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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9.25 샤오롱바오의 영화 후루룩3 <관상>: 운명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 2013.09.23 시네마 폴리티카②: 올리버 스톤, <닉슨> (Nixon 1995)
- 2013.09.21 [Op.8]박스석 이야기 No.2, 'To See, or To Be Seen' 4
- 2013.09.20 [팝콘먹는좀비] 01. 이야기를 하는 이유, <로맨스 조>
- 2013.09.19 [룽의EX] 헤어짐
글
샤오롱바오의 영화 후루룩3 <관상>: 운명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영화 내용이 들어있는 글이라 영화 아직 안 보신 분들에게는 추천하지 않는 글입니다.
수양대군 “그나저나 저 자는 제 아들이 단명할 걸 알았으려나? 난 몰랐다만.”
개봉 전부터 송강호(내경 역), 이정재(수양대군 역), 백윤식(김종서 역), 김혜수(연홍 역), 조정석(팽헌 역), 이종석(진형 역)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영화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관상>이 무서운 속도로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연령, 성별 등에 크게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재밌게 볼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적 영화로 보고 친구들과 가볍게 관람하고 나왔는데요, 바로 저 질문 - 내경은 아들의 단명을 알고 있었는가 –가 계속 궁금하더군요. 샤오롱바오의 영화 후루룩3 <관상>은 이 궁금증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관상-운명-미래
주인공 김내경은 관상쟁이입니다. 먹고 살려고 배웠다는 것이 기가 막힌 재능으로 피어나 살인사건의 범인까지 잡아내기에 이르고, 그는 대단한 관상가로 한양 전체에 이름을 떨치게 되죠. 처남 팽헌과 환상(^^?)의 콤비를 이루며 승승장구하는 내경, 그러나 그의 재능이 왕위 계승과 역모라는 정치적 문제에 엮이기 시작하면서 마냥 유쾌하던 영화는 서서히 비극으로 접어듭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계유정난(1543년)은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김종서를 비롯한 실세 인물들을 모두 살해한 사건으로 이미 여러 번 드라마와 영화로 그려진 바 있는 비교적 유명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양대군, 김종서, 한명회 등의 이름이 친숙할 정도인데요. 사람들에게 친숙한 사건이라는 말은 곧, 관객이 영화의 결말-미래를 예상할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실제 인물인 수양대군이 역모에 성공한다는 역사적 사실에 무리하게 손을 대는 판타지 영화가 아닌 이상에야 결국 수양대군이 승리하고 김종서가 질 것이라는 것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 왜 주인공 내경은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예정된 비극에 스스로 뛰어드는 걸까요? 심지어 김종서의 관상은 수양대군의 관상을 만났을 때 백전백패할 운명임을 알고 있는 뛰어난 관상가가 말입니다. 이 질문들의 해답이 되어줄 중요한 열쇠는 바로 그의 아들 진형의 한 마디에 있습니다.
운명에 뛰어들기
진형은 아버지 내경이 관상 보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선비’의 위신과 자존심을 내세우지만, 운명을 해석한다는 관상의 특징을 생각할 때 진형은 운명 따위를 믿지 않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죠. 운명이 있다 해도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할 곧은 성격의 소유자이고요.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었냐는 면접관의 물음에 대한 진형의 답은 진형의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앞선 질문들을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고리입니다.
진형 “운명에 체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내경은 한명회에게 수양대군이 왕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영화에 묘사된 신기에 가까운 내경의 능력과 그의 언행들로 미루어 볼 때 이 말이 허언은 아닌듯합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내경의 말이 틀린 것은 하나도 없죠. 그렇다면 아들 진형이 일찍 죽을 운명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경은 진형을 두고 관직에 오르면 단명할 상이니 꿈도 꾸지 말라고 여러 번 말하지만, 글쎄요 제 추측이긴 하지만, 진형이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해도 단명할 운명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그래서 위험과는 거리가 먼 시골의 빈 한 삶을 고집했던 것 아닐까 하고요. 그래서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이 관직에 오르면 무조건(!) 단명할 것이 자명한데도 진형의 과거 공부를 인정하는 장면은 하나의 분기점이 될 수 있겠습니다. 어차피 길지도 않은 삶,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순간인 것이죠.
