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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181건
- 2013.08.12 휴재 공지
- 2013.08.09 [Op.5] 지휘자없는 오케스트라
- 2013.08.08 [룽의EX] 왕가위, 양조위의 <화양연화> - 인생이라는 그래프 위의 어떤 점
- 2013.08.06 [천사는 여기 머문다] 자신 안의 생명을 찾아나가는 여정 3
- 2013.08.02 13. 우리는 무엇을 더 원하는가,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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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의 김근근입니다.
이번 주 김근근의 골방통신은 휴재합니다.
김근근이 인생의 전환점을 준비하는 중요한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러운 휴재에 대해 넓은 이해심으로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도 준비하는 모든 일에서 큰 성취 하기를 기원합니다.
사....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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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높이 있는, 가장 역동적인.
어릴 때 음악을 좋아하시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지역 문화회관에서 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니곤 했다. 연주회장에 들어설 때는 바깥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흥미로웠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무대를 한 시간 넘게 꼼짝없이 지켜보는 건 이내 고욕으로 변했다. 공연이 지루해질 때 쯤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가질 수 있었던 대상은 바로 지휘자였다. 무대에서 제일 높은 곳에 혼자 우뚝 서 있어서 시선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 움직임이 가장 역동적이어서 지루함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동안 지휘자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한참을 있자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지휘자가 꼭 필요한가. 어린아이의 시각에서 지휘자는 그저 팔을 흔들어대고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지휘는 지휘대로, 연주는 연주대로 그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을 뿐, 연주가 지휘를 따른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던 것이다. 어린아이가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은 크면서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존재라는 답으로 점점 굳어졌다. 하지만 여기 그와 같은 질문을 다시 던지는 오케스트라가 있다.
Music Minus One.
바로 줄리언 파이퍼가 1972년에 뉴욕에서 창단한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Orpheus Chamber Orchestra)’이다. 줄여서 OCO라고 불리는 이 오케스트라의 공식 데뷔 무대의 타이틀은 ‘Music Minus One’이었다. 데뷔 무대에서부터 어떤 하나가 빠진, 하나가 없는 음악을 하겠다고 당돌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One’은 짐작하듯이 지휘자이다. 데뷔 무대 이후로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OCO는 여전히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 실력 역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7년과 2008년에 내한하여 사라 장(장영주)와 합동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들의 연습 과정은 한 마디로 시끌벅적하다. 여느 오케스트라와 같이 연주를 하다가 지휘자가 멈추고 어떤 부분을 지적하고 다시 호흡을 맞춰보는, 정적인 연습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가 자신들의 연주에 대한 의견을 내고 이를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 호흡을 맞춰나간다. 앞의 방법보다 훨씬 오래 걸리고 시끄러운 과정이다. 그 시끄러운 장면 속의 대화를 살짝 들어보자.
(바이올린 1) : "여기서 좀 더 빠르게 했으면 좋겠어. 느낌이 잘 안 살아.”
(바이올린 2) : "점점 빨라지는 곳인데 여기서 너무 빨리해버리면 뒤 쪽에 느낌이 더 죽지 않을까?”
(비올라) : “아냐, 뒤에서는 첼로가 들어오니까 템포보다는 소리의 풍성함이 관건이지.”
(바이올린 2) : “좋아. 다시 해보자. 101마디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다양하고 자유로운 의견들이 숨 가쁘게 오간다. 그들은 누군가 우리 음악을 듣고, 평가하고 조율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스스로 자신들의 음악을 들으려고 노력하고 이를 통해 능동적으로 예술을 창조한다.
물론 지휘자가 없다고 해서 ‘리더’의 개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악장(樂長, concert master)이 지휘자의 자리를 대신하여 의견 충돌을 중재하고 토론 과정을 이끌어간다. 단, 악장을 매 공연마다 바꾼다. 나이나 경력 순으로 힘이 한 명에게 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인 것이다. 때로는 곡마다 악장을 바꾸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는 일반적인 오케스트라가 한 곡이 끝난 후 지휘자가 무대 뒤로 들어갔다가 다시 박수를 받으면서 나오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멤버 전체가 우르르 일어나서 다 같이 무대 뒤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새로운 자리로 바꿔 앉는 재미있는 광경이 연출된다.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보이지 않는 권력은 지휘자라는 제한된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일반 단원들 사이를 떠돈다.
