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버빌 가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 웨섹스로 떠나는 사실주의 여행

 

 

테스는 여러 번역본이 있지만,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온 것 김보원판을 추천합니다. 2000년에 영미문학연구회에서 추천본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테스Tess. 그 이름만 들어도 서글퍼지는 비련의 여주인공, 테스. 그렇습니다. 오늘 함께 떠나볼 세계는 더버빌가()의 테스(Tess of the d'Ubervilles, 이하 테스)의 무대인 영국입니다. 갑자기 도버해협(칼레해협)을 건너는 것은 연재 세 번 만에 프랑스가 지겨워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실 오늘날 도버해협은 바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교통편 연결이 잘 되어있는 편이니 프랑스편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어차피 유럽연합은 이제 하나의 정치공동체가 되었다고 보아도 될 정도니까요.(?????) 하하하.

 

  사실 토마스 하디의 <테스>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과 더불어 19세기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19세기 영국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역시 대중적 통속소설의 성격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인데요, <테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100년 이상 된 두꺼운 소설 치고 TV연속극 보듯이 심심찮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입니다. 실제로 TV연속극으로 많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최근에 bbc에서 만든 <테스> 4부작 드라마의 경우 현대 드라마를 뛰어넘는 인기를 끌기도 했죠.

 

  가난한 농부의 장녀 테스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먼 친척이라는 더버빌 가로 더부살이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문의 아들 알렉을 만나면서 모진 운명이 시작되죠. 그의 유혹에 넘어간 테스는 임신을 하게 되고 집으로 혼자 돌아와 몰래 아이를 키우지만 아이는 죽어버리고 맙니다. 상처받은 테스는 외진 곳의 농장에서 젖을 짜며 살아가다가 우연히 새로운 남자 에인절을 만납니다. 테스는 사회적 편견과 에인절을 향한 미안함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지 못한 채 그와 결혼하게 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테스가 결국 에인절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지만, 에인절은 뿌리 깊은 편견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테스를 떠나버립니다. 혼자서 에인절을 기다리던 테스에게 다시 귀족남 알렉이 다가오고, 에인절은 두려움 속에서 에인절을 기다리는데…….

 

  테스와 에인절, 더버빌가라는 이름 대신 한국 이름을 넣으면 곧바로 60년대 신파 드라마가 되어버릴 듯한 줄거리입니다. 현대인에게 인기 있는 소재의 원형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럼 이제 테스의 안타까운 사연을 이해하기 위한 짧은 여행을 떠나봅시다.

 

 

비비씨에서 만든 4부작 드라마. 상당히 잘 만든 작품입니다.

 

 

 

#첫 번째 포인트, 하디의 사실주의

 

 

  먼저 하디의 <테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알아봅시다. <테스>는 흔히 사실주의 문학의 전통으로 분류되는데, 영국에서는 디킨스와 새커리가 사실주의를 대표합니다. 사실주의 문학이란 대상으로서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자세와 관련됩니다. 특히 개인의 삶을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는 점이 사실주의 문학의 중요한 특징인데요, 한 개인의 삶은 그와 관련되어 있는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니게 되며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그 사회의 모습 속에서 생생하게 그려내고, 상류계급의 허영과 속물적 성격을 풍자하는 등이 대표적이지요. <테스>의 경우는 사실주의적 경향을 드러내면서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샤롯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처럼 대중성도 뛰어난 연애소설의 면모를 갖습니다. 이러한 사실주의 경향 안에서도 <테스>가 특징적인 것은, 바로 영국 농촌소설의 정점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일찍이 농촌소설의 분위기는 제인 오스틴이나 조지 엘리어트의 소설들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진정한 의미의 농촌소설은 하디에 와서야 이루어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농민들의 삶에 대한 사실주의적인 묘사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직접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영문학사의 일대 사건이라 할만합니다. 예를 들어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다소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때때로 몰락한 귀족)으로 묘사되지만, 이들조차 집안에는 하인들을 여럿 두는 중간계층입니다. 말하자면 하인이 직접적으로 주인공이 되는 소설은 하디에 와서야 이루어진 셈입니다. 특히 <테스>에서도 전통적인 농촌공동체의 해체, 이에 따른 이농현상, 도시빈민으로 몰락하는 농업노동자들의 모습 등 급격한 변화의 흐름에 휩쓸린 농촌사회의 모습은 한 시대의 전형적 양상과 변화에 대한 재현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테스의 아버지가 자신이 몰락한 귀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떠 테스를 객지로 밀어넣은 것이 모든 비극의 출발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시대상을 매우 직관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두 번째 포인트, 우연의 미학, 마주침의 유물론

 

 

