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11 - [김근근의 근근한 가이드] - [근근한 가이드]『프랑스적인 삶』 - 장폴 뒤부아

[김근근의 근근한 가이드 - 프랑스편]


베르 카뮈의 이방인(L’Étranger)을 읽는

세 가지 가이드 포인트



빈티지간지를 풀풀 풍기는 프랑스어판 『이방인』 표지




  뫼르소는 프랑스령 알제리의 평범한 월급쟁이다. 아니, 평범하다는 말은 조심해야겠다. 뫼르소는 모친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다음날 태연히 코미디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까맣게 잊은 듯 애인과 해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아무런 감정적 동요도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우연히 이웃의 분쟁에 휩쓸려 아랍인에게 이유도 없이 총을 쏘고서는 모두가 태양 때문이라고 재판장에서 대답한다. 사회가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감정적 반응이나 태도에는 조금도 부합하지 않으니, 뫼르소는 요즘 말하는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그런데 이방인(L’Étranger)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조금도 그를 비난하는 기색이 없다.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로 뫼르소의 생각과 행동을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사회적 규범과는 동떨어지게 행동하는 뫼르소를 옹호하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라고, 혹은 응당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려는 듯이.


  20세기 최고의 소설이라고 칭송받기도 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슬프게도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무감각한 방관자 뫼르소의 행동은 보편적인 도덕률로 이해하기 어렵고, 그가 처하는 상황도 한 편의 부조리극처럼 알쏭달쏭하다. 제목으로 달린 이방인은 뫼르소의 일탈적인 행동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프랑스와 알제리 모두에서 이방인이었던 알제리 태생 프랑스인 카뮈 자신의 처지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각주:1] 그러나 무엇도 확실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 소설을 읽는가? 어머니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사람을 쏘아버린 뫼르소의 이야기가 그토록 위대해서? 카뮈가 1957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위대한 작가라서? 게다가 이방인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이 서늘한 감정은 무엇인가? ‘부조리의 문학이라는 평가은 어떤 의미인가? 애초에 부조리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끌리는가?


  이러한 물음을 염두에 두고 이제 20세기 중반의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령 알제리로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자.

 


 


 

#가이드 포인트 1:

저 구역질나는 나라 프랑스의 이방인

 


  카뮈는 프랑스 작가라고 한다. 프랑스인 아버지를 뒀고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으니 그렇게 말해도 무리는 없겠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온전한 프랑스인이 되어본 일이 없다. 저 위대한 미술과 문학의 나라, 혁명과 인권, 톨레랑스가 있는 아름다운프랑스는 카뮈와 무관하다. 그의 아버지 뤼시엥 오귀스트 카뮈(Lucien Auguste Camus)1차 세계대전 중에 징집되어 전사하기 전까지 프랑스 땅을 밟아본 일도 없는 알제리의 포도농장 노동자였고, 그의 어머니 카트린 생테스(Catherine Sintés)는 스페인 혈통의 하녀였다.[각주:2] 카뮈가 유년시절을 보낸 알제리의 빈민가는 식민지 속의 식민지일 뿐이었다. 그는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알제의 원주민들과 쉽게 동화될 수 없었지만, 결코 아름다운본토 프랑스인이 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노동자의 아들인 카뮈의 배경은 식민지 지배자들의 호화로운 삶과도 거리가 멀었다. 말하자면 카뮈는 프랑스에서도, 알제리에서도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카뮈가 일생을 보냈던 프랑스령 알제리이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알제리는 바로 요기. 프랑스로부터 1962년에 독립한다.



  다시 소설의 줄거리로 돌아가 보자. 뫼르소는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의 프랑스인이다. 그는 어느 뜨거운 여름 바닷가에서 햇빛 때문에 지나가던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 죽여 재판을 받는다. 이를 우리 역사로 바꾸어보면 일제 말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청년이 지나가던 조선인을 쏘아죽인 셈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아무런 후회나 반성도 없이 자신의 행동을 담담하게 설명할 뿐이고, ‘태양을 탓하는 것 외에 아무런 정당화도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형대에 서서야 자신이 죽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프랑스인이 무기를 든 아랍인을 죽인 사건은 스스로를 변호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죄를 벗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자신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듯이 태연자약하다. 이 무슨 천인공노할 이야기인가?


