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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3.29 4.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 [뼈 도둑]
- 2013.03.27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➃ <밀양> : 비밀의 볕, 온전히 햇볕을 가질 수 없다는 절망과 마주하다.
- 2013.03.25 [근근한 가이드]『더버빌 가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 토머스 하디 3
- 2013.03.21 [룽의EX] 조 라이트, 키이라 나이틀리의 <어톤먼트> - 저마다의 속죄의 길
- 2013.03.18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세계의 끝을 넘어선다는 것 1
글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
뼈 도둑
구멍이 없는 공간을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문이 없는 방, 주둥이가 없는 병,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 빙구는 가끔 지구의 표면에 고이는 시간을 생각해봐요. 지구는 둥글어서 들어올 구멍도 빠질 구멍도 없을 텐데 다들 어디로들 들어오는 건지. 나날들은 어디에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버리는 건지. 우리에게 주어진 신체와 마음은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와 같아서 시간이, 삶이, 사랑이 거기 온전히 담기지 못하고 흘러넘치는 광경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온전히 담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그리 슬픈 것일까요. 오늘 가져온 이야기는 황정은의 단편소설, <뼈 도둑>이랍니다.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
그는 오른쪽 벽에 돌출된 수도꼭지 아래 묘한 시멘트 구조물을 발견하고 다가가보았다. 허리높이로 수도꼭지가 달렸으니 용도는 개수대인 듯했는데 개수구멍이 없었다. 기울어진 방향으로 양배추 조각이 몇 점 모여 있었다. 오래되지는 않은 듯 가장자리만 시든 채로 개수대 바닥에 말라붙어 있었다. 여기 누가 살고 있습니까, 그가 묻자 중개인이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수도꼭지를 비틀어 물을 흘려본 뒤 삐걱삐걱 잠갔다. 거친 녹물에 잠긴 뒤 작은 조각 몇 점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물은 고인 채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겨울이었다고, 많은 얼굴을 잃어버린 뒤 그 집에 당도했다고, 그는 소설의 첫머리를 담담하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동성 애인을 차사고로 잃고 애인명의로 되어있던 집을 빼앗긴 뒤 교외에 낡고 황량한 집을 구한 그는, 그 집의 개수대를, 개수구멍이 없어 물이 빠지지 않는 이상한 개수대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이 이상한 개수대 이야기는 황정은의 소설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또다른 단편 <낙하하다>에는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가 있는 방 안에서 오후를 기다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죠. 남자는 오랫동안 오후를 기다려왔다고 하지만 이야기에는 그 벽에 시계가 걸려있다는 문장도, 방에 문이 있다는 문장도 없습니다. 이처럼 황정은의 소설에는 무한한 속성을 지닌 것들이 자주 출현하고, 그로 인해서 시공간의 질서를 무시하고 무한히 그 틈새로 뻗어가는 어떤 풍경들이 자주 연출되곤 합니다. 이 소설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 장과 함께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길이었다. 장과 그는 뒷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의 선명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컹, 하고 그들의 버스가 어딘가에 충돌했다. 천장으로 창으로 많은 양의 모래가 쏟아져 들어왔다. 매우 많은 양의 모래. 그는 모래에 쓸려 구르고 뒹굴다가 목전에서 연인의 노란 얼굴을 발견했다. 그 얼굴은 그와 다름없이 모래에 묻혀가는 중이었다. 눈을 감고 있었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양쪽 귀는 가망 없이 묻혔고 이제 입을 향해 모래가 닥쳐오고 있었다. 그는 장을 불렀다. 장, 장, 입이 없으면 숨을 쉬지 못한다, 이미 숨을 쉬지 않는 듯한 연인의 얼굴을 덮어가는 모래를 쓸어내고 쓸어내며 흐느꼈다.
구멍이 없는 개수대 위로 고이는 물, 버스의 천장에서 계속해서 쏟아지는 모래의 꿈, 기상이변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는 기온과 내리는 폭설의 이미지 등 한정된 배경 안에 무한히 쏟아지는 것들의 이미지는 이렇듯 계속해서 변용되어 그녀의 소설 속에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경은 하나의 전제를 필요로 하는데, 바로 ‘구멍’이 없다는 것입니다. 외부로부터는 끝없이 어떤 것들이 들어오거나 생성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탈출구가 없다는 말이죠. 들어오는 것은 끊임없이 있는데 빠지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질문이 질문을 낳고 그 질문이 또다른 질문을 낳는데 답은 하나도 없는.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낯설게 바라보고 비정상적인 것, 어그러진 것, 질서를 벗어난 것, 기형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봅시다. 잘못된 질문 안에서 답을 찾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혹시 잘못된 질문 때문에 간데없이 실종된 답을 억지로 짜내 담으려 하는, 잘못된 틀에서 기인한 아이러니한 상황은 아닐런지요? 구멍이 없음은 정말로 기형적인 상태인가요? 그렇다면 기형적이지 않은 상태는 어떤 상태인지요? 어딘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고여있다는 것이 그저 또다른 상태일 수는 없는 것인가요?
