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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2.28 2. 그다지 놀랍지만은 않은 이야기, [너무 놀라지 마라]
- 2013.02.27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➁ <복수는 나의 것> : 몽타주와 사운드, 악의 없는 소통불가능성의 비극
- 2013.02.25 [근근한 가이드] 『이방인』 - 알베르 카뮈 7
- 2013.02.21 [룽의EX] 홍상수의 <북촌방향> - 벗어날 수 없는 찌질함의 섬뜩한 얼굴 1
- 2013.02.19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무의미가 갖는 의미
글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그다지 놀랍지만은 않은 이야기
너 무 놀 라 지 마 라
안녕하세요, 당신. 빙구에요.
저는 최근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상어는 헤엄치지 않으면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린다고요. 그들에게 있어서 멈춰있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 상어들은 잠을 자면서도,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헤엄을 치겠지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상어가 평생 동안 흔들리며 만드는 물결의 수를 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마찬가지겠죠, 쉴 새 없이 물결을 만들며 움직여야만, 흘러가야만 생이 있고 또 생이 있어야 죽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있어야 다시 생이 있겠지요. 희극이 있어야 비극이 있고, 또 비극이 있어야 희극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가져온 이야기에는 몇 사람의 비극적인 죽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들은 극중 내내 무척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곤 하지요. 사실 이 비극이 너무나도 오래 지속되어 온 것이라 이들에겐 그다지 놀랄 것도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혹여, 이 이야기에 너무 놀라지는 말아요. 딱히 비극이랄 것도 없어서 어쩌면 희극에 가까운, 오히려 그래서 더 비극적인, [너무 놀라지 마라]입니다.
죽음과 분간할 수 없는
첫 번째 죽음을 소개합니다. 이 극은 늙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됩니다. 베갯잇에 장례치를 돈을 넣어두고, 손톱발톱을 정갈하게 정리하고서 그는 화장실에서 목을 맵니다. 집을 나간 아내와 영화를 찍는다며 오랜 시간 집을 비우는 장남, 없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만성변비에 시달리는 둘째와, 노래방도우미로 일하며 몸을 파는 거짓말쟁이 며느리를 남겨두고요.
둘째 : 눈 좀 감아 아버지. 감으라니까
아버지 : 나좀 내려줘!
목아파 죽겠다!
나좀 내려줘!
나 목 부러지겠어!
둘째 : 나 좀 쳐다보지 마!
자꾸 그러면 나 진짜 이집 나간다!
아버지 : 가지마! 나 심심해
둘째 : 아 배야!
아 왜 여기서 죽은거야
손톱을 깎으며 그는 둘째아들에게, 같이 낚시를 다니던 친구의 유언을 들려줍니다. 전단지 뒤편에 사인펜으로 휘갈긴 유서, ‘너무 놀라지 마라’…….
그의 바람대로, 식구들은 정말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시체 썩는 냄새가 똥냄새와 섞여 진동을 해도 장례를 치를 생각보다 고장 난 환풍기를 고칠 생각을 먼저 하지요. 썩어가는 아버지가 풍기는 악취를 참는 것을 ‘인내’라고 표현하면서요. 아버지는 극 내내 화장실 천장에 매달려 나 좀 내려줘, 나 좀 내려줘 하고 애원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죽기보다도 더 비참했던 그의 생을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 둘째야 둘째야!
(사이) 아 죽는 게 이런 거구나
난 몰랐다
혼자 있는 게 두려워서 혼자 있는 게 무서워서 이걸 선택했는데
여기서도 난 혼자다.
살다보면 의무 방어라는 게 있지
하기 싫어도 무조건 해야 하고
죽기보다 가기 싫은 곳도 없는 돈에 택시타고 가고
내 짝이 꼭 그짝이다
낚시터엘 갔더니 주인이 문자메세지를 보여 주는거야
그 놈 때 돼서 죽었거니 생각하고
좌대 찾아 자세를 잡는데 돈 받을 생각을 안 해
그러더니 매운탕 한 그릇에 소주 몇 병 들고 오더니
속 데 핀 다음 자기 차 타고 같이 문상을 가자네
“내가 그 새끼 죽은 델 왜” 마음속으론 이러면서
술 몇 잔 들어가니까
“그래 당구장 너도 참 이 세상 힘들게 살아왔다!” 싶더라구
차 타고 한 시간 쯤 왔나?
분당에 있는 병원인데 꽤 크더라고
봉투만 내고 나오려는데
낚시터가 국화 꽃 한송이 올리래
안에선 요단강 어쩌구 찬송가 나부랭이 들리고
근데 이게 뭔 개 뼉따구 같은 시추에이션이냐?
왜 그 새끼 영정 옆에
집 나간 내 마누라가 눈물 뚝뚝 흘리고 있는거니
왜 내 마누라가 흰 소복입고 거기서 나랑 맞절 올리는 거냐구?
너무 놀라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택했지만, 어쩌면 너무 놀란 것은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 자신이었던 건 아닐까요?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집나간 아내 모습에, 상복 입은 자신의 아내와 맞절을 올리고 있는 자신의 끔찍하도록 비참한 꼴에 너무 놀란. 죽음과 다를 바 없는 끔찍한 그의 삶에 너무 놀라고 또 한편 너무 질려서 그는 스스로 죽음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죽은 후에야 깨닫게 됩니다. 죽어서도 그는 그의 냄새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는 그의 삶이 이미 죽음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과거에서부터 오랜 시간동안 죽어 있었다는 것을. 이렇듯 극에 드러나는 첫 번째 죽음은 사실 아주아주 오래 전, 그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죽은 꿈에 젖물리는
두 번째 죽음의 주인공인 며느리를 소개할게요. 사실 죽음이라기보다도 ‘살아있지 않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에서 과연 살아있었던 순간이 있었는지조차 분명치 않은 인물이거든요. 그녀로 말할까 하면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면서 이 집에서 유일하게 돈을 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알 수 없는 여자이기도 하구요. 매일 밤 덕지덕지 칠하는 화장처럼요.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술이 없으면 하루도 넘기지 못하는 알콜중독자가 되어 그녀의 꼬인 인생을 매일같이 한탄합니다. 그러나 그녀도 그녀 인생의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언젠가부터 시작한 거짓말이 어디서부터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였는지 알 수 없듯이요. 지독하리만큼 이기와 허영, 야망으로 점철된 남자를 사랑했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요. 하지만 정말로 그녀가 그녀의 남편을 사랑하긴 했을까요? 답은 그녀만 알겠죠. 아니, 사실은 그녀도 잘 모를 것 같습니다.