  사실 카뮈에게 알제리의 식민지 상황은 안중에도 없다. 그저 소설 속 뫼르소의 부조리한 행동이 일어나기 위한 한갓 배경일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배경은 대단히 지겹고 부조리하며 무의미한 현실이다. 사실 카뮈에게는 식민지나 프랑스나 어디나 마찬가지다. 그저 부조리하고 구역질나는 세상일 뿐이다. 그에게 프랑스는 더 이상 아름답지도, 위대하지도 않다. 따라서 이방인은 위대한 프랑스를 노래한 국민작가 알퐁스 도데나 앙드레 지드와는 정 반대의 지점에 있다. (카뮈의 알제리적 배경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카뮈에게 알제리나 프랑스는 이 세상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곳이지만, 그의 그러한 관점에는 프랑스령 알제리에서의 경험이 짙게 드리워있다.)


뫼르소는 이런 해변에서 아랍인을 총으로 뿅뿅 쏴죽인 사이코패스인 셈이다.

  

그래서 전쟁 중인 1942년 이 소설이 세상에 나왔을 때,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이 소설에 미친 듯이 열광했다. 뫼르소는 전쟁에 의해 유럽에 절망한 프랑스 청년들의 전형이었다.[각주:3] 어머니가 죽어도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애인과 정사를 나누고,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그것을 부정하기는커녕 천연덕스럽게 인정하며 처형당하는 새로운 인간상이었다. ‘극단의 시대’ 20세기를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아 세계는 두 차례에 걸친 지구 규모의 파괴와 살육을 목도한 참이었다. 이 소설이 발표 것도 1942년 히틀러의 점령 하의 파리였다. 전쟁은 수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정답을 주지 않았다. 선과 악은 무엇인가?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더러운가? 누가 압제자이고 누가 해방자인가? 인간은 누구이며, 세계는 어디로가고 있는가?[각주:4] 프랑스의 청년들은 수많은 질문들 앞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 모든 가치와 본질은 사라진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도 없다. 옳고 그른 것도 없다. 뫼르소의 입버릇 - ‘이러나 저러나 상관없어요혹은 그건 중요치 않아요’ - 가 바로 그러한 모습이다.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울 수도, 안 피울 수도 있다. 레몽과 친구가 되어도 좋고, 안 되어도 좋다. 마리와 결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해줄 수도 있다. 이런 삶에서 태양 때문에사람 하나 죽인다 한 들 뭐 그리 대수겠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아무런 목적도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덩어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가이드 포인트 2:

인간이라는 이름의 덩어리, 카뮈의 실존주의[각주:5]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덩어리다. 적어도 실존주의의 대표주자라는 사르트르에 따르면 그렇다. 실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잠깐 다음 도식을 참고해보자

 

 


존재(être) <-> (néant)

실존(existence) <-> 본질(essence)

존재 = 실존 + 본질

 

 


  모든 존재는 덩어리라는 실존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물이나 사람과 구분되는 본질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나는 육체 덩어리라는 실존과 나를 나이게끔 하는 본질로 구성된 존재이다.


  그런데 사르트르에 따르면 사물은 본질이 실존에 앞서지만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자동차를 만든다면 먼저 자동차의 기능과 작동원리 등 본질이 결정되고, 일정한 작업을 거쳐 비로소 자동차라는 실존을 탄생시킨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의 덩어리라는 실존의 탄생 이전에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본질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그저 아무런 이유와 목적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육체덩어리일 뿐이다. 그러한 인간에게 미리 정해진 규범이나 본질, 목적은 없으며, 따라서 인간은 무슨 행동이든지 해도 좋다. 이 무한한 자유와 선택지 앞에서 사르트르는 구토(nausée)[각주:6]를 느꼈던 것이다.


  카뮈의 뫼르소에게도 삶과 죽음은 절대적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습관과 타성에 젖어 살아갈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근원적인 물음이 떠오르는 순간이 오면 인간은 막막하고 아련한 부조리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나는 왜 사는가? 혹은 왜 죽지 않는가? 죽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죽이지 않을 이유는 있는가?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가? 인간이 습관과 타성에서 깨어나 자신의 실존을 의식하는 순간 모든 것은 부조리해지고 만다.


