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1996)

Nixon 
8.8
감독
올리버 스톤
출연
안소니 홉킨스, 조앤 알렌, 에드 해리스, 파워스 부스, 밥 호스킨스
정보
드라마 | 미국 | 190 분 | 1996-02-17
글쓴이 평점  

 

  대통령선거를 몇 주 앞둔 어느 날, 집권여당 관계자 몇명이 모여 재집권을 위한 비밀 공작을 꾸민다. 공작의 내용은 명백히 위헌적인 행위들이었지만, 정권을 빼앗기면 좌익세력에 의해 나라가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인지 누구도 반대하지 못한다. 여당은 결국 집권에 성공하고 대통령은 대내외정책에서 성공가도를 달리지만, 집권 전에 꾸민 공작들이 야당과 언론에 의해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한다.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줄 알았던 일들이 꼬리를 물며 더 큰 사건으로 이어지고, 결국 의혹은 대통령을 겨냥하기에 이른다. 반대세력은 대통령이 모든 음모의 핵심이라며 책임질 것을 요구하지만, 대통령은 묵묵부답 의혹과의 연관성을 절대 부인한다. 의혹을 인정하는 것은 곧 정권의 정당성 상실로 이어지기에 대통령은 무리수를 두며 검찰수사를 방해하기 시작하고, 결국 정국은 거대한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데...

 

  갑자기 왠 국정원 이야기냐고요? 아니에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게 들리긴 하지만, 사실은 그저 한 영화의 시놉시스일 뿐입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영화도 아닙니다. 1970년대 미국의 닉슨 행정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영화, 바로 올리버 스톤 감독의 1995년작 <닉슨Nixon>입니다.

 

  당시의 사건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사람이라도 '워터게이트'라는 이름 정도는 들어봤으리라 생각됩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정권의 부정에 대한 의혹이 터질 때마다 '~~게이트'라는 식으로 패러디하곤 했으니까요. 사건의 전말은 간단합니다. 대선을 몇 주 앞둔 어느 날, 미국 민주당 당사에 좀도둑이 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도둑들이 좀 수상한 게, 알고보니 물건을 훔치러 들어온 게 아니라 도청장치를 설치하려고 했던 거에요. 붙잡힌 자들이 대부분 별볼일 없었기 때문에 사건은 그냥 묻히는 듯 했지만, 워싱턴포스트의 두 기자가 집요하게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전말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사소해보인 사건들은 CIA, 공화당 주요 당직자, 심지어 대통령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음모로 연결되고, 정국은 대 혼란에 빠져듭니다.

 

  영화는 전 미국인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던 사건이 일단락 된지 20년이 갓 지난 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사건의 경과를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전제하고 진행되죠. 아쉽게도 2013년의 한국인 관객들은 많은 것을 놓칠 수밖에 없어요. 조연으로 등장하는 많은 실존인물들에 대한 풍자, 예컨대 헨리 키신저의 얄미운 언행이나 후버의 동성애적 성향 등은 미국정치에 익숙한 소수의 관객들에게만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나 배경을 전혀 몰라도 영화가 추구하는 근본적 재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영화가 사건의 디테일을 추구하는 대신 한 개인의 인간적인 고뇌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닉슨 대통령이지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영화인 이상 어쩌면 당연한 선택인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만든 올리버 스톤 감독은 헐리웃의 대표적인 리버럴입니다. 민주당에 친화적인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거리낌 없이 표출해 왔던 사람으로 유명하지요. 필모그래피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닉슨> 이전에는 상당히 '선동적'이라고 평가받을만한 영화들도 만들어 왔습니다. 민주당 영화감독이 공화당 대통령의 정치스캔들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 말하자면 이창동 감독이 박근혜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국정원 사건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셈이지요. 매우 비판적이거나, 적어도 논쟁적일 것이라고 예상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영화는 편파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정치적이지도 않습니다. 말하자면, 영화는 그 자체로 어떤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요.) 생각해보세요. 이미 관객은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닉슨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의 행정부가 어떻게 실패했는지, 그가 어떤 거짓말을 했으며 그의 임기 말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싫어하는 대통령이기도 하지요. 새롭게 파헤쳐서 부관참시할 꺼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재미도 없겠지요. 촛불정국에서의 MB를 열정적으로 비난한다 한들 새로운 재미가 있을리 없지요.

