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정치적 세계는 근대국가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정치적 행위가 근대국가를 기본 단위로 한다는 말이다. 세계지도를 펼쳐보면 지리적 자연은 각국의 '영토'라는 개념에 따라 구분되어 있으며, 그 경계를 촘촘한 '국경선'이 가로지르고 있다. 사람이 설 수 있는 지상의 모든 땅은 어느 국가의 영토에 속해 있거나, 예외적인 국제법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 모든 땅은 결국 어느 국가엔가 소속되어 있다. 어느 땅이 여러 국가에 동시에 속할 수 없고, 어느 국가에게도 속하지 않는 땅은 없다. (오늘밤 갑자기 태평양에 땅이 솟더라도 무주지 선점론에 따라 재빨리 주인이 정해지고 만다.)


땅이 어느 국가엔가 속해 있고, 해당 국가가 영토에 대한 모든 권한을 독점한다는 독특한 아이디어는 1648년 베스트팔렌에서 탄생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의 느슨하고 중첩적이던 지배는 두부 자르듯 명확하게 나뉜 여러 주권공동체의 지배로 대체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제후들에게 완전한 영토적 주권과 통치권을 인정하고 정치를 종교로부터 독립시켜 세속화하였다. 이는 정신적으로는 교황이 주도하고 세속적으로는 황제가 주도하는 가톨릭 제국으로서의 신성로마제국이 실질적으로 붕괴된 것을 의미했다. 한 때 어느 농부의 땅이면서도 어느 영주의 땅이며, 황제의 땅이면서도 교회의 땅이었던 공간이 이제 어느 국가의 영토로 단일화된 것이다. 개인이 땅을 사유하는 것도 이제 국가의 권위에 의지하게 되었다. 수도로부터 아무리 가깝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땅이라도 '덜 영토'이거나 '더 영토'일 것 없이 개념적으로 동일한 영토였다.


근대국가가 정치의 기본단위를 이룬다는 베스트팔렌의 정신은 그대로 사람에게도 이어졌다. 모든 사람은 어느 국가엔가 속해 있다. 그리고 국가만이 그 국민에게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주체였다. 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지만, 선언 자체가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권을 지니고 어느 국가엔가 소속되어 있어야만 이동도, 생존도, 소유도, 스스로의 '신분증명'도 가능해졌다. 내가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고, 어떤 말을 사용하며, 누구의 가족이고, 무엇을 갖고 살아왔는지는 국가가 이를 인정하고 보증하지 않는 이상 무의미한 것이다. 베스트팔렌조약으로 형성된 근대국가체계 400년은 결국 지구상의 모든 땅과 인구를 명확히 여러 국가로 나눈다는 논리적 기반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영토구분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지도를 놓고 선을 긋는 것만으로도 명목상의 구분이 가능했다. 그러나 사람은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이동하는 유목민들, 한 지역에 정주하지 않고 떠도는 집시들, 몇 세대에 걸쳐 조용히 이주한 사람들까지, 고정된 사물이 아닌 인간을 베스트팔렌 조약의 틀로 가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얀마 국경을 떠도는 로힝야족의 비극도 베스트팔렌의 논리구조 속에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었다.



# 국가에게 버림받은 사람들, 로힝야족


로힝야족은 미얀마 서부의 아라칸 주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 민족이다. 이들은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 이슬람교를 믿으며, 중국-티베트 계열의 언어를 사용하는 주류 미얀마족과 달리 인도-아리아어계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다보니 미얀마족과의 종교적, 민족적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여느 소수민족이라도 겪을 법한 흔한 비극이다.


문제는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족의 시민권을 부정해버렸다는 점이다. 미얀마 정부의 공식적 입장에 따르면 로힝야족은 미얀마의 국민이 아니다. 방글라데시에서 건너온 불법 이민자일 뿐이다. 반면 방글라데시 정부는 이들이 처음부터 미얀마 영토 내에 거주해온 민족이기 때문에 방글라데시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로힝야족이 언제부터 아라칸 지역에 살았는지는 불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현재 수만 명의 로힝야족이 미얀마 국경지대에 살고 있다는 것 뿐이다.


