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시작하기 전에

 

 가까운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인간이 힘줘서 만들 수 있는 건 똥뿐이라고. 그 무렵 나는 내가 싸질러놓은 똥을 치운답시고 또 한참 힘을 주고 있었다. 연극과 글은 그중에서도 가장 뻑뻑하고 물기 없는 지독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어쩌지 못해 한참을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색도 칠해보고 동선이나 배치도 바꿔 보고 남은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주위도 어지간히 알짱거렸다. 그래봤자 똥은 똥이라는 걸 인정하는 데 참 오래 걸렸다.

 그걸 인정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다. 색깔이 같다고 똥이 황금이 되는 건 아니니까. 배운 건 있었다. 이 상태로는 힘을 주나 안 주나 나오는 건 어차피 똥이야!

 한 회차를 쉬면서 특별히 떠오르는 소재나 새로운 형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매번 글을 쓸 때마다 그럴 법한 콘텐츠를 짜낼 자신도 없었거니와,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것들이 당신과 내게 대단한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더더욱 들지 않았다. 무의미한 것들을 만드느라 굳이 공들여 예쁘게 똥을 만들 이유는 없었고, 나와 당신의 이야기라고 말하면서 당신이 없고 나만 있는 글을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형식을 취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두 가지는 힘을 좀 빼기로 했다는 점, 그리고 빙구가 재미있게 본 연극을 유들유들 부들부들 부담 없이 당신에게 소개하는 글이 되리라는 점이다. 쓰다 보면 일정한 패턴이 생길 수도 있고, 구체적으로 방향이 잡힐 수도 있고.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당신이 즐거이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면 좋겠다.

 변명이 구구절절 길었다. 새로운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의 첫 연극을 소개한다. 빙구가 열심히 똥을 만들다가 제풀에 지쳐서 보러갔던 연극, 공연 일주일 전에 연습 때려치우고 보러 간 값을 톡톡히 했던 연극이다.



[데스데모나 웬 손수건에 관한 연극]


2013.09.06(금) - 09.29(일)

화-금 8시 / 토 3시,7시 / 일 3시 / 월 쉼(추석당일 7시공연)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발랄하고 발칙한 여자들

 셰익스피어 고전인 [오셀로]를 기반으로 재구성된 연극 [데스데모나]. 이 연극은 오셀로를 비롯하여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에서 중심이 되던 남성들을 가장자리로 치우고, 그들의 뒷배경인 양 가려져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무대 위로 옮겨놓았다. 관저의 어느 세탁실로 꾸며진 2면 무대에서 여배우 세 명만이 100분의 러닝타임을 꽉꽉 채운다.

 어디 남배우가 등장하지 않는 것뿐일까, 그녀들의 대화 속에서 비극의 고귀했던 남성들은 볼품없는 발정난 수컷들로 전락하고, 그녀들은 셰익스피어의 뒷배경에서 벗어나 무대 위에서 3D가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 고삐풀린 망아지 데스데모나와, 그런 그녀를 꼬드겨 사창가로 끌어들이고 레즈비언 플레이를 즐기는 비앙카, 그리고 그 옆에서 주님을 찾으며 묵주기도를 올리는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까지. 그녀들은 역동적이고 발랄하며, 거칠고 생명력이 넘친다. 어떻게 정숙한 오셀로의 아내가 이토록 발칙하고 섹시하게 그려질 수 있었을까?


 


폴라 보겔과 그린피그

 극단 그린피그의 작가 소개를 따라가보면, [데스데모나]의 작가 폴라 보겔은 1998[운전 배우기 ‘How I Learned To Drive’]라는 희곡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들을 써내려갔다.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인 그녀는 그녀의 작품 속에 여성주의적 의식을 드러내는데, 주로 에이즈나 가정폭력, 여성의 가난의 고착화 등 현 사회의 뜨거운 쟁점들을 작품에 반영한다. 그녀의 작업은 항상 관객의 기대를 뒤집고 전통적인 연극의 개념을 바꿔 놓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린피그가 구현한 [데스데모나]는 흥미로웠다. ‘불온한 상상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새로운 연극을 위해 주제와 예술 형식의 진보를 고민하는 그들은 폴라 보겔의 텍스트 위에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힘있는 연기, 관객의 눈을 휘어잡는 재치 있는 연출을 덧발랐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음탕한 코미디 풍자극으로 탈바꿈하는 동안, 작가의 여성주의적 주제의식은 가볍지만 의미심장하게,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관객의 웃음 사이를 파고든다.


 


우리가 기억하는 오셀로는 무엇이었는가?

 폴라 보겔은 [데스데모나]를 통해 여성의 사회에 초점을 맞추고 그간 그들을 억압해왔던 비극의 구조를 뒤집으며 성공적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그러나 데스데모나가 몰랐던 탑 바깥의 세상이 너무나도 강고했던 것처럼, 여전히 [데스데모나]는 궁전의 뒷방, 컴컴하고 어두운 세탁실에서 사그라드는 이야기다. 세상이 기억하는 [오셀로]의 무대 위에서 여전히 데스데모나는 정숙하고 순종적인 아내로 오셀로의 손에 순순히 죽임을 당한다. [데스데모나]에서 남성들은 등장하지 않지만, 남성의 그림자는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다. 반지도 아니고 목걸이도 아니고 고작 손수건 한 장에 세 여자의 인생이 울고 웃는 것, 편이 갈라지고 그들의 삶을 뿌리 채로 내던질 결심을 하는 모습은 무대 위에서 매우 희극적으로 그려지는 한편으로 씁쓸한 그림자를 던진다. ‘웬 손수건에 대한 연극이라는 부제처럼, 한낱 코풀개에 불과한 손수건 하나만으로 오셀로로 대표되는 남성성은 여성들을 무릎 꿇리고 그들의 삶을 쥐락펴락하는 것이다. 막이 내린 후에 결국 기억되는 것은 활달하게 살아움직이는 데스데모나와 에밀리아, 비앙카가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인 오셀로와 그를 숙명적 죽음으로 내모는 손수건 한 장이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정말로 같은 결말일까

 이러한 맥락에서 그린피그 측에서는 셰익스피어와 보겔이 모두 데스데모나의 운명을 같은 결말로 몰아가고 있다고 해설한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입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움직이던 그녀들을 생각해보면 의문이 든다. 정말 그들은 같은 결말일까? 얼마든지 다른 결말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화요일 밤마다 사창가로 파트 타임 알바를 뛰고, 예배 시간엔 옆에 앉은 총각에게 손으로 서비스를 한다는, 고삐 풀린 망아지같은 아가씨인데.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구둣발로 발등이라도 콱 찍었을지 누가 아는가

 특히 그린피그만의 특징적인 부분으로 꼽히는 커튼콜 없는 엔딩은 극의 결말을 재치있게 열어놓음으로써 관객에게 더 긴 여운을 남기며 빛을 발한다. 관객의 무안한 웃음을 자아내면서,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이야기는 끝난다. 이 연극이 흥미로워 보인다면, 이들의 결말이 궁금하다면, 음탕한 여자들의 야한 얘기가 듣고 싶다면 당신, 늦기 전에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 들러보시길.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이미지 출처 : 그린피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