  이러한 카뮈의 실존주의는 특히 2부의 재판정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뫼르소를 기소한 검사의 논리는 뫼르소의 부조리와는 정 반대에 있다. 재판정에서 뫼르소가 사형에 처하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는 논리에 기반해 있다. 요컨대 살인을 했기에 범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이기에 살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뫼르소는 왜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냈는가? 왜 어머니의 시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는가? 왜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잠을 잤는가? 왜 장례식 다음 날 해수욕을 갔으며, 거기서 만난 여자와 코미디 영화를 보고 섹스를 즐겼는가? 왜 레몽 같은 패륜아를 친구로 사귀고, 추잡스런 정사 사건의 증인 역할을 수락하였는가?…….[각주:7]


  이 질문들 속에서 뫼르소의 본질은 살인자로 전제되어 있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조차 슬퍼하지 않은 패륜아이기 때문에 그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재판정의 논리 속에서 인간은 국가와 사회, 역사와 문화에 의해 세밀하게 짜여진 규범과 도덕으로 규정되는 존재다. 말하자면 인간의 본질은 해당 사회의 구조와 권력에 의해 이미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 이탈하는 자는 인간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다. 카뮈가 자신의 책을 해설한 대로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행위는 패륜이라기보다는 저항이고 일탈이라기보다는 구도(求道)행위이다. 뫼르소가 사형선고를 받고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그가 사회가 요구하는 일종의 집단적 유희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정해진 상황과 조건 속에서 필요한 감정을 연기하고 규범에 따라 거짓말하는 유희. 카뮈가 뫼르소를 옹호하고, 오히려 인간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까지 말하는 진정한 이유는 그가 감정의 은폐 없이 삶의 진실만을 말하려 했던 진실의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소설은 전통적 권위에 도발적으로 저항하는 반체제소설이다.


 

 


 

#가이드 포인트 3:

무(無)스타일의 스타일

  


마지막으로 이방인을 읽는 한국인 독자들에게는 아쉬울 이야기를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카뮈의 이방인은 그 간결하고 단순한 문체로 유명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재밌는 말이 있다. 카뮈의 글을 읽은 프랑스인들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카뮈의 소설들은 대단히 짧고 쉬운 문장이 사용되기 때문에 대학 불문과에서 입문용 교재로 사용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필자의 경우 두 달 프랑스어를 배우고 이방인을 읽기 시작했다.) 직접 도입부를 프랑스어로 읽어보자.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J’ai reçu un télégramme de l’asile : « Mère décédée. Enterrement demain. Sentiments distingués. » Cela ne veut rien dire. C’était peut-être hier.

 

 

  갑자기 프랑스어가 튀어나왔다고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한 문장씩 영어와 함께 파악해 보자.

 

 

Aujourd’hui, maman est morte.

Today, Mom is dead. (오늘, 엄마가 죽었다.)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Or maybe yesterday, I don't know.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까, 모르겠다.)

 

J’ai reçu un télégramme de l’asile

I received a telegram from the Asylum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통 받았다.)

 