로힝야족의 정확한 인구는 가늠하기 어렵다. 어디에서도 자국민으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2012년 UN조사에 따르면 약 80만명의 로힝야족이 미얀마에서 살고 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로힝야족의 사연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도 2012년인데, 당시 로힝야족을 혐오하는 지역 불교도들이 일으킨 아라칸 폭동으로 한 로힝야족의 마을이 "전소"했으며, 600여 명이 죽고 1200명이 실종됐으며 8만 명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됐다. 그러나 이마저도 추산 주체에 따라 숫자가 널뛰기한다. 누구도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국가가 없다는 것은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국가가 없다는 것은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당장 당신에게 주민등록증과 여권이 없다고,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없었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은 일용직 외에 어떠한 일자리도 구할 수 없다. 편의점에서 살법한 물건들 외에 어떠한 중요하고 값비싼 물건도 살 수 없다. 땅도, 집도, 점포도 합법적으로 살 수 없다. 국경을 합법적으로 건널 방법도 없고, 유산을 넘겨주거나 소송을 걸거나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공격을 당하더라도 처벌을 요청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아무런 권리가 없다.


로힝야족에게는 오히려 국가가 가장 두려운 존재다. 1978년, 미얀마 군대는 "모든 거주민들을 면밀히 조사하여 시민들과 외국인들을 법에 따라 지정하고, 불법으로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에 대해 조치를 취하는 것"을 명목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이 군사작전은 민간인들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았고, 대규모 살상과 강간, 모스크의 파괴, 종교적 박해 등을 자행했다. 로힝야인들은 미얀마 군부에 의해 매우 혹독한 환경 하에서의 무보수 강제노동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누구도 군부를 제지하지 못했다.


수십만 명의 로힝야인들은 박해를 피해 방글라데시, 태국 등 주변국으로 도망치고 있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외국인으로서의 신분을 증명할 길도, 이를 보증해 줄 정부도 없기에 밑바닥 인생을 살거나 난민캠프에 틀어박혀 희망 없는 삶을 살 뿐이다. 그러다가 운이 없으면 이국에서도 쫓겨나기 일쑤다. 2009년 태국으로 피난 가던 로힝야 보트피플 일행은 태국 군대에 제지당한 뒤 바다에 버려졌으며, 방글라데시는 2012년 국제구호단체의 로힝야족 원조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 난민법...?


올해 7월 1일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난민법을 시행하게 됐다. 기존 출입국관리법 하위조항에 있던 난민 관련 조항, 즉 인종이나 종교, 정치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박해를 피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외국으로 탈출한 사람들을 돕는 조항을 독립된 법률로 제정한 것이다. 아시아 최초 난민법 제정이라고 홍보하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는 조용하다. 난민에 대한 생계지원을 재량으로 둔 것, 예산 및 관련인력의 태부족 등 여러 문제점도 지적된다. 국제문제 개입에 인색한 한국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될까.


세계에는 다양하게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재해로 집을 잃은 사람들, 식량이 부족한 사람들, 독재정권 하에서 강제동원에 시달리는 사람들... 국적이 없는 로힝야족은 어쩌면 이 모든 것을 합친 듯 한 고통을 겪는지도 모른다. 그럴싸한 집에서 배불리 먹으며 오늘도 게임만 한 나이지만, 로힝야인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해진다.


누군가 말했더랬다. 한 사회에서 사는 이상 우리는 함께 고통 받는 거라고. 내가 오늘 배불리 먹었더라도 옆집 아이가 굶주리면 내 삶은 가난한 거라고. 내가 오늘 따뜻한 방에서 편히 자더라도 뒷집 아저씨가 허름한 곳에서 떨고 있다면 내 삶은 누추한 거라고.


지구촌을 산다는 우리는 우리 이웃들에게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닐까.

‘조용히 좀 해주세요.’

5월 축제의 달에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여기저기서 열리는 락 페스티벌이나 재즈 페스티벌, DJ 페스티벌에 진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가게 된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축제’를 즐기며 사람을 만나고 그 분위기에 취하는 것보다 유명한 아티스트들의 노래나 연주가 된다. 음악에 집중하고 싶은 그는 주변의 시끄러운 대화나 산만한 움직임이 거슬린다. 이 때 그가 ‘음악에 집중하고 싶으니 조용히 해달라’는 우스꽝스러운 주문을 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부탁은 클래식 음악회에서는 전혀 우습지 않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담당자도 있으니 말이다. 또 다시 낯선 질문을 던져본다. 왜 유독 클래식 음악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감상할 수 있는지. 반대로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에는 왜 다른 사람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거쳐야 하는지.