아버지 : 아가야 잘 살아라
며느리 : 아버님이나 잘 사세요
(둘째에게)팁까지 주면서 술 따라 주는데 어떻게 거절하냐?
미친 새끼들! 한번만 가재
여관 가서 따악 한잔 더 하재
아니 술을 왜 여관 가서 마셔
술집에서 마셔야지 모텔도 아니고
아버님 요샌 솔직한 새끼들이 없다니까요
그냥 다이렉트로 “아줌마 나랑 한번 자자”
이러면 얼마나 좋아요 정직하게
그럼 나도 외로우니까 잠깐 망설이다
하루 밤 같이 몸 풀 수 있는 거 아닌가?
제가 몸팔러나가는 거지 진짜 노래방 도우민가?
안 그래요 도련님
눌러봐 2556!
(노래한다)
“추억이 흘러내려 내 맘에 젖어있네
쌓여진 옛 이야기 잊을 수 없다네.
바람이 나부끼면 나뭇잎 떨어져서
내님에게 날아가 소식 전하지.
아~ 바람아 불어라
내 님 있는 그곳까지 불어다오
짜자잔 짜 짜자잔
짜짜자자 짜짜자 짜짜짜잔“
들어간다
여보 나 왔어 여보!
둘째 : 형 없잖아
형수 : 알아 임마 자식아
아무도 없지
분명한 것은 한가지뿐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덕적 덕목과 그녀가 영위하는 삶의 존엄 따위는 미처 생각해 볼 틈새도 없이, 그녀의 삶이 생존 앞에서 정신없이 치여 왔다는 것이죠.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술에 잔뜩 취해서, 밤마다 그녀가 마주해야 하는 추악한 거짓말과 가식을 비웃고 추억과 사랑을 노래합니다. 과연 행복했던 적이 있는지조차 의문스러운 거짓말쟁이 그녀가 말이에요.
형 : 질투?
내가 뭐에 대해서 질투를 느껴야 하지?
사랑? 가족? 행복한 소리 하지마라
질투는 지금 니가 하고 있는 거 같은데
둘째 : 형수 이 꼴 좀 봐
환풍기 하나 못 고치는 위인이 비굴하기까지 하네
형 : 왜 밀라노에 있는 자식 생각나서 슬퍼지니?
왜 보고 싶으면 전화라도 해봐 그런데 어쩌지?
니 애는 지금 한국말 다 잊어버렸을 걸
여보 이태리 말로 ‘잘 있었니’가 뭐지?
며느리 : 꼬메스타이(come stai)
형 : 생각보다 발음도 쉽네, 꼬메스타이(come stai)
그녀에게도 한때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이태리로 입양보낸 그 아이의 아버지가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동생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놀라운 말이 진짜일까요? 이것도 그녀만이 알겠지요. 시동생이 먹을 게맛살이나 독한 관장약 따위를 늘 챙겨주고, 밤마다 독수공방하는 형수의 이불 속으로 고양이처럼 파고드는 시동생을 내버려두는 그녀가 사실 한번쯤은 시동생과 잤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뭐, 어쨌든 이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따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시동생이 되었다가,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남편이 되었다가, 노가다를 뛰는 밤손님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녀가 그리워하는 사랑과 아이와 소망은 허상뿐이고, 그녀는 껍질만 남은 모성애에서 젖을 빠는 것은 그녀의 아이가 아니라 밤마다 바뀌는 그 아이의 아버지인 걸요.
그녀는 매일 밤 웅웅거리는 마이크와 촌스러운 불빛, 치맛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손님들 사이에서 꼬메스타이, 꼬메스타이 하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인생에 있었는지조차 의문스러운 추억과 사랑과 꿈에게 잘 있었느냐, 잘 있었느냐고……. 그러나 그녀의 안쓰러운 노래는 머나먼 이국 땅으로, 그녀가 한번도 닿아본 적 없는 행복한 삶과 한때 그녀의 모태에서 뛰었던 심장을 가진 아이에게로 흘러들지 못하고 더러운 방구석에 고이기만 합니다.
죽은 모태에 기생하는
이 퀴퀴하고 더러운 방에 남겨진 세 번째 죽음 차례입니다. 엄마가 집을 나간 후 한발짝도 밖에 나가지 못하는 히키코모리 둘째아들이 그 주인공이랍니다. 그는 형수를 엄마와 동일시하여 모성으로부터의 애정결핍을 형수에 대한 강한 집착과 성적 욕망으로 바꿔버린 인물입니다. 방구석에 누워 집에 남은 엄마의 희미한 그림자를 더듬으며 만성변비에 시달리는 그의 모습은 그가 사는 방을, 생이 내뿜는 독소를 배설하지 못하고 죽음의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그의 무겁고 더럽고 낮은 방을 그대로 빼닮아 있습니다.
둘째 : 어떻게 알았어. 내가 아버지 냄새 지독히 싫어하는 거
그래서 같이 있기도 싫고 쳐다보기도 싫고
지금처럼 이렇게 애기하는 것도 지긋지긋해
아 숨 막혀!
지금도 나, 토할 거 같은데도 억지로 꾹 참고 있는 거야
안 보여 나 참는 거?
지금 요 아래 목구녕까지 게맛살이 쭈욱 올라와 있어
근데 왜 내가 아버지
그 당구장 친구 장례식 얘기 듣고 있는 줄 알아?
내 방 냄새보단 보다 나으니까
내 몸 똥구멍에서 나는 냄새 보다 나으니까
어쩌지 아버지
아버지 냄새보다 내 몸 썩는 냄새가 더 독한 걸
내가 바보야, 내가 모를 줄 알아, 내 몸 썩는 냄새를?
왜 나도 아버지 죽을 때 같이 죽어줄까?
같이 베란다에서 목 메 줄까
근데 어쩌지? 우리 집은 베란다도 없는데
둘째의 말대로 아버지는 베란다도 없는 탓에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죽어갑니다. 하필이면 둘째가 하루에도 몇 번씩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화장실에서요.
이 화장실은 변비와도 같은 이 가정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나날들이 밀려들어오는데, 이 나날들을 소화할 수 없는 인물들을 품은 그 방은 결국 시간을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공간이 되고 맙니다. 어쩌면 이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들이 부재한 데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비극의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극 내내 심화되는 이러한 비극은 계속되어 중첩되고, 급기야는 며느리가 집안으로 끌어들인 외간남자와 남편, 며느리와 둘째가 시체를 앞에 두고 한 자리에서 화목한 대화를 나누는, 엽기적이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 희극적인 장면이 연출됩니다.
남자 : 누나 이집은 좀 다른 줄 알았는데 사는 게 다 똑같네
우리랑 같애 내 집 같애
아 그러고 보니 정말 환풍기가 안 도네
그러니까 이렇게 공기가 탁하지
며느리 : 해 봤어 저런 거?
