 어쩌면 열정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열정과 탱고, 그리고 계절. 피아졸라가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부분은 어쩌면 이런 연관이 아닐까.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를 준비하며 열정적인 계절, 탱고의 사계를 한 번쯤 가볍게 감상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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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14 조슈아 마이클 스턴의 <스윙보트>
- 자라지 못해 느끼는 성장통
그러니까 내 키가 아직 자라던 시절, 나는 꿈 많은 소년이었다. 적어도 덩크슛을 할 정도의 키는 될 줄 알았고, 적어도 윤동주와 비슷한 나이엔 시집 한 권 내겠거니 생각했고, 적어도 나는 군대에 끌려가진 않을 줄 알았고, 적어도 20대 중반쯤엔 아름다운 예비신부와 괜찮은 직장이 있을 줄 알았다. 이제와 보니 단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된 것이 없다.
성장판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을 무렵,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덩크슛은 포기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시집도, 군면제도, 예비신부도, 괜찮은 직장도 남아있을 시절이었다. 덩크슛 대신 새로 생긴 꿈은 치기어린 것이었다. 세상을 좀 더 괜찮은 곳으로 바꾸고 싶다는 것. 이건 성장판 처럼 닫혀버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그게 덩크슛만큼이나 힘든 꿈이었다는 걸.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세상 모든 가능성의 성장판이 닫힌 것처럼 사는 한 남자의 영화, 우연히 세상 모든 가능성의 열쇠를 갖게 된 한 남자의 영화. <스윙보트>다.
'스윙보터'는 선거에서 어떤 후보에게 투표할지 결정하지 못한 유권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영화의 제목인 <스윙보트>는 '아직 결정하지 못한 투표'를 뜻한다. 고루한 얘기지만, 투표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세상은 정말로 뭐가 됐든 바뀐다. 또는 전혀 달라지는 게 없다. 스윙보터는 어떻게 보면 세상을 바꾸는 키를 쥔 사람인 것이다. 또는 전혀 의미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냐고? 이거야 말로 믿기 나름, 선택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미국 뉴멕시코주의 작은 도시 텍시코. 버드 존슨은 별다른 직업 없이, 낚시와 맥주를 즐기며 빈둥거리며 중년의 싱글대디로 산다. 그러다보니, 12살 딸 몰리가 이런 아빠를 대신하여 집을 돌본다. 이들의 운명이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은 바로 대통령 선거일. 선거시스템기계의 오작동이 생기고, 선거법에 따라 버드에게만 10일안에 재투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공교롭게도 선거는 초박빙이고, 버드에게 주어진 이 한 표가 차기 대통령을 결정하게 된다. 전 세계의 매스컴이 버드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양측 대선캠프는 버드만을 위한 대선캠페인을 펼친다. 낚시를 좋아하는 버드의 마음을 잡기 위해 공화당은 도시 개발 계획을 버리고 강을 살린다며 친환경정책을 내놓고, 낙태를 인정하던 민주당은 버드가 생명 존중론자라고 짐작한 다음 갑자기 낙태반대운동 광고에 열을 올린다.
선거 때마다 당신의 한 표 한 표가 소중하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영화는 이를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문제는 버드가 표에 대한 책임감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반면 딸 몰리는 아빠의 한 표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온 더 좋은 세상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편지들 때문이다. 뻔한 얘기지만 막상 보면 찡하다. 성장판에 대한 희망처럼 접어버린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새삼 들어서다.
어른이 된다는 건 가능성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능성의 문을 하나씩 닫으며 그나마 열린 문이 무엇일까를 필사적으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무엇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되는 게 없었다. 사랑도, 사람도, 상황도, 세상도 그랬다. 하물며 내 삶조차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품어야 할 게 희망인지 절망인지 모르겠는 하루하루. 그것이 성장판이 닫힌 이후의 성장통이었다.
버드는 아마 자신의 모든 성장판이 닫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대로 멈추든지 썩어갈 거라고 자신의 인생이 손에 쥔 휴지조각 같았으리라. 그래서 우연한 사고로 그의 성장판이 열리는 순간은 감동적이다. 전엔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던 투표용지가 그를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그는 그렇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흔들림은 세상의 앞날을 꿈꾸게 하고, 그의 앞날을 새롭게 만든다.