 

  대신 올리버 스톤은 철저히 닉슨의 인간적 고뇌에 초점을 맞춥니다. 오히려 어떤 대목에서는 적극적으로 닉슨을 변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선택이 옥죄가 되어 스스로를 조여오는 상황에서 닉슨이 어떻게 상황을 악화시켜 가는지, 얼마나 비극적으로 파멸해 가는지를 철저히 닉슨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는 겁니다. 지난날 자신의 선택이 훗날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부메랑이 된다. 갈등하고 고뇌하지만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운명에 영웅적으로 승복(패배가 아닐지니!)하는 수밖에 없다. , 그렇습니다. 아주 전형적인 아리스토텔레스식 비극론이지요.

 

  결과적으로 닉슨은 비극에 처한 거대한 영웅처럼 그려집니다. <시민 케인>의 오마주처럼 보이기도 하는 올리버 스톤의 과장된 편집과 닉슨역을 맡은 앤소니 홉킨스의 드라마틱한 연기가 결합하면서 거의 햄릿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올리버 스톤이 닉슨의 흠결을 덮어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곳곳에 노골적인 풍자와 비판이 담겨있지요. 그런데도 닉슨은 작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은 흠결들은 닉슨을 더욱 거대해 보이도록 만들지요. 민주당 성향의 올리버 스톤이 과장된 편집을 밀어붙인 결과 닉슨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종의 아이러니입니다.

 

  닉슨이 거대해질수록 주변 인물은 작아집니다. 하나같이 인상적인 조연들뿐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부분 시정잡배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내와 참모들을 비롯해 닉슨의 주위를 둘러싼 누구도 그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워싱턴포스트의 기자들이나 시민운동가들도, 심지어 그 잘난 케네디 가문도 장애물이나 운명의 장난 같은 일종의 무대장치로 전락합니다. 닉슨을 고뇌케 하기만 한다면 다른 무엇이어도 상관없었겠지요. 영화가 핵심적인 정치적 사건과 인물을 다루기는 하지만, 사실 정치적인 것은 외피에 불과하고 그 핵심은 닉슨의 내면적 고뇌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고뇌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닉슨의 고뇌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여기서 올리버 스톤은 닉슨에 대한 정신분석에 나섭니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 유년시절 뭐 그런 뻔한 것들 말입니다. 닉슨은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고,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병약했던, 병으로 젊은 날에 죽어버린)을 더 사랑하고, 아버지는 엄격하기 그지없어요. 닉슨을 성공으로 이끈 것도, 그가 정치에 나선 것도, 케네디가를 향한 엄청난 질투심도, 탈법행위를 서슴지 않으며 집권에 나선 것도 사실은 사랑받고자 했던 그의 유아기적 갈망의 연장이었을 뿐이지요. 자유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의 대통령이란 지위도 닉슨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그가 원하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일 뿐이니까요. 영화가 다시 정치성을 회복하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닉슨이 갈구하는 사랑은 대중적 지지로 치환됩니다. 언제나 대중에게 인기받기를 원했지만 그럴 수 없었죠. 사람들은 케네디를 보면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고, 닉슨을 보면 현재의 자신을 떠올리게되니까요. 케네디는 손쉽게 얻었지만 닉슨이 결코 차지할 수 없었던 대중의 인기야말로 이 모든 비극의 처음이자 끝이 됩니다. 닉슨이 공작정치에 나서는 것도, 자신의 공적을 알아주지 않는 언론을 증오하는 것도, 심지어 자신의 측근들을 잘라내며 파멸로 뛰어드는 것도 모두 대중의 지지를 얻고 싶었던 닉슨의 서글픈 초상입니다. 세계의 권력을 모두 얻었지만 대중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실패한 한 정치인의 파멸은 부모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점점 더 위험한 일을 서슴지 않는 비뚤어진 어린아이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비극입니다. 평생 얻고자 했지만 얻을 수 없었던 어떤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에 와서야 이야기는 끝을 맺지요.

 

  결과적으로 올리버 스톤은 먼 길을 돌아서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게 되는 셈입니다. 정신분석과 비극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결국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대중의 지지라는 답변 말입니다. 대중의 인기에 울고 웃는 대의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인들의 삶. "워싱턴은 못생긴 자들을 위한 헐리우드(Washington is Hollywood for the ugly people)"라는 격언을 떠올리게 하는 결론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대통령은 어떤 고뇌에 빠져있을까요.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을 그의 유년시절은 그에게 어떤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안겨주었을까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길 바랍니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회고적 자기연민에 빠진 비극적 영웅이 아니라 미래를 제시할 지도자라고 생각하니까요. 올리버 스톤이 그린 닉슨을 우리 대통령에 대입시켜 보는 것, 정치의 위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영화 독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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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근히 살아서 김근근인 역사/정치학도.

작품을 감상할 때면 주제보다도 시대와 맥락에 과도한 흥미를 느끼는 변태.

치킨과 두부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