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에 맞춰 쓰여졌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은 김영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1996)의 2010년도 개정판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직접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를, 문장 전체 인용이나 간접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로 표기했습니다.




무의미가 갖는 의미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는 여러 인물이 나온다. 그 중에서 이번 글은 화자인 ‘나’를 중심으로 진행할 것이다. ‘나’의 직업은 자살안내원이다. 그가 하는 일은 이러하다. 자살욕망의 징후를 보이는 사람을 찾아, 그들을 자살의 길로 안내하는 것. 소설 속에서 ‘나’의 인도를 따라 두 명의 의뢰인이 자살한다. 그 후에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출처 : doopedia.co.kr)



세 가지 단서


   첫째 단서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다. 소설은 이 그림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묘사의 말미에 ‘나’는 이야기한다. “자신이 유포한 공포의 에너지가 종국엔 그 자신마저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8~9) 이 문장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서 자살의 욕망을 끄집어내지만, 종국엔 자신도 자살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 단서는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이다. 이 그림은 소설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다. ‘나’는 이 그림을 감상할 때 사르다나팔에 감정이입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림 속 사르다나팔은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죽임을 시행하는 자이다. ‘나’의 상황과 기묘하게 들어맞는다. ‘나’도 자신에게 죽음이 엄습해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듯하다.


   마지막 단서는 소설 끝부분의 그의 독백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134) 그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삶을 그만 쉬고 싶다 말한다.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물음은 충분히 답을 얻은 듯하다. 그는 스스로 죽음을 택할 것이다. 답을 얻었지만 또 다른 물음표가 달린다. 도대체 왜? 이제 우리는 마지막 단서의 뒷문장을 유심히 바라보아야 한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있는 조화 무더기들.



생화와 조화


   ‘나’의 아파트를 찾아온 미미는 거실을 가득 채운 꽃이 조화임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자 그는 말한다. “조화든 생화든 눈에 보이기는 마찬가지지요.”(132) 조화는 생화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이고, 뒤집어 생각하면, 생화 역시 놀랄 만큼 조화를 닮았다는 것이다. 생화와 조화를 삶과 죽음으로 치환한다면, 죽음과 놀랄 만큼 닮은 삶이 있다는 뜻이다. 결국 ‘나’가 거실을 조화로 가득 채우고 물을 주는 행위는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퍼포먼스이다. 죽음과 다를 바 없이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자신의 삶을, 영양분을 섭취해 연명해나가는 것.


   그의 삶은 죽음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의 삶이 죽음과 다르지 않다면 그 해결방안은 두 가지 뿐이다. 진정한 삶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죽음으로 만들거나.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는 죽음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진정한 삶의 모습으로 바꿀 자신이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읊조리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있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134) 아무리 벗어나도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단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이쯤에서 어떤 독자는 무엇을 했기에 그의 삶이 이렇게 되었는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자살의 문턱에 와있는 것은,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삶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처음부터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는 한 우리는 죽음과 다를 바 없는 무의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 (출처 : doopedia.co.kr)



무의미의 의미


   프랑스 작가이자 실존주의의 대명사인 장 폴 사르트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다. 이 말은 인생을 탁월하면서도 간략히 설명해준다.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구나 삶을 부여받고 결국에는 삶을 도로 빼앗기게 된다는 것.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 선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립해나갈 수 있는 말이다.


   사르트르는 삶의 ‘무의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그의 견해를 따르면, 역설적이게도,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가질 수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이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얀 도화지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무한에 가까운 가능성이 담겨있듯이 말이다.



   삶이 어떠한 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견해가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관에서 어떤 이는 끝없는 허무를 찾고 어떤 이는 완전한 자유를 찾는다는 건 확실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세계관이 있을 테고, 또한 그보다 더 많은 삶의 태도가 있을 것이다. 문득, 나는 나와 당신이 궁금하다. 나와 당신은 어떠한 세상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세상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