남자 : 해본 일만 하면 평생 아무 일도 못하지
다음에 고쳐 드릴 게요 쉬워요
근데 언니 아버님 때문에 작업하는 게 골치 아프겠네
둘째 : 정말 고쳐줄 거야?
남자 : 그럼
둘째 : 언제 올 건데?
남자 : 뭐 아침이라도 당장
둘째 : 우와! 형 들었어? 저 얘기? 형수님!
남자 : 처음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는데 지금 왁자지껄한 게 사람 사는 집 같네요
누님 갈게
며느리 : 저녁때 봐
둘째 : (열쇠 주며) 언제라도 와! 형!
남자 며느리와 키스하고 나간다
둘째 : 고마워 형수!
형 : 시원하니 이제?
형수 친구 앞에서 지 형 치부 드러내 보이는 게 그렇게 좋아?
둘째 : 어쩐지 저 형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달랐어
우리 식구들이랑 분위기가 달라
남을 배려해주고
며느리 : 여보 도련님 웃는 거 오랜만이지? 어때요?
모처럼 모든 가족이 모였는데 우리 술 한 잔 하는 거
형 : 가봐야 하는데 한잔만 하지 뭐
둘째 술을 꺼낸다
며느리 : 저 남자랑 누워있었어
아무 말 안하고 그냥
저 남자가 내 귓불 빨아주는데 달콤하고 몽롱했었어
여보 그런 기분 알아?
손을 잡았지
아까 봤지 당신? 저 남자 손 큰거.
당신 손보다 크고 두툼해
근데 얼마 안 있어 땀을 흘리더라고
내가 좋은가봐
나도 생각해 봤어
나도 정말 이 남자가 좋은지
이 시간이 행복한지
그러다 또 이런 생각도 해봤어
우린 왜 한 번도 우리 앞날과 우리들의 아이
그리고 소망에 대해 얘기하지 않은 거지?
형 : 그런 게 뭐가 중요해?
며느리 : 맞다
다 부질없지
당신, 보이시나요? 다른 남자가 끼어든 가정의 대화에서 거짓말처럼 활기가 돌고 웃음이 피고 있는 것을? 당신은 이 비극적이다 못해 희극적인 광경에서 처참하게 바다 밑바닥으로 침몰하는 가정의 마지막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소통이 단절된 채 썩어가는 한 가족의 병리는 극에 달하고 마침내는 파멸의 길을 걷지요. 마치 죽어가는 고목을 숙주삼아 핀 독버섯에 화색이 돌 듯, 죽은 모태에 기생해 마지막으로 생기를 내뿜는 이 환한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너무 놀라지 마라]에서 우리는 바다 밑바닥으로 무겁게 가라앉아버린 몇 마리의 상어들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경직된 사체가 생전에 빚은 수천 수만 개의 물결들이 고이고 고여 풍기는 냄새를 발견하고, 그리고 그 냄새에 코가 막혀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 심지어는 냄새가 나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가 별로 놀라지도 않고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글을 풀어가는 동안 저는 이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몇 명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는 죽음은 과연 몇 개인지. 당신도 한번 세어보세요. 그럼 당신은 이렇게 대답하겠죠? 음, 우선 아버지와 며느리, 그리고 둘째가 있겠죠, 라고요. 흐음. 과연 그게 다인가요? 라고 반문하면 당신은 머뭇거리며 어쩌면 며느리가 끌어들인 외간남자와 며느리의 남편까지 모두 해당될 수도 있겠습니다, 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리고 또 누가 있을까요 하고 또다시 물으면 이번엔, 놀랍게도 또 있다고? 라고, 당신이 이쪽으로 반문할지도 모르겠네요. 글쎄요, 놀랍나요? 그렇지만 과연 그게 과연 놀라운 일일까요? 뭐, 글쎄요, 하긴…… 너무 놀라운 일들이 많은 이야기긴 하죠. 그래서 어느새, 저 놀라운 풍경을 놀라지도 않고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당신 자신의 모습은 이제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게 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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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➁ <복수는 나의 것> : 몽타주와 사운드, 악의 없는 소통불가능성의 비극
복수는 나의 것 (2002)
Sympathy For Mr. Vengeance
‘우연히 시작된 비극, 상상보다 거대한 파국’
최근 개봉한 영화 <스토커>의 감독 박찬욱의 2002년 작 <복수는 나의 것>. 한국 최초의 정통 하드보일드 무비라는 이 영화는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지는 박찬욱 표 복수극의 시작점이다.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 내내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생경함을 갖게 한다. 분명 상업영화이지만 대중에게 조금은 덜 친절한 이 영화, 무엇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일까.
말 없는 몽타주와 소통불가능성의 조건
류(신하균 분)는 선천성 청각 장애인으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 한다. 말할 수 없는 류를 대신해 가끔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류의 대사가 화면에 등장한다, 마치 무성영화처럼.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이 영화는 어떤 공간에서든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담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사람의 목소리와 발소리는 물론, 창문 밖 빗소리와 사이렌 소리, 야구 배트의 경쾌한 충돌음과 거친 숨소리, 희미한 지하철 경적 소리, 귀가 멀 것처럼 커다란 제철 공장의 공정 소리와 매미 소리, 방음이 안 되도 너무 안 되는 류 남매 집 건물의 온갖 소음들과 빈 건물을 관통하는 공기의 흐름소리까지 모두를 놓치지 않고 매우 충실하게 담아낸다. 다른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칠지언정, 류에게는 애초부터 들리지 않는 다른 세계의 소리. 아무런 대사도 없이 류의 일상과 주변을 무심하게 관찰하는 영화 초반부는 장면의 조각들이 엮어진 몽타주montage의 형태를 강하게 띤다.
러시아의 영화 이론가이자 감독인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에 의해 체계화된 몽타주 이론의 핵심은 단순한 편집으로서의 쇼트와 쇼트의 결합을 넘어서는 ‘제 3의 의미를 창조하는 쇼트와 쇼트의 충돌’로서 정의될 수 있다. 사람 인(人)과 나무 목(木)이 만나 쉴 휴(休)가 되듯이, 변증법의 정(正)과 반(反)이 만나 합(合)이 되듯이. <복수는 나의 것>의 몽타주는 이런 식이다. 주인공 류의 대사는 하나도 없이 이어지는 장면들의 연결. 류의 혈액형이 누나와 달라서 신장이식을 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 → 배팅 연습장에서 힘껏 배트를 휘두르는 류의 모습 → 병원 화장실에 붙여진 장기 알선 스티커 → 류가 일하는 공장의 공정과 소음과 노동자들 그리고 류 → 버려진 소파에 쪼그려 앉아있는 할아버지의 바지를 입혀주는 류 → 온갖 소음이 모두 들리는 류 남매의 집 → 누나가 통증으로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벽에 귀를 대고 자위하는 옆방의 청년들과 아무 것도 모른 채 라면을 끓여먹는 류.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사건 전개의 중심은 인물들의 대사로 옮겨가지만, 초반부의 몽타주는 영화 전체를 관장하는 열쇠가 된다. 듣고 말하지 못하는 이가 가질 수밖에 없는 소통불가능성에 대한 주목. 그리고 모두가 소통하지 않음으로 인한 파국으로의 전개.