오케스트라와 사회, 지휘자와 리더
오케스트라는 공동체이다. 그것도 위계적인 공동체이다.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는 순간 연주자는 암묵적으로 지휘자의 음악관을 따르겠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게는 지휘자의 음악 해석에 충실히 따르는 것과 다른 사람들과 느낌을 조화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이것이 솔리스트들과 다른 점이다. 같은 연주자지만 솔리스트는 음악을 온전히 자신이 해석하고 그 느낌을 살린다. 이와 달리 오케스트라 단원의 경우 자신의 음악관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전체적인 음악 완성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위계질서가 강한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는 가장 높은 존재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 전체를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악기별로 어떻게 소리 낼 것인가를 연구하여 결과적으로 자기만의 스타일로 곡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그리고 곡을 만드는 것은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악기에서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곡에 대한 연구와 실질적인 완성에까지 작곡가의 손에서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휘자는 오늘날까지도 오케스트라의 수장이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생각된다.
오케스트라는 흔히 ‘작은 사회’로 불린다. 다양하게 나누어지는 각각의 부분과 지휘자라는 리더가 있는 공동체에서, 리더의 지휘 속에서 각 부분이 하나로 조화되는 오케스트라를 이상적인 사회로 비유하는 것이다. 많은 정치가나 CEO들이 카라얀이나 번스타인 등의 지휘자를 자신들의 롤모델로 꼽기도 한다. 그래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같았던 지휘자가 없는 오케스트라는 더욱 충격이다. 강력한 힘을 지닌 한 명의 리더가 없으면 뒤죽박죽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세상에 보란듯이 흘려보낸 것이다. 때문에 OCO는 최근 사회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나 자치의 한 예로 제시되고 있다.
또 다른 가치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일일이 수렴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이러한 것은 음악에서나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고 종합하는 과정은 느리고, 까다롭고,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심지어 OCO의 연습시간처럼 소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가는 대상에 대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낼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에, 효율이나 편리와는 또 다른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이 역시 음악에서나 사회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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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13 왕가위, 양조위의 <화양연화>
- 인생이라는 그래프 위의 어떤 점
얼마 전 프러포즈를 도와달라는 아는 선배의 부탁을 받았다. 썩 가고 싶진 않았지만,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알겠노라 답했다(실은 거하게 술을 사겠다는 말에 혹했지만). 거기엔 대학동기 한 놈도 같이 동원되었다. 프러포즈는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다. 예비형수님은 눈물을 폭포처럼 쏟았고, 선배는 휴 그랜트처럼 등장해 무릎을 꿇고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 “나랑 결혼해줄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기 놈이 말을 꺼냈다. “있잖아. 방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하루를 맞은 여자 분을 보았잖아.” 피곤한 나는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응, 왜? 부럽냐?”, “아니, 왠지 오늘이 행복의 정점일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슬퍼졌어.”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방금 본 그 순간이 정말 그 분 인생의 정점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정점은 이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에 관한 영화, 너무나 아름다워서 오히려 처연해지는 한 시절에 관한 영화. <화양연화>다.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을 뜻한다. 그렇지만 영화 <화양연화>가 그런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저 통속적인 불륜이야기이고, 해보지도 못하고 실패한 사랑이야기가 어떻게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이냐는 것이다.
홍콩의 한 아파트에 리첸 부부와 차우 부부는 나란히 세 들어 살게 된다. 리첸(장만옥)의 남편은 출장이 잦고, 차우(양조위)의 부인도 야근이 많아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둘은 서로 스치거나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어느 날, 자신의 배우자들끼리 불륜에 빠진 사실을 알게 되고 서로를 위로한다. 그러다 둘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서로 사랑에 빠진다. 서로 다가설 듯 끝내 다가서지 못하고, 멈칫거리고, 망설이다가 사랑은 떠난다.
이들의 스치는 사랑이 정말 그들의 인생그래프에 정점이었을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을까. 글쎄. 그랬을 수도,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순간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럼 우리는 ‘화양연화’에 대해 다시 물어볼 것이 있다. 대체 가장 행복했던 순간도 아닌 어떤 순간이 어떻게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은,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생을 그래프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x축으로 행복과 고통의 정도를 y축으로 놓자. 아마 일렁이는 삶의 파랑을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의 화양연화는 각각의 그래프에서 가장 정점의 순간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참 재밌게도.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가장 행복한 순간과 가장 소중한 순간은 다르다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는 가장 소중한 순간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영화다. 이승을 떠난 사람들이 저승으로 넘어갈 때, 그들은 이승에서의 기억 중 단 한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 가장 소중한 순간을 선택하고 그 기억을 가져가는 것이다. 나는 술자리에 가면 종종 사람들에게 영화 속 이 질문을 던지곤 했다. “어떤 기억을 가져가고 싶어?”
대답은 다양했다. 또 참 신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닌 기억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꿈을 찾아, 부모님의 반대를 피해 울며불며 도망치듯 가출했던 순간의 기억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언니와 함께 신림동을 떠나 일산으로 이사를 가던 날 밤의 묘한 긴장감과 기대감이 뒤섞인 트럭 안에서의 기억을, 다른 누군가는 어린 시절 하굣길에 저 멀리서 마중 나온 어머니가 보이는 그 순간을 말했다. 이것들을 인생그래프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하나의 기억을 남긴다면 그 기억들을 남기겠다고 했다. 그게 바로 ‘화양연화’ 아닐까.
