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당신과 나 사이의 미지수

P R O O F


 

 안녕하세요, 당신! 빙구에요.

 

 언젠가 사랑에 관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사랑이란, 같은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선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말이었죠.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각기 다른 시선의 틀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그리고 사랑이 정말 시선을 공유하는 것이라면, 이는 곧 내가 가진 시선의 틀을 비집고 넓혀가며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의 틀을 깨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러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거에요. 왜 나는 그동안 이런 프레임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왜 나는 그동안 이런 각도로, 이 정도의 높이에 서서, 이런 색깔로 다른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사랑은 그런 일련의 과정일지도 몰라요. 당신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시선 끝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는 것, 그래서 당신 하나만을 갖는 게 아니라, 당신 시선 끝에 있을 세상을 통째로 선물 받는 것.

 

 희곡 <PROOF>는 수식과 기호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호흡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요. 수학이라는 그들의 아름답고 완벽하고 정연한 세계 속에서 삶이나 죽음, 감정 같은 것들이 늘 알 수 없는 변수들로 끼어들곤 합니다. 그 변수들 사이에서 그들은 어떤 엇갈리는 시선들을 그리는지, 뻗어가고 정체되고 만나고 이어지는 그 선들이 또 어떤 모양을 그리며 변해가는지. 데이빗 어번DAVID AUBURN<PROOF>입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

 

 

로버트 : (사이)그렇다면 334분의 1일이라고 놓자.

캐서린 : 그래. 맘대로 해.

로버트 : 정말 대단한 숫자다!

캐서린 : 좆나게 우울한 숫자지.

로버트 : 캐서린, 네가 허비해버린 날들을 햇수로 바꾼다면 이건 좆나게 흥미로운 숫자가 될 거야.

캐서린 : 334분의 1년이 뭐가 그리 흥미로워.

로버트 : 딴소리 그만해. 넌 분명히 알잖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캐서린 : (인정하며)1729.

로버트 : 그렇지. 1년을 52주로 계산하면 334분의 1년은 1729. 대단한 숫자지. 가장 최소의 숫자.

캐서린 :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으로 두 수의 세제곱의 합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최소의 숫자.

로버트 : 12의 세제곱 더하기 1의 세제곱은 1729.

캐서린 : 10의 세제곱 더하기 9의 세제곱도 1729. 우린 해냈어. 잘났어, 정말. 고마워.

 

 

 캐서린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한때 최고의 천재 수학자였으나 악화된 정신질환으로 인해 연구를 하지 못하게 된 늙은 수학자, 바로 그녀의 아버지 로버트입니다.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며 샴페인을 든 그들의 대화는 수학에 관한 것들로 온통 가득 차 있네요.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프레임은 아무래도 수학으로 이루어져있는 모양입니다.

 

 아버지는 말합니다. 공기와 낙엽, 신문 박스기사, 커피잔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과 향기 속에서도 수학을 찾았다고. 그의 주위의 온 세상에서 메시지들이 들려왔다고. 그러나 아버지를 간호하는 데 청춘을 다 바친 캐서린에게 이는 너무나도 먼 이야기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그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삶을 살아왔는데,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녀가 그동안 구축해온 세상이 모두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죠. 그녀는 대화가 한참이나 진행된 후에야 자각합니다. 그녀와 얘기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 일주일 전에 죽은 아버지의 환영이라는 것을.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의 물음이 아닌 아버지의 물음을 좇아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더 이상 그 어떤 답도 구할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상실감에 빠지고 맙니다.

 

 

캐서린 : 난 아빠와 함께 살았다고요, 난 아빠한테 여지껏 내 일생을 바쳤어요.

먹이고, 얘기하고,

아빠의 말을 들어주며... 아빠가 허깨비들과 말하면서... 유령처럼 막 돌아다녔어요...

고약한 냄새나는 유령, 아빠는 진짜 더러웠어요.

목욕이나 제대로 하는지 확인해야 했어요. 내 미친 아빠를.

: 미안해요. 내가 눈치 없게...

캐서린 : 엄마가 돌아가시고 여긴 나 혼자뿐이었어요.

난 아빠가 아무리 바보 같은 연구를 해도 기쁘게 해드리려고 노력했어요.