 

 

사교의 공간에서 감상의 공간으로

18세기 연주회의 모습은 지금의 엄숙하고 고결한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당시 연주회를 즐길 수 있었던 사회적 계급은 귀족이었다. 어쩌면 연주회를 즐길 수 있는 계층이 귀족이 아니라, 연주회를 유지할 수 있게 한 청중층이 귀족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연주회는 귀족들의 개인적 인맥을 통해 유지 및 흥행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연주회에서 다른 집안의 귀족을 만나 이야기를 하거나 카드놀이를 했다. 연주회는 음악을 듣기 위한 장소라기보다는 귀족이라는 소수층의 사교장이나 음악이 있는 파티 정도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관객들이 너무 시끄러워서 가사를 들을 수 없다는 이유로 성악곡을 연주할 때는 가사가 적힌 종이를 인쇄해서 배포하기도 했고,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지휘자가 힘겹게 지휘를 하기도 했다. 물론 그 중에서 음악에 집중하고자 한 관객도 있었고 다른 청중의 지나친 소음이나 행동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한 관객도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연주회라는 시스템을 유지하던 청중들 자체가 귀족이라는 닫힌 집단이었고, 그 안에서도 음악에 큰 관심을 두는 사람은 소수였기 때문에 그들만으로는 연주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들이 주변에 불만을 이야기하는 순간 앞서 상상한 것과 같이 페스티벌에서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 빈축을 샀을 것이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이러한 연주회장의 모습은 19세기 새로운 사회가 성립되면서 점차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전체적인 모습의 변화는 음악가와 청중의 관계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18세기 귀족들의 연주회에서 음악가와 청중의 관계는 개인적인 인맥으로 성립되었다. 음악가가 알고 지내는 귀족이나 귀족의 지인 등의 친분에 기대어 표를 팔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통해 부와 권력을 획득한 부르주아 계급이 연주회를 지지하는 계층으로 가담하면서 개인적인 관계는 비개인적인 관계로 변하게 된다. 연주회는 상업적 매니지먼트를 기반으로 하게 되고 불특정 다수의 청중을 상대로 표를 팔면서 상업적인 관계로 전환하였다. 즉 연주회가 대중문화화 된 것이다. 이제 표를 살 사람은 음악에 관심이 있고 구매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만큼 음악회의 관객 수도 급속히 팽창했다. 연주자와 개인적 친분이 없으면서 양적으로는 많아진 관객들은 연주회를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찾았고, 연주회의 사교적인 사회적 기능은 점차 상실되었다.

 

 

진지파 vs 오락파

연주회가 대중문화화 되는 과정에서 장사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음악가를 통해 출연료와 판권료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그들은 표를 많이 팔기 위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했는데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한 명의 스타를 만드는 것이 가장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스타가 되어 사람들의 인기를 많이 받는 가수일수록 더 많은 출연료와 판권료를 받을 수 있는 지금의 콘서트와 같은 원리다.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재미나 신선한 것을 추구하다보니 오락을 목적으로 한 연주회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연주회의 성립은 반대로 음악의 진지한 감상을 조장하기도 했다. 새로운 사회가 성립되면서 점차 학식있는 청중도 증가했고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주회도 상업적 기반을 다져나가기 시작한다. 그 때 학식있는 청중을 방해하던 다른 청중들은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연주회에 이미 흡수되었기 때문에 진지한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연주회는 더욱 쉽게 기반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주회에서 관객들은 오늘날과 같이 집중적 청취의 형태를 취했다.

이렇게 연주회를 ‘진지한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지 아니면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지에 따라 ‘진지파’와 ‘오락파’로 나뉘어진다. 청중의 질에 따라서 연주회의 기능이 분화된 것이다. 두 진영은 점점 대립관계로 발전한다. 이 때 수적으로 열등한 진지파는 윤리의 문제를 제시한다. 음악을 감상할 때는 작품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감상방법이며, 오락을 목표로 하는 감상은 상업주의에 물든 감상은 나쁜 취향이라는 것이다. 진지파가 취한 또 다른 전략으로는 ‘고급’ 대 ‘저급’이라는 대립적 가치를 음악에 차용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즉 음악 감상을 그 작품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은 정신적인 활동으로 고급이며 학식있는 사람들의 것으로, 그저 즐기는 음악은 저속한 사람들의 것으로 선을 그어버렸다. 이러한 선 긋기와 윤리적인 정당화가 맞물려 진지파는 결국 주도권을 쥐게 되고, 그들에 의해 오늘날의 연주회 윤리나 연주회 모습이 확립되었다.