이런 질문과 답변은 인생을 아주 다르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은 행복이나 성공과는 전혀 별개의 어떤 것이라는 것. 그건 오로지 행복의 정상을 향해 마치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듯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우리의 화양연화가 그곳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이유가 전혀 없지 않는가.
리첸과 차우의 사랑은 참 볼품없다. 그들은 스쳐가고, 엇갈리고, 에두르고, 억누른다. 만남의 순간에도 서로를 안아 보지 못하고, 이별의 순간에도 애꿎은 자신의 팔만 휘감고 꾹꾹 눌러볼 뿐이다. 이들의 사랑은 그들 인생의 정점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어떤 단 하나의 기억을 남기겠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때를 가져갈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사랑은 ‘행복한 사랑’이 아니라,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은 너무나도 소중한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애초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행복의 부분집합인 것처럼 확신한다. 하지만 사랑이 어디 그러한가. 사랑은 행복하지만 그만큼 아프다. 그러니 사랑은 행복과 고통의 교집합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랑뿐이 아니라 인생의 무엇이든 이와 같을 것이다.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은 바로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차우는 앙코르와트로 간다. 그곳의 돌벽 틈에 무언가를 속삭이곤 흙을 덮는다. 그 작은 틈에 아마 차우는 자신의 ‘화양연화’를 ‘원더풀 라이프’를 담아두었을 것이다. 손을 동그랗게 말아 틈을 만들고 입에 가져다 대어본다. 속삭여본다. 나의 화양연화를. 단 하나의 남기고픈 기억을. 당신에게도 물어본다. “당신의 화양연화는 언제입니까?”, “어떤 기억을 가져가고 싶습니까?”
(P.S. 영화 <화양연화>의 화양연화를 꼽으라면 단연 나는 장만옥의 치파오를 꼽을 것이다.)
※ 왕가위, 양조위의 <일대종사> 2013년 8월 2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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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2007 이상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사, 2007, 16쇄)를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자신 안의 생명을 찾아나가는 여정
전경린의 『천사는 여기 머문다』
전경린의 소설 『천사는 여기 머문다』에서는 극명한 대립이 나타난다. 모경과 하인리히가 그러하고, 서울의 철거예정인 집과 독일의 S마을이 그러하다. 모경과 서울은 욕망과 열정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고, 하인리히와 독일은 절제와 이성의 세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평온한 삶을 살던 여자가 욕망과 열정의 세계를 만나고, 그 곳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뒤, 절제와 이성의 세계로 가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여정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이야기.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첫째는 주인공 이인희가 전남편 모경과의 결혼반지를 빼지 못하는 이유이다. 인희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모경에게 창문을 부수고 칼을 던지면서 까지 쫓아내면서도, 그와의 결혼반지는 끝내 빼지 못한다. 모경과의 추억은 벗어나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고, 때때로는 인희가 일부러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인희의 모경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 이것이 첫 번째 물음이다. 둘째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인희가 모경에 의해 찢어진 흰색 블라우스를 입지 못하게 완전히 꿰매어 버리고, 바늘에 찔려 피가 나고, 반지에서 빛방울이 나와 천사의 형상이 만들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환상적이라는 것을 감안하여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것이 두 번째 물음이다.
두 가지 의문에 대하여 나름의 답을 내릴 수 있던 것은 작가의 수상 소감 덕분이었다. 아래의 인용문은 2007년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게 된 작가의 수상 소감의 일부이다.
겨울 해안 길을 걸을 때면 생명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생명은 착함이다. 하지만 생명력은 교조적인 윤리나 굳은 관습, 안전한 제도, 방어적인 도덕성에 정주하는 데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개체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경험 속에서 스스로 정화하며 침범하는 무감각에 대항해 거듭 자신을 새롭게 낳는 힘이다. 타성에 젖어 산 채로 죽음에 잠식되어 가는 존재들이 도처에 만연하다.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생의 최고의 사치인지도 모른다. 수상 작품의 제목은 그래서 붙여졌다. 천사는 여기 머문다. 그것은 선악의 의미를 넘어 우리 생애 내부에서 비상하는 생명을 은유한다. 살아 있음의 절정에서 당신의 얼굴에 천사가 떠오른다. 천사는 생명이다.(308)
생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다시 살펴본다면, 앞에서 이야기했던 욕망과 이성의 대립은 양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모경과 서울이 나타내는 욕망의 세계는 파괴와 상처라는 부정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인희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긍정적인 의미를 더하게 된다. 하인리히와 독일이 나타내는 이성의 세계는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생명이 결여되어 있는 삶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모경을 만나기 전의 인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인희의 삶은 평화롭지만 공허한 삶이었다. 생생하게 살아있지 못한 삶이었고, 시간도 공간도 텅 비어있는 궁과 같았고, 산소가 없어 사람이 살 수 없지만 미동 하나 없는 진공과 같았다. 생명이 결여되어있던 인희의 삶은 모경을 만난 후에 “해일이 이는 바다를 지니는 배처럼 가파르게 튀어”올았다.