아빠는 온종일 책을 읽곤 했죠.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책을 요구했어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왔어요. 서재에 몇 백 권이 쌓여있었죠.

근데 아빠가 그걸 읽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빠는 도서관 책들에 적힌 듀이의 십진분류법을 통해 외계인들이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믿었죠.

그 암호를 알아내려고 했다구요.

: 어떤 메시지요?

캐서린 : 아름다운 수학이래요. 최상의 우아한 증명, 완벽한 증명, 음악 같은 증명이요.

: 멋진 표현이네요.

캐서린 : 거기다 최신 유행어, “똑똑, 누구게하는 농담 시리즈까지- 내 말은 아빤 진짜 또라이였어요.

: 선생님은 환자였어요. 비극이었죠.

캐서린 : 그 다음 단계는 쓰기 시작했죠. 하루에 열아홉, 스무 시간씩이나 계속...

난 아빠를 위해 노트를 한 상자나 주문했어요. 아빤 모두 다 써버렸어요. 난 학교도 그만 뒀어요.

난 아빠가 죽어서 기뻐요.

: 알 것 같아요, 그 심정.

캐서린 : 웃기지 마.

: 그래요, 난 상상도 못하겠어요. 끔찍했겠네요. 그 기분 알 것 같아-

캐서린 : 네가 뭐 알아. 난 혼자 있고 싶어. 제발 죽었으면 꺼져!

: (혼란스럽게)누구요? -

캐서린 : 너 말이야. 네가 여기 있는 게 싫어.

: 왜요?

캐서린 : 넌 죽었으니까.

: 난 안 죽었어요-(사이)

캐서린 : 아빤 죽었어. 어떤 제자도 필요 없어. (사이)

 

 

 그제서야 보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허무와 원망, 수학에 대한 애증, 자신조차 미친 것이 아닐까 싶은 불안정한 자기규정, 아버지의 연구 결과를 누군가 훔쳐가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눈앞에 나타난, 그 의심의 한가운데에 있는 아버지의 제자 핼이. 그녀는 아버지의 연구실에서 아버지의 메모를 검토하던 핼에게 가시돋친 말들을 던지며 쫓아내려고 합니다. 그녀는 핼이 아버지의 기록 일부를 훔치는 것으로 오해하고 경찰차를 부르는 등 그를 위협하려 소동을 피웁니다.

 

 

: 뭔가 발견했어요. 이건 당신 아버지가 쓴 글이라구요. 알겠어요?

수학이 아니라 선생님이 쓴 글이라니까요. 여기, 여기 여기, 보여줄게요.

캐서린 : 절도사건요.

: 제발 그 망할 놈의 전화 좀 내려놓고, 내 말 들어.

캐서린 : (전화에) , 여기 주소는 하이드파크-

: 당신에 관한 거야. 여기 보여요, 당신, 당신에 대한 글이에요. 당신 이름이 있잖아요. ‘, 보여요?

캐서린 : 하이드파크... 5724...

(캐서린이 멈춘다. 그녀는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 핼이 읽는다.)

: “좋은 날. 캐서린한테 기쁜 소식을 들었다.”

난 이게 뭘 두고 하는 얘긴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알 거 아니에요...(사이)

캐서린 : 언제 쓴 거죠?

: 글씨가 안정돼 보이는데, 4년 전인 것 같아요.(사이) 분명히 병세가 호전됐을 당시 같아요. 여기 더 있어요. (잠시, 캐서린은 전화를 끊는다.)

기계는 아직 작동되지 않지만 난 인내심으로 버티고 있다.“ 기계란 선생님의 마음, 그러니까, 수학적인 능력을 말하는 거예요.

캐서린 : 알아요.

