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근한 가이드] 울부짖음(HOWL) -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



나는 우리 세대 최고의 지성들이 광기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19551013일 밤 11시경, 샌프란시스코의 식스 갤러리에서 와인에 적당히 취한 긴즈버그가 연단에 올랐다. 자리를 가득 메운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지식인, 보헤미안들을 바라보며 긴즈버그는 가볍게, 그러나 격정적인 목소리로 자신의 시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불안하고 굶주린 벌거숭이들,

몸을 끌고 분노를 폭발할 곳을 찾아 흑인가를 방황하며,

천사 머리의 비트족들이 별빛 가득한 밤에 고대의 성스러운 하늘과의 연대감을 기대하지만 오직 기계의 움직임만이 가득할 뿐

  10쪽 가량의 긴 시를 20분이 넘게 낭독하는 동안 군중은 점점 그의 말에 몰입해 갔다. 시대적 절망과 상실감이 긴즈버그의 입에서 시적인 언어로 흘러나오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면서 점차 하나가 되어갔다. 휘파람을 부는 이도 있었고 입으로 맞아’, ‘그래그래맞장구를 치는 이도 있었다.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이도 있었고, 슬며시 옆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이도 있었다. 모두의 가슴에 눈물이 흘렀다. 시라는 것이 본래 성스러운 제의로부터 출발했다면, 그 자리는 가히 종교적 신성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긴즈버그의 정제되지 않은 야성적 언어는 대중이 막연하게만 느끼고 있던 분노와 절망을 찌르는 것이었고, 동시에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지며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낭독이 끝나고 나서도 누구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위대한 시의 탄생을 목도했음을 알았다. 그 자리에 있던 로렌스 펠링기티(Lawrence Ferlinghetti)는 바로 긴즈버그에게 전문을 보냈다.

위대한 문인의 길에 들어선 것을 환영하오. 원고는 언제 보내주겠소?”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의 출현을 알린 시, “울부짖음(HOWL)”은 번영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태평한 시대, 1950년대 미국의 평화로운 외양을 찢고 나온 청년들의 반문화 선언이었다. 그것은 위선적인 평화로 가득한 아이젠하워 시대에 청년들이 던진 폭탄이었고, 60년대 혁명세대의 탄생을 예비한 서곡이었다. 누구나 청년 문제를 말하고 세대 갈등을 걱정하지만, 누구도 혁명적 선언을 포효하지 못하는 오늘, 시원한 울부짖음으로 젊은이의 심장을 뒤흔들어놓고 미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된 앨런 긴즈버그의 울부짖음을 들어보기 위해 1950년대 미국으로 떠나자.

 

# America in 1950s

  1950년대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시대다. 2차 세계대전의 긴박하던 세계정세와, 68혁명을 포함한 60년대 후반의 격동의 시절 사이에 낀 일종의 과도기이자 평화기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1950년대는 전후질서를 재건하는 시기이면서, 68혁명가 태동하는 시기로, 요컨대 50년대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전후의 역사와의 연관성을 통해 이해되는 시기인 셈이다.

  그래서 모순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는 평온한 나날이었다. 파시즘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미국은 자유의 수호자이자 세계의 경찰로 등극해 명실상부한 슈퍼파워가 되었다. 포드주의적 법인자본주의는 영원한 인류의 번영을 보장하는 듯 했다. 미국이 바라본 세계는 낙관적인 희망에 춤추고 있었고, 사람들은 번영의 보증서를 확인하듯 공산품을 구매해댔다. 냉장고, 세탁기, 오븐, 라디오 등 공산품으로 방을 채울 때마다 사람들은 한층 더 자유로워졌고, 마이홈과 마이카가 표준적인 미국적 삶이 되었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자유로운 미국의 번영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모두가 춤을 추던 아메리칸 드림의 장단은 이상화된 것이었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미국의 번영 아래에는 균열이 번져가고 있었다. 미국이 수호한 지구적 평화는 소련과의 갈등을 감추고 있었다. 마셜플랜과 트루먼 독트린 이후 파시즘에 공동으로 대항했던 두 세력은 점차 멀어져갔다. 이에 따라 국내적 자유도 점차 좁아져 갔다. 매카시즘의 광풍은 미국이 자랑하던 정치적 자유마저 제약하며 아메리칸 드림에 그늘을 드리웠다. 아메리카 핵가족으로 대표되는 중산층의 평화로운 삶은 빈곤과 차별에 직면한 흑인들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은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남부에서는 투표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직시하려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전후 미국의 화려한 번영은 거대한 하나의 위선이었다.