그러나 욕망의 형태를 띠고 있던 생명의 모습은 결혼 후에 집착의 형태로 탈바꿈한다. 이는 의처증이라는 정신적 집착으로도 나타나고, 섹스의 탐닉이라는 육체적 집착으로도 나타난다. 이러한 집착들은 인희에게 폭력이라는 육체적 상처로, 욕망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정신적 상처로 남게 된다. 결국 인희와 모경은 헤어지게 된다. 인희는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에 헤어진 것이 아니라, 지나친 사랑 혹은 사랑의 잘못된 모습으로 인하여 헤어진 것이다.
이혼 사유는 피로였다. 산더미만 한 피로, 무덤 같은 피로, 증오 같고, 원한 같고, 뼈저린 후회 같고 타버린 재 같은 피로…….(32-33)
그렇기에 연희는 모경에 대해서 양가적인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과 같이 평온했던 삶에 생명을 불어넣어준 경험임과 동시에 집착의 모습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남긴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가적인 감정이 응축된 소재가 바로 반지이다. 이는 반지에 대한 인희의 생각에서도 나타난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반지를 뽑아버리면, 공허하기만 했던 내 생애에서 선명하게 응축된 유일한 결정(結晶)도 영영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었다.’(27)
인희의 양가적인 감정을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지막 장면을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빨간색과 흰색의 대립이 두드러지는데, 빨간색은 생명을 나타내는 색이고 흰색은 생명이 결여된 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희는 섹스 없는 결혼인 백색결혼을 원하는 하인리히와 그의 전부인의 묘지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죽음이 누워있는 묘지를 가기 위하여 인희는 흰색 블라우스를 입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 흰 블라우스는 모경에 의해 지퍼 부분이 찢어져 있다. 모경으로 인한 상처를 꿰매기 위하여 바느질함을 열어보니 흰실이 없어, 인희는 빨간실로 흰 블라우스를 꿰매기 시작한다. 그러나 빨간실로 꿰매는 블라우스는 찢어진 부분을 더욱 돋보이게 할 뿐이다. 결국 그녀는 찢어진 부분이 아닌 블라우스 전체를 빨간실로 꿰매어 버린다. 더 이상 흰색 블라우스를 입을 수 없다는 의미이고, 흰색 블라우스를 덮음으로서 과거를 덮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모경과 침대에서 사랑을 나눌 때의 느낌을 느끼며, 이내 바늘로 엄지손가락을 찌르는 장면은 이 소설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엄지손가락에서 뿜어나오는 빨간 피는 그녀가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고, 이 장면은 그녀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 안에서 스스로 생명을 찾아내는 장면인 것이다. 흰색 블라우스는 빨간 피로 얼룩지게 된다. 그 순간 반지에서 빛방울들이 양 쪽으로 펼친 그녀의 양팔을 감싼다. 그녀는 천사의 형상을 띠게 된다. 여기서 천사는 치유의 모습을 지닌 것이 아니다. 천사는 그녀의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쯤에서 위에서 한 번 보았던 작가의 수상 소감을 다시 꺼내어볼 만하다.
‘천사는 여기 머문다. 그것은 선악의 의미를 넘어 우리 생애 내부에서 비상하는 생명을 은유한다. 살아 있음의 절정에서 당신의 얼굴에 천사가 떠오른다. 천사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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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우리는 무엇을 더 원하는가
아놀드 웨스커, [부엌]
안녕, 당신!
당신의 하루는 대부분 어디에 고여있나요? 학교일 수도 있고, 개인 사무실이나 작업실, 혹은 회사나 공장, 부엌일 수도 있겠죠. 그곳은 어때요, 할만한가요? 아니면 끔찍한가요? 아마 당신은 매일 생각할지도 모르죠. 이 지긋지긋한 곳 없어졌으면 좋겠어! 만약 정말로 그곳이 없어진다면 어떨 것 같나요? 학교나 사무실이, 공장이, 부엌이 없어진다면요? 당신은 그곳에서 무엇을 원하나요?
오늘 제가 가져온 이야기 속 사람들은 당신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있네요.
아놀드 웨스커의 [부엌]입니다.