관성으로서의 복수, 그 자체가 나에겐 중요하다.
“저는 착한 사람입니다. 성실한 근로자죠.”(류)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유선 아빠)
중심인물 두 명-류와 유선 아빠(송강호 분)-에게 닥치는 비극은 지나치게 가혹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나쁘게 살아온 사람도 아닌데 왜 이리도 가혹해야할까…. 영화의 영어 제목 <Sympathy for Mr.Vengeance>에서 보이듯 연민, 결국엔 잔인한 살인자가 되는 이들을 위한 연민을 준비시키는 사건들의 얽힘을 어떤 면에서 참 친절하고 섬세하다. 어쨌거나 누나를 살리고 싶었을 뿐인 성실하고 순진한 근로자 류, 사장으로서의 지위와 많은 재산도 딸의 죽음 앞에 다 버리는 유선 아빠.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이를 잃은 ‘착한 사람’에게 복수는 이제 삶의 이유가 된다. 천진난만했던 벙어리 청년은 자신과 누나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근원을 단죄하는 잔인한 살인마가 되고, 이것만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강변하듯 그들의 신장을 우걱우걱 씹어 먹는다, 무표정으로. 유선의 시신 부검을 지켜보며 눈물을 참지 못하던 유선 아빠는 류의 누나 부검을 지켜보면서는 하품을 하고, 영미(배두나 분)를 전기고문하면서는 짜장면과 단무지를 씹어 먹는다, 역시 무표정으로.
증오와 복수심만이 삶의 동력이자 관성이 되어버린 이들은 폭주하는 자신을 멈출 용기도 능력도 없다. 내가 그를 죽여야만 마침내 완성되는 복수. 어쩌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임하게 된 이 잔혹한 복수극을 즐기고 있다. 그들에겐 상대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기에 (류가) 나쁜 사람이 아닌 걸 알지만 죽여야만 하고, 원래는 (유선을)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닌 탓에 미안하며 이 사람(유선 아빠)이 나(류)를 죽이는 것도 그럴 만 한 일이다, 여전히 죽는 것은 두렵고 나도 그를 죽이고 싶지만. 그저 용서와 연민과 이해를 서로, 나눌 수 없을 뿐이다. 복수 그 자체가 중요해진 이들에겐 상대의 죽음이라는 결과보다 내가 상대를 죽인다는 죽임의 행위가 중요하다. 철저히 내 입장에서! 그래서인지, 그렇게도 기다렸던 상대의 죽음인데도 상대방이 죽는 순간-숨이 끊어져 고개가 축 쳐진다든지 손이 떨어진다든지, 발버둥 치던 사람이 물에 떠오른다든지-은 굳이 포착되지 않는다. 복수는, 나의 것.
결국 ; 모두의 소통 부재와 파국으로의 귀결
다시 처음, '류'라는 인물에 대한 설정으로 돌아가보자. 류가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처하는 일상적/비일상적인 비극은 참혹하게 드러나곤 했다. 누나의 고통을 모른 채 라면을 끓여먹는 장면에서, 유선이 물에 빠져 죽는 것도 모른 채 누나의 돌무덤을 만들던 장면에서. 그러나 이는 하나의 다른 조건일 뿐, 다 들리고 다 말할 수 있는 유선 아빠에게도, 그리고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유선의 사진을 보며 영미(배두나 분)의 비명을 외면하는 유선 아빠. 유선 아빠가 외면했던 해고노동자 가족의 동반 자살과 그 안에서 살아남아 유선 아빠의 돌봄을 받지만 결국 다시 죽고 외면당하는 그 노동자의 아들. (류의 누나처럼) ‘아픈’ (유선만큼 아끼는)‘딸’을 둔 경찰 수사 반장. 절박한 사람들의 장기를 훔쳐 팔아서 먹고 사는 장기 알선 업자 가족의 조금은 눈물겨운 몰살. 중심 인물이 아니어도 모든 이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소통불가능성을 소지하고 있다. 울타리 밖과는 결코 소통하지 않은 채 나의 울타리를 침범한다면 언제든 나의 복수를 할 사람들. 이게 바로 소통불가능성이 아닌가. 들을 수 없음과 말할 수 없음과 분절된 장면들의 연결은 청각장애인 류만의 것이 아니다. 파국은 충분히 예정된 귀결일 뿐이었다.
그렇다. 영화 초반, 아니 인물 설정에서부터 공을 들여 강조하고자 했던 소통불가능성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복수'를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의 메시지는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복수의 이면에 존재하는 인간의 이야기.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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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1 - [김근근의 근근한 가이드] - [근근한 가이드]『프랑스적인 삶』 - 장폴 뒤부아
[김근근의 근근한 가이드 - 프랑스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L’Étranger)』을 읽는
세 가지 가이드 포인트
빈티지간지를 풀풀 풍기는 프랑스어판 『이방인』 표지
뫼르소는 프랑스령 알제리의 평범한 월급쟁이다. 아니, 평범하다는 말은 조심해야겠다. 뫼르소는 모친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다음날 태연히 코미디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까맣게 잊은 듯 애인과 해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아무런 감정적 동요도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우연히 이웃의 분쟁에 휩쓸려 아랍인에게 이유도 없이 총을 쏘고서는 “모두가 태양 때문”이라고 재판장에서 대답한다. 사회가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감정적 반응이나 태도에는 조금도 부합하지 않으니, 뫼르소는 요즘 말하는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그런데 『이방인(L’Étranger)』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조금도 그를 비난하는 기색이 없다.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로 뫼르소의 생각과 행동을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사회적 규범과는 동떨어지게 행동하는 뫼르소를 옹호하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라고, 혹은 응당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려는 듯이.
