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마라의 죽음>으로

프랑스 대혁명 디벼보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로마문명이 프랑스지역에 전파된 고대? 골족이 거주하기 시작한 게르만 대이동? 클로비스 왕조? 저 유명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부르봉 왕가? 모두 일견 맞는 이야기기는 하지만, 프랑스의 역사를 진지하게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프랑스 혁명을 말할 것이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야말로 현대 프랑스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측면의 기초를 만들어 낸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역사학계에서는 프랑스의 역사를 시대에 따라 구분할 때 현대의 기점으로 프랑스 혁명을 삼겠는가. (이는 20세기를 현대로 이해하는 다른 나라보다 2세기나 앞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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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림이 있다. 바로 루이 자크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다. 급진적 혁명가이자 열렬한 자코뱅 당원이었던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젊은 여성에게 살해당하자, 그의 혁명동지이자 화가였던 다비드가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미술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이 그림을 간단하게 디벼보고, 또 뒤집어보면서 프랑스혁명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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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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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 1: 위대한 순교자, -폴 마라


  작품의 배경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마라는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 프랑스혁명을 이끌었던 위대한 자코뱅 혁명가였다. 평소 고질적인 피부병에 시달리던 마라는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나무상자를 책상 삼아 업무를 처리하곤 했다. 혁명 신문 <민중의 친구>를 창간해 당대의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열심히 퍼뜨리던 마라는 1793년 어느 여름, 자택 욕실에서 한 여성에게 살해당한다. 혁명가 중 한 명으로 마라의 절친한 동지이기도 했던 다비드는 비참히 살해당한 마라의 모습을 위대한 작품으로 남긴다. 공개적으로 진행될 장례 행렬에 쓰일 회화로 만들어진 <마라의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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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비드는 자신의 혁명동지였던 마라를 위대한 순교자로 묘사하고 싶어했다. 민중을 위해 혁명에 참여했으나 비극적으로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던 마라. 역사의 진보와 민중의 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버려야 했던 순교자 마라. <마라의 죽음>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는 마라를 위대한 순교자로 묘사하기 위한 장치로 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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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은 매우 고요하고 성스러운 공간에 펼쳐진다. 마라의 욕실에는 어떤 장식이나 가구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 배경을 뒤로 하고 마라의 머리와 어깨에 비춰지고 있는 빛은 어떤 숭고한 감정을 일으킨다. 잉크병이 놓은 작은 나무상자는 마치 묘비처럼 육중하게 서 있고, ‘마라에게, 다비드가(A Marat, David)’라는 글귀만이 비문처럼 적혀 있다. 오른쪽으로 점점 밝아지는 빛의 묘사는 마치 마라의 죽음 앞에 하늘의 영광이 펼쳐지는 듯 하다. 다비드는 마라를 그리스도적 순교자의 이미지로 그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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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오른쪽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전면을 향하고 있는 마라의 자세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통하는 피에타의 예수를 모방하고 있다. 마라의 모습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와 같은 자세로, 온화한 잠에 빠진 듯 종교적 승화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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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예수의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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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 2: 마라는 혁명의 순교자인가 - 코르테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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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그림은 마라의 죽음에 대한 중립적인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마라의 죽음을 재구성한 선전물에 가깝다. 다비드는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마라의 죽음을 순교로 승화시키고 있다. 바로 마라를 살해한 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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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욕실에 있던 마라를 죽인 범인은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몰래 품에 숨겨 들어간 15센티미터 가량의 칼로 마라의 갈비뼈 사이를 두 번 찌른 뒤 바닥에 버렸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욕실 밖의 자코뱅 당원들이 몰려 들어와 코르데는 현장에서 붙잡혔다. 말하자면 죽은 마라가 발견된 순간은 작품 속처럼 고요한 상황이 아니라 손에 피가 낭자한 범인이 자코뱅 무리와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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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도대체 범인 코르데는 누구였던 것일까? 정신 나간 여자였던가? 아니면 혁명에 반대한 귀족? 왜 인민의 벗을 자처한 마라를 감히 죽이려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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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르데는 스물 다섯의 열렬한 지롱드파 여성이었다. 당시 왕정을 전복시킨 혁명파는 집권파인 자코뱅 당과 소수파인 지롱드 당으로 분열돼 있었다. 흔히 자코뱅 당은 급진적인 파로, 지롱드 당은 온건한 파로 알려져 있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자코뱅은 중앙집중적 권력을 추구했고, 지롱드는 지방분권을 선호했다. 자코뱅은 혁명전쟁을 추구했으나 지롱드는 평화주의를 추구했다. 특히 여성의 권리를 둘러싸고는 의견이 크게 벌어졌다. 자코뱅 당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코웃음을 쳤다. 프랑스 혁명은 모든 민중의 해방을 외치며 발생한 봉기였지만, 자코뱅 당에게 여성의 권리는 중요치 않았다. 지롱드 파였던 올랭프 드 구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패러디한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를 발표하며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으나 결국 자코뱅에게 처형당했다. 자코뱅의 공포정치가 시작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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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롱드 당원이었던 코르데는 이미 자코뱅에 의해 수많은 동료를 보내야 했다. 자코뱅은 일단 권력을 잡고 나자 모든 정치적 반대를 묵살하고 비판자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처형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코르데의 동료들도 마라에 의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터였다. 마라를 없애는 것이 프랑스를 살리는 길이라고 굳게 믿은 코르데에게, 마라는 <민중의 친구>가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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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르데는 체포당할 경우 누구라도 대신 읽어줄 수 있도록 드레스 안에 연설문을 단단히 붙여 두었다. 마라를 프랑스인의 피로 살찌고 있는 야만스러운 짐승이라고 평가하고 마라 사후 프랑스의 평화를 기원하는 글이었다. 처형을 각오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보면 마라는 공포정치를 수행한 탐욕스러운 집권자였고, 오히려 순교의 마음으로 칼을 든 혁명가는 코르데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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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를 살해한 직후, 코르데는 경찰과 자코뱅 당원들에게 범행의 경위를 심문받았다. 그러나 자코뱅은 결코 코르데가 스스로 범행을 했을거라고 믿지 않았다. (무지한) 젊은 여성이 혼자서 그토록 대범한 범행을 저지를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코뱅에게 여성은 정치적 행동을 스스로 선택할 능력이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남자 공범이 있을 거라며 코르데를 추궁했지만, 코르데는 누구의 이름도 대지 않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사흘 뒤, 코르데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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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 폴 자크 에메 보드리는 <마라의 죽음>과 같은 장면을 코르데의 입장에서 다시 그린다. 이제 주인공은 혁명가 마라가 아니라, 공포정치를 끝내기 위해 결연히 죽움을 각오했던 여성 혁명가 코르데이다. 어제의 역적이 오늘의 영웅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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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가 그린 <마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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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인트3: 마라의 데스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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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