: (읽는다) “난 안다. 내가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걸. 나는 자동차 정비사다. 완전히 망가진 차량에 수년간 공을 들인 덕에 시동 걸 때 잠깐씩 들려오는 저 작은 소리에도 낙관적인 생각이 든다. 학생들과의 대화도 도움이 된다. 또 외출하는 것, 음식점에서 식사하는 것, 버스 타는 것 등 소위 정상 생활의 그 모든 일상적 활동이 도움이 된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소중한 것은 내 딸 캐시다. 날 돌보느라 그 애가 잃어버린 시간들, 하마터면 허비해 버렸다고 쓸 뻔 했다. 그 애는 날 수용시설에 보내는 것을 완강히 거절해 왔다. 나를 집에 두고, 직접 보살펴준다. 분명 내 삶을 구원해 주었다. 이렇게 쓸 수 있게 해 준 것도 다시 수학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게 해 준 것도 내 딸이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난 결코 그 애에게 보답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그 애의 생일이다. 딸아이는 스물 한 살이다. 난 그 애를 데리고 저녁 먹으러 나간다.”

94일로 돼 있네요. 내일이죠?

캐서린 : 오늘이에요.

: 그렇군요. (그녀에게 노트를 준다) 난 당신이 이걸 보고 싶어 할 줄 알았어요. 몰래 가지고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비보처럼 들리겠지만,

내일 당신에게 포장해서 생일 선물로 주려고 했어요. 생일 축하해요.

(핼이 퇴장한다. 캐서린은 혼자 있다. 그녀는 손위에 얼굴을 묻고 흐느낀다. 결국 울음을 멈추고 눈물을 닦는다. 멀리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가까이 들린다.)

캐서린 : 아이 씨!

 

 

 그러나 사실은 핼이 아버지의 연구를 훔치려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가 남긴 캐서린에 대한 메시지를 그녀에게 전달하려 했던 것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집니다. 수학적 업적을 남기기엔 어중간하게 나이를 먹어 가는, 범생이 밴드에 드럼이나 치러 가는 스물여덟 살 청년 수학도의 서투름이 전해지는 부분입니다. 이후에 그는 이렇게 멋없고 건조한 말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거기엔 수학이 없었다고요.

 

 맞습니다. 거기엔 수학이 없었지요.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아버지의 말들은 아버지가 남긴 몇 줄의 그 말들은 사실 학계에 파장을 일으킬 수도, 책으로 출판될 수도, 핼이나 캐서린을 명문대 수학 교수로 위임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수학이 언어이자 답이며 진리인 세상,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그 말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수학에 대한 갈증과 아버지에 대한 독기 어린 애증으로 가득 차 있었던 캐서린이 그 수학 아닌 것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긴 몇 줄의 메시지는, 그리고 그 메시지를 전해주려고 애쓴 순수하고 바보같은 청년 핼은 캐서린의 얼어있던 마음을 덥혀줍니다. 멈춘 그녀의 삶을 다시 흐르게 하고 또다른 답을 찾도록 도와준 것은 그들 세상의 바깥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흔들리는 공리

 

 

 어떠한 숫자에도 빗장이 걸린 듯 묵묵부답이었던 그녀의 함수는 마침내 다른 미지수를 만나 새로운 수식을 내놓습니다. 마침내 마음을 열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소수에 관한 정리를 핼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핼은 뛸 듯이 기뻐하고, 뉴욕에서 온 캐서린의 언니 클레어 역시 매우 놀랍니다. 그러나 대단한 증명이라며 흥분하는 그들에게 캐서린은 찬물 끼얹듯 폭탄 같은 말을 던집니다.

 

 

: 이건 믿을 수 없어요.

클레어 : 도대체 뭔데 그래요?

: -, 이건 대단한 결과예요. 증명 말이죠. 내 말은 이건 증명처럼 보여요. 내말은 이건 증명이에요. 아주 긴 증명. , 물론 아직 다 확인해보진 못했어요. 그걸 전부 이해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지만, 만약 이게 무엇에 대한 증명이라면 무엇에 대한 증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 이건... 아주... 중요한... 증명이거든요.

클레어 : 뭘 증명하는데요?

: 정리요... 소수에 대한 수학적 정리... 수학자들이 풀어보려고 노력했던 거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거예요.

(......)

클레어 : 그래서 그게 뭘 의미하는 거죠.

: 이게 의미 하는 건, 사람들이 선생님이 미쳐서, ,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한 시기에, , 선생님은 가장 중요한 수학의 몇 분야를 붙잡고 있었던 거죠. 만약 확인만 된다면, 즉시 출판 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언론이 이 노트를 찾아낸 사람과 인터뷰 하고 싶어 할 겁니다.