20세기 최고의 소설이라고 칭송받기도 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슬프게도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무감각한 방관자 뫼르소의 행동은 보편적인 도덕률로 이해하기 어렵고, 그가 처하는 상황도 한 편의 부조리극처럼 알쏭달쏭하다. 제목으로 달린 ‘이방인’은 뫼르소의 일탈적인 행동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프랑스와 알제리 모두에서 이방인이었던 알제리 태생 프랑스인 카뮈 자신의 처지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1그러나 무엇도 확실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 소설을 읽는가? 어머니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사람을 쏘아버린 뫼르소의 이야기가 그토록 위대해서? 카뮈가 1957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위대한 작가라서? 게다가 『이방인』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이 서늘한 감정은 무엇인가? ‘부조리’의 문학이라는 평가은 어떤 의미인가? 애초에 부조리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끌리는가?
이러한 물음을 염두에 두고 이제 20세기 중반의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령 알제리로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자.
#가이드 포인트 1:
저 구역질나는 나라 프랑스의 이방인
카뮈는 프랑스 작가라고 한다. 프랑스인 아버지를 뒀고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으니 그렇게 말해도 무리는 없겠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온전한 프랑스인이 되어본 일이 없다. 저 위대한 미술과 문학의 나라, 혁명과 인권, 톨레랑스가 있는 ‘아름다운’ 프랑스는 카뮈와 무관하다. 그의 아버지 뤼시엥 오귀스트 카뮈(Lucien Auguste Camus)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징집되어 전사하기 전까지 프랑스 땅을 밟아본 일도 없는 알제리의 포도농장 노동자였고, 그의 어머니 카트린 생테스(Catherine Sintés)는 스페인 혈통의 하녀였다. 2 카뮈가 유년시절을 보낸 알제리의 빈민가는 ‘식민지 속의 식민지’일 뿐이었다. 그는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알제의 원주민들과 쉽게 동화될 수 없었지만, 결코 ‘아름다운’ 본토 프랑스인이 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노동자의 아들인 카뮈의 배경은 식민지 지배자들의 호화로운 삶과도 거리가 멀었다. 말하자면 카뮈는 프랑스에서도, 알제리에서도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카뮈가 일생을 보냈던 프랑스령 알제리이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알제리는 바로 요기. 프랑스로부터 1962년에 독립한다.
다시 소설의 줄거리로 돌아가 보자. 뫼르소는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의 프랑스인이다. 그는 어느 뜨거운 여름 바닷가에서 햇빛 때문에 지나가던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 죽여 재판을 받는다. 이를 우리 역사로 바꾸어보면 일제 말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청년이 지나가던 조선인을 쏘아죽인 셈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아무런 후회나 반성도 없이 자신의 행동을 담담하게 설명할 뿐이고, ‘태양’을 탓하는 것 외에 아무런 정당화도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형대에 서서야 자신이 죽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프랑스인이 ‘무기를 든 아랍인’을 죽인 사건은 스스로를 변호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죄를 벗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자신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듯이 태연자약하다. 이 무슨 천인공노할 이야기인가?
사실 카뮈에게 알제리의 식민지 상황은 안중에도 없다. 그저 소설 속 뫼르소의 부조리한 행동이 일어나기 위한 한갓 배경일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배경은 대단히 지겹고 부조리하며 무의미한 현실이다. 사실 카뮈에게는 식민지나 프랑스나 어디나 마찬가지다. 그저 부조리하고 구역질나는 세상일 뿐이다. 그에게 프랑스는 더 이상 아름답지도, 위대하지도 않다. 따라서 『이방인』은 위대한 프랑스를 노래한 국민작가 알퐁스 도데나 앙드레 지드와는 정 반대의 지점에 있다. (카뮈의 알제리적 배경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카뮈에게 알제리나 프랑스는 이 세상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곳이지만, 그의 그러한 관점에는 프랑스령 알제리에서의 경험이 짙게 드리워있다.)
뫼르소는 이런 해변에서 아랍인을 총으로 뿅뿅 쏴죽인 사이코패스인 셈이다.
그래서 전쟁 중인 1942년 이 소설이 세상에 나왔을 때,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이 소설에 미친 듯이 열광했다. 뫼르소는 전쟁에 의해 유럽에 절망한 프랑스 청년들의 전형이었다. 3 어머니가 죽어도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애인과 정사를 나누고,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그것을 부정하기는커녕 천연덕스럽게 인정하며 처형당하는 ‘새로운 인간상’이었다. ‘극단의 시대’ 20세기를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아 세계는 두 차례에 걸친 지구 규모의 파괴와 살육을 목도한 참이었다. 이 소설이 발표 것도 1942년 히틀러의 점령 하의 파리였다. 전쟁은 수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정답을 주지 않았다. 선과 악은 무엇인가?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더러운가? 누가 압제자이고 누가 해방자인가? 인간은 누구이며, 세계는 어디로가고 있는가? 4 프랑스의 청년들은 수많은 질문들 앞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 모든 가치와 본질은 사라진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도 없다. 옳고 그른 것도 없다. 뫼르소의 입버릇 - ‘이러나 저러나 상관없어요’ 혹은 ‘그건 중요치 않아요’ - 가 바로 그러한 모습이다.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울 수도, 안 피울 수도 있다. 레몽과 친구가 되어도 좋고, 안 되어도 좋다. 마리와 결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해줄 수도 있다. 이런 삶에서 ‘태양 때문에’ 사람 하나 죽인다 한 들 뭐 그리 대수겠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아무런 목적도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덩어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가이드 포인트 2: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덩어리다. 적어도 실존주의의 대표주자라는 사르트르에 따르면 그렇다. 실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잠깐 다음 도식을 참고해보자
존재(être) <-> 無(néant)
실존(existence) <-> 본질(essence)
존재 = 실존 + 본질
모든 ‘존재’는 덩어리라는 ‘실존’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물이나 사람과 구분되는 ‘본질’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나는 육체 덩어리라는 ‘실존’과 나를 나이게끔 하는 ‘본질’로 구성된 ‘존재’이다.
그런데 사르트르에 따르면 사물은 본질이 실존에 앞서지만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자동차를 만든다면 먼저 자동차의 기능과 작동원리 등 본질이 결정되고, 일정한 작업을 거쳐 비로소 자동차라는 실존을 탄생시킨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의 덩어리라는 실존의 탄생 이전에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본질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그저 아무런 이유와 목적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육체덩어리일 뿐이다. 그러한 인간에게 미리 정해진 규범이나 본질, 목적은 없으며, 따라서 인간은 무슨 행동이든지 해도 좋다. 이 무한한 자유와 선택지 앞에서 사르트르는 구토(nausée) 6를 느꼈던 것이다.