누군가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말했던가. 그런데 나는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런게 어른이라면 되기 싫다고 생각하고 있다. 버드가 그랬듯, 멈춰버리는 것이 어른이라면, 어른은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오히려 좋은 어른은 멈추지 않고 흔들리는 사람인 것 아닐까. 실은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자라며 느껴지는 성장통도 아팠지만, 자라지 못해 느끼는 성장통은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영화는 버드가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그가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고,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으니까. 아마 버드는 이후부터 끊임없이 흔들리며 살아가지 않을까. 흔들리는 건 각자의 의지의 문제다. 누구나 흔들리며 살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다시 생각해본다. 문을 닫은 건 나였을지도 모른다고.
※ 조슈아 마이클 스턴의 <잡스> 2013년 8월 2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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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사회평론, 1997)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자, 이제 모두 게을러집시다!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
여름기간 동안 계획했던 중요한 일정 하나가 끝이 났다. 얼마 자지 못한 탓에 몸은 몸대로 지쳤고, 무언가 중요한 것이 끝나니 마음은 마음대로 풀어져버렸다. 방바닥에 축 달라붙은 채로 며칠을 보냈다. 잠을 아무리 자도 누적된 피로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나는 햇빛이 내리쬐는 날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 나무늘보마냥 그렇게 늘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 갑작스레 어떤 증상이 나타났다. 나는 이것을 ‘생산 강박 증상’이라고 부르는데,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지 않는 상태에 모종의 두려움을 느끼는 증상이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감이 물밀 듯이 밀려올 거라는 상상과 내가 멈춰있는 사이에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추월해버릴 것이라는 상상 등을 하며 혼자 괴로워하는 것이다. 이 증상은 언제나 내가 안락함을 즐기고 있을 때 불현 듯 엄습하여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나는 책이라도 하나 붙잡고 누워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책장을 살펴보았다.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단연 나의 시선을 끄는 제목이 있엇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드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그렇게 하나의 위로이자 나를 위한 변명처럼 내 손에 들어왔다. 겉표지 뒷장에 나와있는 독자와의 문답은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글귀였다.
선생님이 쓰신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을 샀습니다. 이 책을 꼭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상대를 가리지 않고 떠들어 댐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지독한 게으름뱅이이며,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인간입니다. (중략) 그 같은 게으름뱅이에게 강경하게 대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부인 (중략)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그 게으름뱅이에게 제가 정말로 지지하고 동정한다는 것을 그대로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도 틀림없이 저와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저도 날이면 날마다 잔소리만 듣고 산다면 어쩔 수 없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버트런드 러셀
책을 펼치고 언제나 그렇듯 저자소개를 간단히 훓어보았다. 아뿔싸, 내가 속았구나. 러셀은 전혀 게으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에 40여 권의 책을 쓴 철학자이자 문학가이고, 『권위와 개인』이라는 저서로 노벨상까지 받았다. 수많은 저작을 남기는 와중에 수소폭탄실험 반대운동, 핵무장 반대운동, 쿠바위기,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 등에 관여하며 자신이 아는 바를 실천하는 바쁜 사람이었다.
