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에 맞춰 쓰여졌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은 김연수 소설집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2005) 속의 중편소설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직접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를, 문장 전체 인용이나 간접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로 표기했습니다.

④ 이 글은 2013년 4월 2일에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고, 4월 7일에 대대적인 수정을 거쳤습니다. 





사라져버린 '그'를 이해하는 방법




   김연수의 중편소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하 『설산』)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러하다. 여자친구의 자살을 이해하려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죽음을 이해하려는 여자. 이 소설에서 반복하여 나오는 모티프는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소설 안에 두 개의 소설이 등장한다. 하나는 여자친구의 갑작스런 자살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가 쓴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하여 쓴 ‘나’의 소설이다.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이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소설은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왕오천축국전>은 승려 혜초가 고대 인도의 다섯 천축국을 답사한 뒤 727년(성덕왕 26)에 쓴 책이다. 본래는 3권으로 생각되지만, 현재에 남아있는 것은 1권짜리 축약본이다. 이 약본 역시 찢어지거나 내용을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 완전하지 못하다.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의 화자인 ‘나’는 <왕오천축국전>에 주석을 달았다. 결국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주석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나름의 이해인 것이다.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그럴듯 하지만,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원문이 사라졌으므로, 모든 추측은 정답이자 오답이 된다.


   이제 다시 두 사람의 소설로 넘어가보자. 먼저 '그'의 소설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는 그는 갑작스레 여자친구의 자살을 맞게 된다. 여자친구는 짧은 유서를 남겼다. “부모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용기가 없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야만의 시대에 더 이상 회색인이나 방관자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후회는 없어.”(122) 그는 유서 속의 ‘없었습니다’라는 존칭과 ‘없어’라는 비칭 사이의 간극을, 자살이라는 그녀의 선택을, 그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던 그녀와 자신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로부터 아홉 달 동안, 그는 소설을 쓰는 데만 몰두한다.


   인과관계에 어긋나는 일들은 문장으로 남기지 않았다. (중략) 그와 여자친구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오직 그 마지막 순간, 그러니까 여자친구의 투신에 논리적으로 부합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문장으로 남길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가 결정됐다. 하여 둘이 사랑했던 모든 순간들은 그가 쓰는 소설에서 사라졌다. 결국 그가 쓸 수 있는 문장들은 등반일지에 적는 것과 같은 것들, 식사의 시기와 장소와 종류, 혹은 그날 불어온 바람의 세기와 방향, 그것도 아니라면 만난 장소와 대화를 나눈 시간 등이 다였다. (124-125)


   그는 인과관계에 따라 '여자친구의 죽음'에 부합하는 사실들만을 모아 소설을 썼다. 그러나 그렇게 모인 객관적 사실들만으로는 어떠한 이해도 얻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인과관계라는 합리적인 방식으로는 비합리적인 인생을 설명해줄 수 없으며, 객관적인 사실만으로는 여자친구의 특수함을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역시 소설을 완성하면 할수록 그 사실을 깨달아갔다.


   하지만 그가 결국 깨닫게 된 것은, 아무리 해도, 그러니까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총동원해도' 문장으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이 삶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124)


   결국 그는 떠나기로 결심한다. 여자친구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빌렸던 <왕오천축국전>, 그 책에 나와있는 모든 것이 혼재하는 곳, 그리고 그 곳에 있는 세계의 끝으로. 그는 낭가파르바트 원정을 나서게 된다. 그는 세계의 끝에서 이해에 도달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다. 악천후 상황에서 제4캠프를 떠난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되었을지 우리는 그저 상상할 뿐이다.


   이쯤에서 또 다른 소설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이번엔 '나'의 소설이다. 소설 속 화자인 그녀는 우리가 방금 던졌던 '그는 이해에 도달했을까?'라는 질문의 해답을 구하기 위하여 소설을 썼다. 그가 남긴 일기와 등반일지를 종합하여 쓴 그녀의 소설이 우리가 읽은 『설산』이다. 그녀는 본래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을 단 인물이다. 부재하는 대상을 이해하는 것에 이미 능숙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주석이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해석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해석을 채택하는 일에 불과”(151)하다는 것과 “원문이 사라졌으므로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문장은 원문이 될 수 있”(143)다는 것을.


   그녀는 낭가파르바트 원정대를 다룬 기사 하나를 소개한다. 그 기사는 그의 실종에 대해 이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가 B조 대원을 구조하기 위해서 낭가파르바트를 올라가다가 히든 크레바스에 빠졌을 것이라고'(153). 이 추측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추측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에 이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상상이 아니라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상상의 힘으로'(154) 다른 추측을 내놓는다. 그는 서늘한 달빛을 받으며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세계의 끝에 도달하였을 것이라고.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 사라진 대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추측해야 한다. 대부분의 추측의 과정에서 이해의 대상은 가장 보편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대상에게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대상이 가장 합리적이고 보편적으로 행동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비합리적이고, 우리의 존재는 보편적이지 않다고 소설은 말한다. 따라서 부재하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가장 개별적이고 특별한 대상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적어도 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책에 주석을 다는 것과는 다르지 않냐고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설산』에 대한 또 다른 글 "세계의 끝을 넘는다는 것" : http://seesunblog.tistory.com/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