진지파와 오락파의 갈등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 둘의 대립이 거장과 비르투오소라는 새로운 대립항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오늘날 비르투오소는 매우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가진 대가라는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종종 비르투오소는 기교적인 면은 뛰어나지만 감정이나 표현의 전달 면에서는 부족하다는 약간의 비하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당시 비르투오소는 뛰어난 기량으로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에 적합했다. 상업주의적인 장사가 목표였던 오락파에서 비르투오소는 판권료를 올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요인이었다. 반면 진지파에서는 비르투오소의 기교 중심적인 면을 비판하며 거장을 영웅화하려는 노력을 한다. 베토벤과 같은 거장들의 전기가 그 시대에 특히 많이 출판되었던 사실은 그러한 노력의 단면을 보여준다. 거장의 우상화는 유행이나 순간적인 인기에 휩쓸리지 않고 영원하게 만들 수 있었다. 진지파의 승리로 거장은 연주회의 프로그램에서 곡과 나란히 적혀있는 위상을 얻는다. 이는 오늘날 대중가요의 작곡가가 가수에 비해 훨씬 적은 위상을 가지는 것과 비교했을 때 클래식에서 작곡가, 즉 거장의 위상이 얼마나 높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당연한 건 없어’

클래식은 정신적으로 고급의 활동이라는 것에, 프로그램의 곡 옆에 나란히 쓰여진 작곡가의 이름에도, 심지어 클래식은 작품의 내용에 집중하여야 한다는 규칙에도 모두 이유가 있다. 오늘날의 연주회는 거의 청교도적 윤리를 요구한다. 이러한 윤리에 하나씩 ‘왜’라는 낯선 질문을 해가다보면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연주회의 감상 형태가 수많은 청취 형태 가운데 하나라는, 조금은 생소한 답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View1. 봉준호 <설국열차>

- 봉준호의 엔진은 무엇이었나

 

 

  시사회로 봉준호의 <설국열차>를 미리 보고왔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영화였다. 영화의 서사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서라기보단 '봉준호의 영화가 무엇이었나'에 대한 질문이었다. 봉준호의 전작을 상당히 흥미롭고 재밌게 보아왔던 나는 그가 '설국열차'라는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올 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영화 진행상황도 꾸준히 살폈으며, 원작 만화도 아껴가며 읽었다. 봉준호가 이 이야기와 장소를 어떻게 요리할까가 너무나 궁금했다.

 

 

  보고 난 뒤의 느낌은 상당한 실망감이었다. 그와 함께 '내가 봉준호 영화에 기대했던 건 무엇이었나'를 고민하게 되었다. 봉준호 영화를 달리게 하는 엔진은 무엇이었나. 그의 영화의 힘과 재미는 특유의 감성과 장르 비틀기 그리고 공간조직력에서 추진력을 얻었다. 범인을 잡지 못하는 형사물, 영화 초반부터 대낮에 광장을 휘젓는 괴수처럼 장르의 특성을 비트는 것. 소소하고 디테일하면서도 우스운 인물, 상황, 대사들이 주는 특유의 B급 감성. 잘 조직되고 이미지화된 장소들과 상징적이고 꿈틀거리는 배경들. 그런 것들이 내가 느끼는 봉준호 영화의 엔진이었다. <설국열차>에 실망했던 건 이런 엔진들이 생기를 잃고 폭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혁명과 저항의 서사를 가진 영화는 효과적으로 혁명을 설득해내지 못한다. 스크린에 보여지는 꼬리칸 사람들의 억압과 분노는 생각보다 미미하게 다가온다. 영화 후반부까지 아껴놓은 '꼬리칸에서의 사건'이 그들의 사연을 더 곡진하게 만들어주는 중심인데도 불구하고, 주인공 커디스의 한탄같은 대사에서만 그려질 뿐이다. 서사를 밀고 끝까지 나아가야할 그들의 이야기부터가 추진력을 잃으니, 전체가 힘이 없어진다. 꼬리칸의 동료 누군가가 죽어나가도 관객에게 슬픔과 분노가 강렬하게 와닿지 못한다. 그렇기에 주인공을 비롯하여 꼬리칸의 캐릭터들이 전체적으로 개성이 없고 공감도 없다. 뒤에 나오는 보안설계자 남궁민수라든가 엔진의 주인 윌포드, 꼬리칸의 정신적 리더 길리엄 등의 캐릭터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뭔가 더 많은 사연을 말할 듯 말할 듯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아쉬울 수 밖에. 혁명서사는 그래서 비틀어지지도 않고, 털털거리는 경운기처럼 나아간다.