자신은 그렇게 바쁘게 살아놓고선 사람들에겐 게을러지라니, 어느 정도의 원망을 품은 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게으름에 대한 찬양」 부분을 다 읽고 나서 어느 정도 그의 말에 수긍하게 되었다. 게을러질 필요가 있겠다고.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 나타난 러셀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하다. 하루에 4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게을러집시다! 어떤 사람은 코웃음을 칠 테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말이다. 실제로 이 글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 중 하나는 허무맹랑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8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를 떠올렸다.(스포 주의!!) 극 중 남궁민수는 엔진을 차지하는 것 말고 열차를 탈출하자고 말한다. 현 시스템을 정복하지 말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러 가자는 이야기이다. 영화 속에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미친 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밖은 어마어마하게 춥고, 어떤 사람들은 밖에 팔을 몇 분간 내놓았다가 그대로 팔이 부셔지는 형벌도 당했고, 이미 시도했다가 그대로 얼어버린 사람도 있다며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말미에 결국 어린아이 둘이 열차 바깥에서 살아남았고, 그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인류를 꾸리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보며 아마 <설국열차>는 그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것 봐라. 새로운 세계라는 것이 마냥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한다. 하루에 단지 4시간만 일을 한다니. 하지만 책에도 나와있듯이,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남자의 평일 근로 시간이 15시간이었고 아이들도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현재 우리는 19세기 초보다 절반 가량인 8시간을 일하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가 엄청난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여가시간이 늘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가 러셀의 주장이 그저 허무맹랑하기만 이야기가 아니라는 변호였다면, 지금부터는 조금 다르게 그의 주장을 바라보려 한다. 그의 주장만을 떼어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왜 이 주장을 펼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단순히 노동시간을 줄이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경제적 생산성이 최우선시 되는 사회보다는 게으름이 찬양받는 사회, 즉 생산성과 유용성에 대한 집착없이 행동할 수 있는 사회가 더 행복한 사회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러셀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그의 주장을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무시하기 보다는, 그가 말하는 더 행복한 사회에 대하여 깊이 고민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이 세상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최고로 행복한 세상인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생산성이나 유용성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 행복한 세상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는 자기자신을 바라봐라. 러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신은 이미 게을러져 버린 것이 아닌가?
노벨 문학상을 탄 저명인사에게 제대로 속았구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듯싶다. 그의 주장은 여전히 곱씹을 만한 것이었고, 글이 발표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그다지 바뀐 게 없어 보인다. 그렇게 책장을 덮었다. 어찌됐든 방바닥에 누워있을 또 하나의 멋진 핑계거리가 생겼으니, 며칠 더 이 생활을 지속해도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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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지금의 얼굴은 전생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안녕하세요, 당신. 빙구에요.
오늘은 전경린의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이 소설 중 제가 가장 인상깊게 남은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지금의 얼굴은 전생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다’.
참 아름다운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사랑한 사람의 얼굴을 가진다는 거요. 왜, 사랑하면 닮아간다는 말도 있잖아요. 어쩌면 지금의 당신과 저는 정말로 그 이전 생의 어딘가에서 평생 가장 사랑한 것들의 얼굴을 갖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지금 생에서 우리는 또 평생에 걸쳐 어떤 얼굴들을 사랑하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긴긴 생은 우리가 사랑하는 얼굴을 닮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르게 생각하면 조금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평생 몸 바쳐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의 자리로 영원히 수렴해갈 뿐, 결국 이 생에서는 결코 그 자리에 다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그 사랑을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곧 내 얼굴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절망을 선사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 얼굴을 가졌다가, 다시 잃어버리곤 하면서 서로를 향해 뻗은 길 위를 평생 떠도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은 수련이라는 인물이 보내는 스무살의 여름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제 막 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친 수련에게 삶은 불투명하고 추상적입니다. 악취나는 병든 할머니와 말이 안 통하는 부모님을 피해 즉흥적으로 연극판에 뛰어들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그녀를 스쳐가는 사람들에 의해 인생이 흘러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불안정하게 서성이면서, 스무살이라는 이름으로 없는 열정을 쥐어짜는 데에 젊음을 소모해야 하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지요. 많은 것들이 그녀의 맘대로 흘러가지 않고 그렇게 흘러가게 할 힘도 그녀에게는 없지만, 무엇보다도 수련에게는 그녀 자신이 없습니다. 얼굴이 없는 배우처럼, 서로 다른 대본을 갖고 무대에 선 배우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을 스쳐가는 사람들을 소통하려들기보다는 그저 말끄러미 바라봅니다. 그녀는, ‘수련’이라는 그녀의 이름을 참 많이 닮아 있어요. 수련은 자신을 단단히 받쳐 줄 뿌리도 땅도 줄기도 없이 못 위에 떠 있죠. 그래서 수면에 이는 바람도 그에 일렁이는 물결도, 다른 누군가의 삶을 떠맡은 것처럼 비현실적인 무게감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나라서 나라기보다는 ‘그저 네가 아니기 때문에 나이고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인 것’만 같은, 그런 모호한 자기경계를 겹겹이 두르고 그녀는 뿌리 없이 수면 위에 있습니다.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운 어린 솜털로 자의식의 보호막을 치고, 못의 물방울을 튕겨내면서. 그 떨림 하나에도 예민하게 흔들리며 물결을 빚고 삶의 질곡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녀가 온몸을 떠밀어 만들어내는 물길은 언제 있었냐는 듯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등이 뜯어져 나간 매미의 빈 허물, 모기장 안에서 아사한 고양이의 파삭파삭한 시체, 오래도록 앓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시신 등, 이 소설에는 허물이나 빈 껍데기를 형상화하는 이미지들이 여러 번 겹치며 변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때 우리가 머물렀던 시간의 죽음을 의미하지요. 한때 나였던 것, 내 자리이고 내 껍질이며 내 얼굴이라고 믿었던 것이 산채로 뜯겨져 나가는 고통에 대하여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몇 번이고 산채로 등이 터지는 아픔을 겪게 되겠지.