카뮈의 뫼르소에게도 삶과 죽음은 절대적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습관과 타성에 젖어 살아갈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근원적인 물음이 떠오르는 순간이 오면 인간은 막막하고 아련한 부조리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나는 왜 사는가? 혹은 왜 죽지 않는가? 죽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죽이지 않을 이유는 있는가?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가? 인간이 습관과 타성에서 깨어나 자신의 실존을 의식하는 순간 모든 것은 부조리해지고 만다.
이러한 카뮈의 실존주의는 특히 2부의 재판정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뫼르소를 기소한 검사의 논리는 뫼르소의 부조리와는 정 반대에 있다. 재판정에서 뫼르소가 사형에 처하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는 논리에 기반해 있다. 요컨대 살인을 했기에 범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이기에 살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뫼르소는 왜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냈는가? 왜 어머니의 시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는가? 왜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잠을 잤는가? 왜 장례식 다음 날 해수욕을 갔으며, 거기서 만난 여자와 코미디 영화를 보고 섹스를 즐겼는가? 왜 레몽 같은 패륜아를 친구로 사귀고, 추잡스런 정사 사건의 증인 역할을 수락하였는가?……. 7
이 질문들 속에서 뫼르소의 본질은 살인자로 전제되어 있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조차 슬퍼하지 않은 패륜아이기 때문에 그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재판정의 논리 속에서 인간은 국가와 사회, 역사와 문화에 의해 세밀하게 짜여진 규범과 도덕으로 규정되는 존재다. 말하자면 인간의 본질은 해당 사회의 구조와 권력에 의해 이미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 이탈하는 자는 인간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다. 카뮈가 자신의 책을 해설한 대로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행위는 패륜이라기보다는 저항이고 일탈이라기보다는 구도(求道)행위이다. 뫼르소가 사형선고를 받고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그가 사회가 요구하는 일종의 집단적 유희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정해진 상황과 조건 속에서 필요한 감정을 연기하고 규범에 따라 거짓말하는 유희. 카뮈가 뫼르소를 옹호하고, 오히려 인간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까지 말하는 진정한 이유는 그가 감정의 은폐 없이 삶의 진실만을 말하려 했던 진실의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소설은 전통적 권위에 도발적으로 저항하는 반체제소설이다.
#가이드 포인트 3:
무(無)스타일의 스타일
마지막으로 『이방인』을 읽는 한국인 독자들에게는 아쉬울 이야기를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카뮈의 『이방인』은 그 간결하고 단순한 문체로 유명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재밌는 말이 있다. 카뮈의 글을 읽은 프랑스인들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카뮈의 소설들은 대단히 짧고 쉬운 문장이 사용되기 때문에 대학 불문과에서 입문용 교재로 사용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필자의 경우 두 달 프랑스어를 배우고 이방인을 읽기 시작했다.) 직접 도입부를 프랑스어로 읽어보자.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J’ai reçu un télégramme de l’asile : « Mère décédée. Enterrement demain. Sentiments distingués. » Cela ne veut rien dire. C’était peut-être hier.
갑자기 프랑스어가 튀어나왔다고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한 문장씩 영어와 함께 파악해 보자.
Aujourd’hui, maman est morte.
Today, Mom is dead. (오늘, 엄마가 죽었다.)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Or maybe yesterday, I don't know.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까, 모르겠다.)
J’ai reçu un télégramme de l’asile
I received a telegram from the Asylum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통 받았다.)
구글 번역기로 돌려도 직역이 가능할 만큼 단순한 문장이다. 이런 문장이 소설 전반에 계속된다. 특히 프랑스어에서 이른바 ‘복합과거(passé composé)’라고 말하는 시제가 사용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프랑스 소설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복합과거는 일상적 사실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매우 구어적이고 평이한 표현으로, 단순과거의 역사적, 문어체적 어투를 주로 사용해 온 이전의 프랑스 소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프랑스 원어민들에게 복합과거와 단순과거가 갖는 어조의 차이는 매우 즉각적으로 전달된다고 한다. 짧고 구어적인 문체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건조하게 서술해 나가는 뫼르소의 어투에서 그의 세상에 대한 무심한 태도가 직접적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번역본으로 소설을 읽는 우리로서는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또 『이방인』에는 마치 중학생이 일기장에 기록한 글처럼 지극히 짧고 단속적인 문장이 접속사도 없이 사용된다. 흔히 카뮈의 문장을 고독한 섬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문장과 문장이 희미한 인과관계로만 묶인 채 병렬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문장과 문장 뿐 아니라 문단과 문단,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에도 인과관계나 우열은 매우 희미하게만 제시된다. 마치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는 듯이 가치중립적인 태도로 소설이 전개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소설에서 보이는 갈등의 고조나 기승전결, 인과관계를 따르는 줄거리는 『이방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요컨대 여러 에피소드들을 특별한 강조점 없이 고만고만한 문체로 단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카뮈가 수사학적 장식을 극도로 절제한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위에서 카뮈의 실존주의를 설명할 때 보았던 ‘실존과 본질’, ‘이유 없음’, ‘무가치함’, ‘우연성’ 등의 정신이 그대로 문체와 기법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카뮈의 ‘중성적 글쓰기’를 두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카뮈의 『이방인』에 의해 처음 자리잡게 된 그 투명한 말은 어떤 부재의 문체를 완성하였다. 그것은 스타일의 이상적인 부재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국인 독자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카뮈의 문체상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번역본으로는 김화영의 번역본이 주로 추천된다. 국내 여러 번역본의 첫 문장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김화영, 책세상)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이휘영, 문예출판사)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방곤, 범우사)
#여정을 마치며
1957년 노벨문학상 역대 두 번째 최연소 수상자 8의 영예를 안은 지 3년 뒤, 알베르 카뮈는 새해를 맞아 떠났던 여행길에서 5번 국도를 타고 돌아오던 길에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를 정면으로 들이받아 즉사한다. 그의 소설만큼 부조리로 가득 찬 죽음이었다.
잘생긴 카뮈찡^^* 사르트르랑 친구라서 그런지 패션과 포즈도 비슷한 듯...
삶의 이방인이 되어본 이들은 어느 날 카뮈를 찾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카뮈는 쉽게 답을 주지 않는다. 그가 어렴풋이 제공하는 답도 신통찮기 그지없다. 그저 우리 뒤를 끝없이 좇는 불가해한 질문을 던져놓는다. 지금까지 근근하게 써 내려간 김근근의 근근한 가이드가 그러한 질문을 받아 안는 작은 길잡이가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프랑스 편인데 알제리로 갔다고 욕하지는 않길 바란다. 출간 당시에는 알제리도 프랑스였다.)
그럼 이만,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다. 근근!