 

 

  디테일과 인물, 상황, 대사들이 주는 유머와 B급 감성 역시 확 죽어있다. 이는 아마도 영화 전체의 톤 때문이겠지만, 언어의 문제가 큰 것 같다. 봉준호 영화의 미요한 감성은 사실 배우에게 기대는 부분이 많다. 자연스러우면서 우스운 대사와 표정이나, 어긋나고 맥락없는 상황과 슬랩스틱 등을 쫀득쫀득하게 붙여주는 변희봉이나 송강호 같은 배우들이 이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설국열차>는 외국배우들이 외국어로 주요 서사를 이끌어 가기에 봉준호 특유의 유머가 끼어들 틈이 많지 않다. 그러다보니 가끔 송강호와 고아성을 통해 나오는 유머와 감성들도 번번이 미끄러진다. 그나마 틸다 스윈튼의 연기가 장르적 속성 안에서도 우스꽝스럽게 잘 표현되었다. 나머지 배우들은 아쉬웠다. 차라리 한국배우들이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윌포드에 백윤식이, 길리엄에 변희봉이, 커티스에 박해일이 그런 식으로 등장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마지막으로 장소다. 봉준호의 특기는 배경도 연기를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논이 꿈틀거리며 광기와 불안을 보여주고, 한강과 하수도가 부조리와 답답함을, 골목골목들이 묘한 긴장감을 연기한다. 특히, 광장의 이미지와 좁은 공간의 이미지가 적절히 섞이고 배합되면서 훌륭한 비쥬얼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설국열차>는 장소가 폐쇄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봉준호의 장기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것 같다. 열차는 그저 열차일뿐 무엇도 연기하기 못한다. 그 자체의 상징성도 강력하게 다가오지 못한다. 열차 칸들의 배치와 대비가 그나마 공간을 환기시킬 수 있는 부분인데, 이마저도 피상적인 스케치에 그친 느낌이다. 어쩌면 열차의 모습과 시스템이 영화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을 수 있는데, 이번 영화에선 박제된 듯 정말 배경에 그친 모습이다.

 

  그렇지만 <설국열차>는 어디까지나 봉준호라는 이름에 맞는 엔진을 장착하지 못했다는 실망감일 뿐이다. 그저 여름에 즐길만한 영화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물론 썩 좋지도 않지만. <설국열차> 역시도 봉준호의 하나의 정착역이었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그의 엔진의 힘을 믿는다. 다음번엔 힘빼고 드라이브하는 마음으로 달려보는 건 어떨까.    

 

 

   

Ex 12. 봉준호, 송강호의 <살인의 추억>

- 한국식 밥과 법 

 

  

  "밥은 먹고 다니냐?”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다. “, 그럼. 요새 밥 굶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는 언제나처럼 퉁명스럽게 답한다. 내가 부모님에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이 끝없이 이어지는 밥타령이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부터 밥 좀 더 먹어라’, ‘밥은 제때 챙겨먹어라.’, ‘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거다.’ 등등. 밥에 대한 레퍼토리는 무한증식, 무한반복된다. 나한테 물어볼게 그것밖에 없나 싶다. 그러니 이라는 단어만 나와서 반사적으로 신경질이 나곤 한다. 