다른 여자와 택시에 오르던 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으로 평온과 활기를 되찾던 수련의 가족, 아버지의 거짓된 위로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모두 허물을 쓴 것과 다름없어 보입니다. 산 채로 등이 터질 허물, 자기 자리라고 생각했던,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자기 자리는 없는 그런 삶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그로부터 한걸음 비껴 서 있습니다. 그녀의 젊음은 그런 빈 껍질같은 얼굴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 결과 생각에도 없던 무대 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연극 준비가 수월히 굴러가지 않는 가운데 연출가인 해경은 사랑하지 않는 처를 피해 수련에게 마음을 기대 오고, 우연인지 장난인지 모를 여러 순간을 지나오면서 그녀는 그의 품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 밤을 계기로 그들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먼 곳으로 멀어지고 맙니다. 그 이후 그녀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생을 살아가기를 택합니다. 시간에 존재의 얼굴을 새기지 않는 삶의 방식, 수면 위의 물자욱이 소리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책망하지도 않는 그런 삶을요. 해경과 보냈던 스무살의 그 밤을 자신의 생 한가운데 팬 웅덩이처럼 남겨두고요. 그녀는 그와의 밤에 대해서, 그녀의 첫경험에 대해서 이렇게 외치고 싶어합니다.
그건 소통이었어. 이 단절된 세계의 틈에 머리를 들이민 밀통이었다구.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정말 소통이었는지, 소통이었다면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녀는 왜 그것을 소통이라고 부르면서 사랑이라고는 차마 부르지 못하는지. 그들은 그 밤 서로의 얼굴에 틈을 만들었고, 그 틈이 그녀와 해경의 존재에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의 삶의 등을 찢고 살갗을 벗겨내어야 했으며 자신의 삶을 벗고 다른 이의 자리로 또다시 뿌리없이 흘러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 강렬한 사건이었음에도, 그녀는 그 하루를 감히 사랑이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의도와 악의가 개입된 장난인지, 우연과 필연을 나눌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지, 무엇은 의무였고 무엇은 욕망이었는지, 그 순간이 혼란이었는지 구원이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가 자신의 살이고 어디까지가 타인의 살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서로를 닮아가는 것이라면,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가져가고 또 내어주는 것이라면, 그녀는 그럴 수 없었던 것이죠. 자기자신을 얼마쯤 경멸하고 사랑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바람과 물결에 대해서 수동적이고 무기력했던 수련, 늘 흐릿한 얼굴로 타인을 응시하는 그녀가, 기꺼이 누군가에게로 가 그의 얼굴이 되어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무살 수련의 사랑은 그 하룻밤으로 짧고 허무하게 끝이 납니다.