  하디가 사실적인 태도와 시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테스의 비극적 삶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을 던져봅니다. 테스의 삶이 비극적이라고 한다면, <테스>비극이라고 말해도 좋은 걸까요? 말하자면, 고전적 의미에서의 비극’, 다시 말해 오이디푸스가 그랬듯이, 햄릿이 그랬듯이, 비극적인 운명(혹은 자연적 질서)에 저항하려는 한 인간의 숭고한 실패를 비극이라고 한다면, <테스>의 이야기도 이 범주 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테스>의 이야기에 운명적 요소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테스의 비극적 삶에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요인이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곳곳에서 테스의 삶은 대단히 우연적 계기로 짜여집니다. 예컨대 테스는 제인 오스틴식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허영심 많은 여자이지도 않고, ‘미인박명의 운명을 타고난 절세 미녀도 아닙니다. 여느 평범한 농가의 더부살이를 떠나야 했을 뿐이고, 하층 여성으로는 오히려 허영심이 없는 소박한 바람을 가졌을 뿐이며, 하디의 묘사에서 테스는 평범한 매력을 가졌을 뿐입니다. 그저 우연에 맡기는 태도로 삶을 살아갔을 뿐인 것입니다.

 

  결과는 무교훈성입니다. 당대의 다른 소설 주인공과는 다르게 테스는 비극적 삶을 살아야 할 어떤 필연적 요소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테스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운명의 장난도, 출생의 비밀도 아닙니다. 다만 우연히 만들어지고 만 어떤 삶의 궤적일 뿐입니다. 잠시 제가 좋아하는 글귀를 인용해봅니다.

 

에피쿠로스는 세계 형성 이전에 무수한 원자가 허공 속에서 평행으로 떨어 진다고 설명한다. 원자들은 항상 떨어진다. 이는 세계가 있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동시에 세계의 모든 요소들은 어떤 세계도 있기 이전인 영원한 과거로부터 실존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는 또한 세계의 형성이전에는 어떤의미도 또 어떤 원인도, 어떤 목적, 어떤 근거나 부조리도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의미의 비선재성은 에피쿠로스의 기본적인 테제이며 이 점에서 그는 플라톤과도 아리스토텔레스와도 대립한다. 클리나멘(clinamen)이 돌발한다.(...) 클리나멘은 무한히 작은, '최대한으로 작은' 편의(de'iation, 기울어짐)로서, 어디서,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르는데, 허공 중에서 한 원자로 하여금 수직으로 낙하하다가'빗나가도록' 그리고 한 점에서 평행낙하를 극히 미세하게 교란함으로써 가까운 원자와 마주치도록 그리고 이 마주침이 또다른 마주침을 유발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하나의 세계가 즉 연쇄적으로 최초의 편의와 최초의 마주침을 유발하는 일군의 원자들의 집합이 탄생한다.(...) 마주침은 원자들에게 편의와 마주침이 없었더라면 밀도도 실존도 없는 추상적인 요소들에 불과했을 바로 그 원자들에게 그것들의 현실성을 부여한다. 원자들은 편의와 마주침 -그에 앞서는 원자들이 유령적 실존만을 지닐 뿐인 저 마주침- 을 통해서만 비로소 자기 실존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 마주침의 유물론, 알튀세

 

  어떤 목적도, 어떤 근거나 부조리도 실존하지 않는 우연성. 그러한 우연성을 통과해서 결국 죽음이라는 실존의 역설에 이르게 된 테스의 삶이 어쩌면 <테스>의 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염세주의라고 규정하기도 하는데, 삶의 우연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에 빠지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 웨섹스로 여행을 떠나자

 

  이 소설을 읽으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집니다. 하디가 낭만적으로 만들어낸 웨섹스의 아름다운 풍광 묘사 덕분입니다. 하디는 영국 서남부 도셋(Dorset)지방 출신으로, 당시 이 지방은 빅토리아 시대의 놀라운 산업발전에도 불구하고 영국 전체로 보아 가장 낙후된 지역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던 고향 도셋을 작품의 배경으로 택했고, 고대에 이곳에 자리잡고 있던 왕국의 이름을 본따 이 지방을 웨섹스(Wessex)로 명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대표작들을 두고 웨섹스소설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광활한 바다와 들판, 농촌의 삶의 모습은 소박하면서도 매우 아름답게 그려져 사회적 불의의 사실적인 묘사라는 주제와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는 웨섹스 지방의 대표적인 유적인 스톤헨지도 등장합니다. 스톤헨지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 관광지이기 때문에 사실 작위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경상도의 한 농촌에서 비극적 삶을 살던 여인이 불국사 석굴암에 가서 생을 마감하는 느낌이랄까요, 혹은 중국 여인이 굳이 만리장성에 누워 눈을 감는 느낌이랄까요, 뭐 그런 셈입니다. 이 소설이 발표됐을 당시에도 스톤헨지는 충분히 유명했기 때문에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으리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한 가지 참작해줄 지점은 있습니다. 지금과 달리 당시의 스톤헨지는 본격적인 관광지로 관리되지는 않았고, 현재와 같은 담장조차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장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드루이드교 신자(우리나라의 무당과 같은 분위기입니다)들이 근처에서 캠핑을 벌이기도 했다고 하네요.

 

스톤스톤스톤헨지

 

  어쨌든, 하디의 소설을 읽으면서 떠오른 풍광들이 당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면, 다음번에는 시간을 내 웨섹스지방을 여행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 생각보다는 우중충하고 춥긴 하겠지만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