구멍이 없는
아침에 그는 생선뼈만도 못한 무게감으로 외양간에 서서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보았다. 세수를 한다, 출근준비를 한다, 라고 생각하며 물이 고여가는 가망 없는 개수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의 얼굴을 분명하게 떠올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일 년이나 되었는데. 사람은 잊는다. 일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
분명 밟히는데 밟히는 것이 좀처럼 보이지 않아 발을 몇 차례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그는 가느다란 것들을 알아보았다. 고불고불하거나 짧거나 길거나 검거나 노랗거나 붉거나 매우 많은 죽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로 바닥을 덮고 있었다.
(……)
장의 누이가 가장 크게 울었다. 그녀는 장의 뺨에 손을 얹었다가 섬뜩 놀란 듯 손을 거두며 차가워, 라고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구멍이 없는 상태들은 무수히 존재합니다. 그 틀에 담겨 흡수되거나 어딘가로 가버리지 못하고 흘러넘치는 것들 역시 생각보다 흔히 존재하는 것들인지도 모릅니다. 가령 우리 유한한 인체가 경험하는 시공간, 우리가 맺는 사람들과의 관계들, 덧없이 스쳐간 인연들, 기억들, 하다못해 ‘고불고불하거나 짧거나 길거나 검거나 노랗거나 붉’었던 머리카락들까지도 그런 흘러넘쳐버린 것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을 꼽자면 이전에는 일상이나 내 몸의 일부였다가 문득 낯선 것이 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구멍이 없는 우리의 틀이 갖고 있는 한계를 벗어나면 무질서한 것, 비정상적인 현상, 낯선 광경으로 변하고 배제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사실 그의 담담한 서술을 잘 들여다보면 이러한 ‘구멍이 없는 상태’는 소설이 시작되기 전부터 지속되고 있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의 지난 사랑은, 이를테면 ‘구멍이 없는’, ‘불쾌하게 사내새끼들끼리’ 하는 ‘거시기한’ 것이었거든요. 이는 그의 삶에서 거대하고 무거운 무게추로 자리해 그의 인생을 우묵하게 만들고, 그 홈으로 떨어지는 인생의 다른 문제들은 자꾸 어디론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고여 그의 삶을 이곳까지 몰아넣었습니다. 기상이변으로 모든 것이 얼어붙은 세상에서, 이상한 개수대가 설치된 외딴 방구석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도록 말이죠. 마치 구멍이 없는 개수대에 고인 물처럼 그는 이제 갈 곳이 없고, 시간은 자꾸만 그에게로 흘러듭니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나쁘다. 닥치는 것보다도 나쁘다. 특별히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에 그들이 즐겨부르는 노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당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사랑받지 못하도록 태어난 당신도 있다는 의미일까, 그런 당신은 누구고 저런 당신은 누굴까.
(...)
어느 쪽에서 들려왔는지는 몰라도 거시기한 관계, 라는 속삭임이 들려왔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다시 왈그락 덜그럭. 장은 입에 든 것을 꼼꼼하게 다 씹은 뒤 장과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부부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렇게 궁금하세요 그렇습니다 이 새끼가 나한테 넣고 내가 이 새끼한테 넣습니다 안심하세요 내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다 나는 당신들에겐 조금도 넣고 싶지 않습니다
거시기한 관계. 그렇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말하자면 참으로 거시기한 것이죠. 그야말로 구멍은 없고 거시기들만 있을 뿐이니. 그러나 사랑이라는 게 그 자체로 참 거시기한 것이 아니던가요. 참으로 규정하기 어렵고도 복합적인, 누구도 딱 잘라 정의하기 힘든 그 복잡미묘하고 애틋하고 따뜻한 관계에 있어서, 거시기들만 있고 그것들이 들어갈 구멍은 없다는 사실은 왜 그토록 문제적인 일인가요? 이것이 문제가 되면 될수록, 우리네 사회에서 사랑이란 결국 ‘거시기한 것’을 결코 넘을 수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남녀만, 넣을 것이 있는 사람과 무언가 넣어지는 구멍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가질 수 있는 관계에 불과한, 그렇고 그런 것에 불과한 관계 말이죠.
그런 것만이 사랑은 아닐 겁니다. 넣을 것이 있고 넣어지는 것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그런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닐 거에요. 어차피 사랑이라는 것이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인, 당신이 내쉬는 날숨을 내가 들숨으로 마시면서 연명하는 것인데요. 결국은 그래서 서로의 모태에 몸을 묻고 기생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 사랑 아니던가요. 서로의 마음을 모태로 삼고도 그것조차 영원할 수 없어서, 언젠가는 구멍이 없는 그 방을 찢고 나와야 하는 것이 사랑의 숙명입니다. 그러한 사랑에서 서로의 몸에 구멍 하나가 없다는 그 상태가 뭐 그리 중요한 것인지요. 따지고 보면 태아가 모태에서 보내는 열 달의 시간도 구멍 없는 개수대에 고이는 물과 같은 것이라서, 자궁을 가진 사람 역시 구멍없는 방을 몸에 지닌 사람이 아니던가요. 구멍 없는 방을 가지지 못한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 그리도 잘못된, 혹은 슬픈 일일까요.
없는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살 수 있었고 갈 수 있었다.