운명에 대해 체념과 불인이라는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던 부자는 인정과 저항의 형태로 가까워지는 양상을 보입니다. 진형이 자신의 행위로 운명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면 내경은 운명에 순응하고 그에 맞춰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진형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운명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항상 그 운명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적 분란 속에서 시력을 잃고 마침내 목숨을 잃는 순간, 아니 그보다 한참 전부터 애써 밀쳐냈지만 항상 생각해왔던 운명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진형은 운명이 어떻든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이런 식이랄까요. 한편 아버지 내경의 경우는 좀 더 극적입니다. 순응과 체념에서 저항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보이죠. 운명을 내다볼 수 있는 자의 패기일 수도 있고, 자식을 잃고 싶지 않은 자의 절박함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부자는 운명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한 가운데로 뛰어드네요.
후회 없는 삶의 조건
알면서도 저항하는 것. 이것이 영화 <관상>의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예정된 대로 처참하게 패배할지라도 꿈틀대보는 것. 운명과 미래를 점치는 관상쟁이지만 충실하게 현재에 임함으로써 미래를 변화시킬 궁리를 하는 것.
물론 이는 다소 허무하고 힘이 빠지는 얘기이긴 합니다. 아무리 고군분투해도 결국은 지고, 운명은 야속하게도 정확히 맞아떨어지니까요. 그럼 이 영화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으니 그냥 조용히 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슬프고 안타까운 개인의 저항을 치하한다면 모를까요. 결국에는 단명하고야 마는 진형을 보면서 ‘그러니까 왜 아버지 말 안 듣고 과거 시험을 보고 그래 이렇게 죽을 거ㅠㅠ’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성급합니다. 진형의 입장에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켰으므로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내경이 짧은 생의 진형에게 남겨주고 싶었던 삶의 기억도 이런 것이지 않았을까요? 정해진 운명이 어떻다한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으로 하고 운명에 맞설 때, 후회가 남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어차피 언젠가 모두 죽는 인생인데!
역사와 픽션을 섞고, 곳곳에 현실에의 유비를 심어놓은 이 영화가 던지는 물음은 결국 이렇습니다. 개인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적 현실 속에서 개인의 선택은? 여기서의 운명은 꼭 관상 같은 것만은 아니겠죠. 재밌는 영화 <관상>, 곱씹어보니 예견된 미래에 좌우되지 않는 현재적 삶에 대한 생각도 안겨주는 영화였네요. 후루룩!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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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를 몇 주 앞둔 어느 날, 집권여당 관계자 몇명이 모여 재집권을 위한 비밀 공작을 꾸민다. 공작의 내용은 명백히 위헌적인 행위들이었지만, 정권을 빼앗기면 좌익세력에 의해 나라가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인지 누구도 반대하지 못한다. 여당은 결국 집권에 성공하고 대통령은 대내외정책에서 성공가도를 달리지만, 집권 전에 꾸민 공작들이 야당과 언론에 의해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한다.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줄 알았던 일들이 꼬리를 물며 더 큰 사건으로 이어지고, 결국 의혹은 대통령을 겨냥하기에 이른다. 반대세력은 대통령이 모든 음모의 핵심이라며 책임질 것을 요구하지만, 대통령은 묵묵부답 의혹과의 연관성을 절대 부인한다. 의혹을 인정하는 것은 곧 정권의 정당성 상실로 이어지기에 대통령은 무리수를 두며 검찰수사를 방해하기 시작하고, 결국 정국은 거대한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데...
갑자기 왠 국정원 이야기냐고요? 아니에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게 들리긴 하지만, 사실은 그저 한 영화의 시놉시스일 뿐입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영화도 아닙니다. 1970년대 미국의 닉슨 행정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영화, 바로 올리버 스톤 감독의 1995년작 <닉슨Nixon>입니다.
당시의 사건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사람이라도 '워터게이트'라는 이름 정도는 들어봤으리라 생각됩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정권의 부정에 대한 의혹이 터질 때마다 '~~게이트'라는 식으로 패러디하곤 했으니까요. 사건의 전말은 간단합니다. 대선을 몇 주 앞둔 어느 날, 미국 민주당 당사에 좀도둑이 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도둑들이 좀 수상한 게, 알고보니 물건을 훔치러 들어온 게 아니라 도청장치를 설치하려고 했던 거에요. 붙잡힌 자들이 대부분 별볼일 없었기 때문에 사건은 그냥 묻히는 듯 했지만, 워싱턴포스트의 두 기자가 집요하게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전말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사소해보인 사건들은 CIA, 공화당 주요 당직자, 심지어 대통령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음모로 연결되고, 정국은 대 혼란에 빠져듭니다.