 

  부모님의 이런 밥에 대한 집념(내가 보기엔 집착에 가까운)은 당신들이 겪은 시대의 유산이다. 단지 못 먹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런 걸까. 아니다. 그보다 정확히 말하면 보다 이 먼저인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법보다 밥인 시절을 담은 영화, 그 애증어린 추억에 관한 영화, 밥걱정 많이 해주는 영화, 봉준호와 송강호의 <살인의 추억>이다.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엔 이런 말이 나온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밥이란 그런 것이다. 밥은 사라지지 않는, 평생 동안 해결해야할 욕망이다. 법은 그 반대다. 과도한 욕망을 제어하는 수단이고, 그 판단의 기준이다. 밥은 본능적으로 찾아야 했던 것인 반면 법은 이성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밥과 법의 충돌이 봉준호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살인의 추억>이 충돌을 가장 잘, 가장 한국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1986년 경기도 작은 농촌마을에서 젊은 여인이 무참히 강간, 살해당한다. 2개월 후, 비슷한 수법의 강간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조용하던 시골마을은 연쇄살인이라는 생소한 범죄의 공포에 휩싸인다. 지역토박이 형사 박두만(송강호), 그리고 서울 시경에서 자원해 온 서태윤(김상경)이 수사를 담당하게 된다. 육감으로 수사한다는 박두만은 동네 바보나 양아치들을 족치며 자백을 강요하고 증거를 조작한다. 오직 자료만을 믿는다는 서태윤은 서류를 꼼꼼히 검토하며 사건 조사한다. 서로 다른 스타일로 두 사람은 부딪히며 신경전을 벌인다. 범인을 만들어내서라도 사건을 종료하려하는 두만은 밥의 수사를 한다. 닥쳐올 나의 한 끼니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에 태윤은 법의 수사를 한다. 범인이 아닌 사람을 가지고 조작하려는 두만을 번번이 방해한다.

 

 

 

  이런 충돌에 법보다 밥이 먼저인 그 시절의 공기가 붙는다. 밥은 욕망이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폭력과 야만을 부른다. 폭력과 야만의 시절에 수사는 진범을 잡기보다는 사건을 무마하는 데 급급하고, 언론은 제멋대로 사건을 뻥튀기해대고, 전경은 살인범 찾기가 아니라 시위진압에 나가있다. 그 사이로 살인범은 숨어들어간다. <살인의 추억>에서 농촌의 논과 거대한 공사현장이 음산하고 야만스럽게 다가오는 건 그 시절의 공기 때문이다. 두만과 태윤은 수사를 함께 해나가면서 변해간다. 두만은 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논리적인 영역의 문제들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태윤은 법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시대의 불합리와 잔혹한 살인마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둘은 사건의 실체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제 다 왔다고 확신한 순간, 미국서 날아온 유전자 검사결과는 무참히 확신을 무너뜨린다. 결국 그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확신하지도, 잡지도 못하게 된다. 이 지점이 다른 형사영화와 <살인의 추억>이 확연히 다른 지점이다. 이 어둡고 텅 빈 터널 같은 결말은 범인을 확신하고 좇아왔다가 배신당한 그들의 황망함과 분노를 관객에게도 전달한다. ‘답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곳에도 답은 없었다.’ <살인의 추억>은 그 시절을 그렇게 추억하고 있다.

 

 

 

  “밥은 먹고 다니냐?” 두만이 범인이라 확신했던 용의자(박해일)에게 묻는다. 아주 묘한 뉘앙스의 대사다.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던 것처럼, 미안함과 염려의 느낌이기도 하고, ‘이런 짓을 하고도 밥이 넘어가냐?’는 분노의 느낌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어디선가 영화를 보고 있을지도 모를, 아마도 밥 잘 먹고 평범하게 잘 살고 있을 범인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고 했다. 나는 이 물음이 그 시절에게 던져지는 듯한 느낌이다. 닿으려고 해도 끝내 닿을 수 없고 추억할 수만 있는 그 시절에게 그렇게 밥 먹으니 좋디?’라고 묻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 질문이 왜 지금의 나에게도 쿡 박히는 걸까. 지금 우리의 시절은 뭐가 달라졌는가 묻고 싶다. “밥은 먹고 다니냐?”

 

 

봉준호, 송강호의 <설국열차> 201381일 개봉

 

 

 

※ 읽기 전 주의사항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후출판사, 2004)를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사진이 보여주는 것 그리고 보여주지 않는 것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 

 

 

 

 

 
사진의 이중성

 