(……)
그는 상상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텅 빈 납골당으로 들어서는 사람, 눈사람과도 같은 거인, 그의 등과 머리에 쌓인 눈, 체온의 냄새. 한발 한발 전진해갈 때마다 그는 그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에 관한 꿈으로 완전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갈 수 있었고, 살 수 있었다.
하.
후.
하.
*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그는 소설의 결말부에서 장의 뼈가 보관되어있는 납골당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집을 나섭니다. 이렇다할 동기부여도 딱히 없이 그는 문득 납골당까지의 거리를 계산하고 걸릴 시간을 가늠한 후 담담히 짐을 쌉니다. 죽을 것이 뻔한 눈 속으로,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할 기록을 그 눈 속에 남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발 한발, 그는 걸음을 뗄수록 점점 더 완전으로 수렴해 갑니다. 모태를 찢고 나오는 태아처럼 공간을 깨고 스스로 구멍을 만들면서요.
어느 작가는 이렇게 말했죠. 삶은 더할 나위 없이 영원하다, 다만 우리를 스쳐갈 뿐이다. 사실 둥근 우리네 삶에 시간이 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의 표면 위에서 움트고 꽃피고 시드는 것일지도 몰라요. 시간은 우리 속에서 많은 얼굴을 가지고 나타나고, 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다시 사라지지요. 당신과 나의 얼굴은, 당신과 내게 주어진 것들은 사실 그 표면에 있는 껍질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껍질을 틀로 삼아 영원한 삶과 시간과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려 드는 것은 너무나도 모순된 일이죠. 그래서 가끔은 이런 말들을 쓰는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 때가 있나 싶도록 막막한 때가 있습니다.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를 보는 일처럼요.
다만 저는 당신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당신은 제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신의 이름도 얼굴도 어떤 날들을 살아왔으며 어떤 날들을 살아갈지도 모르지만요. 그 순간이 하루의 어떤 때이건, 맑은 아침이건 비내리든 저녁이건 눈내리는 정오이건, 이 순간만큼은 당신과 제가 나누는 시간의 무게가 평등하다고 믿습니다. 영원을 스쳐가는 당신의 이 순간이 안녕하기를 빌어요. 당신이 이 기록을 언제 발견하든, 어디서 발견하든. 눈 속에서 발견하든, 제가 없는 순간에 발견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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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➃ <밀양> : 비밀의 볕, 온전히 햇볕을 가질 수 없다는 절망과 마주하다.
밀양 ; Secret Sunshine, 비밀의 볕.
“밀양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볕.”
항상 궁금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왜 ‘밀양’일까? “밀양은 어떤 곳이에요?”라는 두 번의 물음에 밀양을 대표하는 종찬(송강호 분)은 매번 “밀양, 뭐 다른 곳이랑 똑같습니다.”라며 일갈한다. 무슨 꿍꿍이를 감춘 것 가은 미심쩍은 말투도 아니라 의심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항상 궁금했다. 왜 하필 밀양이어야 했던 거지? 유괴사건쯤은 어느 도시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데. 다시 만나게 된 영화 <밀양>에서 나는 나름의 답을 발견하려 노력했다. 시작점은 密(비밀 밀), 陽(볕 양).
흐린 하늘, 그늘진 얼굴
영화 <밀양>을 볼 때면 침침하고 답답한 느낌을 받곤 했다. 물론 이야기가 무거운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화면 속의 밀양은 안개의 도시 무진이라도 되는 양 많은 날 흐린 하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밀양이 눈부시게 맑은 날이면 신애(전도연 분)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더욱 도드라지곤 했다. 따사로운 빛은 차창에 가로막혀 사선의 무늬를 만들며 신애의 얼굴에 그려지고, 많은 경우 응달이거나 실내에 있음으로써 빛의 흔적은 그림자 밖이나 창문의 후광으로 짐작할 뿐. 이 편파적인 비춤의 야속함은 신애가 다른 인물과 함께 양지에 있을 때 가장 선명하다. 신애와 마주보는 이(주로 종찬)는 빛을 정면으로 받는 반면 신애는 빛을 등지고 서있기 마련이었다. 이렇듯 따사로이 비추는 빛을 온전히 갖지 못해온 신애가 얼굴과 온 몸을 감싸는 빛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는 어째서인지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의 한 가운데. 아들 준의 사체를 확인하던 습지, 준의 사망신고를 하러 갔던 동사무소의 주차장. 어쩌면 밀양에 입성하던 날부터 예고된 것이었는지 밀양 길목의 국도에서 멈춰선 차와 씨름할 때에도 그랬다. 그래도 그 때는 준과 함께 햇볕을 쬐는 신애의 얼굴이 조금은 평온해보였으니 그건 아니라고 해줄까. 햇빛만큼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더니, 신애에게는 어찌 이리도 불공평한 것일까. 빛을 대하는 그녀의 눈에서 원망과 분노를 발견한다.
빛의 상징 ; 그녀에게 빛이란
“(빛을 만지는 시늉을 하며) 이거요? 여기에 뭐가 있다고 그래요. 아무 것도 없잖아요.”