영화는 전 미국인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던 사건이 일단락 된지 20년이 갓 지난 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사건의 경과를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전제하고 진행되죠. 아쉽게도 2013년의 한국인 관객들은 많은 것을 놓칠 수밖에 없어요. 조연으로 등장하는 많은 실존인물들에 대한 풍자, 예컨대 헨리 키신저의 얄미운 언행이나 후버의 동성애적 성향 등은 미국정치에 익숙한 소수의 관객들에게만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나 배경을 전혀 몰라도 영화가 추구하는 근본적 재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영화가 사건의 디테일을 추구하는 대신 한 개인의 인간적인 고뇌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닉슨 대통령이지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영화인 이상 어쩌면 당연한 선택인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만든 올리버 스톤 감독은 헐리웃의 대표적인 리버럴입니다. 민주당에 친화적인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거리낌 없이 표출해 왔던 사람으로 유명하지요. 필모그래피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닉슨> 이전에는 상당히 '선동적'이라고 평가받을만한 영화들도 만들어 왔습니다. 민주당 영화감독이 공화당 대통령의 정치스캔들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 말하자면 이창동 감독이 박근혜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국정원 사건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셈이지요. 매우 비판적이거나, 적어도 논쟁적일 것이라고 예상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영화는 편파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정치적이지도 않습니다. 말하자면, 영화는 그 자체로 어떤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요.) 생각해보세요. 이미 관객은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닉슨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의 행정부가 어떻게 실패했는지, 그가 어떤 거짓말을 했으며 그의 임기 말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싫어하는 대통령이기도 하지요. 새롭게 파헤쳐서 부관참시할 꺼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재미도 없겠지요. 촛불정국에서의 MB를 열정적으로 비난한다 한들 새로운 재미가 있을리 없지요.
대신 올리버 스톤은 철저히 닉슨의 인간적 고뇌에 초점을 맞춥니다. 오히려 어떤 대목에서는 적극적으로 닉슨을 변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선택이 옥죄가 되어 스스로를 조여오는 상황에서 닉슨이 어떻게 상황을 악화시켜 가는지, 얼마나 비극적으로 파멸해 가는지를 철저히 닉슨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는 겁니다. 지난날 자신의 선택이 훗날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부메랑이 된다. 갈등하고 고뇌하지만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운명에 영웅적으로 승복(패배가 아닐지니!)하는 수밖에 없다. 네, 그렇습니다. 아주 전형적인 아리스토텔레스식 비극론이지요.
결과적으로 닉슨은 비극에 처한 거대한 영웅처럼 그려집니다. <시민 케인>의 오마주처럼 보이기도 하는 올리버 스톤의 과장된 편집과 닉슨역을 맡은 앤소니 홉킨스의 드라마틱한 연기가 결합하면서 거의 햄릿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올리버 스톤이 닉슨의 흠결을 덮어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곳곳에 노골적인 풍자와 비판이 담겨있지요. 그런데도 닉슨은 작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은 흠결들은 닉슨을 더욱 거대해 보이도록 만들지요. 민주당 성향의 올리버 스톤이 과장된 편집을 밀어붙인 결과 닉슨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종의 아이러니입니다.
