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부유하는 이름들의 표류기

그 섬에서의 생존방식


 


안녕하세요, 당신!

 

 오늘은 아주 유쾌하고 즐거운, 우화같은 희곡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습기가 차 축축 처지는 무거운 여름밤, 가볍고 재미있는 이야기 없을까 하다가 골랐답니다. 부끄럽게도 빙구가 배우로 무대에 서게 했던 작품이기도 해요. 배우로서 대본에 대해 고민하고 분석했던 것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제게는 조금 더 기억에 남는 작품이기도 하네요.  2008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김지용의 <그 섬에서의 생존방식>입니다. 




자유로운 그들이 사는 섬




오크 : (한참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어제는 참 이상한 날이었어. 웬 남자와 웬 여자가 서로 앉아서 쓸데없는 말만 하루 종일 주고받고 있더라구.

트롤 : (오크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휙 돌려서 관심 없다는 투로) 혹시 낚시를 하고 있진 않던가요?

오크 : (깜짝 놀란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어?

트롤 : 나도 봤거든요. (기분이 상한 듯이) 상당히 재수 없게 생긴 남자 한 명이랑 (황홀한 어투) 너무나 우아하고 어여쁜 여자 한 명이 있었잖아요.

오크 : (당황) 내가 모았던 것과는 사뭇 다르군, 그래. 난 말이야, 매우 못생긴 여자와 그와는 정반대로 굉장히 멋지고 핸섬한 남자가 있는 것을 봤다구. (음침하게 웃는다)

트롤 : (기가 막힌 듯이 오크를 쳐다보다가) 그럼 우리가 같은 광경을 본 건 아니군요. (무섭게 노려본다)

오크 : (트롤의 매서운 눈빛을 느끼고) 그래, 그런가 보군.

트롤 : (몸서리치며) 하지만 내가 본 그 남자는 너무나 못생겼어요.

오크 : (트롤의 말에 질) 내가 본 그 여자도 정말 꼴불견이었지.

오크ㆍ트롤 : (한참을 서로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동시에)



 섬의 해변가에 각각 낚싯대를 끼고 무료한 대화를 나누는 그들, 이름부터 귀엽네요, 오크와 트롤 부부입니다. 오크가 큰소리만 뻥뻥 치면서 낚시질에 허탕을 치는 나날들이 계속되자 트롤이 남편의 일터까지 나와서 낚시질을 하고 있네요. 그런데 수완은 오히려 트롤이 더 좋고 말이에요. 오크에게는 자존심도 상하고 남자 혹은 가장으로서의 권위도 떨어지는, 뭐 이런저런 불평불만들로 둘의 사이는 항상 사소한 다툼들이 가득합니다. 낚싯대가 어쨌네 저쨌네. 잡은 물고기가 이랬네 저랬네. 그러나 시끄럽게 다투다가도 낚시찌 하나가 조금 움직이면 그들은 금세 싸움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트롤 : (젖 먹던 힘까지 다 쓴다) 이익! 크흥아악하악하악

트롤은 낚싯대를 끌어당기면서 신음소리를 낸다. 고통스러우면서도 일면 섹시한 신음소리다.

오크 : (보다 말고) 정말로 감질맛 나는구만. (트롤에게로 다가가서 같이 낚싯대를 끌어당긴다)


오크가 같이 낚싯대를 당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낚싯줄은 도통 끌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크와 트롤은 같이 신음소리를 낸다. 서로의 신음소리는 묘하게 잘 어울린다. 오크와 트롤은 낚싯줄을 당기다가 서로를 바라본다. 야릇한 신음소리로 인해 사랑이 가득한 눈이 되었다.

오크와 트롤은 낚싯대를 놓는다. 이미 그들은 낚시에 대한 관심이 끊어졌다.


오크 : 기억해? 아까 내 다리 힘을 보여준다고 했지.

트롤 : 지금이 바로 그 때에.


오크는 트롤을 섬 뒤로 집어 던진다. 그리고 상의를 과격하게 벗고 트롤이 떨어진 곳으로 다이빙하듯 몸을 던진다.

무대에 흐르는 적막.

 


 낚싯대 하나를 갖고 싸우다가도 어느새 열렬하게 사랑을 나누는 이 부부. 어떤가요, 그래도 행복해보이지 않나요? 그들 자신만의 규범 안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오크와 트롤은 섹시하고 뜨겁고 여유가 넘치며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뜨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사이, 낚시찌 하나가 심상치 않게 움직이네요. 이들의 나날이 어떤 새로운 국면을 맞는지 들여다볼까요?




