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포스팅은 특별히 독서 에세이의 형식으로 씁니다. 다음 주에는 다시 김근근의 가이드로 돌아옵니다.

 




벚꽃이 있음을 안

 

: 후안 룰포, 『뻬드로 빠라모(Pedro Páramo)』독서 에세이




 

 


  올해도 꽃놀이를 가지 못했다. 어제부터 비가 왔으니 내일이면 꽃놀이도 끝나있겠다. 시간이 없었던 탓은 아니다. 바쁘게 사는 듯 보여도 짜투리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관악산 천지가 꽃밭이니, 친구 잠깐 불러내 산책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차라리 마음의 문제일까. 아무리 시간적 여유가 많아도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면 꽃놀이는 사치처럼 느껴지고 만다. 조급한 삶을 갖게 된지 벌써 일 년이 조금 넘었다.

 

 

  한 나무에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이 좋다. 벚꽃, 살구꽃, 복숭아꽃……. 짧게 폈다가 이내 지고 마는 꽃들이다. 바로 그 잠깐이 아니면 일 년을 다시 기다려야 한다. 일 년에 한 번 뿐인 꽃을 놓치지 말고 마음에 꼭꼭 눌러 담아야 하는데, 왠일인지 그 1~2주의 시간은 알아차릴 틈도 없이 지나간다. 작년엔 지는 꽃이 아쉬워 밤중에 드라이브를 나선 적도 있었다. 밤벚꽃이라는 단어도 있다지만, 가로등에 어렴풋이 보이는 실루엣만 잔뜩 찍고 돌아왔다. 내려오던 길에 다음해에는 꼭 꽃놀이를 가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느새 오늘이었다.

 

 

느닷없이 안겨 드는 졸음과 환영 속으로 빠져 드는 이 순간까지, 나는 내 어머니의 남편인 뻬드로 빠라모라는 사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꼬말라에 왔다.(p. 8)

 

 

  『뻬드로 빠라모를 읽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핸드폰도 꺼놓고 단숨에 읽었다. 매번 끌려 다니고 싶지는 않다. 가끔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 나는 꼬말라로 도피했다. 말하자면 내가 찾은 나름의 화원(花園)인 셈이다. 풀이라고는 비누풀(saponaria), 또론힐(toronjil), 마령초(capitana), 알팔파(alfalfa), 플로레스 데 가스띠야(flores de castilla)처럼 한 번도 본 적 없는 척박한 땅의 식물들뿐이었고, 혼미하면서도 모호하고 그로테스크한 우울이 가득한 꽃놀이긴 했지만.

 

 

  후안 룰포.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 하나 모르면서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스페인어를 알았더라면 이 소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까. 후안 룰포를 더 잘 이해하고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나는 스페인어도, 멕시코도, 멕시코 혁명, 후안 룰포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여기서 터무니없는 오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주인공 쁘레시아도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뻬드로 빠라모가 있는 꼬말라를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꼬말라는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혼미한 세계. 쁘레시아도는 차츰 생명을 잃어가고 이야기는 급격하게 뻬드로 빠라모를 중심으로 전환된다. 이후에는 뻬드로 빠라모의 사랑과 죽음, 화자가 불분명한 독백이 멕시코 혁명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그게 아니라, 제가 물은 것은 이 마을입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 같군요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요. 여기엔 아무도 살지 않소.

그렇다면 뻬드로 빠라모는……?

그 양반은 오래전에 죽었소.(p. 12)

 

 

  그로테스크(grotesque)라고 할까. 꼬말라에는 망자의 무리들이 득실거리고, 산 자는 적나라한 자연의 마력 앞에 농락당한다. 죽은 어머니에 대한 쁘레시아도의 기억은 마치 또 다른 화자의 독백처럼 현재적이며, 등장 인물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망령은 땀으로 뒤범벅 된 베개를 건네고, 공기는 땡볕에 달구어진 바람한 점 없이 정체된 열기로 가득 차 숨을 죄어온다. 영혼과 육체,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사이에 영원히 되풀이되는 대화. 빅토르 위고가 크롬웰 서문에서 말했던 낭만극의 지도이론을 빼다 박은 모습이다. 그래서일까, 남미 붐(BOOM) 세대의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작가라고 한다지만, 이야기는 마르께스보다 오히려 보들레르나 카프카와 닮아 보였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없다. 복수의 화자가 등장할 뿐이다. 전반부에 쁘레시아도가 주인공처럼 등장하지만, 그는 결코 이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아니다. 뻬드로 빠라모와 그의 도시 꼬말라를 소개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렇다면 후반부의 뻬드로 빠라모가 주인공일까? 이 소설은 뻬드로 빠라모라는 뒤틀린 인물의 수사나를 사랑과 죽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한 여자를 위해 우스꽝스러운 파티를 열어대는 순수와 향락의 화신 위대한 개츠비의 멕시코판인 셈일까? 그런데 봉기를 선택한 렌떼리아 신부는? 꾸까를 잃은 아분디오의 슬픔은? 한마디로 멕시코 혁명은?