닉슨이 거대해질수록 주변 인물은 작아집니다. 하나같이 인상적인 조연들뿐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부분 시정잡배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내와 참모들을 비롯해 닉슨의 주위를 둘러싼 누구도 그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워싱턴포스트의 기자들이나 시민운동가들도, 심지어 그 잘난 케네디 가문도 장애물이나 운명의 장난 같은 일종의 무대장치로 전락합니다. 닉슨을 고뇌케 하기만 한다면 다른 무엇이어도 상관없었겠지요. 영화가 핵심적인 정치적 사건과 인물을 다루기는 하지만, 사실 정치적인 것은 외피에 불과하고 그 핵심은 닉슨의 내면적 고뇌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고뇌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닉슨의 고뇌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여기서 올리버 스톤은 닉슨에 대한 정신분석에 나섭니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 유년시절 뭐 그런 뻔한 것들 말입니다. 닉슨은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고,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병약했던, 병으로 젊은 날에 죽어버린)을 더 사랑하고, 아버지는 엄격하기 그지없어요. 닉슨을 성공으로 이끈 것도, 그가 정치에 나선 것도, 케네디가를 향한 엄청난 질투심도, 탈법행위를 서슴지 않으며 집권에 나선 것도 사실은 사랑받고자 했던 그의 유아기적 갈망의 연장이었을 뿐이지요. 자유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의 대통령이란 지위도 닉슨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그가 원하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일 뿐이니까요. 영화가 다시 정치성을 회복하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닉슨이 갈구하는 사랑은 대중적 지지로 치환됩니다. 언제나 대중에게 인기받기를 원했지만 그럴 수 없었죠. 사람들은 ‘케네디를 보면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고, 닉슨을 보면 현재의 자신을 떠올리게’ 되니까요. 케네디는 손쉽게 얻었지만 닉슨이 결코 차지할 수 없었던 대중의 인기야말로 이 모든 비극의 처음이자 끝이 됩니다. 닉슨이 공작정치에 나서는 것도, 자신의 공적을 알아주지 않는 언론을 증오하는 것도, 심지어 자신의 측근들을 잘라내며 파멸로 뛰어드는 것도 모두 대중의 지지를 얻고 싶었던 닉슨의 서글픈 초상입니다. 세계의 권력을 모두 얻었지만 대중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실패한 한 정치인의 파멸은 부모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점점 더 위험한 일을 서슴지 않는 비뚤어진 어린아이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비극입니다. 평생 얻고자 했지만 얻을 수 없었던 어떤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에 와서야 이야기는 끝을 맺지요.
결과적으로 올리버 스톤은 먼 길을 돌아서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게 되는 셈입니다. 정신분석과 비극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결국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대중의 지지라는 답변 말입니다. 대중의 인기에 울고 웃는 대의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인들의 삶. "워싱턴은 못생긴 자들을 위한 헐리우드(Washington is Hollywood for the ugly people)"라는 격언을 떠올리게 하는 결론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대통령은 어떤 고뇌에 빠져있을까요.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을 그의 유년시절은 그에게 어떤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안겨주었을까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길 바랍니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회고적 자기연민에 빠진 비극적 영웅이 아니라 미래를 제시할 지도자라고 생각하니까요. 올리버 스톤이 그린 닉슨을 우리 대통령에 대입시켜 보는 것, 정치의 위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영화 독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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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근히 살아서 김근근인 역사/정치학도.
작품을 감상할 때면 주제보다도 시대와 맥락에 과도한 흥미를 느끼는 변태.
치킨과 두부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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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박스석의 이상한 시선들. 그것은 르누아르와 카삿의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삐아오의 들리지 않는 음악」, [Op.7] 오페라 이야기 No.1 ‘이상한 시선들’ 참고) 187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 <안나 카레니나>(조 라이트 감독)에는 오페라 무대를 배경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필요로 하는 배경은 오페라라는 작품 자체보다 등장인물들이 오페라 극장, 특히 박스석에 앉아있다는 전제였던 것 같다. 그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이나 오페라의 내용이 묘사되는 대신, 박스석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사건이 목격되며, 소문이 퍼져나가는 진원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림과 영화가 박스석에 대해 보여주는 바를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이미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다. 오페라 박스석의 목적이 공연의 온전한 감상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 아니였다. 그 곳은 ‘과시’의 공간이었다. 자신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을 보기 위한 장소, 즉 ‘To See, or To Be Seen’이 공간의 진짜 목적이자 기능이었다. 결국 박스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무대는 또 다른 박스석이었던 것이다.
박스석의 첫 번째이자 주된 목적은 바로 연인 탐색이었다. 이 때 다른 사람을 ‘보는’ 주체는 남성이고, ‘보여지는’ 주체는 여성이었다. 즉 귀족의 딸이 하는 모든 행동은 다른 신사나 라이벌관계에 있는 다른 여성, 신붓감을 찾는 아버지들의 관심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앞에서 제시된 그림들을 해석할 수 있다. 르누아르 그림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다양한 장신구를 하고는 정숙한 자태로 앉아있는 여성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의식하며 앉아 있다. 그 뒤에 보이는 남성은 다른 곳을 당당하게 두리번거리며 ‘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카삿의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성은 역시 화려한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어딘가를 보고 있다. 하지만 그 시선이 무대와 아예 어긋나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 뒤로 보이는 남성은 아주 노골적으로 무대를 등지고 목을 쭉 빼서 여성을 보고 있다.