불청객



 

모험가 : 젠장, 미끼를 잘못 물었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살핀다) 여긴 어디지? 무인도인가? (섬의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그래, 낚싯대가 있는 걸로 보아서 무인도는 아니로군. (크게 외친다) 실례합니다. 아무도 없습니까? (소리가 없자) 아무도 없는 건가? 그래도 낚싯대를 보니 가끔씩은 사람이 다녀가는 것 같군, 그래. (섬의 한 곳에 앉는다)

섬의 뒤편에서 오크와 트롤의 머리가 올라온다.

오크 : 누굴까?

트롤 : 누군지는 몰라도 함부로 우리 낚시터를 차지한다면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겠어요



 오크와 트롤의 평화롭던 섬에 무단 침입한 모험가는 이내 이들이 자리를 비운 낚시터에 벌렁 드러누워 코를 골기 시작합니다. 예기치 않은 모험가의 등장에 오크와 트롤은 잔뜩 겁을 집어먹습니다. 겉으로는 큰소리를 치면서도 코고는 소리 하나에 놀라 크게 호들갑을 떨고 있네요. 그렇지만 웬걸, 모험가 몰래 낚싯대를 거두어 자리를 피하려던 그들은 이내 낚싯대 하나를 갖고 버린다 만다 옥신각신 싸우기 시작합니다. 싸우는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모험가를 깨울 정도에요. 모험가가 말을 붙여도 무서운 줄도 모르고 싸우기만 하는 단순한 부부입니다.


 얼떨결에 모험가는 이들 사이의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는 해결사로서 기능하게 되고, 그들에게 신뢰 깊은 첫인상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사실 모험가의 정체는 섬과 섬 사이를 떠돌며 질서를 무너뜨리고 섬을 정복하는 악명 높은 수배자! 그는 잽싸게 머리를 굴려 이 순진한 부부를 이용해 이들이 가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마음을 먹습니다. 여자도, 물고기도, 심지어 섬까지도요. 그는 당근과 채찍을 기가 막히게 바꾸어 가며 부부가 물고기를 그에게 잡아 바치도록 유도합니다. 현란한 말솜씨와 밀고 당기기 실력을 백퍼센트 발휘해서, 그는 그들의 낚싯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물고기를 갖다 바치는 노예 계약서에 서명하도록 하지요.



오크 : 그런데 서명이란 게 뭐요?

모험가 : 여기에 이름을 쓰시면 됩니다.

오크 : 여기에 이름을 쓰란 말입니까? 이 조그만 곳에다?

모험가 : 무슨 문제라도?

트롤 : 우리 이름은 여기에 쓸 수 없어요.

모험가 : 그게 무슨 소리인지

오크 : 답답하시구만! 이름 쓰는 방법도 모르다니잘 보시오. 이름이란 건 이렇게 쓰는 겁니다. (객석을 행하여 엉덩이로 이름쓰기를 한다. 트롤을 가리키며) 뭐해? 당신도 이름을 써. 

트롤 : 좋아요. (모험가에게) 내 아름다운 글씨체를 보여드리죠. (오크의 옆에 서서 엉덩이로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오크 : 보셨습니까? 우린 이렇게 이름을 쓴답니다. 그래서 그 조그만 종이에는 절대로 이름을 다 채워 넣을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미개한 종족이라며 모험가가 혀를 차지만, 그런줄도 모르고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엉덩이로 이름을 쓰는 오크와 트롤 부부의 모습은 자못 귀엽기까지 합니다. 이 부분은 이 우화에서 빙구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에요.


 빙구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주인공 치히로가 하쿠의 도움을 받아 이름을 되찾는 장면을 떠올렸어요. 아무 힘도 없는 작은 소녀가 이겨내기엔 이상하고 기묘한 힘으로 가득찬 세계에 빨려든 치히로. 가족과 이름을 빼앗기고 힘들게 일하며 자신을 잃어가던 치히로는, 그녀를 도와준 조력자 하쿠 덕분에 그 이후로 그 세계의 마력에 쉽사리 굴복하지 않게 됩니다. 하쿠가 그녀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맞아요, 그녀가 잃어버렸던 '치히로'라는 이름입니다. 


 그래요, 모험가의 말처럼 그들은 제대로 건설된 문명 체계가 없는 원시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미개한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묻고 싶네요. 조그만 종이 따위에는 채워넣을 수 없는 대단한 이름을 가진 이, 그 이름이 반드시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아름다운 글씨체로 쓰여져 있음을 이해하는 이들을 과연 '미개하다'라는 말로 치부할 수 있을까요? 모험가는 한번이라도 그런 이름을 가진 적이 있을까요?


 당신의 이름과 저의 이름은 어떤가요? 우리의 이름이 오크나 트롤이라는 이름보다는 세련될지 몰라도, 종이 한 장에는 미처 담을 수도 없는 그런 소중함으로 자신의 이름을, 자신을, 간직하고 있나요? 




누구를 위한 섬인가




오크 : 여어, 오래간만이야. 어떻게 지냈나?