클레어 : 캐시.

: 캐시.

캐서린 : 내가 찾은 게 아냐.

: 당신이 찾았어요.

캐서린 : 아뇨.

클레어 : 네가 찾은 게 아니라면 핼이 찾았니?

: 내가 찾은 게 아니에요.

캐서린 : 내가 찾은 게 아냐. 내가 썼어.

 

 

 캐서린이라는 수수께끼의 함수가 드디어 풀리는가 싶더니, 또다시 막다른길입니다. 언니 클레어는 물론, 그녀를 믿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핼 역시 그 정리가 캐서린의 것이라는 사실을 선뜻 믿기 어려워합니다. 겨우 몇 년간 학부 교육을 받은 것이 전부인 캐서린이 해 냈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의 증명이었던 데다가, 필체가 아버지 로버트의 것과 매우 비슷했으며, 혹여 그녀의 필체임을 확인한다고 할지라도 아버지의 증명을 그녀가 옮겨 적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함수가 풀리면서 새로운 수식들을, 새로운 곡선을 그리는가 싶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다시 갈 길을 잃고 멈춰서고 맙니다. 캐서린은 큰 실망감과 절망감에 빠져 상처를 입고 방에 틀어박혀 지내며 아버지와의 지난날을 곱씹지요. 이야기는 아버지와 함께 했던 지난 어느 겨울날의 회상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로버트 : 그래! 연구. . 아니 기계 말이야.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어. 그것도 전속력으로. 실린더란 실린더는 모두 점화됐고, 활활 타오르고 있어. 그래서 좀 식히려고 여기 나와 있는 거야. 요 몇 년 동안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캐서린 : 날 놀리는 거지?

로버트 : 아니다!

캐서린 : 믿을 수 없어.

로버트 : 나도 믿을 수 없어!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일주일 전이었던 것 같다.

잠을 깨, 거실에서 커피를 타고 있었는데 우유를 넣기 바로 직전이었지.

누군가 내 머리 속에 번쩍 하고 불을 켜 놓는 것 같았다.

캐서린 : 정말?

로버트 : 그것만이 아니다. 모든 기관들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21살 때로 돌아간거 같았다.

캐서린 : 농담이지! 그럴 리가!

로버트 : 아니! 돌아왔어! 돌아와서 근본하고 교감하고 있어-원천, -암튼 예전에 내 창조력의 근원 말이야. 다시 접촉 중이다. 터지기 직전이야. 간헐천처럼 하늘 꼭대기까지 쏘아 올린거지.

캐서린 : , 하느님!

 

 

 그 날은 아버지가 마침내 병을 이겨내고 수학적인 능력을 전처럼 회복했다고 기뻐하던 날이었습니다. 몇 년간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던 아버지의 흥분에 노트를 펼쳐 본 캐서린은 말없이 다시 노트를 덮고 들어가자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겨울날 티셔츠만 입은 채로 덜덜 떨며 자신의 연구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고 아이처럼 화를 내고 떼를 쓰지요. 손에 잡히는 아버지의 몸은 오랜 시간 추위에 노출된 탓에 꽁꽁 얼어 있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식어가는 육체 속에서 타들어가는 촛불처럼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듯합니다.

 

 

로버트 : 난 몇 년을 기다렸어. 이게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구. , 같이 연구하자.

캐서린 : 밖에선 안 돼. 여긴 너무 추워. 아빠를 데리고 들어갈래.

로버트 : 증명에 대해 토론하기까지는 안 돼.

캐서린 : 싫어.

로버트 : 시끄럽다. 캐서린, 그 망할 노트 펼치고 그 부분을 읽으란 말이야.

(사이, 캐서린이 노트를 펼친다. 그녀는 동요 없이 천천히 읽는다.)