쉬어빠진 수프처럼
레이몬드 : 이봐, 디미트리, 어젯밤 피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 알고 있니?
디미트리 : 거의 죽여 놓던데요. 왜 그런 거죠?
웨이트리스 2 : 하느님 맙소사.
디미트리 : 그런데 그게 다 피터 잘못인가요? 모두들 한바탕 싸우고 싶어했죠. 사람을 식기보관실에 하루 종일 처박아 놓아봐요. 설거지할 접시들, 내다 버려야할 냄새 나는 쓰레기통들, 청소할 마루들. 싸움밖에 뭐가 있겠느냐고. 싸우고 싶어진다고요. 자기가 사람이라는 걸 나타내야 하거든요. 그런데 녀석을 나무래요?
영국의 어느 식당, 런치타임이 시작되기 전 조리사들과 웨이트리스들은 사장 마랑고의 눈을 피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어젯밤 가스톤의 눈을 밤탱이로 만들어놓은 피터의 이야기가 오늘의 화제네요. 피터는 이 작품의 중심 인물로, 요리사 교류 프로그램으로 이곳에 3년동안 머무른 독일인입니다. 기분이 좋을 때면 나치의 노래를 부르며 광대짓을 하다가도, 그의 애인인 모니크가 남편과의 이혼을 망설일 때면 불같이 화를 내곤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머지않아 모니크가 이혼하고 그에게로 오는 것을,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부엌을 하루빨리 떠나는 것을 낙천스레 꿈꾸곤 합니다. 그것이 이 삭막하고 건조한 부엌에 그가 계속 남아있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피터 : 모니크, 오늘 밤 몬티에게 말해. 이혼 말야. 우리 좀도둑처럼 몰래 만날 수는 없잖아. 우리 둘 다 상처입게 돼. 알고 있지?
모니크 : 피터, 지금, 여기서 그 말은 접어 둬. 나 이혼 얘기 못하겠어.
피터 : 여기 이 속엔 (자기 머리를 때린다) 상처 뿐이야! 우리는 말이지. 서로에게 해를 끼치고 상처를 주고 있어. 더이상 기다릴 수 없어. 알겠어? 난 이 식당에 넌덜머리가 나.
모니크 : 그만해! 넌 왜 이런 얘기를 사람들 앞에서 해? 맨날 이혼하라 윽박지르고, 나는 시간을 달라고 하고, 항상 똑같아. 내가 약속했지. 이혼한다고. 이혼할거야. 참아 줘.
피터 : 참고 기다려라! 참으라고! 아직 모르나 본데, 나 더이상 기다리지 않을 거야.
모니크 : (싸늘하게) 좋을 대로 해!
피터 : (절망적으로) 난 어떡하라고? 웃음거리는 다 됐는데, 삼년 동안, 여기서 삼년 동안이나......
모니크 : (그를 놔두고) 아, 정말이지 죽겠네!
피터와 모니크가 싸우거나 말거나 레스토랑에는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부엌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갑니다. 이 식당에 새로 들어온 아일랜드 출신 조리사 케빈은 마치 기계를 다루는 듯한 조리 과정과 엉망인 음식, 언제 준비되었는지도 모를 재료와 수프, 열악한 부엌에 하루만에 완전히 질려 버리죠. 웨이트리스들과 조리사들은 마치 모던타임즈의 한 장면을 보듯 공장의 부품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부엌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열기로 미친 듯이 바쁘게 돌아갑니다.
웨이트리스 1 : (피터에게) 모듬 생선 세 개. (피터는 그녀가 주문한 것을 내 놓고 ‘다음, 다음’이라고 소리 지른다.)
웨이트리스 2 : 대구 두 개.
웨이트리스 3 : 넙치 하나.
웨이트리스 4 : 대구 하나.
케빈 : (피터에게) 레몬이 없어.
피터 : (무례한 무관심으로) 몇 개 더 썰면 될 것 아냐. 자 다음?
케빈 : 도마 빌릴게요, 부탁해요. (피터의 작업대에서 도마를 가져 가려한다.)
피터 : (일을 멈추고 케빈에게 달려들어 도마를 붙잡는다. 부엌에서는 각자 자기 것을 알아서 챙겨야 한다.) 오 안돼, 안 되지, 이 친구야. 접시 창고, 접시 창고. 접시 창고에 있어. 이건 내 거야. 나도 필요하다고.
케빈 : 잠시 쓰고 돌려 줄게요.
피터 : (가리키면서) 접시 창고. (강조하기 위해서 그의 손으로 도마를 내려친다. 웨이트리스에게) 뭘 원하시나?
케빈 : (피터의 변화에 놀라면서) 저, 좀 더 인간답게 말해줘요, 제발.
피터 :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다고.