이토록 엇갈리는 신애와 빛, 그녀에게 빛은 어떤 상징일까? 신애처럼 ‘불행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꼭 필요하다며 끈기 있게 전도를 시도하는 건너편 약국 사모님은 말한다. 세상 일은 모두 주님의 뜻대로 흘러간다고. 저 햇빛 한 조각에도 주님의 뜻이 깃들어 있다고. 그 말에 신애가 발끈하며 하는 말은 “아무 것도 없잖아요.”이다. 이렇게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던 신애가 준이를 잃고 급격하게 의지하며 빠져드는 신의 품, 그 안에서 그녀는 평온하고 행복하다(고 주문을 건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있지만. 마침내 영화의 결정적 전환점. 신애가 준이를 죽인 범인을 용서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러 교도소에 면회를 갔을 때, 범인은 이미 주님을 만나 속죄하고 평온을 구한 뒤였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 이미 용서 받았대요. 하느님한테. 그래서 맘의 평화를 얻었대요. 이미 용서를 얻었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용서를 해요.”라고 절규하는 신애는 이제 신에 대한 배신감으로 광기에 휩싸인다.
이제부터 신애의 모든 저항과 복수의 대상은 바로 신, 절대자가 된다. ‘보란 듯이’ 할 수 있는 모든 죄를 짓겠다고 마음먹었는지, 음반가게에서 앨범을 '훔쳐서' 부흥성회에 잠입해 김추자의 노래 <거짓말이야>가 울려 퍼지게 한다. 교회 장로님인 건너편 약국의 약사님을 유혹해 대낮에 갈대밭에서 ‘간음’을 저지르고 기도회에 돌을 던지고 마침내는 자신의 손목을 그으며 기독교의 가장 큰 죄 '자살'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때 신애의 눈은 하늘, 바로 빛을 향한다. 하늘의 빛, 십자가의 빛을 노려보며 “보고 있어? 잘 보이냐구.”, “난 너한테 절대로 안 져.”라고 몇 번을 되뇌이는 것이다. 빛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집 안의 모든 조명을 켜고 그를 노려보며 사과를, 그리고 자신의 손목을 깎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즉, 신애에게 빛이란 신- 그녀를 구원해줬다 믿었지만 철저히 배신당했을 뿐인 신이라는 존재를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단 한 번도 빛의 따스함과 기쁨을 누려보지 못한 이의 절규와 저항은 더욱 처절하다. 예전에는 억지로라도 행복하다고 말하던 신애였지만 신의 존재를 한 번 인정하고 나서는 그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해보인다. 다만 자신이 불행한 탓은 신에게 있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섭리, 세상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이 없다고 했으니까. 신이 있다면 이럴 수 없는 것 아니에요?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 ; 자신의 손으로 잘라낸 머리카락이 바람에 밀려 빛이 비춰진 땅으로 가는 장면은 빛으로 상징되는 신의 존재로부터의 주체적인 단절을 뜻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좋겠는데 말이다.
나는 이제야 왜 밀양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은. 비밀의 볕,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지지 않았던 숨겨진 빛, 그 절망과의 조우.
밀양, 지금, 나와 우리에게
나는 한 때 기독교신자였고, 기독교의 원리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상상조차 못해본 시절이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할 때 인간의 삶은 한없이 무력한 것이 된다. 내가 아등바등 하루하루를 살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내가 태어나고 죽고 그 사이의 모든 시간과 사건이 신의 뜻이라는데 나의 노력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내가 만드는 삶에 대한 의지를 가져본들 삶은 그저 승리와 전복에의 희망이 전혀 없는 투쟁의 연속이 아닌가. 그 때도 가끔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종교의 원리를 배제한 채로, 내가 살아가는 지금 이 공간에 대입해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바꿀 수 없는 미래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현재를 깨달을 때의 처절한 무력감과 절망. 나에게만은 이토록 가혹한 현실에 대한 항변이라면, 이제 이 영화는 꼭 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게 된다. 우리는 충분히 무력하고, 햇볕은 충분히 불평등하다.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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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버빌 가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 웨섹스로 떠나는 사실주의 여행
테스는 여러 번역본이 있지만,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온 것 김보원판을 추천합니다. 2000년에 영미문학연구회에서 추천본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테스Tess…. 그 이름만 들어도 서글퍼지는 비련의 여주인공, 테스…. 그렇습니다. 오늘 함께 떠나볼 세계는 『더버빌가(家)의 테스(Tess of the d'Ubervilles, 이하 테스)』의 무대인 영국입니다. 갑자기 도버해협(칼레해협)을 건너는 것은 연재 세 번 만에 프랑스가 지겨워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실 오늘날 도버해협은 바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교통편 연결이 잘 되어있는 편이니 프랑스편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어차피 유럽연합은 이제 하나의 정치공동체가 되었다고 보아도 될 정도니까요.(?????) 하하하.
사실 토마스 하디의 <테스>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과 더불어 19세기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19세기 영국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역시 대중적 통속소설의 성격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인데요, <테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100년 이상 된 두꺼운 소설 치고 TV연속극 보듯이 심심찮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입니다. 실제로 TV연속극으로 많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최근에 bbc에서 만든 <테스> 4부작 드라마의 경우 현대 드라마를 뛰어넘는 인기를 끌기도 했죠.