이미 스무살에 그녀는 그녀의 길 위에서, 생의 많은 질문들이 미처 답해지기 전에 시간 너머로 가라앉을 것임을 직감했고, 그런 삶을 받아들였습니다. 온몸으로 수면을 흔들어 못의 다른 어딘가로 도달해도 사실은 그 어디든 자신의 자리가 될 수 없음을 시인했고, ‘결국 누구나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서 살아간다는 허무한 깨달음, 평생을 그렇게 살 수도 있다는 초월과도 같은 담대함’의 시선을 이미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련은 인생의 한 점으로 섣불리 삶의 질곡을 통찰하려 들지 않고, 스무살의 사랑을 함부로 사랑이라 정의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그런 시선에 쉽게 공감할 수는 없었습니다. 책을 읽는 중에도 책을 덮고 난 이후에도 그녀의 얼굴이 어떤 얼굴이었을지 쉽게 상상되지 않았어요. ‘지금의 얼굴은 전생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다’, 그녀가 그 말을 좀 더 다르게 생각했더라면, 그녀의 이후 삶은 많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얼굴은 전생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 결국 사랑이란 서로의 얼굴을 가져가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얼굴을 남기고 가는 것… 저의 얼굴은 당신의 얼굴이 되고 당신의 얼굴은 저의 얼굴이 되는 것이 사랑인 거라고, 저 문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새 얼굴을 갖는다는 건 다시 말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얼굴을, 다른 아이덴티티를, 전혀 새로운 삶을 갖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사랑을 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생을 얻는 일과 같습니다. 사랑은 그런 일입니다. 또 하나의 생을 얻는 것과 같은 일, 생의 길이만큼 길고 멀고 깊은 그리움을 나누어가지는 일.
저는 당신의 사랑이 궁금해요. 당신이 누구의 얼굴을 어떤 얼굴로 어떻게 얼마나 사랑했는지. 누군가의 얼굴에 대해서 생각하는 만큼이나 당신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 생각했을는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얼굴이 어떻게 보여졌을지 말이에요. 당신은 당신의 얼굴을 아꼈나요? 제가 저의 얼굴을 소중히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이토록 사랑하는 당신의 얼굴을 찢어놓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나요? 우리는 결국 서로 이토록 닮아있는 걸요.
수련의 생각이 맞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평생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서 살아갈지도 모르는 존재, 물자욱의 자취도 남지 않는 수면 위에서 길을 헤매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서 있는 길이 어떻게든 저와 무수한 당신을 향해, 서로를 향해 뻗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 위에서 헤매면서 당신을 만나고, 사랑하고, 당신의 얼굴을 기꺼이 내 것으로 만들리라는 거에요. 설사 그 소중한 얼굴을 잃게 된다고 해도, 언젠가 결국 또 어딘가의 당신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말이죠. 저는 당신의 얼굴을 닮아갈 것이고 우리가 함께하는 날들에 무수한 표정을 새겨넣을 것이며 당신의 얼굴을 가진 순간만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삶의 조각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당신, 그렇게 그 사람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는 당신, 혹은 이제 막 누군가의 얼굴을 잃어버린 당신에게 제 작은 말들이 위로가 되길 바라요. 안녕,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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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⑩-2 <멜랑콜리아>: 숨은 그림 찾기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 1부 ‘JUSTIN’ 중‧후반부에서 주인공 저스틴(커스틴 던스트 분)의 우울감과 불안정함은 극도로 치닫는다. 이 때 저스틴은 감정을 폭발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형부 존(키퍼 서덜랜드 분)의 서재 선반에 진열되어있던 그림들을 모조리 갈아치우는 행동을 취한다.
보는 사람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저스틴의 행동, 정신없이 흔들리는 카메라의 움직임, 그리고 순식간에 눈에 들어왔다 금세 사라지는 여러 작품들. 잠깐의 장면이지만 이 그림들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준비해보았다. <멜랑콜리아>에 숨은 그림 찾기.