웨이트리스 : (피터에게) 넙치 세 개 해줄 수 있나요?
피터 : 두 마리 밖에 없는데. 오 분 내에. 오 분 있다가 와. (삶기 위해 물에 담근 가자미 접시를 가지러 증기실로 달려간다.)
그들에게 부엌은 이미 마치 공장과도 같습니다. 쉬었다고 컴플레인이 들어온 수프는 주방장과 부주방장을 지나 그릇만 바뀌어서 다시 나가고, 주문은 여덟 박자에서 여섯 박자로, 여섯 박자에서 네 박자로, 네 박자에서 두 박자로, 마침내는 아무 간격 없이 기계적으로...... 런치타임의 부엌은 이렇게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갑니다.
케빈의 마지막 대사를 계기로 웨이트리스들은 전원 조리사들을 둘러싸는 원이 되어 움직인다. 그들은 정지 동작에서 시작된 일련의 주문을 반복적으로 외쳐댄다. 동시에 오븐의 음량은 고조되고, 조명의 광량도 증가된다.
그 때 바이올렛이 뛰어와서 조리실에 고함친다.
바이올렛 : 다들 들어! 그 잘난 수프는 여전히 쉬어 빠졌다.
그 말에 모두 얼어붙고, 암전.
부엌이 없어진다면
피터 : 이 곳처럼, 이 집처럼 말이지. 이것도, 언제나 여기에 그냥 있을 거라고, 아이리쉬 친구. 생각해 볼 만한 일이군. 이 미친 소굴 말이야. 항상 이 자리에 그냥 있을 거야. 네가 가거나, 내가 가거나, 디미트리가 가거나. 이 부엌은 남아 있을 거야. 우리가 죽어도 이곳은 계속될거야. 생각해 보라고. 우리는 여기서 하루에 여덟 시간씩 일하지. 땀을 진창 흘리면서,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해. 여기, 이 부엌, 여기, 너와 이 부엌. 그리고 이 부엌은 너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고, 너 또한 부엌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거지. 디미트리가 맞아. 넌 왜 부엌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거지? 세상은 부엌들로 가득 차 있다고. 단지 어떤 것은 사무실이라 부르고, 어떤 것은 공장이라 부르고 있을 뿐이지.
케빈 : 당신은 식당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피터 : 어느날 아침에, 상상해 봐, 사라졌다고. 모든 게 사라졌다고.
1막이 막을 내리고, 2막이 시작되기 전 인터루드. 지옥같던 런치타임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입니다. 못해먹겠다는 케빈의 말에 피터는, 부엌이 없어지면 어떨 것 같느냐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쓰레기통과 그릇, 냄비, 빗자루를 나란히 세워 조잡한 아치를 만들면서 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꿈을 묻습니다. 어린 애 장난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은 하나둘씩 꿈을 꺼내 놓기 시작해요. 디미트리는 기계들을 마음껏 만들 수 있는 헛간, 케빈은 휴식, 한스는 돈. 그리고 마침내 무뚝뚝한 유태인 조리사 폴까지도 피터에게 긴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자신은 친구를 꿈꾼다고요.
폴 : 피터... 내가 말할 게 있어. 하고 싶은 말 다 해도 괜찮겠지? 좋아, 솔직하게 말할게. 난 니가 싫어. 잠깐, 끝까지 다 들어봐. 넌, 돼지 같은 놈에다 깡패야. 너는 질투심이 많고 일할 때는 미친 놈 같아. 너는 언제나 싸우려고 해! 좋아! 하지만 지금은 조용하지. 오븐 소리도 작고. 잠시동안 일도 멈추고 있어. 이럴 때면 나는 너를 조금씩 알게 돼. 그러나 여전히 너는 돼지 새끼야. 그것이, 바로 그것이 내 꿈에 보여.
나는 친구를 꿈꾼다. 너는 나에게 지금 휴식을 주고 있어. 침묵을 주고 있다고. 이 미친 듯한 부엌을 멀리 갖다 버리는 그런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어. 그래서 난 내가 돼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마 돼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그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줍니다. 옆집에 사는 버스기사가 5주 동안 파업을 했을 때, 그는 출근길이 더 불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같은 노동자이기 때문에 그 이웃을 응원했다고요. 그러던 어느 일요일, 그는 평화 행진에 참가하게 됩니다. 크게 소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다음날 그가 그 이웃을 만났을 때, 그는 이웃으로부터 그의 머리에 폭탄이 떨어졌어야 했다는 폭언을 듣습니다. 왜냐구요? 시위가 교통 흐름을 막았기 때문이에요. 버스가 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는 거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폴 : 내가 옳았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건 아냐.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녀석이 동의하기를 원하지도 않아. 나를 섬뜩하게 만든 것은 이 친구가 내 목적을 위해 도와주었으니까 어쩌면, 그래 어쩌면 그가 주장하는 바에도 무언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려 들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
끔찍한 것은 나와 그 녀석과 비슷한 수백만의 사람 사이에는 벽, 거대한 벽이 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생각해본다. 이 벽의 끝은 어디인가? 주위엔 부엌, 공장, 수많은 사무실을 품고 쭉쭉 하늘로 치솟은 거대한 빌딩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숱한 사람들. 나는 생각하지. 빌어먹을! 이래도 되는가, 이래도 되는가, 이래도 되는가?