 

# BEAT Generation

  침묵과 위선을 뚫고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이른바 비트 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이라는 일련의 문학·예술가 집단이었다. 중심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었지만, 유사한 움직임이 미 대륙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비트 세대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주류 문화에 대한 거부, 성의 개방, 영적인 체험 등을 탐구했다. 앨런 긴즈버그, 잭 케루악, 퍼링게티 등이 내놓은 작품들은 대개 혼란스럽고 외설스러운 표현 투성이였고,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장황설도 많았다. 마약과 재즈, 섹스, 선불교의 수양 등으로 생기는 고도의 감각적 의식을 통한 개인의 해방을 주창했다. 밥 딜런과 히피들과 모든 미국 산 반항아들의 선구자가 등장하는 위대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곧이어 올 히피라는 거대한 해일의 시작이었다.

  매카시의 억압과 허울 좋은 아메리칸 드림 속에 신음하던 동시대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비트족은 출세교육도덕이라는 전통적 개념에 도전했고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에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직업 역할이나 가족 외부에서 정체성을 추구했다. 한 마디로 규율이 없었다. 사회적 변화에 대한 허무주의에 전념하고, 동방적 신비주의, 재즈, , 약물, 문학 등에 집착했다. 정치적인 집단은 아니었다. 대개 정치와 사회적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개인의 내면에 천착했다. 그러나 기성 세대가 추구하던 가치에 대한 비트세대의 반감, 위선적 삶에 대한 경멸, 물질주의적 사고로부터의 탈피는 이후의 세대에게 물려줄 거대한 유산이었다. 비트 세대는 짧은 유행에 그쳤지만, 그 저변의 사고는 분화하고 훨씬 더 급진화될 것이었다.

  긴즈버그의 울부짖음은 그 자체로 비트 세대의 선언문이었다. “나는 우리 세대 최고의 지성들이 광기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해방을 얻고자 했던 비트 세대의 삶을 그린 자화상이었다. 긴즈버그의 장편 시는 현대 미국사회에 대한 격렬한 탄핵이며, 동시에 비트세대를 향한 통절한 애가(哀歌)였던 것이다.

 

# HOWL

이제 본격적으로 울부짖음을 파헤쳐 보자.

시는 그가 잠시 정신병원에 있을 때 만난 칼 솔로몬(Carl Solomon)을 위해 바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마도 동시대의 좌절한 청년들 모두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시작은 다음과 같다. (좀 길지만 인내를 갖고 읽어보자. 그럴 가치가 있다.)

“I saw the best minds of my generation destroyed by madness, starving hysterical naked,

dragging themselves through the negro streets at dawn looking for an angry fix,

angelheaded hipsters burning for the ancient heavenly connection to the starry dynamo in the machinery of night,

who poverty and tatters and hollow-eyed and high sat up smoking in the supernatural darkness of cold-water flats floating across the tops of cities contemplating jazz,

who bared their brains to Heaven under the El and saw Mohammedan angels staggering on tenement roofs illuminated,

who passed through universities with radiant cool eyes hallucinating Arkan- sas and Blake-light tragedy among the scholars of war,

who were expelled from the academies for crazy & publishing obscene odes on the windows of the skull,

who cowered in unshaven rooms in underwear, burning their money in wastebaskets and listening to the Terror through the wall, who got busted in their pubic beards returning through Laredo with a belt of marijuana for New York,

who ate fire in paint hotels or drank turpentine in Paradise Alley, death, or purgatoried their torsos night after night with dreams, with drugs, with waking nightmares, alcohol and cock and endless balls, (후략)”