가난한 농부의 장녀 테스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먼 친척이라는 더버빌 가로 더부살이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문의 아들 알렉을 만나면서 모진 운명이 시작되죠. 그의 유혹에 넘어간 테스는 임신을 하게 되고 집으로 혼자 돌아와 몰래 아이를 키우지만 아이는 죽어버리고 맙니다. 상처받은 테스는 외진 곳의 농장에서 젖을 짜며 살아가다가 우연히 새로운 남자 에인절을 만납니다. 테스는 사회적 편견과 에인절을 향한 미안함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지 못한 채 그와 결혼하게 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테스가 결국 에인절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지만, 에인절은 뿌리 깊은 편견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테스를 떠나버립니다. 혼자서 에인절을 기다리던 테스에게 다시 귀족남 알렉이 다가오고, 에인절은 두려움 속에서 에인절을 기다리는데…….
테스와 에인절, 더버빌가라는 이름 대신 한국 이름을 넣으면 곧바로 60년대 신파 드라마가 되어버릴 듯한 줄거리입니다. 현대인에게 인기 있는 소재의 원형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럼 이제 테스의 안타까운 사연을 이해하기 위한 짧은 여행을 떠나봅시다.
비비씨에서 만든 4부작 드라마. 상당히 잘 만든 작품입니다.
#첫 번째 포인트, 하디의 사실주의
먼저 하디의 <테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알아봅시다. <테스>는 흔히 사실주의 문학의 전통으로 분류되는데, 영국에서는 디킨스와 새커리가 사실주의를 대표합니다. 사실주의 문학이란 대상으로서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자세와 관련됩니다. 특히 개인의 삶을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는 점이 사실주의 문학의 중요한 특징인데요, 한 개인의 삶은 그와 관련되어 있는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니게 되며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그 사회의 모습 속에서 생생하게 그려내고, 상류계급의 허영과 속물적 성격을 풍자하는 등이 대표적이지요. <테스>의 경우는 사실주의적 경향을 드러내면서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샤롯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처럼 대중성도 뛰어난 연애소설의 면모를 갖습니다. 이러한 사실주의 경향 안에서도 <테스>가 특징적인 것은, 바로 영국 농촌소설의 정점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일찍이 농촌소설의 분위기는 제인 오스틴이나 조지 엘리어트의 소설들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진정한 의미의 농촌소설은 하디에 와서야 이루어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농민들의 삶에 대한 사실주의적인 묘사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직접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영문학사의 일대 사건이라 할만합니다. 예를 들어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다소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때때로 몰락한 귀족)으로 묘사되지만, 이들조차 집안에는 하인들을 여럿 두는 중간계층입니다. 말하자면 하인이 직접적으로 주인공이 되는 소설은 하디에 와서야 이루어진 셈입니다. 특히 <테스>에서도 전통적인 농촌공동체의 해체, 이에 따른 이농현상, 도시빈민으로 몰락하는 농업노동자들의 모습 등 급격한 변화의 흐름에 휩쓸린 농촌사회의 모습은 한 시대의 전형적 양상과 변화에 대한 재현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테스의 아버지가 자신이 몰락한 귀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떠 테스를 객지로 밀어넣은 것이 모든 비극의 출발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시대상을 매우 직관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두 번째 포인트, 우연의 미학, 마주침의 유물론
하디가 사실적인 태도와 시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테스의 비극적 삶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을 던져봅니다. 테스의 삶이 ‘비극적’이라고 한다면, <테스>를 ‘비극’이라고 말해도 좋은 걸까요? 말하자면, 고전적 의미에서의 ‘비극’, 다시 말해 오이디푸스가 그랬듯이, 햄릿이 그랬듯이, 비극적인 운명(혹은 자연적 질서)에 저항하려는 한 인간의 숭고한 실패를 비극이라고 한다면, <테스>의 이야기도 이 범주 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테스>의 이야기에 ‘운명적 요소’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테스의 비극적 삶에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요인’이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곳곳에서 테스의 삶은 대단히 ‘우연’적 계기로 짜여집니다. 예컨대 테스는 제인 오스틴식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허영심 많은 여자’이지도 않고, ‘미인박명’의 운명을 타고난 절세 미녀도 아닙니다. 여느 평범한 농가의 더부살이를 떠나야 했을 뿐이고, 하층 여성으로는 오히려 허영심이 없는 소박한 바람을 가졌을 뿐이며, 하디의 묘사에서 테스는 평범한 매력을 가졌을 뿐입니다. 그저 ‘우연에 맡기는 태도’로 삶을 살아갔을 뿐인 것입니다.
결과는 무교훈성입니다. 당대의 다른 소설 주인공과는 다르게 테스는 비극적 삶을 살아야 할 어떤 필연적 요소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테스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운명의 장난도, 출생의 비밀도 아닙니다. 다만 우연히 만들어지고 만 어떤 삶의 궤적일 뿐입니다. 잠시 제가 좋아하는 글귀를 인용해봅니다.
