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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근의 근근한 가이드 - 프랑스편]
장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을 읽는
세 가지 가이드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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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중년에 접어든 한 프랑스 남성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는 6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한 여성 사업가와 결혼하였으며 이후 사진가로 성공했다. 그러나 아내의 배신을 겪고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딸은 정신착란에 빠져들었다. 갑작스런 성공과 예기치 못한 추락의 모순적인 삶. 몹시 프랑스적이고 또 동시에 대단히 보편적이기도 한 폴 블릭Paul Blick 삶. 프랑스의 중견 작가 장 폴 뒤부아Jean-Paul Dubois가 들려주는 『프랑스적인 삶Une vie française』, 출간 즉시 프랑스 전역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100년 전통의 페미나 문학상을 수상한 장편 소설이다.
그런데 작가가 주인공 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 사뭇 인상적이다. 유년 시절 겪었던 형의 죽음은 제5공화국 헌법의 반포 순간으로 기억되고, 아버지의 발작은 드골 대통령의 사임 장면과 중첩된다. 그의 사진가로서의 성공에는 자크 시라크의 총리 지명 순간이, 아내의 사업 실패에는 1997년 6월 총파업 사건이 배경처럼 펼쳐진다. 심지어 각 장의 제목으로는 샤를 드골, 조르주 퐁피두, 프랑수아 미테랑, 자크 시라크 등 프랑스 제 5공화국 대통령의 이름이 차례대로 붙어 있다. 우리로 치자면 삶의 시기를 김대중 시대, 노무현 시대, 이명박 시대로 구분하고, 노무현 탄핵 사건으로 첫사랑과의 이별을 기억하는 식이다.
그렇다고 폴이 대단한 정치적 거물이라서 대통령들과 얽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폴은 고작 성적 욕망에 몰두하는 유년기를 보내고, 격동하던 68혁명기에는 자유로운 섹스에 탐닉했으며, 소일거리나 일삼다가 사진가로 데뷔한 별 볼 일 없는 인물일 뿐이다. 대통령을 만난 일이라고는 몇 해에 한 번씩 텔레비전 너머로 취임식을 본 게 전부일 정도인 평범한 삶이다. (대통령이 실제로 이야기에 딱 한 번 등장하는데, 미테랑 대통령이 사진사 주인공에게 전화로 사진을 부탁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전직 대통령을 기준으로 챕터를 나누었으며, 폴 블릭의 삶은 제 5공화국의 부침을 배경으로 등장해야 했던 것일까. 그것이 도대체 『프랑스적인 삶』과 무슨 관계라는 것일까.
여기에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첫 번째 가이드 포인트가 있다.
#가이드 포인트 1:
프랑스 제 5공화국, 대통령의 역사
프랑스 제 5공화국은 1958년 5월, 알제리 혁명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이 국민투표로 새 헌법을 채택하면서 출범했다. 1 당시 드골이 개헌의 과제로 주되게 고려한 것은 프랑스 내각제의 정치적 불안정성이었는데,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려 7년 임기의 직선 대통령제 2를 도입한다. 여기에 비상대권과 총리 및 장관 임명권, 의회해산권과 국민투표회부권 및 군통수권까지 대통령에게 몰아줬으니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제 5공화국을 출범시킨 샤를 드골. 지금은 드골 공항으로 더 유명한 듯
『프랑스적인 삶』에서 대통령의 취임과 퇴임에 관한 묘사가 배경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프랑스 사회에서 대통령이 가진 무거운 존재감 때문이다. 7년(혹은 14년)을 함께 한 대통령이 물러나는 것은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의미하며,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은 그 자체로 프랑스 사회가 새로운 방향과 시대정신으로 선회하는 기점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68혁명과 국민투표 패배로 인한 드골의 사임은 아버지의 첫 심장병 발작과 병치되고, 몇 년 뒤의 아버지의 사망은 데스탱d‘Estaing에서 미테랑Mitterrand으로의 정권교체 3로 표현된다.