피터, 나는 네게 동의해. 아마도, 어느날 아침 깨어나 보면 우리는 모든 게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될 거야. 그렇다면 내가 빵 만들기를 그만두어야 하나? 공장근로자들은 기차랑 자동차 만드는 일을 중지해야 하나? 광부들은 석탄을 있는 곳에 그냥 둬야 하나? (사이) 이번에는 네가 대답할 차례야. 네 꿈은 뭐야?
긴 침묵.
피터 : 꿈 얘길 하라고 했는데 너는 악몽 얘길 하는구나.
폴 : 바로 그런 꿈을 꾼 거라고. 그게 악몽인 것이 내 잘못인가?
사람들은 모두 피터의 꿈 얘기를 듣기를 기다립니다. 피터는 일동의 기대가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고 당황하고, 결국 인터루드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꿈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부엌이 없어진다면, 하는 질문을 맨 처음 던진 사람이지만, 결국 폴의 기대와는 달리 피터는 그 미친 부엌을 멀리로 갖다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요. 폴은 피터가 떠난 부엌에남아 이게 다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립니다. 디미트리는 이렇게 대꾸하죠. 마치 2막에서의 큰 소동을 암시하는 듯하기도 하네요.
디미트리 : 내가 어떻게 알아? 때론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아무도 그 뜻을 모른다고. 그러다 갑자기 다른 일이 터지면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거야. 피터는 바보가 아냐. 너도 바보가 아냐. 사람의 뇌는 계속 움직이고 있거든. 항상 말이야. 정말이라고.
우리는 무엇을 더 원하는가?
모니크의 등장에 반색하며 부엌을 나갔지만, 그녀는 어딘지 시큰둥하기만 합니다. 자신의 생일선물에 기뻐하다가도 부랑자에게 커츠를 주었다는 말에 칭찬보다는 마랑고 걱정을 먼저 하더니, 피터의 아이를 낙태하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그녀가 이혼 생각이 크지 않음을 알게 되죠.
부엌에 들어오자 그가 아까 자랑스럽게 세워놓은 아치는 이미 엉망이 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랬냐며 화를 내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일에 열중합니다. 아직 준비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주문을 하는 건방진 웨이트리스들과, 그가 평소에 즐겨 부르던 나치의 노래를 빈정거리며 흥얼거리는 가스톤, 마치 모든 것들이 그를 조롱이라도 하듯 신경을 긁습니다. 마지못해 요리를 시작한 피터. 그러나 굼뜬 그의 손길에 성미 급한 웨이트리스는 조리대에 들어와 직접 음식을 담아가려고 하고, 그것이 그를 폭발하게 합니다.
(제빵부 요리사들이 떠나자 갑자기 피터의 작업대에서 논쟁이 터져 나온다. 피터는 생선이 담긴 접시를 웨이트리스 손에서 빼앗아 바닥에다 내동댕이친다. 피터가 다른 일로 바빠서 등을 돌리고 있는 사이 그녀는 자기가 주문한 요리를 직접 챙기고 있었다.)
피터 : 날 기다려, 알았어? 서브는 내가 하는 거야. 넌 나한테 부탁하는 거고.
웨이트리스 : 너무 바쁜 것 같아 특별히 도와준 거에요.
피터 : 관심 없어. 여긴 내 구역이고, 저기 (바의 옆을 가리키면서) 저기는 너의 영역이라고.
웨이트리스 : 이런 젠장할, 잠깐만 기다려봐. 도대체 당신이 뭔 줄 아는 거야?
피터 : 내가 누군지 넌 상관 마. 난 요리사야, 됐어? 너는 웨이트리스고 부엌에서는 넌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거야, 됐어? 그리고 식당에서는 너 좋을 대로 하라고.
웨이트리스 : (오븐에서 다른 접시를 꺼내면서) 당신한테 명령을 받지는 않을 거야. 알지, 난...
피터 : (고함을 치면서 그녀의 손에서 접시를 또 다시 빼앗아 내동댕이친다.) 내버려 둬. 거기 내버려 두라고. 내가 음식을 챙겨준다고. 내가! 나 말야! 여기는 내 왕국이야. 내가 사는 곳이야! 이 구역 말이야!