“에피쿠로스는 세계 형성 이전에 무수한 원자가 허공 속에서 평행으로 떨어 진다고 설명한다. 원자들은 항상 떨어진다. 이는 세계가 있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동시에 세계의 모든 요소들은 어떤 세계도 있기 이전인 영원한 과거로부터 실존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는 또한 세계의 형성이전에는 어떤의미도 또 어떤 원인도, 어떤 목적, 어떤 근거나 부조리도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의미의 비선재성은 에피쿠로스의 기본적인 테제이며 이 점에서 그는 플라톤과도 아리스토텔레스와도 대립한다. 클리나멘(clinamen)이 돌발한다.(...) 클리나멘은 무한히 작은, '최대한으로 작은' 편의(de'iation, 기울어짐)로서, 어디서,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르는데, 허공 중에서 한 원자로 하여금 수직으로 낙하하다가'빗나가도록' 그리고 한 점에서 평행낙하를 극히 미세하게 교란함으로써 가까운 원자와 마주치도록 그리고 이 마주침이 또다른 마주침을 유발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하나의 세계가 즉 연쇄적으로 최초의 편의와 최초의 마주침을 유발하는 일군의 원자들의 집합이 탄생한다.(...) 마주침은 원자들에게 편의와 마주침이 없었더라면 밀도도 실존도 없는 추상적인 요소들에 불과했을 바로 그 원자들에게 그것들의 현실성을 부여한다. 원자들은 편의와 마주침 -그에 앞서는 원자들이 유령적 실존만을 지닐 뿐인 저 마주침- 을 통해서만 비로소 자기 실존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 마주침의 유물론, 알튀세
어떤 목적도, 어떤 근거나 부조리도 실존하지 않는 우연성. 그러한 우연성을 통과해서 결국 ‘죽음이라는 실존’의 역설에 이르게 된 테스의 삶이 어쩌면 <테스>의 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염세주의’라고 규정하기도 하는데, 삶의 우연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에 빠지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 웨섹스로 여행을 떠나자
이 소설을 읽으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집니다. 하디가 낭만적으로 만들어낸 웨섹스의 아름다운 풍광 묘사 덕분입니다. 하디는 영국 서남부 도셋(Dorset)지방 출신으로, 당시 이 지방은 빅토리아 시대의 놀라운 산업발전에도 불구하고 영국 전체로 보아 가장 낙후된 지역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던 고향 도셋을 작품의 배경으로 택했고, 고대에 이곳에 자리잡고 있던 왕국의 이름을 본따 이 지방을 웨섹스(Wessex)로 명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대표작들을 두고 ‘웨섹스소설’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광활한 바다와 들판, 농촌의 삶의 모습은 소박하면서도 매우 아름답게 그려져 사회적 불의의 사실적인 묘사라는 주제와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는 웨섹스 지방의 대표적인 유적인 ‘스톤헨지’도 등장합니다. 스톤헨지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 관광지이기 때문에 사실 작위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경상도의 한 농촌에서 비극적 삶을 살던 여인이 불국사 석굴암에 가서 생을 마감하는 느낌이랄까요, 혹은 중국 여인이 굳이 만리장성에 누워 눈을 감는 느낌이랄까요, 뭐 그런 셈입니다. 이 소설이 발표됐을 당시에도 스톤헨지는 충분히 유명했기 때문에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으리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한 가지 참작해줄 지점은 있습니다. 지금과 달리 당시의 스톤헨지는 본격적인 관광지로 관리되지는 않았고, 현재와 같은 담장조차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장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드루이드교 신자(우리나라의 무당과 같은 분위기입니다)들이 근처에서 캠핑을 벌이기도 했다고 하네요.
스톤스톤스톤헨지
어쨌든, 하디의 소설을 읽으면서 떠오른 풍광들이 당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면, 다음번에는 시간을 내 웨섹스지방을 여행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뭐, 생각보다는 우중충하고 춥긴 하겠지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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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4. 조 라이트와 키이라 나이틀리의 <어톤먼트>
- 저마다의 속죄의 길
※ 주의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살다보면 미안한 일이 많이 생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안한 일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더 많다. 사랑해서 미안해지는 건지, 미안해서 사랑하다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은 때로 동의어이기도 하다. 9/11 테러 당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통화를 했다. 비행기가 납치당하는 순간, 빌딩이 불에 타고 무너져 내리는 순간,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메시지를 남겼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전하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말이다.
며칠 전이 친구의 생일이었다. 고등학교 3년을 붙어 다니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안타깝게도 친구는 세상에 없다. 2년 전 급성혈액암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군복무 중이었던 나는 뒤늦게야 투병소식을 들었고 문자로나마 안부를 물었었다. 그 후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친구는 죽었다. 복무 중이어서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 화가 났고 미안했다. 같이 있지 못했던 시간들과, 갚지 못한 것들이, 시시껄렁한 언쟁들이 단번에 몰려왔다.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과를 받아줄 친구는 없었다.
'속죄'라는 말이 있다. 속죄는 '지은 죄를 물건이나 다른 행동으로 비겨 없애는 것'을 뜻한다. 사과와 속죄는 다르다. 사과는 용서를 비는 대상의 앞에서 행해진다. 속죄는 용서를 비는 대상이 없을 때에도 행해진다. 사과는 '나를 용서해줘.'라고 말하는 것이고, 속죄는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과는 남이 나를 용서할 때 끝이 나고, 속죄는 내가 비로소 나를 용서할 때 끝이 난다. 예술은 때때로 속죄의 역할을 해왔다.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삶에게 용서를 비는 영화, 속죄의 결과물로서의 영화, 조 라이트 감독과 키이라 나이틀리의 <어톤먼트>다.