여성들이 보여지는 장소로서 박스석은 한편으로는 귀족들의 관음증적인 기질은 충족시켜주는 부차적인 박스성의 기능과 연관되기도 한다. 측면 높게 달려있는 박스석의 위치적인 특성 상 무대 뒤에서 출연을 대기하며 준비하는 무용수들을 훔쳐보기에도 적격이었던 것이다. 박스석의 귀족들은 공연 중간중간에 옷을 갈아입거나 동작을 연습하는 무용수들을 훔쳐보는 것도 하나의 소일거리로 삼았다. 여성은 비록 박스석에 있는, 보여지기를 원하는 여성이 아니지만 박스석에 있는 남성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즉, 박스석에 있는 남성의 시선은 박스석과 무대, 또 다른 객석 모두를 ‘To See’하는 것이었다.
여성이 비록 주로 ‘보여지는’ 주체였지만 여성도 다른 사람을 어느정도 거리낌없이 볼 수 있다는 것에도 큰 의미가 있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파리에서 여성이 모르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생각되었다. 정숙한 여성이라면 남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극장이나 백화점과 같이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에서 소비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이 점점 커졌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의 옷차림이나 행동을 오페라 글래스를 통해서 거리낌없이 훔쳐볼 수 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페라 박스석에서의 이상한 시선은 남성의 시선으로의 여성의 종속과, 여성의 시선의 주체성이라는 두 가지 함의를 모두 담고 있다.
이렇게 과시를 목적으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박스석은 최신 유행의 의상과 헤어스타일의 전시장이 되었다. 이것은 이내 박스석의 두 번째 목적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여성들은 일상적인 복장으로 오페라 극장에 가는 일은 없었다. 노출이 심한 드레스는 물론이었고 드레스를 한층 더 화려하게 장식하는 브롯지와 귀걸이, 목걸이, 커다란 모자, 하얀 장갑과 그 손에 들 부채, 오페라 글래스와 같은 소품에 이르기까지 외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에 신경을 써야 했다. 메리 카삿의 또 다른 그림 <Woman with a Pearl Necklace in a Loge>는 당시 박스석에 있던 여성의 화려한 모습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박스석은 연인탐색전과 최신 유행의 선도장의 기능 이외에 밀담이 오가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기능은 공연을 할 때 지금의 극장 분위기와 달리 어느정도의 소음과 잡음이 허용되었기에 가능한 기능이었다.(「삐아오의 들리지 않는 음악」, [Op.4] ‘집중적 청취에 대한 낯선 질문’ 참고) 약간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주변이 트여있는 일반 객석과 달리, 칸이 나누어져있어서 사적인 공간이 보장되는 박스석에서 잡담을 나누는 것은 일종의 특혜였다. 잡담의 주제는 보통 전쟁이나 종교에 대한 밀담이나 궁정에서 이루어지도 있는 사건 등 정치적인 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이는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공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오페라 극장의 박스석은 그 사회의 상류 특권층으로 행세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박스석을 사용하는 주체는 귀족이나 상류층이었고, 그들은 우리가 매 공연마다 티켓을 사서 입장하듯이 박스석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가문 대대로 박스석을 소유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요즘의 리조트 회원권과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할 액수의 돈으로 박스석을 소유해두고 공연이 있을 때 마다 그 곳에서 관람을 한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지 않는 휴가철에는 소유권을 넘기고 떠나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박스석에 대한 소유가 상류층에 대한 조건으로 보는 관습이 점점 왜곡되면서 소유를 많이 하는 것에 가문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는 의미를 부여하기 이르렀다. 그 결과 한 가문이 100석 이상의 박스석을 독점하기도 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대표적으로 19세기 미국의 유명 가문이었던 밴더빌트 가문이 오페라 하우스 건축비를 내는 대가로 박스석 122개를 확보한 사례가 귀족들간의 과열된 경쟁의식을 잘 보여준다.