우체부 : 저야 늘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죠. 그런데 부인께서는 어딜 가셨습니까? 항상 같이 계시더니만

오크 : 묻지 말게. 이제 나하고는 상관없으니까.

우체부 : 바다의 여러 섬들 중에서도 제일 금슬이 좋기로 소문난 분들께서 웬일이랍니까? 다투셨나보군요.

오크 : 뭐 새로운 소식이 있나?

우체부 : 여기 신문이 있습니다. (신문을 꺼내준다) 그리고 상부로부터 전달사항입니다. 현재 해양자원이 점점 고갈 되어가고 있으니 각 섬에서는 하나의 낚싯대만을 사용하라는 권고가 내려왔습니다.

오크: ? 안 그래도 고달파 죽겠는데 낚싯대 하나만으로 물고기를 잡으란 말이야? 해도 해도 너무하는구만.

우체부 : 저한테 화를 내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전 단지 전달만 할 뿐이죠. 



 자, 이렇게 모험가가 세치 혀로 오크와 트롤의 갈등을 조장하고 식량부족으로 허덕이도록 섬을 휘어잡는 동안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신문배달 및 상부로부터의 명령 전달을 맡고 있는 우체부입니다. 고생 좀 하다보면 조그맣고 아담한 섬 하나는 생기지 않겠냐면서 힘든 와중에도 딴청부릴 생각은 하지 않는 순진한 청년이지만, 동시에 동네방네 소문이라는 소문은 다 꿰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기 좋아하는 촐싹맞은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해양자원 고갈 때문에 각 섬에서 쓸 수 있는 낚싯대를 단 하나로 제한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상부의 명령을 전달하면서도 그는 책임을 회피하고 단지 전달자일 뿐임을 강조합니다. 반면 괴물이 섬을 집어삼킨다는 흉흉한 소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섬을 떠나려다가도 방향을 틀어 다시 돌아와 수다를 떨죠.



우체부 : 항간에 떠도는 괴소문을 들으셨습니까?

오크 : 무슨 소문인가?

우체부 : 저도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섬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괴물이 이 근방에 돌아다니고 있답니다.

오크 : 아니, 얼마나 크길래 섬을 통째로 집어삼킨단 말인가?

우체부 : 생긴 것은 사람과 비슷한데 그 숨겨진 위장이 무진장 커서 모든 걸 다 삼켜버린다고 하더군요.

오크 : 끔찍한 일이군.

우체부 : 벌써 몇 군데의 섬이 큰 피해를 입은 모양입니다. 이곳에는 그런 일이 없게 만전을 기해 주세요. 보는 즉시, 신고를 하시구요.

오크 : 알겠네.

우체부 : 그럼… (인사한다) 



 우체부의 등장으로 극에는 새로운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각 섬에서는 단 하나의 낚싯대만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전제가 깔리면서 급작스럽게 상황이 변한 상태입니다. 모험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삐걱거리던 오크와 트롤의 사이를 아예 갈라버리는 쾌거를 이룹니다. 낚싯대 하나만으로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으니, 섬을 두개로 쪼개자는 것입니다. 



오크 : 어떻게 섬을 둘로 나눈단 말입니까?

트롤 : 맞아요.

모험가 : 제가 그 방법을 여러분께 알려드리죠. (섬 뒤를 가리키며) 저곳에서부터 이곳까지 선을 긋는 겁니다. 그래서 이쪽은 남편 분께서 살면 되는 것이고 저쪽은 부인께서 살면 되지요.

오크 : 하지만 실제로 이걸로 섬이 두 개가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트롤 : 맞아요. 곧 금방 발각되고 말거에요. 그리고 지침을 어겼다는 명목으로 우린 큰 고초를 겪을 거라구요.

모험가 : 두 분께서 딱 잡아떼면 그만이잖습니까? 서로 자신의 섬이라 주장하시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오크 : 하지만 웬만한 자들은 여기가 우리 둘의 섬이란 걸 다 알고 있어요,

모험가 : 그 때는 그 때일 뿐이지요. 예전엔 한 섬이었지만 지금은 두 개의 섬이라고 주장하세요.

트롤 : (결심한 듯) 좋아요. 선을 그어요.

오크 : 그래, 밑져봐야 본전이 아니겠어?

모험가 : (의미심장한 웃음을 띄며) 훌륭합니다. 그럼 제가 손수 선을 그어 드리지요.

모험가가 섬 뒤에서부터 긴 줄을 치기 시작한다



  졸지에 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서서 서로 말도 붙일 수 없게 된 오크와 트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기묘한 느낌만 들 뿐 그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각자의 낚싯대를 잡네요. 한편 우체부가 자신의 소식을 전했다는 오크의 말에 마음이 급해진 모험가는 트롤에게 접근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쿨쿨 잠을 자는 오크의 모습이 한바탕 소동의 전조를 예고하며 긴장감을 높입니다. 