"1년이 조금 지난 1969년 4월 28일, 드골은 지방제도 개혁과 상원 개편 국민투표에서 패배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가족이 모여 텔레비전 앞에서 별 감동 없이 선거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을 때, 갑자기 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무엇을 잡고 싶은 듯 나의 아버지가 손짓을 했다. 그러고 나서 식탁 위로 푹 쓰러졌다. 아버지가 겪은 최초의 심장병 발작이었다." (p. 60)
프랑스 제 5공화국의 정치적 격변이 단지 배경으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 상층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일상과 결코 동떨어져있지 않다. 오히려 일상적으로 가까이에서 발생하는 작은 변화보다 훨씬 커다란 힘으로 삶을 덮쳐온다. 프랑스 대통령제의 또 다른 특수성은 다수당과 대통령이 같은 계열인가 아닌가에 따라 권력 형태가 현저하게 달라진다는 점인데, 대통령이 의회 다수당도 장악할 경우 원래 의도한 대로 ‘제왕적 대통령’이 되지만, 의회 다수당을 빼앗길 경우 이른바 ‘좌우 동거 정부(cohabitation)’ 4을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시라크 대통령 시기에 이러난 ‘좌우 동거 정부’에 따른 혼란으로 폴의 아내는 사업 경영에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숨겨온 비밀이 드러나면서 폴의 삶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안나가 한창 노동조합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돌발적으로 일어난 총리 교체 소식은 그야말로 레닌의 10월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몽드마르상 출신인 우파 총리 알랭 주페가 사임하고 므동 출신의 진짜 사회주의자인 리오넬 조스팽이 전격 취임한 것이다. 화가 치밀어오른 안나는 완전히 두 손을 들었고, 조합 측에서 주장하는 모든 인상안에 동의했다." (p. 323)
말하자면 이 소설을 감상하는 첫 번째 포인트는 프랑스 제 5공화국의 정치사가 어떻게 폴 블릭이라는 개인의 삶을 흔들었는지, 그리고 폴 블릭이라는 개인의 일생이 프랑스 제 5공화국의 부침을 드러냈는지에 있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추상적인 가상 세계를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인들이 아니라, 현대 프랑스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에 밀접하게 뿌리내리고, 그 다사다난했던 20세기를 몸소 겪어낸 현실 속 사람들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일상과 정치의 연결을 통해 이끌어 낸 구체성’으로 정리해보자.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 출간 직후 프랑스 독자들의 압도적인 공감을 이끌어낸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 비밀은 주인공에게 있다.
#가이드 포인트 2:
68세대의 자기 서사
혁명적 운동은 언제나 혁명적 세대를 낳는다. 일본의 전공투 세대가 그랬고, 우리의 386이 그랬다. 불같이 일어났던 혁명적 운동이 끝나고 나면, 여기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당시를 반추하고 곱씹으며 재구성하려 한다. 90년대 우리나라에서 유행하기도 했던 ‘후일담 문학(386 문학)’이다. 공지영의 초기 소설이 대표하는 후일담 문학은 혁명적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의 의식을 짓누르는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과 자괴감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1968년 5월의 파리. 폴 블릭도 저 사이에 있었을까
『프랑스적인 삶』은 청년 시절에 68혁명을 겪었던 세대들을 위한 후일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386문학과 차이가 있다면 40년 이상의 세월을 돌아보고 있다는 점이다. 분노했던 20대와 부채의식에 사로잡혔던 30대를 지나 결혼, 직업적 성공과 실패, 부모의 죽음, 불륜, 아내와의 다툼, 부모 되기 등 68세대가 노년에 접어들기까지 지나 온 삶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세월의 격차가 있는 만큼 주인공 폴의 태도는 다소 방관자적이다. 이를테면 폴은 내심 좌파적 성향에 동조하지만 투표에 참여하거나 정치적 행동을 할 만큼 적극적이지는 않다. 아담 스미스를 신봉하는 우파적인 아내를 만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지만, 우파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아쉬워한다.
"그렇지만 1974년 5월 19일 저녁에 지스카르 데스탱이 1.62퍼센트 앞서서, 그러니까 명백하게 ‘사회주의 배신자’이지만 어쨌든 결코 더 나을 것 같지 않은 상대 후보 미테랑보다 겨우 42만 4,599표를 더 얻어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을 보자 나쁜 짓을 하고 나면 기분이 찜집하듯이 한 시간쯤 침울해졌다." (p. 126)
그러나 노년에 접어든 폴의 세계관에는 여전히 청년 시절 겪었던 68혁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성공적인 삶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한다. 부채의식이라기보단느 세상과 타협한 자신의 삶에 대한 일종의 자조다. 이러한 태도는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보다는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닮았다.
"적당한 시점에서 나는 아무런 의식 없이 프티부르주아의 여러 단계를 뛰어넘었다. 학위를 따려고 공부하면서 나머지 시간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며 전율의 시간에 방종했고, 그러고 나서 재빨리 남들이 부러워하는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고, 두 아이로 식구를 채웠고, 마침내 부자가 되었다. 결국 나는 좋은 학생이었다." (p. 235)
폴이 식물 사진가로 성공하는 전개도 68세대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혁명운동의 실패 이후 80년대로 접어들면서 프랑스인들은 건강과 겉모습, 그리고 몸의 물질성에 엄청난 관심을 드러낸다. 5 거대 이데올로기와 거시적 관념의 붕괴가 즉각적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몸을 돌보고 온갖 종류의 바디 테라피를 받으며 요가, 마사지, 아로마 등 자연주의적 삶을 향한 열광은 혁명의 열기를 잃어버린 68세대가 찾은 대체물이었다.
68세대의 특수했던 (그러나 보편적이기도 한) 일생을 돌아봄으로써, 작가는 프랑스인들의 전폭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 성공했던 셈이다.