<어톤먼트>는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번역하면 <속죄>라는 뜻이다. 조 라이트 감독은 <오만과 편견>으로 젊은 나이에 뛰어난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소설을 영화화하는 감각이 탁월한데, 이는 <어톤먼트>를 통해서 다시 증명된다. <어톤먼트>의 연출은 우아하고 섬세하다. 음악과 미장센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대신한다. 씬과 씬, 컷과 컷의 연결과 배치가 묘한 분위기와 무수한 암시를 읽어내도록 한다(특히 전쟁터를 스케치하는 5분여에 걸친 롱테이크는 감탄을 자아낸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조 라이트 감독과 <오만과 편견>에서 만난 뒤 <어톤먼트>에서 다시 만났다. 그녀는 고전적 이야기에 굉장히 잘 녹아난다는 것을 다시금 보여준다. 그녀의 수줍은 미소, 살짝 나온 턱, 텅 빈 눈동자와 더는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호흡들이 영화를 본 뒤 내내 눈에 남는다. 그녀의 연기는 영화를 더 아프고 아련하게 만든다(제임스 맥어보이와의 더듬거리며 긴장하다 순간 터져 나오는 호흡이 정말 좋다). 조 라이트 감독이 그녀를 믿는 이유가 있다.
1935년 영국, 부유한 집안의 아름다운 딸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와 집사의 아들이자 명문대 의대생 로비(제임스 맥어보이)는 어릴 때부터 서로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었다. 쉽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던 이들은 우연히 잘못 보내진 로비의 편지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세실리아의 어린동생 브라이오니의 오해로 로비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그리고 전쟁터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 세실리아는 로비가 전쟁터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간호사로 일하게 되고, 로비 또한 세실리아를 다시 만난다는 단 하나의 일념으로 참혹한 전쟁을 버틴다. 브라이오니는 자신의 오해와 잘못을 깨닫고 세실리아와 로비에게 사과하려 한다. 그러나 사과는 실패하고 그녀는 속죄의 길을 걷는다.
<어톤먼트>는 제목처럼 '속죄'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다. 세실리아와 로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실은 브라이오니의 평생에 걸친 속죄를 말하기 위해 끼여 있는 이야기다. 브라이오니는 자신의 오해(혹은 질투로 인한 고의) 때문에 세실리아와 로비의 삶이 망가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이를 사과하고 돌려놓으려 한다. 그러나 참혹한 전쟁이 셋을 갈라놓는다. 끝내 사과는 이뤄지지 못한다. 세실리아와 로비가 전쟁 중에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속엔 브라이오니가 두 사람을 만나 사과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이야기 진행상 약간 어색한 장면이다. 끝에서야 밝혀지지만 브라이오니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어톤먼트>를 내놓는다(그녀는 글쓰기를 놓치않는 소녀로 내내 등장한다). 그제야 앞선 이야기가 그녀의 소설 속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다(배경음악과 함께 쓰이는 타자기 소리가 이를 암시한다). 브라이오니가 두 사람에게 사과를 하는 장면은 실제로 있을 수 없었던 허구로 써낸 장면이다. 그녀는 세실리아와 로비가 마땅히 받았어야 할 행복을 그녀의 소설 속에서나마 돌려준다.
그녀에게 소설은 속죄의 도구다. 세실리아와 로비가 만나 바닷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욱 처연하다. 존재했어야 하지만 존재할 수 없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도 그녀의 속죄는 끝나지 않는 듯 이상한 여운이 남는다. 애초에 속죄란 끝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속죄는 이 정도면 됐다며 멈추는 순간 의미를 잃는 것이리라.
때때로 나도 가버린 친구를 생각하며 글을 끄적거렸다. 친구의 멈춰버린 시간을 이어 붙여 만들어 주기도 했다. 예전처럼 바보 같은 농담을 하는 상상을, 늘어지게 뒹굴며 만화책을 읽던 상상을,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사는 얘기를 하는 상상을, 내가 다 잘못했다고 돌아오라고 말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친구를 생각하면 나는 속죄하는 마음이 된다. 뭐하나 잘난 것 없는 내가 더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미안하다.
속죄라는 건 참 무력한 일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일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속죄의 행위는 무엇이든 숭고한 예술이 된다. 그것이 소설을 쓰는 일이든, 더 잘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이든, 봉사를 하는 일이든, 매일 무덤을 찾아가는 일이든 말이다.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엔 속죄하게 된다. 특히 남겨진 사람들이 그렇다. 수화기 너머로 미안하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있었을 그들. 허무하게 남겨진 그들은 더 미안하고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마다의 속죄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 조 라이트, 키이나 나이틀리의 <안나 카레니나> 2013년 3월 2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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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에 맞춰 쓰여졌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은 김연수 소설집『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2005) 속의 중편소설「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직접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를, 문장 전체 인용이나 간접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로 표기했습니다.
