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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가 돌아왔다. 만드는 영화마다 작품성과 재미, 사회적 메시지 중 어느 것도 놓치지 않아 온 영국의 영화장인, 믿고 보는 감독 켄 로치가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The Angels’ Share>라는 영화로 돌아왔다. 그 동안 스페인 내전, 니카라과 혁명, 아일랜드 내전 등을 배경으로 삼아 큰 서사를 엮었던 것에 비교하면 이번 영화는 하층계급의 소시민이 주인공이며 이야기도 상대적으로 작다. 게다가 감독 자신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를 무대로 찌질한 청춘들의 코믹한 에피소드가 펼쳐지니 거장 감독이 잠시 쉬어가는 마음으로 만든 소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뭐, 벌써 77세를 넘긴 노장이니 잠시 쉬어갈 만도 하다.
<엔젤스 셰어> 한국 포스터
그렇다고 영화가 소소한 이야기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청년 실업이 100만명을 훌쩍 넘는 영국의 현실을 살아가는 지친 젊은이들이 모습을 집중적으로 담았다. 범죄와 처벌에 대한 감독의 시각과 함께 사회의 타자, 이방인들을 보듬자는 관용도 담겨 있다. 노동자, 하층민, 심지어 범죄자의 삶을 다루는 방식에선 수십년 동안 좌파 영화감독의 아이콘이 되어 온 켄 로치 특유의 휴머니티가 녹아있다. 가벼운 코미디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날카로은 사회적 비판이 담겨있는 영화,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를 통해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나보자.
#1 스코틀랜드의, 스코틀랜드를 위한, 스코틀랜드에 의한?
영화의 주인공이 반드시 인물일 필요가 없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스코틀랜드’적 삶 그 자체다. 스코틀랜드의 두 중심 도시 글래스고와 에딘버러를 배경으로, 구수한 스코틀랜드 사투리를 쓰는 주인공들이 등장해, 스코틀랜드의 특산품인 스카치 위스키를 두고 벌이는 소동이 영화의 전부이니 말이다. 게다가 영화는 스코틀랜드인들이 느끼는 소외와 분노를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재판 장면이 대표적이다. 청년 백수 라이노(윌리엄 루앤)가 경범죄로 처벌을 받는 이유는 그가 만취한 상태로 엘리자베스 동상을 스코틀랜드기로 덮고 오줌을 갈겼기 때문이다.
원래 스코틀랜드기는 이렇게 생겼다. 올해 안으로 스코틀랜드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진행한다고 하니 정말 독립국가 스코틀랜드가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스코틀랜드인의 잉글랜드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은 단지 민족주의적 감정에 기반한 것만은 아니다.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의 연합왕국으로 구성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영국의 경제적, 정치적 주도권은 잉글랜드가 행사해 왔다. 부와 권력은 런던으로 집중되었고, 수 세기동안 자치적 주권을 행사해 온 스코틀랜드는 사실상 영국의 변방으로 전락해 온 것이다. (영국이라는 단어 조차 잉글랜드의 음차이기 때문에 실은 United Kingdom 혹은 Britain에 대한 올바른 번역은 아니다.) 연합왕국에 가담한 덕분에 스코틀랜드의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많지만, 오랜 청년실업과 경기침체를 경험하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젊은이들이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을 키워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스코틀랜드의 유산들을 약삭빠른 잉글랜드인들이 빼앗아갔다는 인식은 영화에서의 언어 사용을 통해 은연중에 드러난다. 스코틀랜드의 특산품인 고가의 위스키를 감별하는 자리에서, 정작 감별자로 나선 사람은 스코틀랜드어가 아니라 점잖은 런던 억양(잉글랜드어)을 구사한다. 구수한 스코틀랜드어는 어딘지 덜떨어지고, 촌스러운 하층민들 주인공들만이 쓰고 있다. 교양 없는 하층 계급일수록 스코틀랜드 억양은 심해지며, 같은 스코틀랜드 안에서도 지위가 높을수록 표준적인 영어 억양에 가까워진다. 각 등장인물이 사용하는 영어를 도식화하자면 스코틀랜드어 -> 잉글랜드어 -> 미국식 영어 순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식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스코틀랜드 사투리(사실 사투리라는 표현에도 잉글랜드 중심주의가 깔려있다)는 매우 중요한 유머 요소로도 작용하고 있는데, 외국인 관객이 이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우리나라 조폭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상상하면 유사할 것이다. 어딘지 덜떨어져 보이는 스코틀랜드어로 치는 드립의 향연에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리게 된다. 우리나라 자막에서는 모두 표준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어쩌면 사투리로 번역하는 것이 원래의 의도를 더 잘 살리는 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스코틀랜드 사투리를 쓰는 네 명의 찐따들이 주인공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켄 로치 감독 자신이 스코틀랜드 인이며, 그와 함께 오랫동안 각본을 맞춰 온 폴 래버티도 스코틀랜드인이다. 심지어 주연을 맡은 배우 폴 브래니건은 주인공 로비처럼 스코틀랜드에서 감옥을 전전하며 밑바닥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일반인이었다. 그는 아들을 얻은 후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해 지역 축구클럽에서 코치로 활동하며 사회봉사를 하던 중 폴 래버티의 눈에 띄어 전격 캐스팅됐다. (그는 앤젤스셰어로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완전히 배우로 변신해 이제 배우로서의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폴 브래니건은 이 영화로 배우로서의 새 삶을 살게 됐다.