#가이드 포인트 3:
관능적인 삶, 프랑스적인 삶
마지막 가이드 포인트는 이 소설의 관능적 묘사에 대한 것이다. 성욕과 자위행위에 빠져들었던 유년시절, 자유로이 섹스를 탐닉하던 청년기, 연애와 결혼, 장모를 향한 성욕와 몇 번의 불륜까지, 이 소설에는 자유분방한 성적 묘사가 여러 번 등장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성을 다루는 태도는 대단히 가볍고 유쾌하다. 불륜에 대한 인간적인 갈등이나 고뇌는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성적 즐거움을 마음껏 향유하려는 솔직한 태도가 유머러스하게 표현된다.
"그녀도 나도 성교가 끝난 뒤에 후회하는, 예수회의 도덕률에 얽매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는 후회도 회한도 어떤 죄의식도 없었다. 오로지 쾌락만이, 실제로 느끼는 엄청난 쾌감만이 존재할 뿐 각자 결혼을 깨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누추한 작은 방을 나가면 너무도 분명한 각자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쾌락과 정액의 공국인 이 작은 작업실의 은염과 정물 사진 한가운데서 우리는 아무런 구속 없이 즐겼으며, 낯 모르는 사람들과 열광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여행자들처럼 굴었다." (p. 213)
프랑스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성적으로 방종(!)한 것일까? 그렇게 말해도 완전히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청교도적 육체관을 가진 상당수의 서방 국가들(미국, 영국, 독일 등)이 감각적 쾌락을 경멸하는 것과는 달리 가톨릭 문화의 국가들(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은 관능적인 것을 찬양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들은 미국에서 사람들이 영화에 관능적인 장면이 있다고 부모들에게 미리 경고하는 것에 놀라게 된다. ‘관능적 장면’이란 용어는 프랑스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6 특히 프랑스에서 육체에 관한 사회적 도덕은 1960년대 이후 훨씬 더 자유로워지고 개인주의화되었다. 육체의 도덕성은 개인사가 되었고, 개인은 자기 나름의 규범을 선택하였으며, 타인의 규범에 관대해져 갔다. 성을 묘사하는 폴의 자유분방한 태도는 68세대가 가진 정체성의 한 표현인 셈이다.
“대통령이 영부인과 이혼하고 열 세 살 연하인 인기 연예인과 연애하다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프랑스에서는 2008년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재임 중 부인과 이혼하고 인기 모델이자 가수인 카를라 부르니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라면 거대한 스캔들로 비화됐을 일이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대통령의 진지한 로맨스를 축하했다 하니 사생활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관념은 우리와는 확실히 사뭇 다른 모양이다.
"데헷, 나 모델이랑 사귄다능^^V" - 사르코지 전 대통령(우)과 카를라 부르니(좌)
그러니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성에 대한 도덕적 갈등이나 고뇌에 빠져들지 말고 한 사람의 자유로운 프랑스인이 되어 성적 유희에 몰입해보도록 하자. 물론 한국 사회로 돌아와서도 똑같이 생활했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를 일이다.
# 마치며
『프랑스적인 삶』은 작고도 위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프랑스 제 5공화국의 격변에 한 사람의 일생을 버무려냄으로써 왜소한 인간의 왜소하지 않은 운명을 그리고 있다. 위에서 세 가이드 포인트를 제시했지만, 그런 것 하나 몰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더 충실히 즐길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인 장 폴 뒤부아
그래서, 작가가 말하려던 ‘프랑스적인 삶’이란 결국 무엇일까. 해답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도록 하자. 근근하게 써내려간 김근근의 근근한 가이드는 여기서 이만 갑작스럽게 마쳐야겠다.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다. 이만, 근근!
참고문헌
장폴 뒤부아, 함유선 옮김, 『프랑스적인 삶』, 밝은세상, 2006.
로렌스 와일리·장 브리에르, 손주경 옮김, 『프렌치 프랑스』, 고려대학교출판부, 2007.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2004.
최연구, 『프랑스 대통령 이야기』, 살림출판사, 2008.
- 최연구, 『프랑스 대통령 이야기』, 살림출판사, 2008, p. 32. [본문으로]
- 중임 금지 규정이 없어 재선, 삼선까지 얼마든지 가능하다. 2000년에 시라크 대통령이 의회와의 선거 주기를 맞추기 위해 임기를 개정해 현재는 5년 임기로 축소되었다. [본문으로]
- 이 때 제 5공화국 사상 최초로 사회당이 집권한다. [본문으로]
- 프랑스와 같은 이원집정부제에서 여당과 의회 다수당이 다를 경우에, 대통령이 의회 다수당 출신의 인사를 총리로 기용함으로써 구성하는 연립 정부를 일컫는다. 이 경우 대통령과 의회가 모두 민주적 정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력의 충돌이 발생해 국정이 혼란스러워진다. 대통령은 외교 및 국방을, 총리는 내정을 맡는 경우가 많지만, 총리가 외무 행정 권한도 갖고 있기 때문에 역할의 구분이 엄밀하게 이뤄지지 못한다. 통상적으로 대통령은 입헌군주제에서의 왕처럼 의례적인 존재가 된다. [본문으로]
- 로렌스 와일리·장 브리에르, 손주경 옮김, 『프렌치 프랑스』, 고려대학교출판부, 2007, p. 113. [본문으로]
- 위의 책, p. 1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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