박스석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무대였으며 그곳에 앉아있는 여성은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또 다른 프리마돈나가 되었다. 그 곳에 앉은 모든 사람들은 최신 유행을 몸에 걸친 모델이 되기도 했으며 밀담을 나누는 사람들은 정치적 주체가 되기도 했다. 또는 박스석은 그 곳에 앉은 사람이 상류층이라는 것을 보장해주는 하나의 표식이 되기도 했다. 즉 박스석은 ‘돈 많은 사람들이 오페라를 잘 보기 위해 앉는 공간’ 이상으로 훨씬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박스석은 남들의 시선을 받는, 그리고 받기 위한 공적인 장소이자, 그 속에서 밀담이 오가는 사적인 장소였다. 결국 박스석은 공연 관람이 목적이 아니라 귀족들의 과시와 허세로 가득 차 있어서 역설적이게도 텅 비어있는 ‘상자(Box)’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림 1. 영화 <안나 카레니나>의 한 장면. (출처 : 구글 이미지)
* 그림 2. 영화 <안나 카레니나>의 한 장면. (출처 : 구글 이미지)
* 그림 3. Mary Cassatt, <Woman with a Pearl Necklace in a Loge>, 1879.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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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먹는 좀비]
01. 이야기를 하는 이유, <로맨스 조>
"당분간 그럼 신세 좀 질게. 고맙다."
"오-. 한국소설계를 이끌어가는 대문호 룽님에게 고맙다는 소릴 듣다니. 감개가 무량하옵니다아-."
저 돼지기름을 듬뿍 바른 듯한 말투. 승훈이 놈은 마음놓고 나를 비꼬고 있다. 승훈은 항상 붙어 다니던 대학동기다. 우리는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갔다. 나는 글을 썼고, 승훈인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등단 이후 평단의 극찬과 독자들의 넘치는 사랑으로 단숨에 스타작가가 되었다. 여전히 독립영화를 만드는 승훈이는 그런 날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내심 대박난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하면서도 자존심인지 자격지심인지 메이저 시스템을 경멸했으니까. 승훈이는 항상 말했다.
"야. 사람들은 네가 똥구멍으로 글을 써도 좋다고 받아먹을 거야. 유명세라는 건 그런 거니까. 그치?"
아, 얘랑 같이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지난 2년간 한 글자도 못 쓰고 있는데다 돈도 없어져 갈 곳 없어진 신세.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마음껏 비웃어라.
"룽. 네가 이러고 빌빌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아마 역작을 내려나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치?"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승훈이 말한다. '그치?'라고 되묻는 저 말버릇 정말 별로다.
"그만 좀 해. 새끼야.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한강 보이는 오피스텔에 살면서 배고픈 예술가인 척 하는 너 같은 게으른 한량보단 나으니까."
"아, 그러는 넌 존나게 성실하게 노력해서 2년 동안 한 글자도 못 썼구나. 역시 대문호답다. 혼을 실은 한 글자! 크아, 멋져멋져."
"씨팔, 그래 말자. 말아. 그만하고 술이나 한 잔 하자."
"오오케이. 알겠습니다아-."
승훈이 과장되게 엉덩이를 씰룩이며 맥주를 내온다. 거실 창문 너머로 해 지는 한강이 보인다.
"야. 근데 여기 거의 DVD방 수준인데? 만 장은 되는 거 아니야?"
거실 벽엔 빙 둘러 DVD가 빽빽하게 꽂혀있다. 진열장에 레일까지 깔아놓아서 정말 DVD방 같았다. 나도 이런 서재를 가질 수 있을까. 내심 부러웠다.
"후후후. 형님의 콜렉션이지. 만 장은 안 되고 한 삼 천장쯤 될 거야. 우리 애기들."
"미친놈. 그럼 영화나 하나 보자. 안주로."
"오오케이. 뭘 볼까아-. 뭘 봐야 소설가님이 흡족하실까아-."
띵-동-. 그때 벨이 울렸다. 승훈이가 주인을 맡는 강아지처럼 쫄랑쫄랑 달려가 문을 열었다. 처음 보는 앳된 여자였다.
"인사해. 말했었지? 내 여자친구 혜선이."
이 새끼가 또 말도 없이…. 승훈은 항상 여자를 꼬시는데 나를 팔곤 했다. 자신의 능력과 인맥을 과시하려는 허세스러운 방법이다. 나는 승훈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 안녕하세요. 룽입니다."
"네, 하하. 저 룽씨 정-말- 팬인데. 꼭 뵙고 싶었어요. 정말이요."
하얀색 쫙 달라붙는 바지에 경쾌한 색의 스트라이프 티셔츠 그리고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까지. 전체적으로 평범한 인상이었지만 환하고 싱그러운 느낌의 여자였다. 잠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 발랄한 처자였다. 그녀는 대학교 4학년이었고, 알고 보니 같은 과 후배였다. 승훈이 새끼 능력도 좋다. 11살 연하 후배를 만나다니.
"우리 영화 보려던 참이었어. 혜선아. 오늘의 영화는! <로맨스 조>!"