캐서린 : “XX의 모든 양의 수라고 놓는다. X가 추위라고 놓는다. 12월은 춥다. 11월에서 2월까지는 추운달이다. 넉 달의 추위와, 넉 달의 더위, 나머지 넉 달의 적당한 기온이라고 가정해보자. 2월에 눈이 온다. 3월은 얼음의 호수다. 9월에는 학생들이 돌아오고 서점이 붐빈다. X를 서점이 가득 차는 달로 놓는다. 추운 달수가 4에 접근하면 책의 숫자는 무한대로 간다. 미래의 어떤 때보다도 추울 것이다. 추위의 미래는 무한대다. 미래는 추위의 미래다. 서점들은 무한대고 9월을 빼고는 결코 가득 차지 않는다......“

 

 

 연구물이라며 자랑스럽게 노트를 내놓은 그가 종이 가득 늘어놓은 것은 터무니없는 헛소리들뿐입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이미 그들의 세상에서 너무 멀어졌음을, 아버지가 이미 다른 우주의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이미 그들은 다른 세상에서 다른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으며, 같은 공간 안에 있어도 다시는 아버지와 같은 세상 안에서 소통할 수 없을 것임을 그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며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아버지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아무데도 가지 않겠다고 위로합니다.

 


로버트 : , 춥다.

캐서린 : 따뜻하게 해줄게.

로버트 : 제발 떠나지 말아라.

캐서린 : 안가. 아빠. 나 안 갈게.

 

 

 수학에는 공리라는 게 있죠. 아주 단단한 수학적 기반, 아무도 ?’라고 묻지 않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명제들이. 아버지와 캐서린에게는 서로의 존재가 그런 공리로써 작용했습니다. 비록 서로 다른 세상에 있어도 서로의 세상을 지탱하는, 서로를 믿는. 아무런 조건도 의심도 없이 온전히 그녀의 존재 자체를 믿어줄 사람, 이제 그런 사람이 그녀의 곁에는 없습니다. 믿어주리라고 생각했던 핼마저도 그녀에게 상처를 남긴 지금, 어떤 수식을 풀기 위해 마땅히 있어야 할 조건이 갑자기 없어진 것처럼 그녀의 세상은 크게 흔들립니다. 공리가 없이는 그 위의 수학이라는 체계가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오랜 세월 아버지를 대신해 어렵게 쌓아 올린 증명도 그녀에 대한 신뢰 없이는 무너집니다.

 

 소수에 관한 정리를 핼에게 보여주고 일주일이 지난 시점, 그녀는 언니 클레어의 설득에 따라 시카고의 집을 정리하고 언니와 함께 뉴욕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습니다. 클레어가 뉴욕의 정신병원으로 그녀를 데려갈 것임을 분명히 알면서도요. 그 순간부터 그녀는 그녀의 세계가 완전히 다른 곳으로 분리된 것처럼 지금까지 그녀가 쥐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체념합니다.

 

 

같은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선을 공유하는 것

 

 

 

캐서린 : 난 떠나요.

: 알아요. 하지만 잠깐만 기다려요, 제발!

캐서린 : 뭘 더 원해요? 당신에겐 노트가 있잖아요. 그걸로 뭐든지 해도 돼요. 출판을 하시죠.

: 캐서린!

캐서린 : 언니 허락을 받고 출판하라구요. 언닌 상관도 안 할 거예요. 아무 것도 모르니까.

: 언니 허락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캐서린 : 내 허락을 원해요? 가서 책을 내요. 해보라구요. 기자 회견도 하고. 아빠가 뭘 증명했는지 전 세계에 알려요.

: 그러고 싶지 않아요.

캐서린 : 아빠 이름을 팔아서 하고 싶은 데로 하라구요. 무슨 상관이에요. 이 나라 어느 수학과라도 갈 수 있는 비행기 표나 사라구요.

: 당신 아버지가 쓴 게 아니에요.

(사이)

캐서린 : 지난주엔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 그건 지난주죠. 난 이번 주 내내 이 증명을 읽으면서 보냈어요. 내가 어느 정도 이해한 부분이라면 지난 10년 동안 발표된 새로운 수학 기법을 많이 썼다는 거예요. 타원형 곡선이라든가 계수 형식이라든가. 4년 동안 대학원에서 공부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번 주에 배운 것 같아요.

캐서린 : 그래서요?

: 이 증명은... 새로워요.

캐서린 : 밀린 잠이나 실컷 자요, .