  마지막으로 마라가 손에 든 쪽지에 주목해 보자. 프랑스어를 해석해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시민 마라에게. 나는 당신의 자비를 얻을 만큼 충분히 비참합니다.” 이 종이는 코르데가 마라를 만나기 위해 사용한 거짓 청원서였다. 코르데는 도움을 청하러 온 불행한 시민으로 가장해 마라를 만나려 했던 것이다. (사실 코르데가 마라에게 건낸 원본에는 자비도움으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다비드는 마라를 자비를 베풀려다 순교한 위인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약간의 조작을 가한 셈이다.) 그러한 청원서를 들고 찾아온 코르데를 마라가 의심 없이 만난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의 실제 초상화. 감옥에 수감된 당시에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코르데가 어떻게 욕실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뒷말이 있다. 마라가 옷을 갖춰 입고 욕실 밖으로 나오는 대신 코르데가 욕실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코르데는 대단히 용모가 뛰어난 미혼 여성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마라는 조금은 불순한 의도에서 코르데를 욕실로 불러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뭉크는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코르데가 알몸으로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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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마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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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르데와 마라는 욕실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일설에 따르면 코르데는 시위를 벌였던 지롱드 당원의 이름을 대며 석방을 요구했고, 마라는 이들 이름을 받아적으며 그들이 며칠 안에 단두대에서 처형될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 순간 코르데는 품에서 칼을 꺼내 마라의 가슴에 깊이 꽂았던 것이다. 상황을 사실적으로 복원하자면, 마라가 손에 들고 있던 쪽지는 코르데의 청원서가 아니라 처형자의 명단을 적은 데스노트였다. 마라는, 가려움증을 참으며 욕조에 누워 반혁명분자의 데스노트를 작성하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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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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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정신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프랑스 혁명은 인권선언을 낳았고 전제왕정을 끌어내렸으며 현대적 공화정치를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의 참정권은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공포정치로 수많은 죽음을 가져왔다. 마라의 죽음은, 단순한 잣대로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역사적 상황이 교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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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거나 <마라의 죽음>17931016일 루브르의 정원에서 처음 대중에 공개된다. 마침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일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인간의 운명은 역사의 방향을 바꿔놓았지만, 모두가 죽음 앞에서는 평등했던 셈이다.



"L'assassinat de Marat", par Jean-Joseph Weerts Rouba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