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무기의 그늘>>을 읽으며 베트남으로 떠나자
베트남 전쟁은 실로 세계사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세계 최강국이라던 미국은 아시아 변방의 소국에게 최초로 패퇴했으며, 전 세계적인 반전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미국의 자유주의는 도덕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국제정치는 제3세계로 무게추가 옮겨오게 된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이 종결된 지도 어느덧 40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성격과 의미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베트남 전쟁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인식됩니다. 하나는 한국군이 최초로 해외 파병에 나서 자랑스럽게 싸웠던 역사입니다. 8~90년대까지만 해도 각 부대에서는 월남 나갔던 부대원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져 왔다고 하죠. 목숨 걸고 싸우며 외화를 벌었다는 베트남 파병의 이야기는 이른바 산업화 세력의 자기서사입니다. 두 번째는 세계사적 사건으로서의 베트남전입니다. 주로 미국과 서유럽에서의 반전운동, 통킹만 조작사건, 네이팜 탄, 혁명의 지도자 호치민처럼 서구에서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베트남전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방향 모두 정작 베트남전 자체는 배제된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트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미국은 베트남에 가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 혹은 서구 세계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베트남전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 황석영의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은 독자를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으로 데려갑니다. 무언가를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그것에 빠져 허우적대 보는 것이겠지요. 오늘 근근한 가이드는 여러분과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으로 떠납니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근대사를 겪었으면서도, 결국 공산주의에 의해 통일되었던 현대 베트남. 또 오늘날에는 급속한 경제 개방으로 갈수록 우리나라와 경제적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현대 베트남을 만든 베트남전으로 떠나봅시다.
# 베트남의 슬픈 역사
<<무기의 그늘>>은 21세기의 독자들이 읽기에 친절한 소설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베트남전의 배경과 발단에 대해 무지한 상황에서 황석영은 무작정 독자를 전장 한복판에 떨궈놓기 때문입니다.
“백오밀리 포가 계속해서 강 건너편을 강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리만 요란했고, 비어 있는 모래벌판과 철조망과 선인장 숲 위에는 새하얀 햇빛만이 보일 뿐이었다. 물 위에 뜬 조각배처럼 정글의 일부분이 드문드문 남아 있는 사이로 양쪽에 철조망과 낮은 모래주머니의 벽으로 막힌 좁다란 군용도로가 여러 중대와 대대를 연결시키고 있었다. 도로의 교통통제소마다 설치된 높다란 마루에서 밀림 쪽을 향해 가끔 위협사격을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후에도 황석영은 베트남 전에 대한 아무런 배경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지엠 정권과 해방전선은 누구인지, 미국과 한국이 왜 베트남에서 싸우고 있는지, 왜 종종 프랑스어가 등장하는지 사전지식이 없는 독자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책이 지어진 1992년에는 베트남전이 얼마간 알려져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읽기엔 쉽지 않은 셈입니다. 일단 베트남전의 배경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시아)은 19세기 이래로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습니다. 1884년부터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완전한 식민지 상황이었죠. 그러다 2차 세계대전, 엄밀하게 말하면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한편으로는 일본이 동남아로 진출해 프랑스와 싸우게 됩니다. 식민지에 저항하려는 베트남인은 일본인과 힘을 합쳐 프랑스를 격퇴해야 할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 일본도 하나의 식민주의 세력입니다. 일본과 프랑스를 모두 격퇴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마침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반식민주의 세력인 중국군이 있습니다. 특히 중공군의 영향을 받고 서로 연대하면서 베트남에는 공산주의 세력이 점차 힘을 모으게 됩니다. (호치민도 중국에서 반식민주의 운동에 가담했지요.)
그런데 유럽에서 프랑스 본국이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고 프랑스가 자유 프랑스와 비시 프랑스로 쪼개지자 베트남 식민정부는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비시 프랑스를 따르려면 일본과 협력해야 하고, 자유 프랑스를 따르자면 일본과 싸워야 하는 겁니다. 결국 세부적 군사 조치를 둘러싼 갈등은 봉합대고 일본군과 프랑스군, 중국군이 공존하는 상태로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베트남 반식민주의 운동은 계속해서 지지세력을 늘려가는 중이었죠.
2차 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인 자유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북부에는 공산당이 기반이 된 반식민주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해버린 후였습니다. 결국 베트남을 재식민화하려는 프랑스와 해방을 원하는 베트민 사이에 오랜 전쟁이 시작됩니다. <<무기의 그늘>>에서 종종 등장하는 프랑스는 베트남의 전 식민국이었던 셈입니다.
그럼 미국은 도대체 왜 베트남에 가게 된 것일까요?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된 후 전 세계에서 공산세력 확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프랑스에 엄청난 군비를 지원해 간접적으로 전쟁을 도왔습니다. 그러다 프랑스가 반전 여론 등 국내정치적 문제로 결국 베트남에서 철수하려 하자 이번에는 미국이 프랑스와 바톤을 터치해 전쟁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수십 년간 독립을 바라 온 베트남인들에게 달가울 리 없는 존재였지요. 결국 베트남인들에게 미국은 공산세력과 맞선다는 명목으로 베트남땅에 들어온 또 다른 식민세력일 뿐이었습니다.
