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높이 있는, 가장 역동적인.

어릴 때 음악을 좋아하시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지역 문화회관에서 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니곤 했다. 연주회장에 들어설 때는 바깥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흥미로웠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무대를 한 시간 넘게 꼼짝없이 지켜보는 건 이내 고욕으로 변했다. 공연이 지루해질 때 쯤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가질 수 있었던 대상은 바로 지휘자였다. 무대에서 제일 높은 곳에 혼자 우뚝 서 있어서 시선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 움직임이 가장 역동적이어서 지루함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동안 지휘자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한참을 있자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지휘자가 꼭 필요한가. 어린아이의 시각에서 지휘자는 그저 팔을 흔들어대고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지휘는 지휘대로, 연주는 연주대로 그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을 뿐, 연주가 지휘를 따른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던 것이다. 어린아이가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은 크면서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존재라는 답으로 점점 굳어졌다. 하지만 여기 그와 같은 질문을 다시 던지는 오케스트라가 있다.

 

 

Music Minus One.

바로 줄리언 파이퍼가 1972년에 뉴욕에서 창단한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Orpheus Chamber Orchestra)’이다. 줄여서 OCO라고 불리는 이 오케스트라의 공식 데뷔 무대의 타이틀은 ‘Music Minus One’이었다. 데뷔 무대에서부터 어떤 하나가 빠진, 하나가 없는 음악을 하겠다고 당돌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One’은 짐작하듯이 지휘자이다. 데뷔 무대 이후로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OCO는 여전히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 실력 역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7년과 2008년에 내한하여 사라 장(장영주)와 합동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들의 연습 과정은 한 마디로 시끌벅적하다. 여느 오케스트라와 같이 연주를 하다가 지휘자가 멈추고 어떤 부분을 지적하고 다시 호흡을 맞춰보는, 정적인 연습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가 자신들의 연주에 대한 의견을 내고 이를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 호흡을 맞춰나간다. 앞의 방법보다 훨씬 오래 걸리고 시끄러운 과정이다. 그 시끄러운 장면 속의 대화를 살짝 들어보자.

(바이올린 1) : "여기서 좀 더 빠르게 했으면 좋겠어. 느낌이 잘 안 살아.”

(바이올린 2) : "점점 빨라지는 곳인데 여기서 너무 빨리해버리면 뒤 쪽에 느낌이 더 죽지 않을까?”

(비올라) : “아냐, 뒤에서는 첼로가 들어오니까 템포보다는 소리의 풍성함이 관건이지.”

(바이올린 2) : “좋아. 다시 해보자. 101마디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다양하고 자유로운 의견들이 숨 가쁘게 오간다. 그들은 누군가 우리 음악을 듣고, 평가하고 조율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스스로 자신들의 음악을 들으려고 노력하고 이를 통해 능동적으로 예술을 창조한다.

물론 지휘자가 없다고 해서 ‘리더’의 개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악장(樂長, concert master)이 지휘자의 자리를 대신하여 의견 충돌을 중재하고 토론 과정을 이끌어간다. 단, 악장을 매 공연마다 바꾼다. 나이나 경력 순으로 힘이 한 명에게 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인 것이다. 때로는 곡마다 악장을 바꾸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는 일반적인 오케스트라가 한 곡이 끝난 후 지휘자가 무대 뒤로 들어갔다가 다시 박수를 받으면서 나오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멤버 전체가 우르르 일어나서 다 같이 무대 뒤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새로운 자리로 바꿔 앉는 재미있는 광경이 연출된다.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보이지 않는 권력은 지휘자라는 제한된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일반 단원들 사이를 떠돈다.

 

 

오케스트라와 사회, 지휘자와 리더

오케스트라는 공동체이다. 그것도 위계적인 공동체이다.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는 순간 연주자는 암묵적으로 지휘자의 음악관을 따르겠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게는 지휘자의 음악 해석에 충실히 따르는 것과 다른 사람들과 느낌을 조화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이것이 솔리스트들과 다른 점이다. 같은 연주자지만 솔리스트는 음악을 온전히 자신이 해석하고 그 느낌을 살린다. 이와 달리 오케스트라 단원의 경우 자신의 음악관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전체적인 음악 완성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위계질서가 강한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는 가장 높은 존재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 전체를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악기별로 어떻게 소리 낼 것인가를 연구하여 결과적으로 자기만의 스타일로 곡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그리고 곡을 만드는 것은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악기에서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곡에 대한 연구와 실질적인 완성에까지 작곡가의 손에서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휘자는 오늘날까지도 오케스트라의 수장이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생각된다.

오케스트라는 흔히 ‘작은 사회’로 불린다. 다양하게 나누어지는 각각의 부분과 지휘자라는 리더가 있는 공동체에서, 리더의 지휘 속에서 각 부분이 하나로 조화되는 오케스트라를 이상적인 사회로 비유하는 것이다. 많은 정치가나 CEO들이 카라얀이나 번스타인 등의 지휘자를 자신들의 롤모델로 꼽기도 한다. 그래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같았던 지휘자가 없는 오케스트라는 더욱 충격이다. 강력한 힘을 지닌 한 명의 리더가 없으면 뒤죽박죽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세상에 보란듯이 흘려보낸 것이다. 때문에 OCO는 최근 사회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나 자치의 한 예로 제시되고 있다.

 

 

또 다른 가치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일일이 수렴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이러한 것은 음악에서나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고 종합하는 과정은 느리고, 까다롭고,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심지어 OCO의 연습시간처럼 소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가는 대상에 대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낼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에, 효율이나 편리와는 또 다른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이 역시 음악에서나 사회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