"아, 그 감독 홍상수 감독님 옆에서 조감독 하셨던 분 맞죠? 완전 보고 싶었는데."
"오오케이. 그럼 플레이합니다요."
우리는 혜선을 가운데 끼고 영화를 보았다. 신선하고 깨끗한 느낌의 영화였다. 로맨스 조라는 인물의 실제와 그에 대한 상상과 회상과 허구가 마구 뒤섞인 이야기. 하지만 그것이 이상하게도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다가오는 영화였다. 마치 학창시절 각자 싸온 도시락 반찬을 한 데 놓고 비벼먹던 비빔밥처럼 여기저기서 가져온 이야기가 맛있게 비벼졌다.
"영화 어땠어요?"
맥주를 입에 털어 넣고 혜선에게 물었다.
"재밌었어요. 확실히 홍상수 영화 느낌이 있는데요? 영화 속 300만 영화감독이라는 사람은 꼭 승훈오빠 같아서 웃겼어요. 물론 오빤 300명 영화감독이지만요. 하하하."
그녀가 그 나이답게 천진하게 웃는다. 참 상쾌하다.
"요것이 말하는 것 보게-. 아무튼 공감 가는 부분은 있었어. 이야기를 찾는 영화감독이 좀 짠하더라. 나도 이야기 헌팅 좀 해볼까. 어때 대문호님은?"
"글쎄. 아무래도 너나 나나 이야기 쓰는 사람이니까. 더 공감하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로맨스 조가 술 취해서 '왜 우리는 이야기를 해야만 합니까? 이야기가 없는 나는 왜 죽어야 합니까?'라고 말하는데 그게 서늘하게 와 닿더라. 소설 못 쓰고 있는 소설가인 내 처지 같아서 그런가."
"새끼야 너도 연애를 좀 해봐. 로. 맨. 스. 응? 나처럼."
승훈이 보란 듯이 혜선의 허리를 감는다. 혜선이 나를 보고 빙긋 웃는다.
"저는 예전부터 로맨스 조의 첫사랑인 초희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혜선이 허리에서 승훈의 팔을 벗겨내며 말했다. 나는 물었다.
"왜요?"
"로맨스 조의 평생의 이야기 속 주인공인 여자일거 아니에요. 반복되고 변주되는 신화적인 존재요. 멋지지 않나요?"
승훈이 코웃음을 쳤다.
"그거 안 좋을 수도 있어. 우리 대문호님도 첫사랑 얘기 많이 썼는데 말이지. 그 친구가 자기 얘기 쓰지 말라고 욕을 했어. 그치?"
"응. 그랬지. 소설을 읽으면 자기 추억이 좀비처럼 느껴진다나? 죽지도 살지도 못한 그런?"
술을 꽤 마셨는지 혜선의 얼굴이 붉었다. 혜선이 맥주캔을 입에 갖다 대고 눈을 끔뻑이다가 말을 꺼냈다.
"근데요. 두 분은 왜 이야기를 해요?"
맹랑한 질문이다. 그녀는 답변을 기다리며 입을 삐죽거린다. 인터뷰 할 때면 늘 받는 질문이면서도 항상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니까 이렇다 저렇다라고 확실히 말하기 찝찝하달까. 뭐라고 말해도 확실하지가 않고, 생각할수록 멀어진다. 승훈이 먼저 입을 연다.
"허세지. 뭐. 난 그냥 멋있어 보이려고 하는 거야. 크크. 그게 아님, 토끼를 좇아가는 엘리스처럼 이상한 환상에 속아 넘어가서 이야기의 세계에 빠져 버렸달까? 로맨스 조처럼."
나는 잠시 앓은 소리를 내며 골몰하다가 말을 뱉었다.
"글쎄요. 옛날엔 알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내가 왜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요?"
뭐였더라 소설을 처음 쓰게 된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한 글자도 못 쓰고 있는 걸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을 보았다. 한강이 빛을 반사하며 울렁거렸다.
그때 정적을 뚫고 핸드폰이 울렸다.
띵-동-.
[소방방재청]
긴급재난알림.
현재 서울 북부에서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전염병이 돌고 있음.
위험지역대피, 외출자제 등 안전에 유의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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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의 Ex-MovieFriend가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언제 돌아올지는 약속하기 힘들겠네요.
이제부터는 이야기 있는 글인 [팝콘먹는좀비]가 연재됩니다.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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