나는 우리 세대 최고의 지성들이 광기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불안하고 굶주린 벌거숭이들,

몸을 끌고 분노를 폭발할 곳을 찾아 흑인가를 방황하며,

천사 머리의 비트족들이 별빛 가득한 밤에 고대의 성스러운 하늘과의 연대감을 기대하지만 오직 기계의 움직임만이 가득할 뿐인

  이후는 who로 시작되는 어구가 반복되며 긴즈버그가 목격한 비트세대의 모습들이 표현되어 있다. 문장은 끊길 듯 끊길 듯 다시 who로 되돌아오며 좌절과 허무주의, 분노에 휩싸인 채 광기로 스스로를 파괴해가는 동시대인들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그러다가 who로 시작하는 어구가 끝나고 두 번째 파트가 시작된다.

“What sphinx of cement and aluminum bashed open their skulls and ate up their brains and imagination? Moloch! Solitude! Filth! Ugliness! Ashcans and unobtainable dollars! Children screaming under the stairways! Boys sobbing in armies! Old men weeping in the parks! (후략)”

어떤 시멘트와 알루미늄으로 이루어진 스핑크스가 스스로 두개골을 부수고 자신의 뇌와 상상력을 먹어버렸는가? 몰로크! 고독! 쓰레기! 추함! 재떨이와 얻을 수 없는 달러들! 계단 아래서 비명지르는 어린이들! 군대에서 훌쩍이는 소년들! 공원에서 우는 노인들!”

  이후로는 계속해서 Moloch를 향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Moloch는 기계, 물질, 자본, 위선 등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몰로크에 대한 분노로 격정적인 목소리를 내던 긴즈버그는, 세 번째 파트에 와서 완전히 목소리를 바꿔 우리를 위로한다.

“Carl Solomon! I'm with you in Rockland

where you're madder than I am

I'm with you in Rockland

where you must feel very strange

I'm with you in Rockland

where you imitate the shade of my mother

I'm with you in Rockland (후략)”

칼 솔로몬!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네가 나보다 더 미친 그곳에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네가 몹시 이상하게 느끼고 있을 그곳에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네가 내 엄마의 그늘을 흉내내는 그곳에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칼 솔로몬을 만났던 정신병원을 암시하는 록랜드(Rockland)’에 함께 있음을 반복하면서 긴즈버그는 따뜻한 연대의 손길을 내민다. 너만 고독한 게 아니야. 너만 절망하고 있는 게 아니야. 이 미친 세상에,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어.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마법처럼 계속해서 주문을 되뇌이면서, 긴즈버그는 비절한 애가(哀歌)로 우리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해방시킨다.

  그의 시는 신화적이며 웅변적이다. 기본적으로 눈으로 읽기 위한 시가 아니라 마음을 담아 소리 내어 읽고 귀로 반응하는 시다. 음유시인이나 고대 예언자의 모습을 닮아 있는 것이다. 비트 시인들은 시를 까다로운 강단에서 해방하여 '거리로 돌려보내자'고 말하곤 했다. 긴즈버그는 시를 청중 집단의 종교적 체험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 나가며

  1950년대 미국과 비트세대, 그리고 긴즈버그의 울부짖음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이제 직접 뛰어들어 보는 일만 남았다. 놀랍게도 긴즈버그가 직접 낭독한 울부짖음의 여러 버전들은 인터넷으로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다. 그 중 한 편을 여기에 소개한다.

 

  현대의 음유시인 긴즈버그의 목소리에 빠져 있다보면, 아마도 비트세대가 느꼈던 울림에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멀리 떨어진 시공간에서 이루어진 시 낭독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우리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던 옛 명언을 긍정할 수 있을까. 여전히 갈 길을 모르고 혼란스럽기만 한 오늘, 긴즈버그의 목소리에 다시 한 번 귀 기울여 본다. 나에게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이 오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