기존의 질서: 말레비치와 절대주의 추상
우선, 선반에 놓여있던 작품들을 보자. 저스틴의 공격을 받기 전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림들 말이다. 쭉 훑어보면, 원래 선반에 펼쳐져있던 작품들은 주로 추상화들로, 특히 절대주의 추상으로 잘 알려진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작품들이 대거 눈에 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이차원의 자화상>
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원>, 1920년대
말레비치, 카지미르 세베리니 비치Malevich Kazimir Severinivich(1878-1935)는 러시아의 화가이자 시각예술가, 극 디자이너, 미술이론가로서 칸딘스키, 몬드리안과 함께 추상미술을 이끈 화가로 거론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 추상 회화로의 이행기에 러시아는 칸딘스키와 말레비치를 앞세워 새로운 표현양식을 창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칸딘스키가 캔버스 위에 색과 리듬으로 표현주의 추상을 실험하면서 비대상이라는 개념을 주창했다면, 말레비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절대주의Suprematism 추상이라는 경향을 선도한다.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는 추상 그 자체-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세계의 느낌을 전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 추상이 가장 순수한 감정과 지각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열렬히 믿었다.
그럼 이쯤에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연작”들을 살펴보자. 절대주의 연작들은 감상자들로 하여금 예술의 초개인적인 본질로서 ‘절대’를 달성하게 한다는 생각에 의해 고무되던 말레비치의 대표적인 시기를 잘 드러낸다. 채색된 기하학적 형태-평면, 사각형, 십자-들의 역동적인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 이 구성들은 우주의 무한성을 축도한 배경공간에서 떠다닌다.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현실을 추론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말레비치는 순수한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여 보편적 미술언어를 창조한다는 자신의 꿈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명료한 형태로 시선을 잡아끄는 <검은 원>(1920년대)은 원이라는 기초적 기하학적 형태로 보편적인 미술 체계, 즉 현실의 자연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시공간적 관계에 근거한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겠다는 작가의 자기주장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형태의 절대적인 ‘순수성’과 이것들의 구성인 ‘공식’들을 강조하며 신성시했던 말레비치는 원과 정방형은 인간의 독창력과 관련된 가장 간결한 형태이며 검정과 빨강은 색과 형태의 순수한 강도에 있어서 최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스틴에게 ‘선택된’ 작품들
그렇다면 저스틴에게 선택된 작품들은 어떨까?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추상을 엎고 자리를 꿰찬 새로운 그림들.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 <눈 속의 사냥꾼>, 1565.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 <게으름뱅이의 천국>, 1567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로 일컬어지는 피테르 브뢰헬은 평범한 사람들-주로 농민들-의 일상과 네덜란드의 자연과 풍습, 속담 등을 따뜻하고 재치 있게, 그러면서도 섬세하고 예리한 터치로 그려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각광받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상어>에서도 그의 작품 <이카루스의 추락>(1555-8)과 <바벨탑>(1563)이 주제의식을 암시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영화 <멜랑콜리아>에 등장하는 브뢰헬의 작품은 <눈 속의 사냥꾼>과 <게으름뱅이의 천국>. 먼저 계절 연작의 하나인 <눈 속의 사냥꾼>은 1월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되며, 겨울적인 색채로 깊은 겨울의 추위를 나타낸다. 플랑드르 전원의 평범한 경관의 세세한 묘사와 함께 알프스 산맥의 웅장함을 결합시킨 이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역시 사람들이다. 그는 사람들의 노동의 변화가 아닌 색채의 변화로서 계절의 순환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계절 연작을 구성했다. 날씨는 매우 춥지만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혹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게으름뱅이의 천국>은 어떨까. 이 그림 안에서 거위, 돼지 같은 동물들은 모두 구워진 채로 돌아다니고, 지붕 위에서는 팬케이크와 타르트가 자라며, 울타리는 통통한 소시지로 만들어져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배가 부른 몸과 얼굴로 나태함을 한껏 드러낸다. 돈도 노력도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쾌락의 세계는 먹을 것, 마실 것이 풍성한 땅으로 기술된 ‘나태한 자의 천국’이라는 같은 제목의 네덜란드 시와 관련돼 보인다. 일상에 지친 우리가 꿈꾸는 파라다이스!