오크 : 왜 이리 시끄러워? 여보! 아니, 뭐야? 이 어색한 모션은?

트롤 : 도와줘요. 이 남자가 나를 덮치려고 해요.

오크 : ? 이런 불한당 같은! (모험가에게 달려들려 한다)

모험가 : (오크의 발을 가리키며) 그 선을 넘어와선 안 돼! 잊었나? 이 섬은 두 개라구.

오크 : 아, !

트롤 : 여보, 지금 그게 문제예요?

모험가 : (트롤에게) 너도 닥쳐! 직접 말 하지 말라고 한 걸 잊었어? 대화는 오로지 나를 통해서만이 가능해. 멍청한 것들. 대체 몇 번이나 주의사항을 반복해서 일러줘야 하지?

오크 : (깜짝 놀라) 그렇지! (트롤을 보며) 나한테 말 걸지 마.



  오크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미 트롤이 겁탈 위기에 놓인 상태입니다. 눈앞에서 아내가 위험에 처했는데도 섬을 나누는 선 때문에 발만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가여운 오크를 어찌하면 좋나요. 그런데 마침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주변을 지나던 우체부가 해변으로 다가오고, 오크는 애꿎은 우체부의 멱살을 잡으며 터무니없는 소식을 전달했다고 화를 냅니다. 모험가는 우체부의 등장에 잠시 긴장하지만, 포커페이스를 잃지 않고 여유롭게 우체부를 궁지로 몰아갑니다. 졸지에 쫓겨날 위기에 놓인 우체부는 소문이 거짓이든 아니든 소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자유라며 애원해봅니다. 그렇지만 이미 마음을 돌린 오크와 트롤에게 우체부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네요.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승리감에 취한 모험가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모험가: (얼굴을 찡그리고 큰 소리로) 꺼지란 말이야, 이 허풍쟁이!

모험가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우체부에게 입에 담기 힘든 욕지거리를 해댄다.

모두 놀라서 멍하니 있는다.

드디어 모험가의 욕이 그치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이윽고, 섬에는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우스꽝스러운 추격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오크와 트롤은 할말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하고, 그들은 섬의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먼 바다 끝으로 자취를 감추지요. 섬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괴물은 쫓아냈지만, 섬을 두개로 가른 선은 그대로 있고, 낚싯대는 모험가에게 도둑맞은 채. 그들이 사는 섬은 모두 망가져버린 상태입니다. 천천히 이 막은 암전으로 이어집니다. 망가진 섬의 잔상을 무대에 새기면서요. 이 섬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섬일까 하는 의문을 남긴 채.  



이름을 가진 사람과 이름을 가지지 않은 사람의 세상



 모험가가 발달한 문명의 지성으로 오크와 트롤을 비롯한 여러 섬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것은, 섬들이 속해 있는 문명 체계가 이미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해양자원이 고갈된다고 각 섬의 식량을 터무니없이 제한하도록 하는 극단적인 명령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문명은 누구를 위한 체계인가요? 문명을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들을 위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적어도 모험가와 우체부, 두 개의 각각 다른 섬 외부의 문명 체계에서 온 인물들을 들여다보면, 이 섬에 개입하는 두개의 문명이 그들을 위해 돌아가는 것 같아보이지도 않긴 해요. 모험가와 우체부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름이 있기는 했을까요? 그들이 한번이라도 자신의 소중한 섬을 가져보았다면, 온전한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었다면, 이 극에서 이렇게 등장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라요. 


 빙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우화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누구를 위한 섬, 누구를 위한 사회, 누구를 위한 세상인지. 우리는 우리 중 누구 한 명이 없어도 그다지 큰일이 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죠. 생각해보세요. 아무런 목적도 없이 문득 이 세상에 던져져서, 하찮은 종이 한 구석을 채우고 구겨져버리곤 하는 이름자를 가진 채 부표처럼 떠돌고 있지는 않은지. 당신은 누구를 위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당신의 섬은 누가 규정한 규범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그 규범에 따라 물고기는 배불리 먹었는지, 혹여 배불리 먹지 못했더라도 당신 손으로 기꺼이, 당신이 잡고 싶어서 낚싯대 앞에 앉아있는 건지, 얼마나 뜨겁고 자유로운지.


 트롤과 오크의 마지막 대화를 곱씹으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칠게요. 빙구도 오늘은 빙구의 섬에 앉아서 생각 좀 해봐야겠어요. 제가 저 자신으로 얼마나 온전한지, 제 자리에 서서 당신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과연 제게 얼마나 있는지.  


 

트롤 : 무슨 생각해요?

오크 : 저 물고기랑 우리랑 다른 점이 뭘까?

트롤 : 글쎄요. 공통점은 보이네요.

오크 : 뭔데?

트롤 : 미끼를 덥썩 문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