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롱바오의 영화 후루룩2 <바람이 분다>: 꿈으로 살아가기


바람이 분다 (2013)

The Wind Rises 
5.1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출연
안노 히데아키, 타키모토 미오리, 니시지마 히데토시, 니시무라 마사히코, 스티븐 알버트
정보
애니메이션, 드라마 | 일본 | 127 분 | 2013-09-05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이 분다>를 보고 왔습니다. 올해로 72세를 맞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얼마 전, <바람이 분다>를 자신의 은퇴작으로 선언했는데요, 그래서인지 <바람이 분다>에 대한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주말 좌석은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관객이 그의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이웃집 토토로>(1988),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으로 친숙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귀환, 아름답고 환상적인 영상과 음악으로 상징되는 지브리 스타일<바람이 분다>에서도 역시 잘 재현되고 있습니다.

 

 

 

꿈의 양면성

 

은 영화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첫 장면부터가 주인공 지로의 꿈이지요. 잠에서 깬 지로는 지붕으로 올라가 경비행기를 타고 마을의 상공을 한 바퀴 돕니다. 지로의 비행기가 지나는 곳마다 구름이 걷히고 햇볕이 비추는 것에서, 지로의 꿈이 가지는 희망-혼자만의 열망에 한정되지 않고 국민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희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괴비행체들의 공격에 의해 추락하고 마는 비행기는 미래의 전쟁과 결부된 자신, 그리고 자신의 비행기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 이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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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꿈속에서, 지로는 자신의 롤모델인 카프로니 백작과 자주 조우합니다. 이탈리아에서 경비행기를 설계하는 선도자인 카프로니 백작은 일본의 소년지로에게 미래의 비행기를 보여주면서 그의 꿈을 자극하고 희망을 키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비행기는 지로 인생의 꿈이자, 자는 동안 꿈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소재인 것이지요. 자는 동안 꾸는 꿈과 멋진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포부로서 꿈이 겹쳐지면서 꿈의 세계에 대한 갈망과 동경은 한껏 강조됩니다.

 

보통 꿈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니체의 말마따나 꿈이 있기에 살아갈만한 세상이 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바람이 분다>는 꿈의 세계를 마냥 찬양하지만은 않습니다.

 

“(비행기는) 아름답지만 저주받은 꿈이야.” -카프로니 백작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은 아주 오래되었고 어떤 측면에서는 신성하게까지 여겨집니다. 땅의 공간에서 하늘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오랜 꿈. 하지만 카프로니 백작은 지로에게 그 꿈이 아름답지만 저주받은 꿈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모습은 아름답고 벅찬 광경이지만, 상승하는 비행기는 결국 추락할 운명을 지녔으며 심지어 전시 상황에서는 인간의 행복이 아닌 절망의 폭탄을 싣는 역할을 하도록 명령받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꿈이라는 건 양면성을 가집니다. 꿈은 황홀하고 무한하지만, 꿈이 끝나는 순간 밀려오는 허무함과 더욱 강하게 대비되는 현실의 고통. 지로 역시 자신의 삶을 가득 채운 꿈의 양면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꿈을 좇는 길을 택할 뿐인 것이지요.

 


지로의 꿈은 비행기로 구현되지만, 결국은 하늘에 대한 동경입니다. 영화에서 하늘은 대부분 정말 아름답습니다. 바람이 부는 하늘, 비행기가 가르는 하늘, 심지어는 폭탄이 터지는 하늘마저도. 저 아름다운 하늘에 닿겠다는 인간의 열망! 하지만 비행기의 운명이 예고하듯, 결국 하늘이라는 공간도 죽어서야 진정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절망의 공간으로 설명됩니다. “하늘은 모든 걸 삼켜버리니까, 병으로 죽은 나호코만이 비로소 하늘에 갈 수 있었으니 말이에요.

 

이제 지로의 꿈은 황홀하지도 뿌듯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꿈은 꿈이기에 아름답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스쳐옵니다. 그리고, 적어도 지로에게는 그 꿈이라는 환상이 삶을 살아가는 주요한 동력이 되었죠.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영화의 제목이자 여러 번 등장하는 이 한 마디는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1871-1945)의 시 해변의 묘지의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진우 시인이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발레리의 시를 한 마디로 정리할만한 깊이가 허락되지는 않지만, 보통 짐작하듯 바람을 현실의 시련으로 본다면, 힘든 현실을 극복하고 삶의 의지를 다지는 구절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레리의 시에서 덧없는 꿈이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이 구절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아, <바람이 분다>살아감자체에 대한 찬양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공황과 전시 상황-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는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요. 그래서 지로처럼, 현실의 아편 격으로 꿈을 사고하면서, ‘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비극의 시대인 것입니다.

 


최근 <바람이 분다>와 더불어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찬양이라는 논쟁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카프로니 백작과 지로는 비행기의 발명이 전쟁에 동원되는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을 여러 번 표출하기도 하니까요. 반나치주의자 독일인 카스트로프(토마스 만의 <마의 산>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지요!)를 통해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죠. 따라서 감독이 적어도 전쟁을 옹호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저의 해석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욱승천기가 등장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에서 필수적인 것이라 생각하고요.

 


그럼에도 문제가 되는 지점은, 현재의 관점에서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 전혀 없다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세계대전발발을 주도했던 국가임에도 역사의 가해자가 아닌 오히려 피해자로 그리는 모습들에서 감독의 민족주의적 감성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주인공 지로 역시 자신의 비행기가 살육의 무기로 쓰였다는 죄의식보다는, 자신의 비행기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허망함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보이고요. 하지만 저는 이마저도 당시의 일본의 모습을 최대한 재현하고자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당시 일본, 특히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은 전쟁의 책임과 죄의식보다도, 또한 열렬한 제국주의 찬양보다도, 개인적인 삶의 의미와 탐미적 취향을 형성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당대의 시대상, 심리 상태와 행동 양식에 대한 섬세한 터치에서 거장의 면모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감독의 입장에서 완벽하게 재현한 것에 만족할지라도, 반세기의 시간이 흐른 지금, 역사의 부채에 대해 침묵함으로서 암묵적인 미화에 동의한다는 혐의를 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특정한 역사적 배경과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삼은 이상 판타지라는 장르의 방패가 무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나저나, 지로는 그 때(!) 도대체 왜 담배를 폈을까요? 역시 그에겐 꿈이 먼저인가요.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환상적 로맨스가 무너지는 순간, 극장의 모든 관객이 폭소(실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인 지로의 캐릭터가 꽤나 흥미로운 요소였습니다만, 과연 이 장면은 일관적 지로의 연장선인가 일탈선인가… 아직도 고민이에요. <바람이 분다>, 어떻게 보셨나요? 후루룩!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