밀레이 존 에버릿Millais John Everett <오필리아>, 1851-2
19세기 라파엘전파의 일원인 밀레이 존 에버릿의 작품 두 점이다. <멜랑콜리아>의 포스터의 모티브였던 <오필리아>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그리려는 밀레이의 노력이 나타난 작품으로, 연인과 신에게 버림받아 평정을 잃어 물에 빠진 소녀를 주제로 한 첫 번째 그림이 되었다. <나무꾼의 딸>은 신분이 다른 소년과 소녀가 있고 신분이 높은 소년이 소녀에게 산딸기를 건네주는 순간, 그리고 소녀가 그것을 받기 위해 손을 내미는 순간- 그러니까 예정된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두 그림 모두 너무도 아름다운 배경의 자연과 대비되는 인물의 불길한 표정이 주는 불안감과 우울함을 특징으로 한다. <오필리아>에 등장하는 꽃들의 의미-제비꽃의 신의, 팬지의 허무한 사랑, 수선화의 깨진 희망, 양귀비의 죽음, 물망초의 잊지 말라는 메시지-또한 저스틴의 우울과 불안과 엮여 강조된다.
한스 홀바인(hans hollbein), <게오르그 기체의 초상>, 1532
홀바인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능숙한 솜씨를 보인다. 이 그림 역시 유리와 융단, 양피지 등의 질감이 섬세하게 표현되어있다. 홀바인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물건들은 인물의 직업과 성향을 알려줌과 동시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재현된 것이다. 꽃다발은 사랑과 정절, 순수, 겸손 등을 상징하고 깨지기 쉬운 유리와 시들어가는 꽃,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 들은 삶을 경솔히 받아들이지 말 것을 경고한다.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09-10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알수록 궁금한 이 그림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머리가 잘려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골리앗의 얼굴이 (이마의 상처로 미루어보아) 바로 카라바조 자신이라는 점이다. 왼쪽 눈은 아직 마지막 생명의 기운이 남아있지만 오른쪽 눈은 흐릿하고 시선이 부재함으로써 죽음을 예고한다. 그의 말년에 제작된 이 그림은 그가 육감적으로 느꼈을 절망을 증언한 것이자, 참수로써 지난 삶에 대한 자멸과 자책, 죄의식, 자학의 심리와 결부된 것으로 평가된다. 다윗의 얼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다윗이 어린 카라바조이든 그의 연인이든, 악당 골리앗의 머리를 움켜진 다윗의 눈에 서린 연민의 빛에서 더욱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의 교차를 목격할 수 있다.
카르 힐(Carl Fredrik Hill), <무제/crying dear>, 1900년경
스웨덴의 화가 카를 힐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표현주의에 가까운 예리한 스타일의 풍경화와 어둡고 절망적인 환상품의 스케치를 남겨놓았다. 그는 말년에 정신병을 앓다가 사망했는데, 그의 정신적 불안과 혼란스러운 자아는 그림에도 고스란히 표현된다. 나무를 연구하고 섬세하게 표현하기를 즐겼던 카르 힐은 정신병을 앓으면서 더욱 과장되고 격렬한 형태의 나뭇가지들을 그려내기에 이르는데, 이 그림이 바로 그러한 사례다. 울부짖는 사슴을 쉽게 연상시키는 이 그림은, 카르 힐의 과거 작품들을 떠올릴 때 어쩌면 나무 기둥과 나뭇가지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무가 사슴이 되고 내가 나무가 되는 혼란스러운 상상을 상상해본다.
대체의 의미: 추상에서 실제로
이러한 대체의 의미는 무엇일까?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추상에서 브뤼헬, 밀레이, 홀바인, 카라바조, 카를 힐에 이르는 구상 회화로의 이동의 의미. 나는, “현실”에의 주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새롭고 추상적인 세계를 찾으려는 현대인의 고상한 취향에 대한 직설적인 반발.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의 실상과 우울한 자아, 예견된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와 모두가 바라는 이상적인 세계 그리고 현실과의 괴리. 나의 우울과 혼란스러운 자아, 세계에 대한 불안감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애써 배제하는 것이 아니니까. 불안과 우울을 인정할 때 비로소 편해질 수 있으니까. 나는 우울하다. 우리는 불안하다. 현실을 인정하라.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의 행성이 멜랑콜리아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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