# 미국의 신제국주의
그렇다면 미국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기를 쓰고 베트남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요? 특히 동남아시아 변방의 소국이라는 베트남의 지정학적 특성을 고려하면 미국이 자신의 식민지도 아니었던 곳에 엄청난 부담을 들여가며 전쟁에 참여했던 것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유세력을 수호하겠다는 언명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무기의 그늘>>은 바로 그러한 의문에 대한 황석영의 대답입니다. 미국은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베트남에 들어왔는가. 엄청난 군비 지출을 해가며 주둔했던 주월미군은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인가.
황석영의 대답은 ‘달러’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달러의 확산’이지요. 미국식 자본주의를 동남아에 이식하고, 보다 장기적인 이익을 착취해내고자 기회를 엿보던 미국이 베트남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나아가 황석영은 바로 그런 것이 ‘미국의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한국에서도, 남미에서도, 심지어 유럽에서도 미국의 위대함은 달러를 통해 확산됩니다.
“PX란 무엇인가. 아메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위대한 나라입니다, 라는 표어가 적힌 방패를 들고 로마식 단검을 들고서, 성조기의 옷을 입고 낯선 고장마다 나타나는 엉클 쌤의 지붕밑 방이다. (...) 그리고 PX는 바나나와 한줌의 쌀만 있으면 오순도순 살아가는 아시아의 더러운 슬로프 헤드들에게 문명을 가르친다. 우윳빛 비누로 세수하는 법과,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코카콜라의 맛이며, 향수와 무지개색 과자와 드롭스와, 레이스 달린 잠옷과 고급시계와 보석반지를 포탄으로 곤죽이 되어버린 바라크 위에 쏟아낸다. (...) 한 번이라도 그 맛과 냄새와 감촉에 도취된 자는 결코 죽어서도 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 이른바 ‘신제국주의론’으로 알려진 이론과 맥을 같이 합니다. 고전적 제국주의는 정치적으로 식민지를 점령합니다. 반면 신제국주의는 명목상으로는 독립을 유지시키면서 경제적으로 대상을 종속시켜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무기의 그늘>>은 미국이 베트남에 미국적 자본주의를 이식시키고 이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 했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사실 제목부터가 그렇습니다.
“저 피의 밭에 던진 달러, 가이사의 것, 그리고 무기의 그늘 아래서 번성한 핏빛의 곰팡이꽃, 달러는 세계의 돈이며 지배의 도구이다. 달러, 그것은 제국주의 질서의 선도자이며 조직가로서의 아메리카의 신분증이다. 전세계에 광범하게 펼쳐진 군대와 정치적 힘 보태기, 다국적 기업망의 그물로 거두어진 미국 자본의 기름진 영양 보태기, 지불과 신용과 예금의 중요한 국제적 매개체로 정착된 달러 보태기, 다국적은행의 번창 등의 결합 위에 핏빛 꽃은 피어난다.”
그리하여 베트남 전쟁은 부정한 전쟁unjust war이 됩니다. 미국은 자유세계를 위한 수호자도, 세계의 경찰도 아닌 그저 총기를 앞세운 달러 장사꾼인 셈입니다. 그것도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며 돈을 버는. 좀 과도한 주장이 아니냐고요?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새 설득당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 베트남으로 떠나고 싶소
<<무기의 그늘>>은 잔인한 소설입니다. 경제적 이익 앞에서 전쟁과 살육을 서슴치 않는 인간의 잔혹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베트남에서 문제가 됐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이기에 더욱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아오자이’일 것입니다. 아... 하얀 아오자이
“그가 공허한 마음으로 뒤뜰에 갔을 때, 칸나 향내로 가득 찬 그 방공호에는 하얀 모시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뚜렌지방 여자들은 옛적부터 한 사내만을 사랑한다. 그들은 정인이 멀리 떠날 때 아오자이 속바지 자락을 찢어서 수건을 만들어준다. 팜 민은 흠칫 놀란다.”
제가 2년 전쯤 베트남에 갔을 때에도, 여전히 베트남 여학생들이 새하얀 아오자이를 입고 거리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의 매력은 아오자이만이 아니지만, 그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지요.
다른 하나를 더 추천하다면, 저는 역시 ‘분짜’를 추천합니다. 아 분짜 먹고 싶당
아무튼 이번 주 베트남 여행은 이걸로 갑작스럽게 끝! 근근!
'[영화] 김근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근한 가이드] 울부짖음(HOWL) -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 (3) | 2013.05.05 |
---|---|
[독서에세이]『뻬드로 빠라모(Pedro Páramo)』- 후안 룰포 (1) | 2013.04.21 |
[근근한 가이드]『더버빌 가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 토머스 하디 (3) | 2013.03.25 |
[근근한 가이드]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0) | 2013.03.11 |
[근근한 가이드] 『이방인』 - 알베르 카뮈 (7) | 2013.02.25 |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