세계의 끝을 넘어선다는 것
‘우일월정과설산(又一月程過雪山).’ 왕오천축국전 70행에서 71행에 걸쳐있는 말이자 지금 이야기 할 소설의 제목이다. 김연수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우일월정과설산’을 한글로 풀어 쓴 제목이다. 제목에서부터 이 글을 다시 읽어보려 한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이 설산의 이름은 낭가파르바트이다. 파키스탄 북부의 히말라야산맥 서쪽 끝에 위치한 해발 8,125m의 봉우리로, 전 세계 8,000m급 고봉 14좌 가운데 9번째로 높다.(『시사상식사전』, pmg지식엔진연구소, 2012 참조 및 변형) 낭가파르바트를 이야기하려면 이 설산이 위치한 길기트 지역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다음 두 문단은 소설에 나온 길기트 지역에 대한 설명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발률은 대발률과 소발률, 두 개의 나라로 나뉜다. 대발률은 지금의 인도 북부 발티스탄 지역에 있었는데, 전통적으로 인도에 속했다. 하지만 파키스탄 북부 길기트 지역에 있던 소발률은 세계의 경계였다. 동서남북 어디서 바라보든 이 지역은 그들이 아는 세계의 끝이었다. 소발률은 서쪽으로 아라비아인 대식국, 남쪽으로 인도인 천축국, 동쪽으로 티베트인 토번국, 북쪽으로 중국인 당에 접해있었다. 페르시아를 물리친 뒤,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온 알렉산드로스가 마침내 도달한 세계의 끝도, 파미르 고원을 넘어온 고선지가 결국 이르게 된 세계의 끝도 바로 이 지역이었다. 혜초에게도, 이븐 바투타에게도 소발률은 마찬가지의 의미였다. (109)
“(전략) ‘동서남북의 모든 나라들이 소발률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겼다. 소발률에서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와 아랍과 인도와 중국과 티베트의 문화가 혼재했다.’ 모든 나라에게 소발률 너머는 이방의 땅이었다. 거기가 바로 지금 내가 가는 곳이다. 모든 게 혼재하는 곳, 수령과 백성을 버려두고 왕 혼자서 도망간 곳.” (113)
설산은 단지 눈 덮인 산이 아니다. 모든 것이 혼재되어있는 소발률, 그 곳에서 우뚝 솟아있는 세계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다. 끝, 게다가 세계의 끝이라 함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을 의미한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제목을 더듬어보자.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소설의 주인공 격인 ‘그’는 실종되기 직전 제4캠프에서 등반일지에 이 말을 마지막으로 쓰고 정상을 향해 나선다.
8,125m나 되는 고봉을 오르는 사람들의 목표는 모두 같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하여 출발한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의 목표 역시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태극기를 꽂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설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넘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의 끝인 설산을 넘어 그는 어디에 도달하고 싶은 것일까.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그는 어느 곳에 도달하여 무엇을 보게 될까.
설산을 넘어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소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소설의 표현을 빌자면, 설산 너머에 대해 문장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문이 없는 자리에는 주석만이, 기억이 없는 자리에는 추측만이 대신할 뿐이다. 그가 등반일지를 다른 사람의 배낭에 밀어넣고 떠난 것에 대하여, 원정대의 소식을 실은 유일한 신문은 짤막하게,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나’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상상의 힘으로 힘껏 추측해보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나름의 추측을 덧붙여 본다.
추측을 위해 살펴볼 것은 ‘그’가 새 공책을 사면 뒷면에 언제나 적어 넣었다던 릴케의 글이다. 이는 다음과 같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아주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 이런 면에서 인류가 비겁해진 결과, 삶에 끼친 피해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환상’이라고 하는 경험, 이른바 ‘영적 세계’라는 것, 죽음 등과 같이 우리와 아주 가까운 것들이, 예사로 얼버무리는 사이에 우리 삶에서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러는 사이 그런 것들을 느끼는 데 필요한 감각들은 모두 퇴화되고만 것이다. 신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111-112)
‘환상’, ‘영적 세계’, ‘죽음’은 인간이 얼버무리는 사이 인간이 느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은 더 이상 ‘환상’을 느낄 수 없었고, 다만 환상과 현실이 섞여있는 곳에서 문득문득 그 존재를 인식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곳에 매료되었다. 그가 모든 것이 혼재되어있는 길기트 지역, 즉, 소발률로 떠난 것은 분명 그 혼재되어있음 때문일 것이다. 그 곳에서 그는 세계의 끝인 낭가파르바트를 오르는 것이다. 이 세계의 끝, 다시 말하자면 진실의 끝이자 현실의 끝, 그리고 삶의 끝을 향해 가는 것이다.
나는 추측해본다. 그는 제4캠프를 지나 진실의 끝, 현실의 끝, 삶의 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라고. 그리고 거기서 내 추측은 더 나아가본다. 그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인 세계의 끝에서 조금 더 밀고나갔을 것이라고. 진실을 넘어 거짓으로, 현실을 넘어 환상으로, 삶을 넘어 죽음으로 떠났을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나는 조심스레 덧붙여본다. 설산을 넘은 그는 거짓 속에서 사실로는 알 수 없던 진실을, 환상 속에서 현실 너머의 현실을, 죽음 속에서 진정한 삶을 보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설산』에 대한 또 다른 글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 http://seesunblog.tistory.com/28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낭가파르바트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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