※참고로 올해는 알베르 카뮈 탄생 100주년. 여러 출판사에서 이런저런 카뮈 관련 책을 새롭게 출판하고 있고, 불문학계에서는 학술대회도 준비중이라고 하니 관심있게 지켜봐도 좋을 듯 합니다!
- 프랑스어에서 원제인 L’Étranger는 "이국foreign", "해외overseas", "미지unknown", "무관extraneous", "외부인outsider", "낯선 사람stranger", "생경한, 이질적인alien", "무관한unconnected or irrelevant" 등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고 한다. 어느 것을 대입해도 뫼르소가 처한 상황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영역본은 초기에 "The Outsider"라는 제목을 달고 출판되었지만, 근래에는 "The Stranger"가 더욱 일반적이다. 한국판 제목은 주로 “이방인”으로 통일되어 있지만, 종종 “이인(異人)”이라는 제목도 보인다. [본문으로]
- 유기환, 『알베르 카뮈』, 살림, 2004. p. 9 [본문으로]
- 박홍규, 『카뮈를 위한 변명』, 우물이 있는 집, p. 42 [본문으로]
- 유기환, 앞의 책, p. 30 [본문으로]
- 카뮈는 스스로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혔다는 점을 참고해두자. 특히 그의 철학사상이 중점적으로 전개된다고 평가받는 『반항인』에서 카뮈는 사실상 ‘저항’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인간의 실존 앞에 두고 있다. 따라서 그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적어도 『이방인』에서의 카뮈는 사르트르와 유사한 실존주의적 관점을 아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카뮈가 실존주의자라고 말하는 것도 전적으로 타당하다. [본문으로]
- 사르트르의 대표 소설 제목. [본문으로]
- 유기환, 앞의 책, p. 38. [본문으로]
- 최연소는 마흔두 살에 수상한 키플링(Kipling)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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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2. 홍상수의 <북촌방향>
- 벗어날 수 없는 찌질함의 섬뜩한 얼굴
※ 감상의 큰 줄기는 이동진 평론가의 평을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룽의 EX 소개글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조금 찌질하지만 모두들 자기 애인의 EX를 궁금해 한다. 그런데 실은 그보다 더 궁금하고 더 찌질한 궁금증이 있다. 그래서 숨기고픈, 하지만 나도 모르게 알려고 하고 있는, 그러다보면 어느새 문득 내가 싫어지는 블랙홀 같은 궁금증. 바로 내 EX에 대한 궁금증이다. 아, 어쩌면 오늘의 룽의 Ex-MovieFreind는 술 한 잔 하고 읽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의하시길. 술 취하면 이 궁금증이 미치도록 강력해져 다음날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건대 나는 이 부분에서 상당히 전통 있는 강호요, 권위 있는 찌질이임을 밝힌다. 기본 경력으로는 술에 취해 나를 배신한 '썅년'(<건축학개론>)을 찾아가 울고불고 오기, 이미 '윈터'쯤에 와서는 문득 이해할 수 없었던 '썸머'(<500일의 썸머>)가 그리워져 여기저기 근황을 캐묻기 등이 있다. 나는 정말 궁금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가끔 미치도록 네(들)이 안고 싶어질 때가 있'는 건지, 왜 헤어지고 나서야 그녀의 겨털마저도 사랑스러웠다는 걸 갑자기 깨닫게 되는 건지(<러브픽션>). 오늘 이 찌질한 룽의 두 번째 Ex-MovieFriend는 누군가에겐 리얼리스트, 다른 이에겐 모럴리스트, 하지만 나에게만은 찌질리스트인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이다.
홍상수 감독에 대해 아마 많이들 들어봤을 거다. 영화인들이 사랑하는 영화인, 독특한 이야기와 연출, 해외영화제가 아끼는 감독 등 너무도 많은 수식어들이 그를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 일단 봤다 하면 호평이든 혹평이든 공통적으로 느낄 그것은 바로 '낯섦'이다. 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나왔을 때부터 이 낯섦은 그의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며, 또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정형화되지 않고 새롭게 몸을 바꾸며 진화 중이다. 그의 열두 번째 영화인 <북촌방향>은 전작 <옥희의 영화>에 이어 그의 영화 세계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이다(줄곧 상투성과 싸워왔던 그는 이제 시간 그리고 우연과도 싸우려는 듯 보인다).
홍상수 영화의 또 다른 키워드는 '찌질함'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욕망과 통념은 찌질함을 넘어 너무도 리얼하게 다가와서 사람에 따라 불편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북촌방향>이 중요한 작품인 것은(특히 나 같은 찌질이에게는) 이 찌질함이 섬뜩함으로 변하는 순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신비롭고 혼란스러운 영화에는 엔딩까지 내내 알 수 없게 교란된 시간의 틈에서 비슷한 사건들이 미묘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영화가 어려울 것 같다고 겁먹을 건 없다. 내용은 간단하고 러닝타임도 짧고, 홍상수 특유의 유머가 여전하니까. 그리고 당신은 결국 영화를 안주삼아 술 한 잔 하게 될 테니까.
한때 영화감독이던 성준이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와 북촌에 사는 선배 영호를 만나려 한다. 그날 혹은 다른 어떤 날(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도록 되어있다), 성준은 다른 이들과 우연히 술자리를 갖기도 하고 고덕동에 사는 옛 여자인 '경진'을 찾아가기도 한다. 또 그날 혹은 다른 어떤 날에 선배 영호와 영호의 후배 보람과 만나(이렇게 셋이선 두 번) 혹은 전직배우인 중원까지 만나(이렇게 넷이선 한 번) '소설'이라는 술집에 간다(그러니까 총 세 번). 그런데 그 술집의 주인인 '예전'은 성준의 옛 여자인 '경진'과 꼭 닮았다(실제로 1인 2역). 이게 내용의 전부다. 이 순환·반복·변주되는 시간과 북촌이라는 무대에서 성준은 자신의 찌질함을 옛 여자에게, 또 그녀와 닮은 여자에게 우습게, 안타깝게, 경이롭게 발산한다.
옛 사랑과의 관계에 있어서 찌질함이란 아주 잊어서 쿨해지지도 못하고 용기 있게 다시 사랑을 시작하지도 못하면서 주변에서 어물쩍거리거나, 문득 욕망과 미련이 끓어오를 때만 사랑인 척 다가갔다 사라지는 행태들일 것이리라. 앞에서 내가 고백한 행동들이 바로 이것이며, 영화에서 성준이 줄곧 하고 있는 행동들도 다름 아닌 이것이다(그러니 이건 찌질동지의 영화인 셈).