  구글 번역기로 돌려도 직역이 가능할 만큼 단순한 문장이다. 이런 문장이 소설 전반에 계속된다. 특히 프랑스어에서 이른바 복합과거(passé composé)’라고 말하는 시제가 사용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프랑스 소설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복합과거는 일상적 사실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매우 구어적이고 평이한 표현으로, 단순과거의 역사적, 문어체적 어투를 주로 사용해 온 이전의 프랑스 소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프랑스 원어민들에게 복합과거와 단순과거가 갖는 어조의 차이는 매우 즉각적으로 전달된다고 한다. 짧고 구어적인 문체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건조하게 서술해 나가는 뫼르소의 어투에서 그의 세상에 대한 무심한 태도가 직접적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번역본으로 소설을 읽는 우리로서는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또 이방인에는 마치 중학생이 일기장에 기록한 글처럼 지극히 짧고 단속적인 문장이 접속사도 없이 사용된다. 흔히 카뮈의 문장을 고독한 섬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문장과 문장이 희미한 인과관계로만 묶인 채 병렬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문장과 문장 뿐 아니라 문단과 문단,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에도 인과관계나 우열은 매우 희미하게만 제시된다. 마치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는 듯이 가치중립적인 태도로 소설이 전개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소설에서 보이는 갈등의 고조나 기승전결, 인과관계를 따르는 줄거리는 이방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요컨대 여러 에피소드들을 특별한 강조점 없이 고만고만한 문체로 단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카뮈가 수사학적 장식을 극도로 절제한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위에서 카뮈의 실존주의를 설명할 때 보았던 실존과 본질’, ‘이유 없음’, ‘무가치함’, ‘우연성등의 정신이 그대로 문체와 기법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카뮈의 중성적 글쓰기를 두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카뮈의 이방인에 의해 처음 자리잡게 된 그 투명한 말은 어떤 부재의 문체를 완성하였다. 그것은 스타일의 이상적인 부재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국인 독자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카뮈의 문체상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번역본으로는 김화영의 번역본이 주로 추천된다. 국내 여러 번역본의 첫 문장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김화영, 책세상)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이휘영, 문예출판사)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방곤, 범우사)

 




 

#여정을 마치며 



  1957년 노벨문학상 역대 두 번째 최연소 수상자[각주:8]의 영예를 안은 지 3년 뒤, 알베르 카뮈는 새해를 맞아 떠났던 여행길에서 5번 국도를 타고 돌아오던 길에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를 정면으로 들이받아 즉사한다. 그의 소설만큼 부조리로 가득 찬 죽음이었다.


잘생긴 카뮈찡^^* 사르트르랑 친구라서 그런지 패션과 포즈도 비슷한 듯...



  삶의 이방인이 되어본 이들은 어느 날 카뮈를 찾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카뮈는 쉽게 답을 주지 않는다. 그가 어렴풋이 제공하는 답도 신통찮기 그지없다. 그저 우리 뒤를 끝없이 좇는 불가해한 질문을 던져놓는다. 지금까지 근근하게 써 내려간 김근근의 근근한 가이드가 그러한 질문을 받아 안는 작은 길잡이가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프랑스 편인데 알제리로 갔다고 욕하지는 않길 바란다. 출간 당시에는 알제리도 프랑스였다.)

 

  그럼 이만,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다근근!


※참고로 올해는 알베르 카뮈 탄생 100주년. 여러 출판사에서 이런저런 카뮈 관련 책을 새롭게 출판하고 있고, 불문학계에서는 학술대회도 준비중이라고 하니 관심있게 지켜봐도 좋을 듯 합니다!



  1. 프랑스어에서 원제인 L’Étranger는 "이국foreign", "해외overseas", "미지unknown", "무관extraneous", "외부인outsider", "낯선 사람stranger", "생경한, 이질적인alien", "무관한unconnected or irrelevant" 등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고 한다. 어느 것을 대입해도 뫼르소가 처한 상황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영역본은 초기에 "The Outsider"라는 제목을 달고 출판되었지만, 근래에는 "The Stranger"가 더욱 일반적이다. 한국판 제목은 주로 “이방인”으로 통일되어 있지만, 종종 “이인(異人)”이라는 제목도 보인다. [본문으로]
  2. 유기환, 『알베르 카뮈』, 살림, 2004. p. 9 [본문으로]
  3. 박홍규, 『카뮈를 위한 변명』, 우물이 있는 집, p. 42 [본문으로]
  4. 유기환, 앞의 책, p. 30 [본문으로]
  5. 카뮈는 스스로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혔다는 점을 참고해두자. 특히 그의 철학사상이 중점적으로 전개된다고 평가받는 『반항인』에서 카뮈는 사실상 ‘저항’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인간의 실존 앞에 두고 있다. 따라서 그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적어도 『이방인』에서의 카뮈는 사르트르와 유사한 실존주의적 관점을 아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카뮈가 실존주의자라고 말하는 것도 전적으로 타당하다. [본문으로]
  6. 사르트르의 대표 소설 제목. [본문으로]
  7. 유기환, 앞의 책, p. 38. [본문으로]
  8. 최연소는 마흔두 살에 수상한 키플링(Kipling)이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