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기 전 주의사항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제임스 설터 단편집 어젯밤(마음산책, 2010) 속의 단편 포기」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욕망과 이성





   제임스 설터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본다. 그리고 그것을 간략하지만 적확하게 포착해내는 작가이다. 작가의 통찰은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는다. 지금 살펴볼 단편 「포기」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포기」는 주인공의 아내가 서른한 번째 맞는 생일에 일어난 이야기이다. 원래는 서른 번째 생일이었을 테지만, 미국의 나이 체계와 한국의 나이 체계가 달라 번역자가 한 살을 더해 번역한 듯하다(원서를 확인해 본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이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나이를 환산하는 것보다는, 서른 번째 생일로 번역하는 것이 아내가 철없는 20대를 갓 지났다는 것을 더 잘 표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글에는 ‘아내는 막 서른한 살이 되었다. 철없는 짓을 할 땐 지났지만 아직 감정이 무뎌지진 않은, 여자의 나이였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주인공의 집에는 주인공 잭, 아내인 안나, 아들인 빌리, 그리고 잭의 친구인 데스가 함께 산다. 주인공이 아내와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은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데스에 대하여는 조금의 설명이 더 보충되어야겠다. 데스는 시인이다. 잭은 데스를 만나기 전 그의 시를 읽은 적이 있었다. 잭을 그전의 자신으로부터,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주는 시였다. 잭은 우연히 파티장에서 데스를 만났고, 둘은 대화를 통해 수많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금세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자유분방하게 떠돌아다니던 데스는 그렇게 잭과 함께 살게 되었다.



   다시 아내의 생일날로 돌아오자.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포기’가 나오는 대목이다. 생일 축하가 끝난 뒤 아내는 그를 따로 불러 ‘포기’를 요구한다. ‘포기’란 잭과 안나의 부부생활을 영위해주는 일종의 법칙이었다. 그들은 일 년에 한 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에 대한 ‘포기’를 상대방에게 요구할 수 있었다. 주로 지나치게 사용하는 문구나 식습관, 혹은 제일 좋아하는 옷이 ‘포기’의 대상에 속했다. 그들은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 말하자면 어떤 경험이나 책이나 어떤 인물이 그들을 완전히 바꾸어놨다고들 하지만, 그들이 그전에 어땠는지 알고 있다면 사실 별로 바뀐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상대방이 매력적이긴 해도 완벽하지는 않을 때, 사람들은 결혼한 다음에 전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론 잘해야 한 가지 정도를 바꿀 수 있을 뿐이고, 그것마저도 결국은 예전처럼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99)



   그들은 상대방에게 ‘변화’가 아닌 ‘포기’를 요구한다. 남편을 따로 불러낸 안나는 놀랍게도 잭에게 데스와의 섹스를 ‘포기’하라고 부탁한다. 아내는 남편과 남편의 친구가 사랑을 나누는 사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잭은 화들짝 놀란다. 그러고는 곧바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며 제발 믿어달라고 한다.(물론, 이는 거짓말이다.) 아내는 그의 말을 믿겠노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데스가 집을 나가야만 한다고 끝에 덧붙인다. 결국 그 날 오후 데스는 자신의 가방을 들고 집을 떠난다. 잭은 아내의 처사가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포기」는 여섯 장으로 이루어진 굉장히 짧은 이야기다. 꽤나 얇은 분량이지만 이야기의 깊이까지 얇지는 않다. 나는 ‘욕망’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통해 이야기를 다시 살펴볼 생각이다. 이 키워드를 적용할 대상은 데스와 안나이다.



   소설 속에서 데스는 욕망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는 그에 대한 묘사들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데스는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모습으로, 거리 한복판을 나체로 돌아다닐 만큼 자유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욕망의 모습이 이러하다. 욕망은 거짓 없는 순수 그 자체인 것이며, 그러므로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욕망의 모습은 아이의 모습을 닮아있기도 하다. 아이는 욕망을 통제하기 이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욕망인 데스와 어린아이 빌리는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데스로 인해 잭은 변화한다. 욕망으로 인해 주체는 변화한다고 쓸 수도 있겠다. 잭은 데스의 시를 읽는다. 데스의 시는 잭을 시를 읽기 전의 자신으로부터,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시가 품고 있는 ‘성적 욕망’때문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 후에 우연히 잭은 파티장에서 데스를 만나게 되고, 그 둘은 한 집에서 살면서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된다. 데스의 시로 잭은 내재된 욕망을 인식하게 되고, 데스를 통해 그 욕망을 실현하게 된다.



   이 즈음에서 안나가 등장해야 한다. 데스가 욕망이라면 안나는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은 욕망을 통제한다. 통제의 방법은 욕망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쫓아내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억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억압’이란 ‘불쾌한 경험이나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욕구, 반사회적인 충동 등을 무의식 속으로 몰아넣거나 생각하지 않도록 억누르는 방법’이다. 프로이트의 말을 따르자면 데스는 집을 떠났지만, 잭은 데스를 완전히 떠나보내진 못하였을 것이다. 데스는 잭의 무의식 속에 있다. 이는 그가 데스의 사진을 아직도 갖고 있는 모습으로 소설 속에 나타나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욕망의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내재된 욕망이 인식되었다가 다시 축출되는 이야기. 욕망을 이야기의 소재로 선정했을 때, 욕망에 휩싸인 주체가 점차 파멸의 길로 치닫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고(떠오르는 예로 『은교』를 들 수 있겠다), 제임스 설터처럼 주체의 욕망이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모습을 그릴 수도 있다. 같은 소재를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같은 소설을 읽어도 가지각색의 감상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 소설이 단지 여섯 장, 열두 페이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이제 다 읽은 책을 베개 삼아 눕고 당신의 감상을 나누고 싶다. 이것도 하나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