 

 

순간 그는 혼자서 쓸쓸하게 누워 있을 아내를 생각했다.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마당의 침상 위에 높여놓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꾸까, 그녀는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암말처럼 생생히 살아 숨쉬던 아내였다. 잠자리에서 코를 비비고 입술로 깨물던 여자였다. 시력이 좋지 않고 몸에 냉기가 흐르는 체질에 가슴앓이 병을 앓고 있었기에, 아니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이름조차 모르는 병을 앓고 있었기에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왕진을 다녀가는 의사에게 진료비를 지불하기 위해 나귀까지 팔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꾸까, 그녀는 찬 이슬을 맞으며 차디찬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동이 트는 것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달려오는 햇살도, 상큼한 아침 바람도, 아무것도 보고 느끼지 못한 채. (p. 170)

 

 

  그렇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뻬드로 빠라모라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누가 말하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다양하게 등장하는 화자 각각도 아니다. 차라리 각 화자의 총합 이상으로서의 멕시코 사회 그 자체라 할만 하다. 황폐화된 농촌의 현실과 그들 위에 군림하는 토호의 절대적인 존재. 부패된 연방 정부와 토지를 빼앗긴 채 좌절하는 농민. 실패한 혁명과 계속되는 갈등에 대한 그로테스크 몽타주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은 뻬드로 빠라모보다 꼬말라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룰포는 자신의 역사관을 섣불리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팔짱을 낀 채 굶어서 죽어가는 꼬말라를 지켜보(p. 162)”는 듯한 태도다. 그래서 독자는 알쏭달쏭해진다. 룰포는 뻬드로 빠라모를 비난하고 있는가, 미화하고 있는가. 그는 혁명을 옹호하고 있는가, 조롱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내가 읽은 것은 삶의 배태성(embeddedness)이다. 다중의 화자, 생사(生死) 경계의 모호함, 힌트도 없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전개가 드러내는 것은 모두의 삶이 단일하거나 단절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이다. 뻬드로 빠라모, 쁘레시아도, 수사나, 아분디오, 미겔 뻬드로, 렌떼리아 신부, 바르똘로메, 이들은 모두 꼬말라가 낳은 자식들이다. 이들의 삶은 서로 배태(embedded)되어 있고, 각자가 뿌리박은 관계망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러한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며, 존재의 의미는 오히려 죽은 이후에 더 깊게 뿌리내린다. 의미는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내가 어디로부터(누구로부터) 왔느냐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될 수 있다(되어야 한다).

 

 

후스띠나, 너는 지옥이 있다고 생각해?

그럼요. 하지만 천국도 있잖아요.

난 지옥만 있다고 생각해.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p. 153)

 

 

  조급한 삶을 갖게 된 지 벌써 일 년이 조금 넘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잊을 때가 많다. 무엇이든 빨리 이루고 싶은 조급함에 터무니없는 선택을 할 뻔도 했다.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마지막 신념도 내팽개쳤을지도 모른다. 며칠간 고민한 일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실은 고민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나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열여섯 살에 일기장을 만들면서 첫 장에 이렇게 적었다. “서른 넘은 사람의 말은 한마디도 믿지 말자.” 이제 내가 그 서른이 되기까지 고작 2년 여 남았다. 어느 노랫말처럼, 나이 서른에 나는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진 않을까. 지금의 나는 열여섯 살 때와는 가치관도 세계관도 무척이나 달라졌다. 그 때 모르던 것들도 알게 됐고, 못 보던 것들도 보게 됐다. 그러나 그 때의 다짐을 읽다보면 나는 여전히 그저 퇴보하고 있을 뿐인 것 같다.

 

 

  나의 선배들, 또 그들의 선배들은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 짧다면 짧은 인생, 어떤 성취와 좌절로 채워나갔던가. 꼬말라의 자식들처럼, 오히려 죽은 이후에 더 깊게 뿌리내리는 유산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무엇이었던가. 아니, 나는. 나를 위한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어떤 것을 회상하게 될까. 나의 유산은 어떤 이들을 웃고 울게 만들까.

 

 

새벽이 열리고 있었다.(p. 165)

 

 

  일 년에 한 번 꽃을 틔울 뿐인 벚나무 옆을 지나면서, 나는 벚꽃이 없어도 벚꽃이 그 곳에 있음을 안다. 녹음이 무성한 여름에도, 낙엽이 쓸쓸한 가을에도, 가지만 앙상한 겨울에도, 나는 벚꽃이 없어도 벚꽃이 그 자리에 있음을 안다. 봄이면 다시 가지에 꽃을 틔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새하얗게 흔들어댈 것임을 안다. 그래서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서도 서글퍼하지 않을 수 있다. 꽃은 한철 피고 지지만, 벚나무는 대지에 깊게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꼭 꽃놀이를 가야겠다. 당신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