#2 Scotch, Single Malt Whiskey
스코틀랜드인들이 모여 만든 영화라는데, 스카치 위스키가 등장하는 것이 이상할 리 없다. 이야기 전개의 중심에는 스코틀랜드의 특산품으로 유명한 스카치 위스키, 그 중에서도 한 개의 오크통에서 숙성해 만든 싱글 몰트 위스키가 있다.
요런 게 싱글 몰트 위스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직업도 없이 사고만 치고 다니는 청년 백수 로비는 폭행 사건에 연루돼 법원으로부터 사회봉사 명령을 받는다. 여자친구의 출산으로 아빠가 된 그는 갓 태어난 아들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아들에게 자신과 같은 삶을 되풀이하게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어느 날 사회봉사 교육관의 집에서 난생 처음 몰트 위스키를 맛보게 된 그는 자신이 예민한 후각과 미각을 타고났으며 위스키 감별에 선천적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회봉사를 함께 하는 친구들과 함께 위스키 시음 행사에 갔다가 수십억을 호가하는 세계 최고의 위스키 경매가 곧 열릴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의 타고난 위스키 감별 재능을 이용해 일생일대의 인생 반전을 계획하는데…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스코틀랜드의 하층계급 청년들이 스코틀랜드의 특산품이자 상징인 고가의 스카치 위스키를 훔치는 줄거리인 셈이다. 이는 (극중에서 잘 드러나진 않지만) 그 자체로 상징적인 행위이다. 이중의 박탈에 시달리는 스코틀랜드의 청년들이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 행동에 나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이 훔치는 위스키는 이른바 ‘싱글 몰트 위스키’. 흔히 먹는 브랜드 위스키처럼 여러 오크통의 위스키를 블랜딩해 만든 술이 아니라 하나의 오크통에서 바로 뽑은 빈티지 위스키로, 엄청나게 높은 가격을 자랑하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적 위스키이다.
그런데 싱글 몰트 위스키는 높은 가격 때문에 대부분의 스코틀랜드인과 무관한 술이 되어있다. 극 중에서 (전설의) 싱글 몰트 위스키를 살 수 있는 사람은 콜로라도 출신의 미국인(돈 많고 교양 없는 미국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이거나 러시아의 대부호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청년들은 위스키를 한 번이라도 먹어본 경험조차 없다.
그러니까 싱글 몰트 위스키는 스코틀랜드의 청년들이 박탈당한, 배제된, 그러나 응당 향유해야 할 어떤 것들에 대한 은유인 셈이다.
#3 The Angels’ share.
이 영화의 논리구조를 따라가다 보면 어떤 이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눈먼 돈은 조금 훔쳐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The Angels' Share>는 실은 누구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치 ‘천사의 몫’이 날아가듯 조금 슬쩍해도 좋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마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가치관은 아닐 것이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누구도 자신이 입은 피해를 눈치 채지 못한다면. 그런 작은 도둑질이 한 사람의 (혹은 네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초석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도둑질을 허용할 수 있을까. 아마도 켄 로치에게 ‘무해한 도둑질’은 지극히 합법적인 ‘세금을 통한 재분배’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일일 것이다. 극빈층에게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약간의 종잣돈이 제공될 수 있다면, 그 돈은 이미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부유층에게 있을 때보다 오히려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영화의 시각은 순진한 이상주의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천사처럼 따뜻하기만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77세의 노련한 좌파 영화감독이 만들었음을 고려하다보면 어딘가 깊은 사유의 여정 끝에 도달한 결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범죄와 교정에 대한 켄 로치 식의 철학과 처방이 담겨있는 것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저 노년의 켄 로치가 (젊은 시절의 날카롭던 발톱을 잃어버린 많은 좌파 감독과 마찬가지로) 관용과 타협의 정신에 물들었을 뿐이 아니라면 말이다.
# 나가며
<엔젤스 셰어>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영화다. 영화 전반부에는 청년들의 탈출구 없는 삶을 그리며 답답한 마음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편안한 마음으로 예정된 해피엔딩을 향해 가는 주인공들을 흐뭇하게 관람할 수 있는 영화다. 혹여나 갑작스러운 비극이 닥치진 않을까 하는 긴장감은 영화 자체에서 온다기보다는 켄 로치의 성향을 알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영화는 착하고, 관객은 따뜻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서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한 가지 의심을 하게 된다. 이 영화가 칸 심사위원장 상을 받게 된 것에는 이번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에 이례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임명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 아닐까 하는. 켄 로치 답지 않게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 이 영화가 칸에서 수상할 수 있었던 강력한 원동력이 스필버그 감독으로부터 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
77세의 켄 로치 감독.
청년 문제, 지역 소외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고도로 심각해지고 있다. 영국은 우리의 미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켄 로치의 <엔젤스 셰어>로 스코틀랜드 여행을 다녀와서, 우리 사회의 현주소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를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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