영화 초반부에 잠시 나오지만 성준은 북촌에서 술을 마시고 옛 여자인 '경진'이 사는 고덕동 그녀의 집으로 향해 하룻밤을 보낸다. 이 장면 이외의 모든 영화 속 공간은 북촌이며, 이후에 경진은 문자메시지로만 등장하고 대신 예전만이 등장한다. 때문에 이 장면은 쉽게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찌질함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면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해 진다. 찌질함의 근원은 '예전과의 관계'가 아니라 '경진과의 관계'에 있으며, '북촌'이 아니라 '고덕동'에 있다. 북촌에서 그리고 예전에게서의 성준의 찌질함은 결국에 고덕동에 사는 경진 때문인 것이다. 말하자면 북촌은 찌질함의 근원적 공간이라기보다 찌질함이 상징적으로 재연되는 '무대적 공간' 혹은 영원회귀하는 '신화적 공간'인 것이다(쉽게말해 고덕동에서 뺨맞고 북촌에서 찌질거리기).
또 내 얘길 고백하자면, 나에게는 정동과 성북동이 그러한 공간이다. 그 동네의 오래된 돌들이 주는 색채와 질감, 좁고 조용한 골목길을 보면 어쩐지 옛사랑이 생각나곤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슈퍼에서 그녀가 좋아했던 아이스크림을 사먹는다거나, 닮은 사람을 보고 흠칫 놀란 적도 있다. 그런 내 모습에 나 스스로도 우습고도 슬펐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나에겐 정동방향쯤 될까.
영화의 제목은 그래서 <북촌'에서'>가 아니라 <북촌'방향'>이 된다.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방향을 향해가고 그 행동을 반복하는 '지향성'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향성은 연애얘기에 국한한다면 찌질함으로 바꿔도 무방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찌질함은 홍상수에 의해 뒤틀린 시간과 공간과 관계들 속에서 마법처럼 인생의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굴레 같은 것들로 변하여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북촌지도 옆에서 성준이 사진 찍히며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 와서는 견딜 수 없는 처량함이 나아가서는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결국엔 벗어날 수 없는 내 삶의 어떤 굴레들을 깨달을 때의 그것이 이 영화에 있다. 성준은 아마도 영화의 마지막 순간 옛사랑에 대한 자신의 찌질함과 함께 인생의 다른 부분에도 있을 찌질과 비슷한 무엇을 깨달았을 것이다(예를 들면, 성준에겐 영화가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거다).
<북촌방향>을 보고 나는 한동안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힘껏 뛰어올라도 3초도 안되어 땅에 발이 붙어버리는 것이 그토록 야속했던 기억이 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결국 죽을 것이라는 게 너무도 억울했던 기억도 난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그녀의 생각에 눈물 났던 기억도 난다. 삶이란 결국 이 거대한 인력들 앞에서 찌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방향쯤을 향해서 찌질하게 가고 있는걸까.
(거봐라, 결국 술 한 잔 하고 싶어지지 않았나?)
※ 홍상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2013년 2월 2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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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에 맞춰 쓰여졌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은 김영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1996)의 2010년도 개정판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직접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를, 문장 전체 인용이나 간접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로 표기했습니다.
무의미가 갖는 의미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는 여러 인물이 나온다. 그 중에서 이번 글은 화자인 ‘나’를 중심으로 진행할 것이다. ‘나’의 직업은 자살안내원이다. 그가 하는 일은 이러하다. 자살욕망의 징후를 보이는 사람을 찾아, 그들을 자살의 길로 안내하는 것. 소설 속에서 ‘나’의 인도를 따라 두 명의 의뢰인이 자살한다. 그 후에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출처 : doopedia.co.kr)
세 가지 단서
첫째 단서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다. 소설은 이 그림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묘사의 말미에 ‘나’는 이야기한다. “자신이 유포한 공포의 에너지가 종국엔 그 자신마저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8~9) 이 문장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서 자살의 욕망을 끄집어내지만, 종국엔 자신도 자살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 단서는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이다. 이 그림은 소설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다. ‘나’는 이 그림을 감상할 때 사르다나팔에 감정이입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림 속 사르다나팔은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죽임을 시행하는 자이다. ‘나’의 상황과 기묘하게 들어맞는다. ‘나’도 자신에게 죽음이 엄습해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듯하다.
마지막 단서는 소설 끝부분의 그의 독백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134) 그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삶을 그만 쉬고 싶다 말한다.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물음은 충분히 답을 얻은 듯하다. 그는 스스로 죽음을 택할 것이다. 답을 얻었지만 또 다른 물음표가 달린다. 도대체 왜? 이제 우리는 마지막 단서의 뒷문장을 유심히 바라보아야 한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있는 조화 무더기들.
생화와 조화
‘나’의 아파트를 찾아온 미미는 거실을 가득 채운 꽃이 조화임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자 그는 말한다. “조화든 생화든 눈에 보이기는 마찬가지지요.”(132) 조화는 생화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이고, 뒤집어 생각하면, 생화 역시 놀랄 만큼 조화를 닮았다는 것이다. 생화와 조화를 삶과 죽음으로 치환한다면, 죽음과 놀랄 만큼 닮은 삶이 있다는 뜻이다. 결국 ‘나’가 거실을 조화로 가득 채우고 물을 주는 행위는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퍼포먼스이다. 죽음과 다를 바 없이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자신의 삶을, 영양분을 섭취해 연명해나가는 것.
그의 삶은 죽음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의 삶이 죽음과 다르지 않다면 그 해결방안은 두 가지 뿐이다. 진정한 삶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죽음으로 만들거나.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는 죽음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진정한 삶의 모습으로 바꿀 자신이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읊조리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있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134) 아무리 벗어나도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단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이쯤에서 어떤 독자는 무엇을 했기에 그의 삶이 이렇게 되었는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자살의 문턱에 와있는 것은,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삶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처음부터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는 한 우리는 죽음과 다를 바 없는 무의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 (출처 : doopedia.co.kr)
무의미의 의미
프랑스 작가이자 실존주의의 대명사인 장 폴 사르트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다. 이 말은 인생을 탁월하면서도 간략히 설명해준다.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구나 삶을 부여받고 결국에는 삶을 도로 빼앗기게 된다는 것.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 선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립해나갈 수 있는 말이다.
사르트르는 삶의 ‘무의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그의 견해를 따르면, 역설적이게도,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가질 수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이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얀 도화지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무한에 가까운 가능성이 담겨있듯이 말이다.
삶이 어떠한 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견해가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관에서 어떤 이는 끝없는 허무를 찾고 어떤 이는 완전한 자유를 찾는다는 건 확실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세계관이 있을 테고, 또한 그보다 더 많은 삶의 태도가 있을 것이다. 문득, 나는 나와 당신이 궁금하다. 나와 당신은 어떠한 세상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세상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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