웨이트리스 : (아주 조용히) 이 놈의 독일 놈이. 빌어먹을 독일 놈의 새끼!
그의 고함소리로 웨이트리스는 얼어붙고, 그는 마치 흥분한 짐승처럼 난폭하게 주변을 돌아보다가 접시들을 와장창 깨부숩니다. 다른 조리사들이 그를 제압하려고 달려들지만 그는 큰 고기칼을 휘둘러 주변을 위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칼로 주방 내의 화기들에 연결된 커다란 가스관을 절단하고 맙니다.
오븐의 불이 일제히 꺼졌습니다. 한순간 침묵이 흐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두가 직감할 때까지.
그 후 모든 게 어지럽혀집니다. 피터의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식당은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접시는 온통 바닥에 널브러졌네요. 소동은 마랑고가 부엌에 등장하고 난 뒤에야 진정됩니다. 그는 화를 내기보다도 놀라고, 상처입었다는 표정으로 피터를 대합니다.
마랑고 : (무섭도록 냉엄한 자세로) 너는 나의 모든 세계를 정지시켰어. 네가 하느님한테 허락이라도 받았냐? 받았어? 이런 일을 할 만한 인간은 아무도 없어! 너 말고는!
프랭크 : 사장님, 참으세요. 이 놈은 그만 둘 사람입니다. 아마 어디가 아픈 모양이에요. 그러니 진정하세요.
마랑고 : (조용히 호소하듯이) 프랭크, 왜 모든 사람들이 나를 파멸시키지? 나는 일자리를 주었어. 충분한 월급도 주고. 안 그래? 원하는 대로 먹게끔 했어. 사람들에게 무엇을 더 주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일하고, 먹고, 돈을 받는다. 이것이 인생 아닌가? 안 그래? 난 아무 잘못 없어. 그렇지? 나는 바르게 살아왔어!
(피터에게) 너는 내 세계를 짓밟았다, 풋내기 녀석아! 개판을 만들어 놨어. 왜 그랬지? 아마 넌 내가 모르는 걸 말해줄 수 있을 거야. 말해 봐. (아무 대답도 없다. ) 나도 배우고 싶군. (부엌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것이 있나?
피터는 일어나서 고통스럽게 움직이면서 나간다. 마랑고는 그의 등 뒤로 고함을 지른다.
마랑고 : 바보 자식! 무엇을 더 원하나? 무엇이 더 필요해, 말해 봐!
이렇게 부엌은 오븐 소리도 없이 고요하게 멈춰 버렸습니다. 폴의 말대로 피터는 어쨌든 미친 듯한 부엌을 멀리 갖다 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사라진 한가운데서 식당의 사장인 마랑고는 피터와 식당의 다른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그는 충분한 월급을 주었고, 식사를 제공했다고요. 부엌에서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던가요? 사람들은 왜 그토록 부엌을 지긋지긋해하고 벗어나려고 했던가요?
아무리 바쁘게 부엌이 돌아가도 여전히 쉬어빠진 채로 식당에 나가는 수프처럼, 웨이트리스 한 명이 쓰러지든 말든 부엌은 이전처럼 돌아갑니다. 이제 그 부엌이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에 대해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모두들 여전히 쉬어빠진 수프인 채로 그릇 안에 담겨져있을 뿐이죠. 그들은 그동안 부엌의 어딘가를 구성하는 부품에 불과했으니까요.
폴은 물었습니다. 어느 날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을 때, 자신은 빵 만들기를 그만두어야 하느냐고. 공장의 근로자들과 광부들도 하던 일을 내려놓아야 하느냐고. 폴이 말한 것처럼 부엌이 없어진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닌 듯하네요. 벽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들, 폴이 그 벽 너머로 손뻗으려 할 때 그를 외면했던 그의 이웃처럼, 서로의 벽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부엌이 사라지는 달콤한 꿈은 그들에게 악몽으로 돌아올 뿐입니다.
그들이 끔찍하게 생각하던 마랑고 역시 그 벽 속에서 외칩니다.
마랑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야?
피터는 답을 하려고 한다. 여러 사람들을 쳐다보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당신이 모른다면 설명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 말없이 나가 버린다. 마랑고는 주변에 둘러서서 그에게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식당 사람들에게 묻는다.
마랑고: 무엇을 더 원해?
부엌에는 더 할 일이 없다. 주방장이 모자를 벗더니, 조용히 나간다. 그것을 계기로 하나둘씩 모두 부엌을 떠나기 시작한다. 그는 다시 울부짖는다.
마랑고 :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마랑고는 객석으로 몸을 돌려 관객에게 호소한다.
마랑고 : 무엇을 더 원하는가?
천천히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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