: 묻고 싶은 게 많아요. 연구과정이 엄청났을 거예요. 당신 말을 듣고 싶어요.

캐서린 : 싫어요.

: 그러지 말고, 캐서린, 내가 망친 걸 바로 잡으려는 거예요.

캐서린 : 그럴 순 없을 걸요? 당신은 확신하고 있군요? 생각을 바꿨다고 기뻐하면서 신나게 여기로 달려왔겠죠. 당신은 너무...... 제멋대로예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 노트와 수학, 날짜, 필체까지, 당신의 그 잘난 친구들과 결정한 모든 결론은 그저 단서에 불과해요. 일이 마무리 된 게 아니에요. 증명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 알겠어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캐서린 : 아무것도. 당신은 날 믿었어야 했어요.

 

 

 그러나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마지막 순간, 그녀는 뉴욕으로 떠나지 못한 채 남아 그녀를 찾아온 핼을 만나게 됩니다. 그에게 큰 상처를 받았던 그녀는 서운했던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핼은 일주일동안 그가 그 정리를 증명하는 데 불철주야 매달렸음을 알립니다. 그것이 그 나름의 공리를 세우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캐서린을 믿기 위한 그 나름의 방식이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조금 더 오랜 시간을 돌아온 그는, 위태로운 세상 속에 있는 그녀에게 손을 뻗어 잡아 줍니다. 둘이 함께 할 수 있도록, 그가 가진 세상의 귀퉁이를 조금 더 넓혀서요. 그는 공고히 정립한 어떤 공리로 흔들리는 그녀의 세상을 그 안에 들입니다. 

 


핼 : 잘 안 풀리는게 있다면 뭐든지 말해줄래요당신은 그걸 발전시킬 수 있을 거예요.

캐서린 : 모르겠어요......

핼 : 아무거나 골라요한 번 해보자구요당신은 좀 더 우아한 걸 찾게 될 거예요.

(잠시핼은 캐서린 옆에 앉는다결국 그녀는 노트를 펼쳐 천천히 넘기다가 한 곳을 찾는다그녀는 그를 본다.)

캐서린 :여기요.

 

그녀는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막 내림.

 


 빙구는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만일 다른 별에서 온, 우리 인체와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인식할 수 있는 주파수의 범위가 다르다던가 하는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는 맡지 못하는 냄새를, 보지 못하는 빛을,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우리와 다른 우주를 보고 살아가고 있겠죠.


 같은 지구 위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사실 마찬가지일 거에요. 각자 다른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각자 다른 세상을 갖고 있음을, 그래서 사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서로 다른 각기의 세상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같은 시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사실 서로 다른 우주를, 서로 다른 별을, 서로 다른 사랑을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극의 결말은, 캐서린이 핼에게 그녀의 정리를 설명하기 시작하는 데에서 끝납니다. 그러니까 둘이 온전히 하나의 시선으로 서로의 세계를 들이기 전, 핼이 뻗은 손을 따라 캐서린 역시 그녀 자신의 틀을 넓히고 바꾸면서 그 손을 잡으러 나아가는 단계까지만 보여주고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 그래프로 그리자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수식이 같은 근을 내놓는 한 지점에서 만나는 그림을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단 하나의 접점일 수도 있는 그 점에서 서로 만나기 위해 핼과 캐서린의 그래프선은 무한한 어딘가로부터 달려왔고, 또 무한한 어딘가의 끝점을 향해 달려나갈 것입니다. 시선을 공유한다는 것, 서로의 틀을 부수고 다른 사람의 세계를 들인다는 것은 그러한 과정을 수반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단 한 번의 접점을 위해 우리는 엇갈린 각각의 우주 속에서 서로를 찾아내고 만나 사랑을 하죠. 단 하나뿐일지라도, 그 하나의 작은 점이 당신과 저의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를 증명하는 해답이자, 이 긴긴 길의 끝에 있는 물음에 답을 던지는 유일한 미지수이니까요. 그리고 그 하나의 점을 공유하는 데서부터 우리들의 또다른 우주가 펼쳐지니까요. 그것이 제가 지금 여기에서 감히 사랑을 말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이,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이 제게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