 사진은 틀을 가지고 있다. 보통 당신의 앨범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네모난 틀 말이다. 그렇기에 사진을 찍으면 세상은 둘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틀 안에 있는 세상, 다른 하나는 틀 밖에 세상. 틀 안에 있는 세상은 객관적인 세계이다. 조작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틀 안에 묘사된 모든 것은 사진을 찍을 당시에 그 곳에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진은 객관적인 자료이지만, 또 그렇기에 사진은 명백히 주관적인 자료이다. 틀 밖의 세상을 배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전부를 볼 수 없다.(물론 사진이 아니더라도 ‘전부’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우리는 사진작가가 의도한 때와 장소를 사진작가가 의도한 각도로 바라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진을 볼 때에는, 사진의 틀을 자세히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의 틀 바깥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 오늘 글의 소재인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도 이러한 맥락에서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어떤 대상은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뉜다. 사진은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가장 흔한 분류를 생각해보자. 당신의 디지털 카메라를 보라. 그곳에 상세히 적혀있을 것이다. 인물 사진이나 풍경 사진과 같이 찍히는 대상에 따라서 사진을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조금 특이하게 사진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따라서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행복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사진,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진, 쓸쓸함을 자아내는 사진 등등. 조금 추상적이고 모호한 기준이지만, 이것 나름대로 좋다. 방금 우리가 지어낸 분류대로 이야기하자면 오늘 볼 사진의 종류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 되겠다.

 

 

 
연루되지 않음에서 나오는 연민

 

 당신도 연민을 일으키는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왜냐하면 그러한 사진은 도처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얼마 전에 지하철역에서 그러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지하철역 한 켠에 아프리카 기아를 위한 서명과 모금 운동을 하는 단체가 있었고, 그들이 전시한 사진 속에는 등에 상처자국이 자욱한 아이, 살이 모두 빠진 채 배만 불룩한 아이 등이 찍혀있었다. 그러한 사진을 맞닥뜨린다면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사람일지라도 가슴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꽤나 자주 보는 광경이었지만 그 사진 속 한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서 나는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연민의 감정을 느껴 서명을 하고 기부를 하는 것도 사진 감상의 좋은 방법이자 세계를 조금 더 따뜻한 방향으로 이끄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진의 틀 안을 바라본 경우이다. 그러한 감상을 마쳤으면, 이제는 사진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이 사진이 보여주지 않은 것을 생각해볼 시간이다. 수잔 손택은 이러한 사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진 1 : <학살된 투치족의 시체>, 사진 2 : <시에라리온 내전의 희생자>(곧 찾아서 올리겠습니다.) 


 이 사진들은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런 사진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나라들)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110) 
 

 수잔 손택은 이러한 설명과 함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연민’을 공격한다. 연민은 자신이 이미지 속의 고통에서 떨어져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녀는 연민을, 착한 의도에서 나오지만 “어느 정도 뻔뻔한 혹은 부적절한 반응”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동의할 수 있는가? 만약 동의가 어렵다면 조금 더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보자. 당신이 보는 TV에서 내전으로 인하여 팔이 잘린 아이가 배고파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다. 당신은 소파에 앉아 감자칩을 집어 먹으면서 그 고통스러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이마를 한껏 찡그린 채 말이다. 이미지 속의 대상(팔이 잘린 아이)과 이미지의 감상자(감자칩을 먹는 당신) 사이에 숨어있는 모종의 권력관계가 보이는가? 수잔 손택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연민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우리가 당면한 과제를 말해준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154)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그동안 많이 궁금했다. 저 멀리에 있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을 우리가 관음증과 같이 염탐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저 나만의 착각이려니 하고 있었다. 그러다 『타인의 고통』을 읽게 되었고, 이것이 나만의 생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다시 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사진에 나타난 틀 안에 세상이 있다면, 당연히 사진에 드러나지 않는 틀 밖에 세상이 있다. 수잔 손택은 이야기한다. 연민을 느끼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고. 연민만을 베푸는 것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 혼자만의 위안이라고. 이미지 속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도 나와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자신은 이미지 속에 있는 사람의 고통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자신하지 말자. 틀 밖에 세상을 한 번 생각한다면, 당신이 생각한 틀 밖의 세상은 조금씩 변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이 글에서 『타인의 고통』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 아니다. 책에는 본 글에서 말한 이야기 말고도 더 많은 이야기(가령, 전쟁에서의 사진이 어떻게 쓰이는지, 대중에게 공개되는 사진의 적정 수준에 대한 논의, 사진 속에서 이름이 아닌 대표 이미지로 사용된 사례 등등)가 나와 있다. 책에 쓰여진 많은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그저 아쉽기만 하다. 이 글이 『타인의 고통』을 읽게 되는 하나의 짐검다리가 되길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